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7. 2. 7. 18:16


梁惠王上 - Liang Hui Wang I

 

1-1 孟子見梁惠王王曰:「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Mencius went to see king Hui of Liang. The king said, 'Venerable sir, since you have not counted it far to come here, a distance of a thousand li, may I presume that you are provided with counsels to profit my kingdom?'


孟子께서 양나라 혜왕梁惠王을 뵈었더니, 왕이 말씀하였다. "長老께서 千里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利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7. 2. 3. 19:46


1a-1. 맹자께서 양혜왕을 알형하시었다. 왕은 기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선생께서 추鄒나라에서 대량大梁까지 천리를 멀다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나이까?

맹자께서 이에 대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오니이다.

왕께서 '어떻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꼬?' 라고만 하시면 대부들은 당연히,

'어떻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꼬?' 라 말할 것이요, 사士와 서인庶人들도 당연히,

'어떻하면 내 몸 하나 이롭게 할꼬?' 라 말할 것이외다.

그리하면 윗 사람이건 아랫 사람이건 서로서로 이익만을 쟁탈하려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올시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국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고 노리는 놈은

반드시 천승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부大夫 정도의 가로家老일 것입니다.

천 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고 노리는 놈은

백승 정도의 전차를 가지고 있는 대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천승을 거느릴 강역을 차지하고,

또 천승의 나라에서 백승을 거르릴 강역을 차지했다면

그놈들은 이미 처먹은 놈들이올시다.

그런데 만약 공의公義를 뒤로 하고 사리私利를 앞세우는 풍조가 성행하면,

그런 놈들은 임금의 모든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못 배기옵나이다.

예로부터 인仁한 마음이 있으면서 그 어버이를 돌보지 아니 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으며, 공의公義를 지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임금을 깔보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단지 인의仁義를 말씀하시옵소서,

어찌하여 반드시 이익을 말씀하려 하시나이까?" 

[도올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 上 p65~66] 




梁惠王上 - Liang Hui Wang I》


1-1 孟子見梁惠王。王曰 叟不遠千里而來,亦將有以利吾國乎?

      맹자현양혜왕. 왕왈 수불원천리이래,  역장유이리오국호?


Mencius went to see king Hui of Liang. The king said, 'Venerable sir, since you have not counted it far to come here, a distance of a thousand li, may I presume that you are provided with counsels to profit my kingdom?'


1-2 孟子對曰 王何必曰利?亦有仁義而已矣。

     맹자대왈  왕히필왈리? 역유인의이이의. 

王曰 何以利吾國?

왕왈 하이리오국?

大夫曰 何以利吾家?士庶人曰 何以利吾身?上下交征利而國危矣。

대부왈 하이리오가? 사서인왈 하이리오신? 상하교정리이국위의.

萬乘之國弒其君者,必千乘之家;千乘之國弒其君者,必百乘之家。

만승지국시기군자,  필천승지가 ;  천승지국시기군자, 필백승지가.

取千焉,千取百焉,不爲不多矣。苟爲後義而先利,不奪不饜。

만취천언,  천취백언,  불위불다의. 구위후의이선리,   불탐불여.

未有仁而遺其親者也,未有義而後其君者也。王亦曰 仁義而已矣,何必曰利?

미유인이유기친자야,  미유의이후기군자야.  왕역왈 인의이이의, 하필왕리?

  

Mencius replied, 'Why must your Majesty use that word "profit?"

What I am provided with, are counsels to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and these are my on ly topics.

'If your Majesty say, "What is to be done to profit my kingdom?"

the great officers will say, "What is to be done to profit our families?"

and the inferior officers and the common people will say,

"What is to be done to profit our persons?"

Superiors and inferiors will try to snatch this profit the on e from the other,

and the kingdom will be endangered.

In the kingdom of ten thousand chariots,

the murderer of his sovereign shall be the chief of a family of a thousand chariots.

In the kingdom of a thousand chariots,

the murderer of his prince shall be the chief of a family of a hundred chariots.

To have a thousand in ten thousand, and a hundred in a thousand,

cannot be said not to be a large allotment, but if righteousness be put last,

and profit be put first, they will not be satisfied without snatching all.

There never has been a benevolent man who neglected his parents.

There never has been a righteous man who made his sovereign

an after consideration. Let your Majesty also say,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and let these be your on ly themes."

Why must you use that word - "profit?".'

[ 맹자 한문 영문판 참조 ]



전국시대 위나라 및 수도 대량


'맹자'

 - 양혜왕(梁惠王)과의 대화인 양혜왕

 - 제자인 공손추(公孫丑)와의 대화인 공손추

 - 등문공(滕文公)이 세자시절 맹자와 대화한 등문공

 - 눈 밝은 옛사람인 이루(離婁)에서 시작된 이루

 - 제자 만장(萬章)과의 대화인 만장

​ - 묵가의 사상가인 고자(告子)와의 대화인 고자

 - 마음을 다한다는 뜻인 진심(盡心)에서 시작되는 진심

전체 7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주자는 각 편을 상하로 나누어 모두 14편으로 구성.




孟子集注 卷一

梁惠王章句上(凡七章) 第一章


孟子見梁惠王.


孟子께서 양나라 혜왕梁惠王을 뵈었더니,


梁惠王, 魏侯罃也. 都大梁, 僭稱王, 諡曰惠. 史記, 惠王三十五年, 卑禮厚幣以招賢者, 而孟軻至梁.


양혜왕梁惠王은 위나라 제후 영(魏侯罃)이다. 대량大梁에 도읍하여 王이라 참칭하고(僭稱王) 시호를 혜라 하였다. 『史記』에 <혜왕 35년에 禮를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卑禮厚幣)하여 어진 사람을 초청하므로 孟子가 梁나라에 가셨다>고 하였다.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왕이 말씀하였다. "長老께서 千里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利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叟, 長老之稱. 王所謂利, 蓋富國彊兵之類.


수叟는 長老의 칭호이다. 王이 소위 利라고 하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彊兵의 류이다.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孟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王께서는 어찌 구태여 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仁과 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仁者, 心之德 愛之理. 義者, 心之制 事之宜也. 此二句乃一章之大指, 下文乃詳言之. 後多放此.


仁은 마음의 德이요, 사랑의 이치理致이며, 義는 마음의 제약(制)이요, 일의 마땅함(宜)이다. 이 두 귀절은 이 장의 大指로서, 이하의 글에 상세하게 말하였다. 뒤에도 이와 같은 것이 많다.


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 萬乘之國弑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弑其君者, 必百乘之家.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利롭게 할까를 하시면,
大夫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家門을 이롭게 할까 하며,
士와 서민(庶人)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니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려고 하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萬乘의 나라(天子國)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千乘의 가문(公卿)이요,
千乘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百乘의 家門(大夫)입니다.
萬에서 千을 취하고, 千에서 百을 취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만약 義를 뒤로 미루고 利를 앞세우면 모두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此言求利之害, 以明上文何必曰利之意也. 征, 取也. 上取乎下, 下取乎上, 故曰交征. 國危, 謂將有弑奪之禍. 乘, 車數也. 萬乘之國者, 天子畿內地方千里, 出車萬乘. 千乘之家者, 天子之公卿采地方百里, 出車千乘也. 千乘之國, 諸侯之國. 百乘之家, 諸侯之大夫也. 弑, 下殺上也. 饜, 足也. 言臣之於君, 每十分而取其一分, 亦已多矣. 若又以義爲後而以利爲先, 則不弑其君而盡奪之, 其心未肯以爲足也.


이것은 利를 구하는 것에 따르는 해害를 말하여 위에서 '하필 利를 말씀하십니까?'라고 하신 뜻을 밝힌 것이다. 정征은 취함이다. 위는 아래에서 취하고, 아래는 위에서 취하므로 서로 취한다고 한 것이다.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은 장차 임금을 시해하고 찬탈할 화禍가 있음을 이른다. 승乘은 수레의 수효이다. 萬乘의 나라라는 것은 天子는 기내畿內가 四方이 千里에 수레 萬대를 낼 수 있다. 千乘의 집안이라는 것은 天子의 공경公卿으로서 채지采地가 百里에 수레 千대를 낼 수 있다. 千乘의 나라라는 것은 제후諸侯의 나라이고, 百乘의 집안이라는 것은, 諸侯의 대부大夫이다. 시弑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염은 만족함이다. 臣下가 임금에게 매양 十分의 一을 취하는 것은 이미 많지만 만일 義를 뒤로 미루고 利를 앞세우면 그 임금을 시해하고, 모두 빼앗지 아니하면 그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사람이 있지 않았으며, 義로우면서 그 임금을 뒤로 하는 사람은 있지 않습니다.     


此言仁義未嘗不利, 以明上文亦有仁義而已之意也. 遺, 猶棄也. 後, 不急也. 言仁者必愛其親, 義者必急其君. 故人君躬行仁義而無求利之心, 則其下化之, 自親戴於己也.


이것은 仁義가 일찌기 이롭지 않은 적이 없음을 말하여, 윗글에서 '仁과 義가 있을 따름입니다'하신 뜻을 밝힌 것이다. 유猶는 버린다는 뜻이요, 후後는 급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그 어버이를 사랑하고,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그 임금을 우선으로 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仁義를 몸소 행하고 利를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아래도 감화되어 스스로 자기에게 친하고 떠받들게 된다는 말이다.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王께서는 오직 仁義를 말씀함에 그칠 것이니, 어찌 구태여 利를 말씀하십니까?"          


重言之, 以結上文兩節之意.
○此章言仁義根於人心之固有, 天理之公也. 利心生於物我之相形, 人欲之私也. 循天理, 則不求利而自無不利 殉人欲, 則求利未得而害已隨之. 所謂 毫釐之差, 千里之繆. 此孟子之書所以造端託始之深意, 學者所宜精察而明辨也.
○太史公曰, 余讀孟子書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 未嘗不廢書而歎也. 曰嗟乎. 利誠亂之始也. 夫子罕言利, 常防其源也. 故曰 放於利而行, 多怨. 自天子以至於庶人, 好利之弊, 何以異哉.
程子曰 君子未嘗不欲利, 但專以利爲心則有害. 惟仁義則不求利而未嘗不利也. 當是之時, 天下之人惟利是求, 而不復知有仁義. 故孟子言仁義而不言利, 所以拔本塞源而救其弊, 此聖賢之心也


거듭 말하면서 윗글 두 절의 뜻을 맺은 것이다.
이 장은 仁義는 사람의 마음에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것에 근원하였으니 天理의 公임을 말씀하였다. 利心은 남과 내가 서로 형상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人慾의 사사로움이다. 天理를 따르면 利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롭지 않음이 없고, 人慾을 따르게 되면 利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害가 따르게 된다. 이른바 '터럭끝만한 차이가 千里만큼이나 어그러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맹자>책의 단서를 짓고, 시작을 의탁하는 바의 깊은 뜻이니. 배우는 자가 의당 정밀精密하게 살피고 밝게 분별하여야 하는 바이다. 

     
태사공(司馬遷)이 말하였다. "내가 『孟子』를 읽다가 양혜왕이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하고 묻는데에 이르러서는 일찌기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 利는 진실로 어지러움의 시작이다. 孔子께서 드믈게 利를 말씀하신 것은 항상 그 어지러움의 근원을 막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利를 따라서 행하면 원망이 많다' 하셨으니, 천자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利를 좋아아는 폐단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程子가 말씀하였다. "君子가 일찌기 利롭고자 아니함이 없지만, 오로지 利로서 마음을 삼으면 해害가 있고, 仁義로 하면 利를 구하지 않아도 일찌기 利롭지 아니함이 없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 사람들이 오직 利만 구하고 다시 仁義가 있음을 알지 못하므로 孟子께서 仁義만 말하고 利를 말하지 않으신 것은 발본색원하여 그 폐단에서 구하고자 하신 것이니, 이것이 성현의 마음이다."







 
 
 

맹자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7. 2. 3. 18:28


趙岐(조기)의 孟子題辭(맹자제사)

.​

[原文은 청나라 乾隆帝 4년에 교열하여 간행되고 同治十年 重刊 武英殿十三經注疏에 근거했다. 孟子題辭를 쓴 趙岐(108~201, 字 邠卿, 初名 嘉, 字 臺卿)는 후한 때 사람으로 아래에 자세히 설명했다.]

孟子題辭者 所以題號孟子之書本末指義文辭之表也姓也子者男子之通稱也此書孟子之所作也總謂之孟子其篇目則各自有名이라


맹자제사는 "맹자"라고 부르는 책의 본말(本末).지의(指義).문사(文辭)의 뜻과 글을 밝힌 표제라. ()은 성이고, ()는 남자의 통칭이라. 이 책은 맹자가 지은 바이라. 그러므로 다 맹자라 이름이라. 그 편의 제목에는 곧 각자의 이름이 있음이라.

 

孟子鄒人也字則未聞也니라 本春秋邾子之國이나 至孟子時하여는 改曰鄒矣國近魯하여 後爲魯所幷又言邾爲楚所幷이오 非魯也今鄒縣是也或曰孟子 魯公族孟孫之後孟子 仕於齊라가 喪母而歸葬於魯也三桓子孫旣以衰微하여 分適他國하니라 孟子 生有淑質이러니 夙喪其父하고 幼被慈母三遷之敎하니라 長師孔子之孫子思하여 治儒術之道한대 通五經하고 尤長於詩書


맹자는 추()나라 사람이니, 이름은 가()이고, ()는 알려져 있지 않느니라. ()는 본래 "춘추"에는 주자(邾子)의 나라이나 맹자 때에 이르러서는 고쳐서 라고 함이라. 노나라와 가까워 뒤에 노나라가 합병한 바가 되었느니라. 또 말하기를 주()나라는 초()나라에 합병되었고, 노나라는 아니라고 하니라. 지금의 추현(鄒縣)이 이것이라. 혹자가 말하기를, ‘맹자는 노나라 공족인 맹손의 후손이라. 그러므로 맹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어머니상을 당하여 노나라에 돌아가 장례를 치렀으니(공손추하편 제7), 삼환의 자손이 이미 쇠미하여 다른 나라로 나뉘어 갔기 때문이라.’고 하니라. 맹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맑은 기질이 있더니 일찍이 그 아비를 여의고 어려서 자모삼천(慈母三遷, 어진 어머니가 자식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 갔다는 데에서 흔히 孟母三遷이라 함)의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자라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스승으로 하여 유가 학술의 도를 익혔는데, 오경(詩 書 易 禮樂 春秋)에 통하였고 시서에 더욱 뛰어났음이라.

 

周衰之末戰國縱橫하여 用兵爭强하여 以相侵奪이라 當世取士務先權謀以爲上賢하니 先王大道陵遲墮廢하고 異端並起若楊朱墨翟 放蕩之言以干時惑衆者 非一이러라 孟子 閔悼堯舜湯文周孔之業將遂湮微하여 正塗壅底하고 仁義荒怠하며 佞僞馳騁하고 紅紫亂朱니라 於是則慕仲尼周流憂世하고 遂以儒道遊於諸侯하여 思濟斯民이라 이나 由不肯枉尺直尋으로 時君咸謂之迂闊於事하여 終莫能聽納其說이라


()나라가 쇠미한 말기에 전쟁하는 나라들이 합종연횡(合縱連橫)하여 무력을 써서 강함을 다투어서 서로 침탈하였음이라. 당시 세상에 선비를 취함에 권모술수를 우선적으로 힘쓰는 이를 상현이라 했으니, 선왕의 큰 도는 업신여겨지다가 점차 추락하여 폐기되고 이단이 아울러 일어났느니라. 양주와 묵적과 같은 방탕한 말로써 때를 주장하고 무리들을 현혹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더라. 맹자가 요순과 탕과 문왕과 주공과 공자의 업적이 장차 마침내 막히고 쇠미해져 바른 길이 막히는데 이르고, 인의가 황폐하여 위태해지며, 아첨과 거짓이 날뛰고, 홍색과 자색이 주색(朱色)을 어지럽힘("논어" 양화편 제18)을 근심하고 슬퍼했음이라(진심하편 제37). 이에 곧 중니가 세상을 근심하여 돌아다니셨음을 그리워하고 마침내 유학의 도로써 제후에게 유세하여 이 백성들을 구제하려 생각했음이라. 그러나 왕척직심(枉尺直尋, 한 자를 구부려 여덟 자를 편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희생하여 큰 것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불의를 묵인하고 합리화하는 행태를 의미함 : 등문공하편 제1)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당시 인군들이 다 일에 오활하다(어둡다)고 하면서 끝내 능히 그 유세를 듣고 받아들이지 않았음이라.

 

孟子 亦自知遭蒼姬之訖錄하고 値炎劉之未奮하여 進不得佐興唐虞雍熙之和하고 退不能信三代之餘風하여 恥沒世而無聞焉이라 是故垂憲言하여 以詒後人하니라 仲尼有云我欲託之空言이나 不如載之行事之深切著明也


맹자 또한 스스로 창희(나라는 오행중 에 속한다하여 주나라 왕실의 성인 東方木을 붙여 蒼姬라 부른다.)가 끝났고, 염유(漢高祖 劉邦火德으로써 왕 하였기에 炎劉라 함)가 아직 떨쳐 일어나지 아니한 때를 만나 나아가 당우(요순시대)의 화평한 치세를 도와 일으키지 못함을 알고, 물러나서는 능히 삼대(夏殷周)의 유풍을 펴지 못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들림이 없을까를 부끄러워했음이라. 이런 까닭으로 법이 되는 말을 드리워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했음이라. 중니께서 나는 공언(空言, 관직이 없었기에 세상에 펼쳐 실행하지 못한 말)에 의탁하고자 하나, 행한 일을 기록하는 것처럼 깊고 절실하며 뚜렷하게 밝은 것만 같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있었음이라.

() 펼 신 마칠 흘 줄 이, 전할 이

 

於是에도 退而論集所與高第弟子公孫丑萬章之徒難疑答問하고 又自撰其法度之言하여 著書七篇하니 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包羅天地하고 揆敍萬類하고 仁義道德性命禍福粲然靡所不載


이러함에도 물러나 뛰어난 제자인 공손추와 만장 등의 무리들과 더불어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문답한 것을 의논하여 모으고, 또한 스스로 그 법도가 되는 말을 지어서 일곱 편을 저술하니, 261(趙岐는 양혜왕편 23, 공손추편 23, 등문공편 15, 이루편 61, 만장편 18, 고자편 36, 진심편 85장으로 나누었다. 주자는 진심장구상편 46, 하편 38, 84장으로 하여 총260장으로 나누었다.) 34685자에 천지를 망라하고 만물의 종류를 헤아려 서술하고, 인의와 도덕과 성명과 화복이 찬연하게 실려 있지 않은 바가 없음이라.

 

帝王公侯遵之則可以致隆平하여 頌淸廟하며 卿大夫士蹈之則可以尊君父하고 立忠信하며 守志厲操者 儀之하면 則可以崇高節하고 抗浮雲하리라 有風人之託物二雅之正言하여 可謂直而不倨하고 曲而不屈하니 命世亞聖之大才者也


제왕과 공후가 이를 따른다면 융성하고 평안함에 이르러 청묘("시경" 周頌편의 노래로, 주공이 낙읍을 건설하고 제후들을 조회한 뒤 문왕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부른 노래이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밝은 덕을 칭송할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를 노래할 것이며, 경대부와 선비가 이를 실천한다면 임금과 아비를 높이고 충과 신을 세울 것이며, 뜻을 지키고 절조를 근심하는 자가 이를 본받는다면 높은 절개를 숭상하고 부운(의롭지 않는 부귀)을 막을 것이라.

("맹자" 7편에는) 사람을 사물에 빗대어 풍자하고 二雅("시경"大雅小雅)의 바른 말이 있어서 가히 곧으면서도 거만하지 아니하고 곡진하면서도 굽히지 않았으니, (맹자는) 세상에 뛰어난 성인 다음가는(맹자를 亞聖이라 이름붙인 최초의 글이다.) 위대한 인물이라 이를 만하니라.

 

孔子 自衛反魯然後樂正하고 雅頌各得其所乃刪詩定書, 繫周易, 作春秋孟子 退自齊梁하여 述堯舜之道而著作焉하니 大賢擬聖人而作者也七十子之疇 會集夫子所言하여 以爲論語하니 論語者 五經之錧鎋이오 六藝之喉衿也이니 孟子之書 則而象之니라 衛靈公問陳於孔子할새 孔子答以俎豆하고 梁惠王問利國할새 孟子對以仁義하며 宋桓魋欲害孔子할새 孔子 稱天生德於予하고 魯臧倉毁鬲孟子할새 孟子曰臧氏之子 焉能使予不遇哉아하니 旨意合同이라 若此者 衆이라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 악이 바루어지고, 아와 송이 각각 그 곳을 얻었음이라. 그리고 를 편찬하고("시경"), 를 정리하고("서경"), "주역"에 해설을 달고(十翼傳), "춘추"를 지으셨음이라.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로부터 물러나 요순의 를 풀이해 지었으니, 이는 대현이 성인을 본받아 지은 것이라. 70제자의 무리들이 공자의 말씀하신 바를 모아 󰡔논어󰡕라 했으니, "논어"는 오경의 관할이고, 육예(禮樂射御書數)의 후금(목구멍과 옷깃, 요긴한 부분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를 말함)이니 맹자의 글은 이를 본받았느니라. 위령공이 공자에게 진법을 물었을 때 공자가 제사 예법으로 답하시고("논어" 위령공편 제1), 양혜왕이 나라의 이로움을 물었을 때 맹자가 仁義로 대답했으며("맹자" 양혜왕 상편 제1), 송의 환퇴가 공자를 해치려 할 때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냈다고 말하고("논어" 술이편 제22), 노나라 장창이 맹자를 훼방하고 이간질하려고 할 때 맹자가 장씨의 자식이 어찌 나로 하여금 (인군을)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하니("맹자" 양혜왕 하편 제16), 뜻이 하나로 합함이라. 이와 같은 것이 많으니라.

 

又有外書四篇하니 性善辯文說孝經爲正이라 其文不能弘深하고 不與內篇相似하며 似非孟子本眞하니 後世依放而託之者也子旣沒之後大道遂絀하고 逮至亡秦하여 焚滅經術하고 坑戮儒生하니 孟子徒黨盡矣其書號爲諸子篇籍得不泯絶이라


또한 외서 네 편이 있으니 성선변문설효경위정이라. 그 글이 크고 깊지 못하고 내편과 더불어 서로 같지 못하며, 비슷하면서도 맹자의 본뜻이 아니니, 후세에 모방하여 붙인 것이라. 맹자가 이미 돌아가신 뒤에 대도가 마침내 버림받고, 망진(亡秦)에 이르러 마침내 경서의 학술을 태워 없애고, 유생을 생매장하여 죽였으니 맹자의 무리들도 없어졌음이라. 그 글을 불러 제자(諸子)라 했으므로(諸子百家書의 하나로 봄) 서적이 없어지지 않았느니라.

 

漢興하여 除秦虐禁하고 開延道德이라 孝文皇帝欲廣遊學之路하사 論語孝經孟子爾雅皆置博士後罷傳記博士하고 獨立五經而已한대 訖今諸經通義得引孟子以明事謂之博文이라


한나라가 일어나 진나라의 포악한 금령을 없애고 도덕을 열어 폈느니라. 효문황제가 배움의 길을 넓혀주고자 논어,효경,맹자,이아에 다 박사를 두었느니라. 뒤에 전기 박사들을 폐지하고 오직 오경만을 세웠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서의 뜻을 통하는 데에 󰡔맹자󰡕를 인용하여 일을 밝히면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고 하니라.

 

孟子 長於譬喩하고 辭不迫切而意以獨至其言曰說詩者不以文害辭하며 不以辭害志以意逆志라야 是得之矣斯言殆欲使後人으로 深求其意하여 以解其文이오 不但施於說詩也今諸解者 往往摭取而說之其說又多乖異不同하니 孟子以來五百餘載傳之者亦已衆多


맹자는 비유에 뛰어나고 말이 박절하지 않으면서 뜻은 홀로 지극하니라. 그 말에 시를 해설하는 자는 글로써 말을 해치지 말며 말로써 뜻을 해치지 말고, 뜻으로써 (지은이의) 뜻을 맞이하여야 이에 얻어진다("맹자" 만장상편 제4)고 했음이라. 이 말은 자못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깊이 구하여 이로써 그 글을 풀이하도록 함이고, 다만 시를 해설하는 데에 베푼 것만은 아니니라. 이제 풀이하는 자들이 왕왕 취하여 해설하고 있으나, 그 해설이 또한 많이 어그러지고 달라 같지 아니하니, 맹자 이래로 오백여 년에 전하는 자가 또한 이미 많음이라. 주울 척


余生西京하니 世尋丕祚有自來矣少蒙義方하고 訓涉典文한대 知命之際嬰戚于天하여 遘屯離蹇이라 詭姓遁身하며 經營八紘之內十有餘年心勦形瘵하니 何勤如焉이리오 嘗息肩弛擔於海岱之間할새 或有溫故知新雅德君子하여 矜我劬瘁하고 睠我皓首하며 訪論稽古하여 慰以大道하니라 余困吝之中精神遐漂하여 靡所濟集이나 聊欲系志於翰墨하니 得以亂思遺老也니라


(趙岐)가 서경에서 태어났으니 세대로 큰 복을 이어 왔음이라. 어려서는 올바른 법도를 깨우치고 경전의 글을 배웠는데, 천명을 알 즈음에(나이 오십에) 하늘로부터 슬픈 일을 당하여 매우 어려움에 직면하였음이라. 성을 바꾸고 몸을 숨기며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닌 지 십여 년에 마음은 괴롭고 몸은 병들었으니 무슨 괴로움이 이와 같으리오. 일찍이 해대지간(北海郡과 태산 사이, 趙岐를 구해준 孫嵩이 살던 安丘를 말함)에 짐을 풀어놓고 쉴 때에 문득 온고지신하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군자가 있어 나의 괴롭고 병든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내 백발머리를 돌봐주며, 찾아와 옛 일을 상고하면서 대도로 위로했느니라. 내가 매우 괴롭고 어려운 속에서 정신이 멀리 떠돌아다녀서 집중되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글 쓰는 데 뜻을 매어 두고자 했으니 이로써 생각을 다스리고 늙음을 잊어버리게 되었느니라.


갓난아이 영, 두를 영. 만날 구. 절음발이 건, 어려울 건. 속일 궤. 달아날 둔

끈 굉, 넓을 굉. 노곤할 초. 앓을 채, 지칠 채. 수고로울 구.

병들 췌, 고달플 췌. 돌아볼 권

 

惟六籍之學先覺之士釋而辯之者 旣已詳矣儒家惟有孟子閎遠微妙하고 縕奧難見하니 宜在條理之科於是乃述己所聞하고 證以經傳하여 爲之章句하고 具載本文이라 章別其旨하고 分爲上下하니 凡十四卷이라 究而言之不敢以當達者施於新學이면 可以寤疑辯惑이리라 愚亦未能審於是非後之明者見其違闕하여 儻改而正諸不亦宜乎


육경의 학문은 먼저 깨우친 선비들이 풀이하고 분별해놓은 것이 이미 매우 상세하니라. 유가에서는 오직 "맹자"만이 크고 심원하며 미묘하고 온오(이치가 깊고 오묘함)하여 보기 어려우니 마땅히 조리해야 할 과목이 있음이라. 이에 내가 들은 바를 서술하고 경전으로써 증명하여 장구를 짓고 모두 본문에 실었음이라. 장마다 그 뜻을 별도로 쓰고, (장마다) 상하로 나누어 두니 무릇 14권이라. 궁구하여 말한다면 감히 통달한 사람들에게는 마땅하지 않고 초학자들에게 베풀면 가히 의심스러움을 깨우치고 미혹됨을 분별하리라. 어리석은 나 또한 옳고 그름을 능히 살필 수 없으니 후세의 밝은 자가 그 어긋나고 빠진 것을 보아서 만약에 고쳐서 바로잡아 준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조기(趙岐, 108~201)의 일생


趙岐의 조상은 나라의 조상과 같은데 모두 황제 전욱(顓頊)의 후손이다. 후손 중의 하나인 조보(造父)秦穆公 때에 큰 공을 세워 趙城에 봉해졌기에 씨가 되었다. 윗글에서 세대로 큰 복을 이어왔다고 한 것이 이런 뜻이다. 趙岐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았는데 특히 그림에도 능해 죽기 전에 미리 마련해둔 본인의 무덤 속에 계찰(季札)과 자산(子産), 안영(晏嬰), 숙향(叔向) 4인물을 빈위(賓位)로 하고 자신을 주위(主位)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의 찬탄을 자아냈을 정도였다. 결혼은 당대 경전에 두루 능한 마융(馬融)의 형인 馬敦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한동안 마융과 상견하지 않았다고 한다.

 

趙岐는 나이 50에 이르기까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는데, 從兄과 함께 당시 권세가이자 환관이었던 당형(唐衡)의 형인 현()의 부덕함을 탄핵 비판한 일이 있었다. 158년에 당현이 수도의 장관인 경조윤(京兆尹)이 되자 조기는 화가 닥쳐올까 두려워 피하였으나 가속과 친척들은 모두 화를 당했다. 이에 趙岐는 이름을 고치고 떡을 팔며 사방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에 사는 20대의 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이름이 손숭(孫嵩)으로 그는 趙岐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보고 자기 집에 이중벽을 만들어 당가 일문이 멸망할 때까지 그 속에 숨어 살게 했다. 이때 조기는 복벽(複壁) 속에서 3년을 지내면서 액둔가(戹屯歌) 23장을 짓고, "맹자" 7편에 각각 그 뜻을 달고 또한 편마다 상하로 나누고 여기에 를 단 것으로 전해진다.

 

당현 일족이 망한 뒤에 趙岐는 사면되어 병주자사(幷州刺史)로 발탁되었으나 다시 당고의 화(黨錮之禍 : 중국 후한의 환제 · 영제 때에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사를 마음대로 하자 陳蕃李膺 등의 학자와 태학생들이 환관들을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환관들이 이들을 종신 금고에 처하여 벼슬길을 막아 버린 일)10여년을 고생했다. 군웅이 할거하던 후한 초기까지 조기는 한 왕실을 받들었으며 태상경(太常卿)까지 지내고 90여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