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중국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20. 2. 9. 17:14

1. 선진시대 -『시경』,『초사』
시경(詩經) - 시경은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입니다.
황허[黃河] 중류 주위안[中原] 지방의 시로서, 시대적으로는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본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입니다.

 

초사(楚辭) - 초사는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과 그 계열의 사(辭)를 모은 책, 또는 그 문체의 명칭을 말합니다. 시집이라는 점에서는 시경과 유사하나 북중국에서 발달한 시경과 달리 남중국에서 발달한 시의 종류입니다.  

 

2. 양한-위진 남북조 시
고시 19수(古詩十九首) - 중국의 고전인『문선』이라는 책에 수록된 한나라 때의 작자 불명의 오언고시 19수를 말합니다. 19수 중의 몇 수는『옥대신영(玉臺新詠)』에 전한(前漢)시대의 매승(枚乘)의 작품이라고 하였으며, 다른 1수에 대해서는『문심조룡(文心雕龍)』에 후한시대의 부의(傅毅)의 작품이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설은 신빙성이 적으며,『문선』의 편자인 소통(蕭統)이 그 당시에 잔존(殘存)한 작자 불명의 고시 중에서 19수를 가려서 수록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식(曹植) - 조식(曹植, 192~232)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시인입니다. 자기를 콩에, 형을 콩대에 비유하여 육친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노래한『칠보지시(七步之詩)』를 지었다. 당시의 문학적 중심을 이루었고, 오언시를 서정시로서 완성시켜 문학사상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지요. 주요 저서에는『조자건집(曹子建集)』등이 있습니다. 

 
완적(阮籍) - 완적(阮籍, 210~263)은 중국 3국시대의 위(魏)나라 사상가, 문학자 겸 시인입니다. 많은 기행 중 ‘청안백안(靑眼白眼)’의 고사는 유명하지요. 대표작인『영회(詠懷)』의 시 85수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제재로 한 철학적 표백의 연작(連作)이었습니다. 원초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추구하는 작품을 남겼지요. 이른바 죽림칠현으로 유명합니다.


도연명(陶淵明) - 도연명 [陶淵明, 365~427]은 자가() 연명 또는 원량()이며 원래 이름은 잠()입니다. 중국 동진(東晋) ·남조 유송 시기의 시인이지요.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 왕유(王維), 저광희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지요. 주요 작품으로『오류선생전』,『도화원기』,『귀거래사』등이 있습니다. 
 
사령운(謝靈運) - 사령운(謝靈運, 385~433)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산수시인(山水詩人)입니다. 당시 제대로 문학적 표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의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지요. 대표적인 시로는『등지상루(登池上樓)』,『초거군(草去郡)』등이 있으며, 불경을 깊이 연구하여『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조식과 비겨 중국 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비기기도 했지요. 물론 조식을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포조(鮑照) - 포조(鮑照, 421?~465)는 오언시(五言詩)가 전성하던 육조시대(六朝時代)에 희귀한 칠언시(七言詩)에 손을 댄 중국 육조(六朝)· 유송의 시인입니다. 특히 악부(樂府)에 뛰어났습니다. 두보(杜甫)는 그를 '준일(俊逸-재능이 뛰어남)'하다고 높이 평가했고 송나라 육시옹(陸時雍)은 "길 없는 곳에 길을 연 사람"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사조(謝脁) -  사조(謝脁, 464~499)는 중국 육조시대 남제의 시인입니다. 음조(音調)에 뜻을 담은 시풍(詩風)인 영명체(永明體)에 가장 뛰어났지요. 시는 오언체(五言體)에 능하고 사경(寫景)에 묘하며 청신(淸新)한 기풍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주요 저서에는『사선성시집(謝宣城詩集)』등이 있습니다. 
 

유신(庾信) - 유신(庾信, 513~581)은 육조시대 최후를 장식했던 중국 남북조시대의 시인입니다. 양나라 시절의 화려한 작풍과는 전혀 그 형식을 달리하여 남북조의 시문을 집대성하고 당 대(唐代) 율시(律詩)의 선구가 되는 작품을 썼지요. 주요 저서에는『유자산문집(庾子山文集)』이 있습니다. 참고로 이 유신 시인의 이름을 딴 사람이 7세기에 신라의 대장군 벼슬을 지내는 김유신이라고 하지요. 
  
3. 당시
왕범지(王梵志) - 왕범지(王梵志?~670?)는 원명이 범천(梵天)으로 여양黎陽(지금의 허난(河南)성 지구) 준현 사람으로 승려 시인입니다.


한산(寒山) - 한산은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승려입니다.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풍간 선사(豊干禪師)의 제자(弟子)로서 선도(禪道)에 오입(悟入)하여, 습득(拾得)과 함께 문수(文殊)의 화신이라 불렸습니다. 시에 능(能)했던 승려시인입니다. 작품(作品)에는『한산 시집(詩集)』이 있습니다.

 
소미도(蘇味道) - 북송의 소씨 집안은 미산眉山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유서 깊은 가문으로, 북송의 문인 동파 소식의 먼 조상으로 후세에 더 잘 알려진 그러나 당(唐)나라 당시에도 이미 유명했던 문인입니다. 당의 시선 두보(杜甫)의 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의 친구로도 유명하지요.  


왕발(王勃) - 왕발(王勃, 650~676)은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입니다.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5언 절구(五言絶句)에 뛰어났지요. 시문집으로『왕자안집(王子安集)』등을 남겼습니다. 
 
류희이(劉希夷) - 류희이(651-?)는 자가 연지(延之), 정지(庭芝)이며, 하남성 여주(汝州) 사람입니다.

 

심전기(沈佺期) - 심전기(沈佺期, 656?~714?)는 중국 초당(初唐)의 궁정 시인입니다. 송지문과 함께 ‘심송(沈宋)’이라 불렸지요. 초당사걸(初唐四傑)의 뒤를 계승해 율시(律詩)라고 하는 신시형의 운율을 완성시킨 시인으로 공적이 매우 컸다고 합니다. 7언율시(七言律詩)에 뛰어났고 “노가(盧家)의 소부(少婦) 울금향(鬱金香)”으로 시작되는 7률은 유명하지요. 
 

진자앙(陳子昻) - 진자앙(陳子昻, 661~702)은 중국 초당(初唐)의 시인입니다. 한위(漢魏)의 풍골(風骨)’을 중히 여겨 강건 중후한 시를 지음으로써 초당(初唐)에서 성당(盛唐)으로 넘어가는 시풍 전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하지요. 대표작에는『감우(感遇)』,『영회(詠懷)』등이 있습니다. 
 

하지장(賀知章) - 하지장(賀知章, 659~744)은 현종(玄宗) 때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시인 이백(李白)의 발견자로 알려진 중국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부시랑(禮部侍郞), 공부시랑, 이어 태자빈객(太子賓客), 비서감(秘書監)을 역임했습니다.
 

장약허(張若虛) - 장약허(張若虛 660~약 720)는 양주(揚州) 사람으로「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라는 작품이 유명합니다.

 

장구령(張九齡) - 장구령(張九齡, 673~740)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입니다. 문인 재상 장열의 추천을 받아 중서사인(中書舍人),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재상이 되었습니다. 안녹산이 위험 인물임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반대파인 이림보에게 미움을 받고 좌천되었습니다. 주요 저서에는『취장 장선생문집』등이 있습니다. 
 

왕지환(王之渙) - 왕지환(王之渙, 688 - 742)은 당나라 시인입니다.  

 

왕창령(王昌齡) - 왕창령(王昌齡, 698~755?)은 칠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여인의 사랑의 비탄을 노래한『장신추시(長信秋詩)』,『규원(閨怨)』, 변경의 풍물과 군인의 향수를 노래한『출새(出塞)』,『종군기(從軍記)』가 유명합니다. 
 

왕한(王翰) - 왕한(王翰, 687~726)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으로 호방하여 자부심이 강하고 분방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포도미주야광배(葡萄美酒夜光杯)”로 시작되는『양주사(凉州詞)』는 당대 7언절구 중 걸작으로 꼽히지요.

  

최호(崔顥) - 최호(崔顥 : ?-754년 졸)는 하남성 개봉(開封) 사람으로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입니다.

 

고적(高適) - 고적(高適, 707~765)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변경에서의 외로움과 전쟁·이별의 비참함을 읊은 변새 시(邊塞詩)가 뛰어나지요. 잠참(岑參)의 시와 더불어 성당 시(盛唐詩)의 일면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시집은『고상시집(高常詩集)』이라 하여, 그가 찬(撰)한『중간흥기집(中間興氣集)』과 함께 지금까지 전합니다. 
 

잠삼(岑參) - 잠삼(715~770)은 중국(中國) 당(唐)나라의 시인(詩人)으로 시의 품격(品格)이 높았고 가주자사(嘉州刺史)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흔히 잠 가주(岑嘉州)라 불렸습니다.  

 

왕유(王維) - 왕유 [王維, 699?~759]는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며,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평가를 받습니다.  
 

맹호연(孟浩然) - 맹호연(孟浩然, 689~740)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춘효(春曉)』의 시가 유명하지요. 주요 저서는『맹호연집』4권이 있으며, 약 200 수의 시가 전합니다. 
 

리백(李白) - 리백(이백)은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립니다.

 

두보(杜甫) - 두보(杜甫, 712~770)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입니다. 널리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습니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리지요. 주요 작품에는『북정(北征)』,『추흥(秋興)』등이 있습니다. 
 

원결(元結) - 원결(元結, 723~772)은 한유(韓愈), 류종원(柳宗元)의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영향을 끼쳤던 중국 당나라의 시인입니다. 전란으로 인한 인민의 고통과 사회상에 눈길을 돌린 침통한 작품이 많았지요. 대표작『용릉행(舂陵行)』은 두보(杜甫)를 크게 감동시켜 거기에 답하는 시를 짓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장적(張籍) - 장적(張籍, 766?~830?)은 전쟁의 비정함과 전란 속에 겪는 백성들의 고난을 사실적으로 잘 그린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입니다. 주요 작품으로『축성사』,『야로가』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봉건 통치계급들이 농민에게 가져다 준 고통을 폭로하고 고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동정을 나타내고 있지요. 
 

백거이(白居易) -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입니다.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습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습니다.
 

원진(元稹) - 원진(元稹, 779~831)은 중국 당나라의 문학가입니다. 현실에 존재한 사실을 솔직하게 전달하여 이 시대의 정당성과 광명성을 남겨야 함을 주장했지요. 대표 작품으로 60년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농가의 한을 쓴 『전가사』, 상인들의 불로소득을 풍자한『고객악』등이 있습니다. 
 

한유(韓愈)

맹교(孟郊)

로동(盧仝)

가도(賈島)

왕건(王建)

장계(張繼)

전기(錢起)

류우석(劉禹錫)

류종원(柳宗元)

리하(李賀)

두목(杜牧)

리상은(李商隱)

두추냥(杜秋娘)

금창서(金昌緖)

4. 사
온정운(溫庭筠)

위장(韋莊)

리백(李白)

풍연사(馮延巳)

리욱(李煜)

안기도(晏幾道)

장선(張先)

류영(柳永)

소식(蘇軾)

진관(秦觀)

하주(賀鑄)

주방언(周邦彦)

리청조(李淸照)

주돈유(朱敦儒)

악비(岳飛)

신기질(辛棄疾)

강기(姜夔)

오문영(吳文英)

장염(張炎)

납란성덕(納蘭性德)

장춘림(蔣春霖)

5. 산곡(散曲:원·명대의 가곡)
관한경(關漢卿)

백박(白樸)

마치원(馬致遠)

장양호(張養浩)

 

관운석(貫雲石) - 관운석(貫雲石, 1286~1324)은 원나라 때의 산곡(散曲) 작가입니다. 호방탈속(豪放脫俗)의 작풍과 속요(俗謠)에서 익힌 평이한 수법에 특징이 있지요.『전원산곡(全元散曲)』에 소령(小令) 79, 투수(套數) 8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가구(張可久) - 장가구(張可久, ?~?)는 산곡을 위주로 짓고 특히 소령(小令: 단곡 형식의 산곡)에 뛰어났던 원나라의 산곡(散曲: 원·명대의 가곡) 작가입니다. 질과 양에서 원대 산곡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산곡의 이백과 두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지요. 주요 작품에는『소산악부』등이 있습니다. 
 

교길(喬吉) - 교길(喬吉, 1280~1345)은 원나라 후기의 대표적인 희곡·산곡(散曲) 작가입니다. 퇴폐사상이나 염세관의 색채가 짙으나, 말기에는 청려한 작풍으로 자연경관을 묘사한 작품이 많으며, 그 위에 전기 작가들의 소박하고 대담한 표현을 이어받아 독자적인 작풍을 개척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양세인연(兩世姻緣)』,『양주몽(揚州夢)』등이 있습니다. 

 

왕반(王磐) -  왕반(王磐, 약 1470—1530)은 자(字)를 홍점(鸿渐)이라 하며 중국 명(明)의 산곡(散曲) 작가입니다.

 

풍유민(馮惟敏) - 풍유민(馮惟民, 1511?~1580)은 중국 명나라의 산곡 작가입니다. 산곡(散曲)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여 발휘한 작가로 평가받으며, 명대 산곡작가 중 일인자로 손꼽히지요. 그의 작품에는 소재와 제재가 다양하고 방언과 속어를 사용하여 생동감이 넘쳤으며, 내용이 진지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시소신(施紹莘) - 시소신(施紹莘, 1581~1640)은 문사의 전아함이나 음률의 해화를 추구했던 중국 명(明)의 산곡(散曲) 작가입니다. 저서에는『화영집(花影集)』이 있는데 작품의 제재가 다양하여 맑고 빼어난 것도 있고, 애절하면서도 화려한 것도 있으며, 노련하면서 호방한 것도 있습니다.
 
 
6. 송(북송,남송).금.원.명.청 시
매요신(梅堯臣) - 매요신(梅堯臣, 1002~1060)은 중국 북송대 시인입니다. 세련되고 정밀한 구법(句法)이 특징이며, 두보(杜甫) 이후 최대의 시인이라는 상찬을 받았습니다. 주요저서로는『원릉집(宛陵集)』,『손자(孫子)』,『당재기(唐載記)』가 있습니다. 
  

왕안석(王安石) -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필가이자 정치인으로서 1069~1076년에 신법(新法)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왕임천문집()』,『임천집습유(遗)』등의 문집()이 전해집니다.   
 

소식(蘇軾) - 소동파(蘇東坡, 1037.1.8~1101.8.24)로 불리는 그는 중국 북송 시기 제1의 시인이라고 합니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 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지요.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습니다. 대표작인『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지요. 
 

황정견(黃庭堅) -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고전주의적인 작풍을 지닌 중국 송나라의 시인 겸 화가입니다. 지방관리를 역임하다 중앙관직에 취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국사편찬(國史編纂)에 종사했습니다. 학식에 의한 전고(典故)와, 수련을 거듭한 조사(措辭)를 특색으로 하지요. 주요저서로는『예장 황선생문집』이 있습니다. 

 

륙유(陸游) - 륙유(陸游, 1125~1210)는 철저한 항전주의자로 일관했던 중국 남송(南宋)의 대표적 시인입니다. 약 50년간에 1만 수(首)에 달하는 시를 남겨 중국 시사 상(詩史上) 최다작의 시인으로 꼽히지요. 강렬한 서정을 부흥시킨 점이 최대의 특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저서에는『검남시고(劍南詩稿)』등이 있다. 
 

원호문(元好問) -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금(金)나라의 시인입니다. 두보의 시에 조예가 깊어 그의 작품은 두보의 시구를 요령 있게 이용해 때로는 두보의 시를 능가하는 중후함을 보였지요. 주요 저서에는『유산문집(遺山文集)』,『중주집(中州集)』등이 있다. 
 

고계(高啓) - 고계(高啓, 1336~1374) 원말(元末)·명초(明初)의 시인입니다. 근체시(近體詩)에서는 주로 강남의 수향(水鄕:강·호수 등 물이 많은 지방)의 풍물을 담백하게 노래했고, 고체(古體)에서는 역사나 전설에서 취재한 낭만을 노래하였지요. 대표작인『청구자가(靑邱子歌)』는 분방한 환상을 엮어 나가면서 시인의 사명을 노래한, 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 합니다. 
 

원굉도(袁宏道) - 원굉도(袁宏道, 1568~1610)는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학자입니다. 국자감조교(國子監助敎), 이부계훈시랑(吏部稽勳侍郞) 등을 역임했지요. 고문사파(古文辭派)에 의한 의고운동(擬古運動)에 반대해 시의 진수(眞髓)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로이며 격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주요저서로는『원중랑집』이 있습니다.
 

오위업(吳偉業) - 오위업(吳偉業, 1609~1671)은 명말청초의 시인 겸 화가입니다. 장편의 칠언시(七言詩)로써 망국의 비극을 노래한 많은 작품을 남겼지요.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전겸익(錢謙益) ·공정자(龔鼎孶)와 함께 강좌(江左)의 3대시인이라 불렸습니다. 주요 저서에는『매촌집(梅村集)』등이 있습니다. 

 

왕사진(王士禛) - 왕사진(1634-1711)은 청대의 시인입니다. 그는 탈속과 운치를 중시하는 시인으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왕유, 맹호연, 고적의 시를 이백이나 두보의 시보다 높이 평가했습니다.

공자진(龔自珍) - 공자진(龔自珍, 1792~1841)은 청나라의 학자 겸 시인입니다. 청나라 말기의 다난한 시대상과 자신의 울분을 정감 넘치는 시문(詩文)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속에서 엿보이는 개혁의지는 그 후에 개혁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요. 저서에는『정암문집(定庵文集)』,『시집(詩集)』,『보편(補編)』등이 있습니다. 
 

황준헌(黃遵憲) - 황준헌(黃遵憲, 1848~1905.3.28)은 청말의 외교관 겸 작가입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대책으로는 조 ·청 ·일 3국이 협력하여 미국과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문학인으로서 그는 개화파 문학을 이끌었는데, 문학의 진화와 의식의 근대화 등에 바탕한 자유신시(自由新詩)를 주창하였고 '신파시(新派詩)'의 시도로 시 속에 외래어, 새로운 단어, 방언과 속어 등을 거침없이 사용하였지요. 시집『인경려시초(人境廬詩草)』11권에 1천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동양 중국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9. 12. 8. 10:24

[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

‘眞’-동양式 진리의 출발 


취중진담, 술 속에 진실이 담겨 있나니 

현상 뒤에 숨겨진 자명성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

시공초월, 영원불변, 만고불변 진리는 없을 수도

동양을 어떻게 읽을까? 우리는 동양에 몸담고 살아 가지만 실제 이 지역의 문명적 맥락을 어떻게 읽을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다양한 방도 중에서도 우리가 비켜가기 어려운 산맥이 있다. ‘한자(漢字)’다. 동북아 지역 사람들의 감정과 사유는 이 한자를 축선(軸線) 삼아 종횡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굴기로 동북아 문명은 새 분기점을 맞고 있다. 세계의 중축으로 떠오르는 추세가 완연하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12가지 한자의 어원과 의미 변천 과정, 서양과의 비교를 통해 그 배후에 담긴 문명과 문화적 의미를 톺아보는 기획이다. 주요 한자어를 통해 동양문화의 근원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진리의 상징인 원(圓)을 기본으로 한 성철 스님 사리탑은 주위에 직경 24㎝의 원형 참배대를 두고 가운데 3단의 정사각형 기단 위에 사리탑을 세웠다. 사리탑은 2개의 반구(反球)위에 둘레 1m20㎝의 구(球)가 꽃봉오리처럼 솟아 있는 형상으로 사리는 맨 밑의 기단 아래 안치돼 있다.

1.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숨어 있는 것인가? 동양에서는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이 있고(중국어로는 酒後吐言), 라틴어로 “In vino Veritas”라는 말이 있다. 비노(vino)가 와인(wine)이고 베리타스(Veritas)가 진리(眞理)이니, “술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이다. 둘 모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드러낸다는 얘기다. 술만큼 인간을 진솔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어쩌면 미래의 인공지능 시대에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 술 일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술을 마실 리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왜 옛사람들은 진리가 술의 힘을 빌려야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진리는 뭔가 언캐니(묘한)한 것, 즉 아주 친숙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꽁꽁 숨어 있는 그 무엇을 바탕으로 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 아닐까?

진리가 시간이나 장소·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가? 진리가 보편적이고 자명한 것이라면,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에서나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에도 두루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은 만고불변의 진리일까?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이 조항이 진리이지만, 군주제였던 조선시대에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진리란 한 영화의 제목처럼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는 것일까? 상황에 따라 진리가 달라질 수 있다면 ‘대한민국 주권은 돈 많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는 술자리에서의 주장도 진리가 아닌가? 그리고 [동물농장]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더 평등하다’는 조지 오웰의 말도 우리가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진술만큼이나 진리인 것은 아닐까?

진리는 분명하고 자명한가? 진리가 보편적이고 자명한 것이라면 역사 속에서 왜 “이것이 자명한 진리”라고 선언하면서 그것을 위해 때로는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을 불사해왔던 것일까?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가 자명하다면,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처럼 그 자명한 진리를 선언할 필요도 없고, 그 자명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명한 진리가 현실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 선언이 필요한 것이며, 자명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존재토록 하기 위해 진리 선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역설(paradox)이지만, 진리가 호출되고 진리가 누군가에 의해 언급되는 자리는 진리가 이런 역설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진리가 자명한 것인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과는 반대로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마주하게 되면 진리만큼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한자의 ‘진(眞)’자 어원을 분석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고대 동양인들은 진리를 어떤 모습으로 상정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주류 서양철학에서 생각한 진리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 이를 한자 진(眞)의 어원분석을 통해 비교해보도록 한다. 물론 도(道)의 어원과 그 의미도 이후 따로 살피게 될 것이다.

2. 서구에서의 의미


▎하버드 대학과 서울대의 상징 휘장. 진리와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라틴어가 들어가 있다.

진리에 대한 서양의 여러 입장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흐름이 있다. 진리를 사실과 말해진 것의 올바른 대응으로 설명하는 ‘진리 대응설’이다. 주류 서구철학사에서 진리는 사실과 대응하는 것, 즉 진리를 언어적 표상의 정확성으로 보는 것이었다. “있는 것을 있다고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고, 있는 것을 없다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이 이러한 진리 대응설의 가장 오래된 정의 중 하나다.

진리의 라틴어 어원은 베리타스(Veritas)다. 베리타스는 올바름, 참, 정확히 맞음을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판단과 사태의 엄정한 일치를,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에 상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로마를 거쳐 근대에 이르면 베리타스는 설(J. Searle)이 주장하듯이 “한 진술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표상할 때 참인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진리치(眞理値)는 진술과 사실과의 일치를 따지기 때문에 진리는 객관적이며, 고정돼 있다. 따라서 중세 이후 근대 주류 서양철학에서 진리는 진리와 가상, 참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설명되고, 현상 이면의 탐구가 아니라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인식이 정말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이 돼버렸다.

그래서 베리타스는 서구 철학의 근본적 목표였고, 학문이 풀어야 하는 숙명적 명제였다. 이것이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교시로 가장 자주 쓰였던 ‘베리타스’의 형성 배경일 것이다. 하버드 대학에도, 예일 대학에도, 우리의 서울대에도 학교를 상징하는 로고에 ‘Veritas’가 들어 있다.

그러나 로마 이전의 그리스 어원에서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라틴어의 베리타스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알레테이아는 ‘a’와 나머지 ‘letheia’로 구성됐는데 ‘a’는 ‘제거하다’, ‘드러내다’는 뜻이고, ‘letheia’는 숨겨진, 은폐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aletheia’는 숨겨진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일(Unverborgenheit, unconcealment)을 뜻한다. 베리타스가 말해진 것과 사태와의 일치를 상정한다면, 알레테이아는 그 어원에서 진리가 그러한 자명한 일치, 겉으로 보이는 자명한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명성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3. 헤겔의 중국 비판

13세기 말에 들면서 마르코 폴로 등이 동양을 방문하고, 15세기 후반 대항해(大航海) 시대가 시작되면서 서구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했다. 이를 계기로 동양, 특히 중국에 대한 연구가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19세기 초의 헤겔은 중국 연구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한다. 특별히 관심도 많이 가졌고, 관련 연구도 많이 남겼다. 이후 그의 연구는 서양의 중국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지울 수 없는 틀을 만들었다. 그로써 헤겔이 얻은 결론은 “중국에는 역사도 없고, 철학도 없다”였다.

굉장히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는 중국의 경우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흥망성쇠를 다했지만, 왕족의 교체만 있었지 진정한 역사의 변혁에 해당하는 발전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선 인류의 역사를 소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 등으로 나눴다. 이어 문명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는 소년기, 그리스 시대는 생기발랄한 청년기, 로마 시대는 장년기, 노르만 족이 활약하던 시기는 이성이 성숙한 노년기로 봤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디쯤 해당하는 것일까? 그는 서구 문명의 출발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년기’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당시의 중국은 아직 이성과 자유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원시적이며 자연을 벗어나지 못한 우매한 단계에 놓여 있다고 했다.

게다가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가정’으로, 개인은 도덕률에만 근거한 이 거대한 ‘가정’에 속한 ‘자식들’일 뿐이며, 개인적인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은 개인의 자유의지도, 이상도, 정신도 존재하지 않는 ‘왕국’이라고 했다.

이상에 대한 연구가 없는 그곳에 과학이 존재할 리 없고, 이성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 것이며, 진리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했다. 이러한 선언은 헤겔이 가지는 위상 때문인지 너무나 강력한 영향과 후유증을 남겼다.

그 대표적 예가 최근의 대다수 학자들까지도 중국에서는 ‘진리’를 나타내는 개념인 진(眞)이 한(漢)나라 때 처음 등장했으며, 이 글자에 ‘진리’라는 의미가 깃든 것도 불교가 유입된 이후의 일이라고 했다. 아무려면 중국 사상에 도덕적 상식만 존재하고, 사변적 사유는 부재했을까?

또 설사 부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는 잣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편견이 아닐 수 없으며, 자기만의 역사에 근거해 타자를 규정짓는, 자기들은 문명이고 타자는 야만이라는, 극히 서구중심의 사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들면서 상당한 수정을 거쳤지만, 세부적인 각론에서 서구의 편견이나 오인식을 바로 잡는 것은 동양 학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4. 중국에서 眞의 등장과 의미


정말 진리를 뜻하는 진(眞)은 한나라에 들어서야 출현하고, 서구의 진리라는 개념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나 생긴 개념일까? 그래서 중국에는 진정한 진리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출현도 매우 늦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철학이 없었던 것일까?

서구 학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상당부분 사실로 보인다. 진(眞)이 한나라 때의 사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처음으로 해석됐고, 거기서도 진(眞)은 ‘진리’나 ‘참’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쓰인 것도 아니며, 불교가 중국으로 유입한 후에야 글자에 진체(眞諦: 제일의 진리)라는 개념이 든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놓쳤던 것은 진(眞)의 실제 출현 시기도 그보다 이르며, 그전 진(眞)으로 분화하기 전의 글자가 이미 갑골문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게다가 다른 문화체계를 가진 중국에서 ‘진리’는 서구와 다른 방식의 다양한 인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는 중국뿐 아니라 인류사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위대한 저작이다. AD 100년에 당시 볼 수 있었던 모든 한자라 할 9353자(최근의 복원 자료에서는 9833자)에 대해 일일이 그 자형의 유래와 의미, 의미파생 및 독음을 하나하나 밝혀놓은 방대한 한자어원사전이다. 약 1900년 전에 이렇게 방대하며 체계적인 어원사전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설문해자]에 등장하는 진(眞)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모습을 변화시켜 하늘로 올라가는 신선의 모습을 그렸다. 제일 위쪽 부분은 화( ), 가운데 부분은 목(目)과 은( )으로 구성됐으며, 제일 아래쪽 부분은 하(∥)로 구성돼 타고 올라가는 기구를 그렸다. 진( )은 진(眞)의 고문체이다.(僊人變形而登天也. 目; ∥,所以乘載之. 古文眞寶)

그러나 [설문해자]의 방대한 목록 중 진(眞)의 자형만큼 그 설명이 모호한 것은 없다. 허신은 진(眞)을 화( : 化의 원래 글자)와 목(目)과 은( )과 하(∥)”의 네 부분으로 분리해 ‘신선’을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해석한다. 도교적인 색채가 명백한 부분이다.

그러나 뭔가 복잡하고 잘 이해되지도 않으며, 당시의 자형 또는 의미와도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는다. 위대한 한자 학자 허신이었지만, 그 당시에 이미 진(眞)자의 원형과 변화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변화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20세기 후반에 들어 대량으로 출토된 춘추전국시대 때의 청동기 명문에서 그 원래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진(眞)은 기본적으로 ‘화( )’와 ‘정(鼎)’으로 구성됐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정(鼎)’은 ‘패(貝)’로 변하기도 했으며, 독음을 나타내고자 ‘정(丁)’이 더해지기도 했고, 정(鼎)의 아랫부분이 ‘기( )’로 변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모두 ‘화( )’와 ‘정(鼎)’으로 구성된 기본형에서 변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진(眞)은 사실 그전의 갑골문에서 다름 아닌 정(貞)자였다. 즉 정(貞)자에서 분화된 글자였다.

5. 진(眞)과 정(貞)의 관계


▎한나라 때의 표준 서체인 예서(隸書)체. 예서체는 노예를 관리하던 하급관리가 사용하던 서체라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정(貞)은 갑골문에서 매우 중요한 글자이며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복(卜)과 패(貝)로 구성된 정(貞)으로 쓰지만, 갑골문 당시에는 복(卜)과 정(鼎)으로 구성된‘정( )’으로 썼는데, 정(鼎)이 간단한 모습의 패(貝)로 변해 지금처럼 정(貞)이 됐다. 정(貞)을 구성하는 복(卜)은 거북점을 칠 때 불로 지진 곳이 갈라진 모습을 그린 글자이고, 이 갈라진 모습이 점괘를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복(卜)이 ‘점을 치다’는 뜻을 가진다.

정(鼎)은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쓰던 다양한 기물, 즉 청동 예기(禮器)의 대표다. 그래서 정(鼎)은 제기를 상징하면서 또한 권력을 가리켰다. 그래서 ‘세발 솥’을 지칭하는 정(鼎)은 국가나 조정을 뜻하기도 했으며 구정(九鼎)은 천자(天子)의 나라를 뜻한다. 갑골문 시대에는 정(鼎) 그 자체로‘(신에게) 묻다’는 뜻의 동사로도 쓰였다. 신권 통치가 이뤄졌던 상(商)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복(卜)과 정(鼎)으로 이뤄진 정(貞)도 당시에는 ‘신에게 묻다’는 뜻이었다. [설문해자]에서도 정(貞)을 “물어보다(問也)”라는 뜻으로 풀이했고, 한나라 때의 위대한 경학자 정현(鄭玄)도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거북점이나 시초(蓍草)점을 쳐 물어본다”라고 했다. 신에게 거북점을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물어보고 그 갈라진 흔적을 보면서 신의 뜻과 의지를 해석해 내던 점복관(占卜官)을 ‘정인(貞人)’이라 불렀다.


갑골문에서 ‘정인’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성직으로 세습됐고, 어떨 때는 왕이 직접 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만큼 중요하고 성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지금은 당시의 뜻을 잃어버리고, ‘곧다’, ‘정직하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마치 복(卜)의 자형처럼 불에 의해 쩍쩍 직선으로 갈라지는 거북딱지의 흔적에서 ‘곧다’는 뜻이, ‘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해석해 내다’는 뜻에서 ‘정직하다’의 뜻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진(眞)’의 자원과 ‘진리’의 근원은 신의 의지를 묻는 점복 행위를 지칭하는 ‘정(貞)’에서 찾을 수 있고, ‘정(貞)’이 ‘정(正)’, 즉 옳다는 뜻으로 해석된 것은 점복 행위 이후에 사후적으로 확립된 뜻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貞)’과 통용되는 ‘정(鼎)’은 신의 의미를 묻는 점복 관련 의식의 상징이며, 의식의 대표 기물인 정(鼎)으로 해당 의미를 강조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행위가 점복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복(卜)’을 더한 ‘정( )’을 탄생시켰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어에서 진리가 ‘탈(a)’ ‘은폐(letheia)’를 의미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에서 ‘베리타스’로 옮겨갔듯이, 중국에서도 숨겨져 있는 신의 의지를 묻기 위해 점복을 행하고, 갈라진 거북딱지의 흔적으로 보면서 ‘은폐된 신의 의지를 묻는’ 행위에서, 사후적으로 이 행위를 통해 정확성을 확증하는 과정은 서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행위인 정(貞)과 그런 행위를 주관했던 정인(貞人)이 바로 ‘진리’의 출발이자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6. 한나라 이후의 변화

이렇듯 한나라 [설문해자]에서 처음 해설이 붙여진 진(眞)은 사실 한나라가 아니라 훨씬 이전의 주나라 때부터 등장했다. 게다가 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나라 갑골문의 정(貞)자가 이의 원형이며, 정(貞)은 거북점을 통해 ‘신의 의지를 물어보고’ ‘그 숨겨진 의지를 드러내는’ 점복행위에 기원을 둔다.

다만, 전국시대 말과 한나라 초기에 들면서 신선 사상의 유행으로 우주만물의 변화원리를 터득한 사람을 지칭하는 ‘진인(眞人)’이 등장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진(眞)이 정(貞)과 점차 분리됐다. 그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진 진(眞)이 진인(眞人)을 지칭해 원래의 의미를 계승했다면, 정(貞)은 파생 의미인 ‘곧다’와 ‘옳다’의 뜻으로 그 역할을 분담했다. 그러다가 외래의 불교가 들어오면서 ‘진리’라는 개념을 진(眞)으로 표기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의 진(眞)은 사실 [설문해자] 훨씬 이전에 등장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 갑골문 시대의 정(貞)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진(眞)의 원형이 되는 정(貞)은 그리스어에서 ‘진리’를 뜻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 즉 ‘탈(a)’ ‘은폐(letheia)’와 다르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이라고 서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진리를 이렇게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개념화하게 되면 그것은 인간의 실재(reality)의 대면이자, 인간의 실천과 무관하지 않은 동양적인 사유와 만나게 된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환경적 요소 때문에 서구와는 다른 발전 방향을 취했다. 즉 표상하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한나라 이전의 중국인들은 진리란 수행적인 것이지 언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서구인들처럼 “진리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행함(doing), 혹은 어떻게 올바른 행동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그들의 관심사로 삼았다. 그들에게서 주체와 객체, 혹은 인간과 세계는 이분법적 관계 속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인 일자의 관계 속에 거주한다. 이러한 전통은 직관을 통한 앎과 연결되는 것으로, 논리학이나 인식론을 통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논리가 없다고 해서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동양에서는 단지 언표의 차원에서 진리를 고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동양은 개념을 역사적이고 인류학적인 맥락에서 분리시키지 않았고, 물질 속에 이성이 내재하고 이성 속에 물질이 내재한다는 전일적(全一的) 관점을 취해왔다. 그래서 서양에서 분석철학이 지배적이라면 동양에서는 해석학이 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러므로 사유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한자에서 서구 사유에 상응하는 요소를 찾아내는 일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아울러 서구의 ‘진리’에 해당하는 번역어를 한자에서 찾아내는 것이 ‘진리’ 탐구의 접근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어에 관계대명사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어에도 이에 상응하는 문법소가 있어야 하고,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열등한 문화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에 다름이 아니다.

7. 오리엔탈리즘의 극복과 한자

이렇게 서구철학이 동양에 수입될 당시의 지배적이었던 진리관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진(眞)’의 출현이 [설문해자]에서야 등장하기 때문에 그전의 중국에는 진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그리고 진리와 허위의 짝패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는 주장은 이론적이나 어원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즉 ‘진(眞)’에 대한 문자학적 분석을 통해 ‘진(眞)’이 등장하기 전, ‘진(眞)’의 더 오래된 형태가 어떻게 진리를 표현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진리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동양문명의 핵심이다. 철학 문헌이 형성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심지어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숱한 기억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자의 어원 연구는 동양 문명의 근원 연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동양은 이 한자를 기반으로 문명을 형성해왔다. 데리다가 서양 문명을 ‘음성중심주의문명’, ‘로고스중심주의 문명’이라 칭했다면, 동양문명은 ‘문자중심주의 문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음성이나 로고스와 동양의 문자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 간에 문명과 야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다음 호에서 논하기로 한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사)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동양 중국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9. 12. 7. 08:19

[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23)] 치(恥):

부끄러움, 인간의 최소 조건 


곧바로 걸어야 할 길 도덕(道德)과 다르지 않아 

염치가 깨지면 후안무치… 결과는 치욕만이 기다릴 뿐
상식 통하고 정의가 존중받는 건전한 사회 만들어 내야


▎부끄러움을 잘 모르는 세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염치가 깨지면 결과는 치욕뿐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1. ‘지치득거(舐痔得車)’

옛날 전국(戰國)시대 때 송(宋)나라에 조상(曹商)이라는 자가 있었다. 한번은 송나라 임금을 대신해 진(秦)나라로 사신을 가게 됐다. 진나라로 떠날 때는 고작 몇 대의 수레만 주어져 다소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진나라에 도착한 그는 잘난 세 치 혀로 진(秦) 왕을 극진히 잘 모셨다. 그러자 진나라 왕이 너무나 흡족해해 무려 100대나 되는 수레를 상으로 줬다. 그는 의기양양해하며 송나라로 돌아와 장자를 만나 자랑하며 말했다.

“내가 그간 뭐 한다고 이 좁고 누추한 빈민굴에서 짚신이나 짜면서 삐쩍 마른 목덜미에 갖은 두통에다 누렇게 뜬 얼굴로 구차하게 살았을까? 만승(萬乘)의 임금을 깨우쳐 100대의 수레를 얻는 재주가 나에게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오!”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허허허, 그랬던가? 진나라 왕이 병이 나면 의사를 부르는데, 종기를 째고 고름을 빨아주는 자에게 수레 한 대를 주었다고 들었네. 치질을 핥아서 고쳐주는 자에게는 수레를 다섯 대 줬다고 하네. 치료하는 곳이 더러울수록 하사했던 수레의 숫자가 늘어났지.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그의 어디를 어떻게 빨아 줬기에 100대나 되는 수레를 얻었던가? 정말 더러워서 상종하기조차 싫다네. 썩 빨리 내 앞에서 꺼져버리게!”

[장자]에 나오는 ‘지치득거(舐痔得車)’, 즉 ‘혀로 치질을 핥아 주고 얻은 수레’라는 고사성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면조차 버렸던 당시의 세태, 또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일상, 아니 재주라고 우쭐하며 자랑삼던 풍토, 그러나 그 일이 얼마나 부끄럽고 치욕스런 일인지, 윗사람에게 아첨해 이익을 얻는 자의 비열함을 통박한 유쾌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사실 그 옛날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도 자신의 출세와 이익을 위해 갖은 부끄러운 방법을 동원하고도 그것을 재주라 여기는 풍토는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아 보인다. 부끄러움은커녕 그것을 정의로 포장하고 더욱 떳떳이 여기며 당당해하는 모습이 어찌 이와 다르다 하겠는가?

2. 몰염치(沒廉恥)의 시대


▎중국 고대 철학자인 장자의 초상. 장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세태를 비판했다.

그야말로 몰염치의 시대다. 몰염치는 염치가 몰락하여 아예 없음을 말한다. 달리 무치(無恥)라고도 한다. 염치가 없다는 말은 양심(良心)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양심은 “도덕적 가치를 판단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을 말한다.

무치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과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 없음은 물론 그것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조차 없기 때문에 얼굴이 두껍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후안(厚顔)이라는 말이 붙어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로 자주 쓰인다.

몰염치는 염치가 물속에 들어가 버린 듯(沒) 전혀 보이지 않음을 말하고, 무치는 염치(恥)가 없다(無)는 말이다. 사람치고 어찌 염치가 어찌 전혀 없을 수 있겠냐만, 염치가 없다면 그것은 어떤 의도된 목적에 의식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염치를 깨트려버리다(破)라는 뜻의 파렴치(破廉恥)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염치도 모르는 뻔뻔스러움’, 여기서 파(破)는 돌을 깨다는 뜻이다. 그 단단한 돌, 어지간한 힘으로는 깨트릴 수도 없는, 인간의 가장 깊은 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에 깨트려서는 아니 되는 염치를 ‘깨트리다’는 뜻에서 파(破)가 어찌도 이렇게 적절하게 사용됐는지를 생각해 본다.

염치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나와 우리를 비롯한 동양인들에게 중요한 윤리 도덕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로 존중돼 온 말이다. 일찍이 [순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등장한 말로 알려졌다.

파렴치, 염치가 깨어지고 나면 얼굴이 두꺼워지는 법, 후안무치해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로지 치욕(恥辱)만이 기다릴 뿐이다. 더구나 자연인이 아니라 나라의 지도자가 그렇다면 그 치욕은 한 개인에 머물지 않고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된다. 국가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여러 차례 겪었던 우리의 국치(國恥)가 바로 무능하고 파렴치한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지 않았던가?

아무리 능력 뛰어나도 명분 없으면 무용

그래서 예로부터 강조해 왔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여전히 유효하다. 천하를 다스리기 전에 자신의 나라부터 잘 다스려야 하고, 이도 가정을 잘 다스려 남의 모범이 됐을 때 가능하며, 가정은 자신이 잘 수양됐을 때 평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자신이 잘못 수양됐고, 가정이 엉망이고 정의롭지 못하면, 나랏일을 할 명분 그 자체가 없어진다. 동양에서는 명분을 얻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억지로 할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며, 궁극에는 개인의 치욕을 넘어서 국치로 갈 뿐이다.

3. 염치의 어원


▎색연필과 볼펜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한 배우 김혜자의 대본. ‘국민 엄마’로 불리는 대배우지만 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염치를 잃으면 치욕(恥辱)에 이르고 만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염치와 치욕에 공통으로 든 글자가 치(恥)이다. ‘양심의 부끄러움’을 한자에서는 어떻게 해서 치(恥)로 그려냈을까? 치(恥)는 글자 그대로 이(耳)와 심(心)이 경합한 글자다. 그런데 이들이 무엇을 상징하기에 ‘치욕’을 뜻하게 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먼저, 마음속(心)으로부터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으로, 얼굴이 빨개지고 귀(耳)가 붉어짐을 상징한다는 설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것이 자연스레 밖으로 드러나 얼굴이 붉어지고 귀가 빨개진다는 것이다.

둘째, 옳고 그름과 선악은 귀(耳)를 통해 마음(心)으로 전달되어, 양심으로 작동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스템 때문에 이(耳)와 심(心)을 결합해 치(恥)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셋째, 옛날 전쟁에서 패하면 귀를 잘라 수급을 대신하던 패배의 치욕에서 기원했다는 설이다.


넷째, 또 刵(귀 벨 이)나 聝(귀 벨 괵) 등에 근거해 귀를 베던 습속이 옛날의 형벌의 하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중 어느 해설이 더 정확한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귀가 빨개지든, 전쟁에서 패한 포로의 귀를 잘라 전공을 내세웠든, 귀(耳)가 수치의 상징임은 분명하다.

귀를 자르던 형벌에서 치(恥)의 어원을 찾는 것은 영어의 ‘치욕’의 어원을 생각하게 한다. 치욕을 뜻하는 ‘stigma’는 범죄자의 피부에 불에 달군 인두로 낙인을 찍던 데서 유래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도 ‘stigma’로 썼는데, ‘스틱이나 뾰족한 도구’를 뜻하는 steig-(PIE)에서 근원해 ‘뾰족한 도구로 낸 표식·펑크·문신·마크’ 등을 뜻했고, 다시 죄수들에게 ‘뜨거운 철로 태워서 피부에 표식을 남김’을 말했다.

말을 거둬들이는 게 겸손의 출발

이는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도 등장하는 묵형(墨刑)과도 비슷해 보인다. 묵형은 죄수의 얼굴에다 먹으로 문신을 새겨 그가 죄인임을 표식했던 제도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불로 지진 인두로 낙인을 찍었으며, 부위도 얼굴에 한정되지 않고 등이나 팔 등 신체의 다른 곳에도 가능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뾰족한 것으로 찌르다’는 뜻의 ‘stick’도 여기에서 근원했다. 물론 대문자로 쓴 ‘Stigmas’는 1670년대부터 ‘독신의 몸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닮은 표식’ 즉 ‘성흔(聖痕)’을 말하기도 한다고 알려졌다.

‘염치’는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다. 그래서 그런지 보통 앞에 ‘도덕(道德)’이 붙어 ‘도덕 염치’라는 말을 많이 쓴다. ‘도덕’이 무엇이던가? 우주만물의 운행질서, 그 질서를 따라가야 하고 걸어야 하는 인간의 길을 도(道)라 하고, 그 길을 가면서 갖은 유혹에도 한눈팔지 말고 바르게 걷는 ‘정직한 마음’, 그 ‘곧은 마음’을 덕(德)이라 하지 않았던가?

치(恥)는 다른 글자에 비해 상당히 이후에 생겨난 글자다. 소전체부터 등장하며 [설문해자]에서 처음으로 이의 구조에 대한 해석이 이뤄졌다. “치욕을 말한다(辱也). 심(心)이 의미부이고 이(耳)가 소리부다”라고 해 허신은 이(耳)를 소리부로 봤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한 치(耻)·치(誀)·치(?)·치(聇) 등과 같은 여러 이체자를 살펴보면 이(耳)는 대체로 고정된 반면, 심(心)이 지(止)·언(言)·산(山)·정(正) 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耳)는 단순한 소리부라기보다는 의미를 겸한 소리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 때문에 최근의 연구에서는 “심(心)과 이(耳)가 의미부고, 이(耳)는 소리부도 겸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설문해자]의 말처럼 ‘치욕(恥辱)’이 원래 뜻이고, “치욕을 느끼게 되면 얼굴이 붉어지고 귀가 발개진다”라거나 “치욕스런 말이 귀에 들어가면 마음에서 수치를 느끼게 된다”는 해설처럼 ‘귀’가 더 중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염(廉)도 재미있는 글자이다. ‘청렴(淸廉)하다’는 뜻인데, 엄(广)과 겸(兼)으로 구성됐다. 엄(广)은 214부수 글자의 하나로, 옛날 거주 형태의 하나였던 동굴 집에 앞으로 처마를 내고 받침대를 그린 모습이다. 그래서 엄(广)이 들어가면 암(庵, 암자), 점(店, 가게), 부(府, 곳집), 고(庫, 곳집), 측(廁, 뒷간)에서처럼 달아낸 건축물을 뜻한다.

겸(兼)은 원래 두 개의 화(禾)와 손을 뜻하는 우(又)로 구성돼 볏단 둘을 한 손으로 쥔 모습을 그렸다. 이로부터 ‘겸하다’는 뜻이 나왔으며, ‘아우르다’는 뜻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겸(兼)으로 구성된 글자들은 이러한 의미 지향을 가진다. 예컨대 겸(謙)은 ‘겸손하다’는 뜻인데 말(言)을 많이 해 떠벌리지 않고 속으로 거둬들이는 것이 바로 ‘겸손’의 출발임을 보여준다.

또 겸(鎌)은 ‘낫’을 말하는데, 한 손으로 볏단을 쥐고 벨 수 있도록 고안된 금속 도구를 말한다. 겸(鉗)이나 겸(箝)은 죄수의 목에 채우는 형벌 도구인 ‘칼’을 말하는데, 마음대로 나대지 못하도록 목을 구속하는 쇠나 대로 만든 형벌 도구를 말한다.

엄(广)과 겸(兼)이 결합해 만들어진 염(廉)은 원래 지붕에서 한 곳으로 모이는 곳을 말했다.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안쪽을 향해 한 곳으로 모으다는 뜻에서 속으로 거둬들이다, 검소하다, 청렴하다는 뜻이 나왔다.

그래서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잘난 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을 속으로 거둬들이고(收斂, 수렴), 양심으로부터 생겨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스스로 양심의 문제고, 그래서 염치(廉恥)는 ‘인간이 곧바로 걸어야 할 길’을 말한 ‘도덕(道德)’과 다르지 않다.

4. ‘귀’의 상징: 총명함


▎교토 히가시야마(東山)구에 있는 귀 무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군과 양민을 학살한 증거다.

‘귀’를 뜻하는 이(耳)는 귀 모양을 그대로 그렸는데, 외이(外耳) 즉 귓바퀴와 외이도(外耳道)가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물론 청각이 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지만, 한자에서는 이러한 기능 외에 다양한 특수한 의미를 가지며, 거기에 맞는 합성자를 만들어 냈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요한 글자에 자주 귀(耳)가 등장하는 까닭

먼저, 이목구비(耳目口鼻)에서처럼 ‘귀’ 그 자체를 지칭한다. 그러나 이목(耳目)은 ‘귀와 눈’이 원래 뜻이지만, ‘다른 사람의 주목’이나 ‘얼굴 생김새’ 전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만큼 귀가 신체 부위에서 중요한 부위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활에서 눈과 함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聾(귀머거리 롱)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또 이(耳)가 셋 보인 섭(聶)은 귀에 대고 ‘소곤거리다’는 뜻이며, 여기에 수(手)가 더해진 섭(攝)은 ‘당기다’는 뜻인데, 손으로 귀를 당겨 소곤대는 모습을 선명하게 그렸다.

나아가 이(耳)는 사람의 귀뿐만 아니라 ‘귀처럼 생긴 것’이나 ‘두 쪽으로 갈라진 것’ 등도 지칭한다. 예컨대, 버섯의 일종인 목이(木耳)는 나무에서 자라는 사람 귀처럼 생긴 버섯을 지칭한다. 다만 색깔이 검지 않고 흰색이면 은이(銀耳)라고 부르는데, ‘흰 목이버섯’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정이(鼎耳)라는 말도 있다.

옛날 청동 제기의 대표였던 정(鼎)의 귀(耳)라는 뜻인데, 정은 발이 세 개이고 귀가 두 개이며 둥근 배를 특징으로 한다. 무거운 정(鼎)에 막대를 끼워 메거나 들고 가도록 고안된 몸통 양 쪽으로 솟은 두 귀가 사람 머리의 양편으로 붙은 귀를 연상시켜 이(耳)라 부르게 됐다. 그것은 이방(耳房)도 마찬가지인데, 정방(正房)의 양편으로 늘어선 방을 말한다.

둘째, ‘듣다’는 뜻인데 [급취편] 등에서도 이(耳)를 “듣는 감각기관”이라고 해 귀의 청각 기능을 강조했다. 예컨대, 문(聞)은 문(門) 사이로 귀(耳)를 대고 엿듣는 모습에서부터 ‘듣다’는 뜻을 그려냈다. 또 청(聽)은 이(耳)와 悳(덕 덕)이 의미 부이고 ?(좋을 정)이 소리부로, 귀(耳)로 듣다는 뜻이다.

금문에서는 이(耳)와 口(입 구)로 이뤄져 말(口)을 귀(耳)로 듣다는 뜻을 그렸는데, 구(口)가 두 개로 변하기도 했다. 소전체에 들어 소리부인 ?(좋을 정)이 더해졌으며, 곧은 마음(㥁)으로 발돋움한 채(?)귀(耳) 기울여 듣고 청을 들어준다는 뜻을 반영했다. 듣다는 뜻이 외에도 받아들이다, 판결하다, 판단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여기서 파생한 청(廳)은 广(집 엄)이 의미부고 청(聽)이 소리부로, 대청(大廳)마루가 갖춰진 관아를 말했다. 관아는 일반 민중들의 의견을 잘 청취하고 아픈 사연들을 귀담아들어야(聽) 하며,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큰 집이나(广) 장소임을 웅변했다.

셋째, 총명함의 상징으로서의 ‘귀’다. [설문해자]에서는 귀를 두고 “총명함을 주관하는 기관”이라 하여 총명함과 귀의 연관성이 일찍부터 주관했다. 한자에서 총명하다는 뜻의 총(聰), 성인을 뜻하는 성(聖) 등에도, 빛나다는 뜻의 경(耿)에도 이(耳)가 들었고, 관직을 뜻하는 직(職)에도, 깨달음을 뜻하는 영(聆)에도, 초빙한다는 뜻의 빙(聘)에도 이(耳)가 들었다.

총(聰)은 이(耳)가 의미부고 悤(바쁠 총)이 소리부로, 훤히 뚫린 밝은(悤) 귀(耳)로써 남의 말을 잘 들어 살핌을 말했고, 이로부터 ‘총명(聰明)함’의 뜻이 나왔다. 또 성(聖)은 이(耳)와 구(口)가 의미부고 정(?)이 소리부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그렸다. 갑골문에서는 와 같이 써 사람(人)의 큰 귀(耳)와 입(口)을 그렸고, 금문에서는 사람(人)이 발돋움하고 선(?) 모습을 그렸는데, 귀(耳)는 ‘뛰어난 청각을 가진 사람’을, 구(口)는 말을 상징해 남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존재가 지도자임을 형상화했다.

그런가 하면 직(職)은 이(耳)가 의미부고 戠(찰진 흙 시)가 소리부로, 직무·직책이라는 뜻인데, 남의 말을 귀(耳)에 새기는(戠) 직책을 말해, 언제나 남의 자세한 사정을 귀담아듣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직무(職務)의 원뜻임을, 그런 일은 영민한 사람이 맡아야 함을 웅변해 주고 있다.

나아가 빙(聘)은 이(耳)가 의미부고 甹(말이 잴 병)이 소리부로, 방문하다, 초빙한다는 뜻인데, 훌륭한 사람(耳)에게 물음을 구하고 귀담아듣기(耳) 위해 말을 달려(甹) 찾아가고 물어보다는 뜻을 그렸고, 이로부터 초빙(招聘)에서처럼 훌륭한 사람을 모시다는 뜻도 생겼다.

귀를 잃는 건 곧 생명을 잃는 것과 같아

늘어진 귀는 이처럼 총명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경(耿)도 “귀가 늘어져 뺨에 붙다”는 뜻이지만, 총명함의 상징으로 쓰인다. 또 탐(耽)도 ‘큰 귀’나 ‘늘어진 귀’를 말했는데([설문해자]), 늘어진 큰 귀는 길상의 상징이었다. 반면 짧은 귀는 서구처럼 악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담(聃)은 귓바퀴가 없는 ‘귀’를 말한다고 하지만, 어원적으로 보면 귀(耳)가 늘어진(冉) 모습을 그렸다. 최고 현자의 상징인 노자의 이름이 담(聃)인데 귀가 축 늘어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부처의 모습도 마찬가지인데, 모두 지혜의 상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나이 예순 살’을 뜻하는 이순(耳順)은 모든 말이 귀에 순조롭게 들린다는 뜻을 담았다. 그 나이가 되면 인생살이에서 지혜로움 다 얻을 나이라는 뜻이다. 농경사회를 살면서 경함이 특히 중시됐던 중국에서 60갑자가 한 바퀴 도는 60이라는 나이는 장수의 상징이었고, 이 나이는 모든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완성되는 상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5. 귀의 상징: 수치


▎보물 제141호인 대성전에는 공자·맹자를 비롯한 중국 위인 21명과 설총·최치원 등 우리나라 위인 18명 등 총 39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넷째, 수치(羞恥)의 상징으로서의 ‘귀’이다. 한나라 때의 백과사전인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귀를 두고 “마음의 징후(心之候)”라고 했다.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인 심장의 대표가 ‘귀’이고, 마음에서 작동하는 부끄러움도 귀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를 잃는 것은 심장을 잃는 것이요, 생명을 잃는 것이요, 그래서 수치의 상징이 됐다. 앞서 말한 치(恥)가 대표적이다. 이는 취(取)나 련(聯)이나 괵(聝) 등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취(取)는 이(耳)와 又(또 우)로 구성돼 전공을 세우려 적의 귀(耳)를 베어 손(又)에 쥔 모습이며, 이로부터 (귀를) 베다, 가지다, ‘빼앗다’, 채택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여기서 파생한 취(娶)나 취(聚)나 총(叢) 등도 모두 이러한 뜻이 있다.

전쟁에서 잡은 적의 귀를 베던 모습은 련(聯)과 괵(聝)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잇다’는 뜻의 련(聯)은 원래는 이(耳)와 絲(실 사)로 구성됐는데, 사(絲)가 련(?)으로 변해 지금처럼 됐다. [설문해자]에서는 “귀가 뺨에 붙어 있다”라고 했는데, 이후의 파생 의미로 보인다. 갑골문에서는 귀를 실로꿰놓은 모습이다.

전쟁에서 잡은 포로의 귀를 베어서 실(絲)로 꿰놓은 끔찍한 모습을 그렸던 것이 [설문해자]에서 부드럽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로부터 연결되다는 뜻이, 다시 대련(對聯)에서처럼 짝을 이루다는 뜻도 나왔다.

귀를 잘라 전공을 헤아리던 습관은 임진왜란 때도 경험했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이 우리의 귀를 잘라 본국으로 가져가 무덤을 만들고 전공을 기억했다. ‘귀 무덤’이라 불리는 이총(耳塚)이 그것인데, 우리에게는 치욕의 상징이다. 마에다 켄지 감독이 만든 임진왜란의 참상을 잘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월하의 침략자 (Invaders in the Moonlight, 2009)]에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귀를 배다’는 뜻의 괵(聝)은 首(머리 수)가 의미부이고 或(혹시 혹)이 소리부로, 적이나 포로의 귀를 베다는 뜻인데, 옛날의 전쟁에서는 귀를 베서 수급을 대신했고 이로써 전공을 헤아렸다. 괵(聝)은 달리 괵(馘)으로도 쓰는데, 이(耳)가 수(首)로 바뀌었다.

범법을 재주로 여기는 사회

이는 자신의 영역(或)을 지키는 싸움(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목(首) 베기’를 형상화한 글자이며, 이로부터 베다, 포로, 끊다, 살육하다 등의 뜻이 나왔다. 목 대신 자른 귀(耳)로 전공(戰功)을 헤아렸다는 뜻에서 베어낸 귀를 뜻하기도 했다. 이처럼 귀는 전쟁에서 이긴 자에게는 전리품이자 철저한 유린의 상징이고, 전쟁에서 진 자에게는 치욕의 상징이었다.

다섯째, 귀처럼 부드럽다는 뜻이다. 중요한 한약재이자 보약으로 쓰이는 녹용(鹿茸)의 용(茸)이 그것이다. 용(茸)은 초(艹)와 이(耳)로 구성됐는데, 사슴의 뿔이지만 ‘막 자라난 새싹처럼 부드러운’ 것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혹자는 잎에 미세한 솜이 촘촘하듯 ‘잔 솜이 난’ 녹용을 말하는데, 상징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이손(耳孫)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신으로부터 계산해서 8대까지의 손자를 말하는데, 잉손(仍孫)과 같은 말이다.

6. ‘염치론’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기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한 실증주의자이다. [일지록(日知錄)]으로도 유명한 그는 염치에 관한 유명한 글을 남겼다. [염치론]이 그것인데, 학문하기 전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천고의 원리를 설파하면서 인격에 필요한 것으로 “예(禮)·의(義)·염(廉)·치(恥)” 즉 4가지 핵심 개념(四維)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4가지 핵심 개념이 진작되지 않으면 나라는 망하고 만다고 했다. 그것은 예의(禮義)라는 것이 남을 다스리는 커다란 법(治人之大法)이라면, 염치(廉恥)라는 것이 사람이 바로 서는 커다란 규칙(立人之大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흥망은 필부라도 모두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래전 맹자도 말했다. “사람이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니된다. 부끄러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진심 상’) 염치는 인간이 인간으로 서는 최소한의 출발이요, 인간이 인간으로서 기능하는 최소의 요건이다. 개인 자신은 물론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근본적 요소이다. 개개인이 염치를 상실하면 나라 전체가 치욕을 당하는 법이다. 국치(國恥)는 그래서 만들어진다.

7. 이 시대의 염치와 인간성 회복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정말 염치가 상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 몰염치와 무치를 넘어서 파렴치와 후안무치가 일상이 된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금기 규칙인 법을 범하지만 않으면, 아니 법을 범했음에도 범법 사실이 증명되지만 않으면 떳떳하고 오히려 그것을 재주라 능력이라 여기는 사회가 돼버렸다.

죄의 유무로 개인과 사회적 존재 조건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염치를 아는 사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양심과 도덕과 인간성의 회복이 시급한 시점이다. 그리하여 상식이 통하고 상식이 살아 있는 사회, 옳음과 정의가 존중받는 그런 건전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끄러움과 염치를 잃어버린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 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