대학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8. 5. 12. 20:10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5> 賈誼와 改革


- 값 가(貝-6)옳을 의(言-8)고칠 개(-3)바꿀 혁(革-0)

천하를 一統(일통)한 秦(진)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졌고, 다시 들어선 漢(한) 제국 또한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高祖(고조) 劉邦(유방)이 통치할 때도 곳곳의 諸侯王(제후왕)들이 謀叛(모반)하고 또 북방의 흉노가 남하하여 불안과 위기가 지속되었는데, 고조 사후에는 呂太后(여태후)가 권력을 잡고 呂氏(여씨) 일족이 전횡을 일삼는 바람에 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자 太尉(태위) 周勃(주발)과 丞相(승상) 陳平(진평) 등이 여씨 일족을 제압하고 代王(대왕)으로 있던 고조의 넷째 아들 劉恒(유항)을 맞아들여 옹립했다. 그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며 안정적으로 통치한 文帝(문제)다.

문제는 제국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사회의 기강을 확립해야 하는 난제를 떠맡았다. 더구나 이를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대신들과 제후왕들의 눈치를 보면서 실행해야 했으므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경륜과 행정 능력을 갖춘 인재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는데, 그때 두각을 나타낸 이가 賈誼(가의, 기원전 200∼168)다.

가의는 유가사상을 토대로 개혁적인 정책을 개진했다. 법령을 간략하게 하고 형벌을 줄여야 하며, 重農抑商(중농억상) 정책을 통해 사회의 안정과 부를 축적해야 하며, 장안에 거주하면서 권세를 부리던 제후들을 각자의 封地(봉지)로 돌아가게 하여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하며, 흉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책을 써야 한다는 등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주발 등 대신들이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얕은데, 권력을 독점해서 일을 어지럽히려 한다"며 강력하게 반대했고, 문제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여 결국 가의를 멀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가의의 개혁안을 완급을 조절하며 적절하게 실행하여 통치의 기반을 다지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가의의 사상과 정책에 대해서는 그의 글들을 모아 놓은 '新書(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서'를 보면, 물자 비축과 화폐 주조에 관한 문제나 풍속을 바로잡는 일, 제후와 흉노의 문제 등 당시의 주요한 문제들부터 정치와 학문, 예법 따위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게 거의 없다.


가의의 사상은 간단히 말해 仁義(인의)와 禮樂(예악)을 바탕으로 法家(법가)의 통치술을 아우른 것이었다. 그 사상은 陸賈(육가)의 사상과 더불어 한 제국이 유교국가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大學(대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고전학자    

 
 
 

대학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8. 5. 12. 20:08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4> 高祖와 陸賈


- 높을 고(高-0)할아비 조(示-5)뭍 륙(阜-8) 값 가(貝-6)

陸賈(육가)가 漢(한) 高祖(고조) 劉邦(유방) 앞에 나아가 말할 때마다 '詩經(시경)'과 '尙書(상서)'를 들먹이자, 고조가 꾸짖듯이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시경'이나 '상서' 따위를 섬기겠소?" 그러자 육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기는 했으나,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 商(상) 왕조를 일으킨 湯王(탕왕)과 周(주) 왕조를 일으킨 武王(무왕)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이치를 따라 천하를 지켰습니다. 文武(문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옛날 吳(오)나라 왕 夫差(부차)와 晉(진)나라의 智伯(지백)은 무력만 지나치게 쓰다가 망했고, 秦(진) 제국은 형법만을 쓰고 變通(변통)하지 않은 탓에 결국 멸망했습니다. 만일 진 제국이 천하를 아우른 뒤에 仁義(인의)를 실행하고 옛 성인들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는 언짢으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육가에게 말했다. "나를 위해 진 제국이 천하를 잃게 된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또 옛 나라들이 정치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한 까닭이 무엇인지 글을 지어 주시오."

이에 육가는 국가 존망의 징후에 대해 거칠게나마 서술하여 모두 열두 편을 지었다. 그가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조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좌우 신하들도 만세를 불렀다. 그 책을 '新語(신어)'라 한다. 육가의 이 책은 지금도 전하고 있다.

흔히 創業(창업)보다 守成(수성)이 어렵다는데, 이는 창업은 한때의 책략만으로 가능하나 수성은 장구한 계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리라. 육가는 이를 잘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한 고조에게 무력과 책략으로써 천하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거대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제국에 걸맞은 정치 철학과 제도, 방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을 보라. 오로지 경제성장을 지향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정과 모순, 부조리를 애써 외면해온 탓에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외교, 군사, 문화, 교육 각 방면에서 불평등과 차별 따위를 비롯한 갖가지 심각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2016년의 '박근혜 게이트'는 그 縮圖(축도)라 할 만하다. 육가의 말투를 빌어 말하자면 이렇다. "경제로써 나라를 일으켰으나, 경제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융성하기 어렵다."

이제 참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고전학자    

 
 
 

대학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8. 5. 12. 20:05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3> 修身이 아닌 治國



- 닦을 수(人 - 8)몸 신(身 - 0)다스릴 치(水 - 5)나라 국(口 - 8)

朱熹(주희)는 大學(대학)을 "大人(대인)의 學問(학문)"으로 풀이한다.

대학이 대인의 학문이라면, 小人(소인)의 학문도 있을 법하다. 그게 小學(소학)이다. '소학'이라는 책도 있다. 그런데 '소학'은 '예기'가 편찬될 때 있었던 책이 아니다. 주희가 지시하여 그 제자 劉子澄(유자징)이 편찬한 책이다.

'소학'은 유교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덕규범을 아동에게 가르치기 위해 갖가지 經典(경전)들과 書冊(서책)들에서 긴요한 내용들을 가려 뽑아 완성한 것이다. 흔히 소학의 공부를 간단하게 '灑掃應對(쇄소응대)'라고 하는데, 쇄는 물 뿌리는 일을, 소는 마당 쓰는 일을, 응대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어른이 부를 때 대답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어린 사람이 어른이 되어 생활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예법들을 익히는 과정이다.

이렇게 신유학이 등장한 뒤에는 유자의 길을 가려는 이라면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익히고 그 다음에 '대학'을 읽어야 했다. 문제는 본래의 '대학'이 아니라 주희가 개정한 '大學章句(대학장구)'를 읽으며 주희의 해석을 주로 따랐다는 사실이다. 성리학적 이념이 공고해진 조선 후기에는 주희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주희와 다른 해석을 가하면, 이른바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내몰렸다.

이는 학문과 사상에서 專制(전제)와 橫暴(횡포)를 일삼은 것인데, 이것이 결국 창조적인 사유를 가로막아 정치·사회·경제 각 방면에서 停滯(정체)가 일어난 이유였다.

또 성리학적 관점에서는 '대학'을 주로 수신(修身)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치는데, 이는 '대학' 본래의 의의에서 벗어난 것이다.

'대학'은 본디 治國(치국)의 요체를 다룬 글이다. 後漢(후한) 때의 鄭玄(정현, 127∼200)은 '대학'을 "넓게 배워 정치를 하는 데 활용하는 바탕"으로 생각했다.

'대학'의 뜻을 소박하게 말하면, "큰 배움 또는 크게 배운다"가 된다. 달리 말하면, "큰일을 위한 학문 또는 큰일을 배운다"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때 큰일이란 바로 통치 또는 정치다.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을 교화하는 일이 유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큰일이었다.

바로 그런 큰일을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나 능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대해 간결하게 적고 있는 책이 대학이라는 말이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