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5. 9. 23. 21:17

지난 9월19일 새벽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에서는 집단자위권행사가 가능하도록 자위대법 등 11개의 안보관련 법안이 참의원을 통과했다. 찬성 148표 반대 90표의 압도적 표차였다. 지난 7월16일 중의원에서 강행처리 된지 94일만이다.


1946년 11월 평화헌법이 공포된 후 70년 가깝게 지켜 온 전수방위(專守防衛 오직 방어만 위한 무력만 행사)원칙은 그 날로 깨졌다.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적극적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의 일본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 시간에 국회를 에워싼 시위대로부터 ‘헌법을 지켜라’ ‘아베 야메로(그만 두라)’라는 구호가 밤하늘을 덮었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안보법안 통과되면 평화헌법하의 일본은 없어진다’고 호소하였지만 허사였다.

국회에서 표결 저지에 실패한 오카다 민주당 대표는 국회의 가결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안보법제를 백지로 되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후진국에만 있을 법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날치기로 강하게 밀어 붙인 아베 총리는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룰이다’라면서 몸싸움의 와중에서 한가롭게 책보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국으로서도 중대 사안이다. 안보법제는 양날의 칼이다. 호전적인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미일동맹의 강화가 유리한 면도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본군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유사시에 주한 미군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빌미로 일본군(자위대)이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동의나 요청 없이는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이 불가하다. 한민구 국방장관도 “미군의 요청이 있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TV에 비치는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시위대를 보면서 55년 전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정권 당시의 안보투쟁을 생각한다. 당시에도 국회 의사당 주변에 시위대가 몰려 와 안보조약 개정반대 시위를 했다. 그 때 7세의 어린 아베 소년은 총리관저에서 놀고 있었다. 관저를 에워 싼 시위대는 ‘안보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총리가 관저로 들어오자 아베 소년은 ‘안보반대!’를 따라 외쳤다. 기시는 손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1950년 6월 북한이 불시에 남침하면서 한반도의 적화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국은 스탈린의 아시아 공산화를 견제할 수 있는 일본의 독립을 위해 평화조약이 필요해졌다.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을 포함하는 49개국 연합군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평화조약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도 사인한다. 미국과 처음으로 맺은 안보조약이다. 안보조약에 근거하여 점령군 미군이 재일미군의 지위로서 일본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서방 세계가 중심이 된 평화조약을 부인하고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안보조약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하였다.


1957년 총리가 된 기시는 전승국과 패전국의 색채가 강한 요시다의 안보조약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안보조약은 미군이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 일본 내 내란진압에도 출동할 수 있는 반면에 일본은 미군에게 기지 제공이라는 편무적 역할에 머무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1960년 1월 기시 총리를 대표로 하는 안보조약 개정 교섭 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을 만난다. 기시 총리는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개정된 안보조약(신 안보조약)에 서명하고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을 방일 초청하였다.


개정된 안보조약에 내란조항을 없애고 재일미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자위대(1954년 창설)가 미군과 함께 방위를 하도록 하는 미일 공동방위를 명문화하였다. 새로운 안보조약은 기시의 숙원인 대등한 미일동맹 조약으로 평가 받았지만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말려들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다.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국회 심의 과정에서 당시 야당인 사회당이 반대하고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쳤다. 종전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국민들을 불안케 하였다. 당시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안보소동’으로 과소평가 하였지만 전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민중 시위의 ‘안보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기시 내각으로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일하는 6월 19일에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5월19일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표결을 강행하였다. 당시 사회당의 의원들이 연좌하여 표결에 반대하였으나 자민당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을 모조리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었다. 5월 20일 중의원 본회에서 안보조약 개정안이 통과 되었지만 특별위원회의 강행 표결에 실망한 이시바시 단잔, 미키 다케오 등 총리를 역임한 자민당 중진들은 본회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보조약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면서 학생 시민들의 반대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의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제임스 하저티(James C. Hargerty) 백악관 공보비서관이 선발대로 방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하네다 공항에서 하저티 비서관이 탄 자동차를 에워쌌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자 미군의 헬기가 동원되어 구출하는 소동도 빚었다.


6월15일 우익단체가 시위대를 습격하여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와중에 ‘미치코’라는 도쿄대학의 여학생이 압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정국이 예상외로 나쁜 방향으로 발전되자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은 방일을 무기 연기하였다.


6월 23일 미일 양국은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안보조약 개정안은 발효된다. 같은 날 기시 총리는 정국의 혼란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발표하고 7월15일 개관사정(蓋棺事定 죽어서 관 뚜껑을 닫은 뒤의 평가)을 받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총리 직을 사퇴한다. 태어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산모가 희생된 격이다.


1960년 5월 안보조약 개정안의 통과와 2015년 9월 안보법제의 가결이 다르면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시와 아베 총리는 전후체제의 탈피를 주장하고 강한 일본을 지향한다. 55년 전에는 소련에 대한 미일의 동맹 강화라면 지금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는 강화된 미일동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변국의 반응도 갈라진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정책에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다고 환영한다. 중국은 중일간 군비경쟁을 경고하면서 극도로 반대한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필리핀 등 중국의 팽창(군사굴기)에 위협을 느끼는 국가는 환영한다.


아베 내각이 강행처리도 닮은 데가 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5년 전의 강행처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쫓겼고, 이번에는 아베 총리의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지난 4월 방미 시 오바마 대통령에게 ‘여름까지 안보관련 법안을 통과 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에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대형 연휴 전 날인 9월18일을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연휴가 끝나면 국회의 회기가 끝나간다. 그런데 9월18일은 공교롭게도 84년 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날이다.


반대 시위도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기시 정권 때에는 ‘전학련’이었다면 지금은 ‘실즈(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허약한 야당을 대안세력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심판을 하겠다고 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자민당의 ‘강행처리가 적절치 않다’고 응답이 60%에 달하고,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계속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안보법제의 무리한 통과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기시 정권처럼 신생아를 위해 산모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일본의 안보법제 통과로 동북아 정세는 미일과 중국과의 대립이 첨예화 되는 신 냉전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한국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은 최악이다. 돈독해진 한중 관계를 기반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굳건한 한미 동맹과 이를 위한 일본의 협력(用日)이 필요하다. 격동의 동북아 정세를 내다보면 한국의 ‘창조적 외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세계사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5. 6. 30. 20:45

이태리 로마를 구석구석 안내해 드릴께요.  

 

고층건물이 안 보이는 로마시 전경 

 

  

 이태리   로마 (Roma)

여러 왕국과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정치적·군사적으로

고대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신적·물질적 중심지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인류의 예술 및 지성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쌓아올린 도시이다.

현재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로마는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제국의 영토 축소, 경제의 마비,

정치적·군사적 무력 등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 세력으로서의 힘을 잃었지만

입법·교육·건축 도시로서 전 유럽에 계속 빛을 발했다.

6~15세기에 교황들의 입지는 때로 위태위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킨 도시로서 영광을 누렸고,

궁극적으로 부와 힘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미·지혜·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로마 지역에는 일찍이 청동기시대 (BC 1500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거주가 이루어진 것은 BC 1000년경부터이다

로마는 BC 390년에 처음으로 갈리아족의 침략을 받았으며,

이후 AD 410년에는 서고트족, 445년에는 반달족,

1084년에는 노르만족, 1527년에는 스페인 군대로부터 약탈을 당했다.

이슬람교도들은 846년에 로마를 포위공격했다.

AD 64년 네로 황제에 의해 저질러진 대화재를 비롯해서

각종 화재와 지진이 1,000년 이상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하여

많은 건축물과 도시 전역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9~16세기에 건축자재로 쓰기 위해 옛 건축물들의

일부분을 마구 뜯어낸 것이 옛 도시를 파괴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인구 : 2,553,873 (2005)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네로의 거대한 동상(colossus)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지만,정식 명칭은 ‘폴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폴라비우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약 6만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글라디아토르(검투사)의 시합, 맹수 연기 등이 시행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으로되어있다

 

 

 

 

 

 

 

 

 

 

 

 

 

 

 

 

 

 

 

 

 

  

바티칸성당 (성베드로성당)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베드로의 권위에 걸맞는 성당을 건축하도록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게 건축하도록 명령하였고, 그후에도 교황과

추기경들의 외압에 의해 많은 예술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건축에 참가하여 어마어마한 공간속에 조화로움과 호화로움의 극치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바티칸 성당은 세계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답게 화려하고 웅장하다.

 

 

 성베드로 성당

 

 

 성베드로 성당

 

 

 

 

 

 

 

 

  성베드로광장.

최대 25만명까지 수용이 가능

 

 

 

 

 

 판테온 신전

 

 

 

 

 

 판테온 내부

 

 

 캄피돌리오 미술관앞 광장

 

 

  캄피돌리오 미술관

 

 

 

 

 

 

스페인광장의 스페인계단

바로크 양식의 137개 계단으로 정식 명칭은

"언덕 위의 삼위일체 교회로 오르는 계단"이다.

영화"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소로 유명하다.

 1726년 프란체스코 데 산크티스가 완성했는데 직선 면과

곡선 테라스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있다

 

 

 

 

 

 

뜨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애천 분수"

고대 로마의 교황들은 수로를 재건하면서 자신들의 자비로움을

보여주기위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분수들를

도시 곳곳에 만들었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방법은 뒤로 돌아서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너머로 던지는 것이다.

동전을 하나 던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온다'고 하며

동전을 두개 던지면 '연인을 만나 사랑이 이루어진다'고한다.

동전을 세개 던지면 '연인과 헤어지거나 이혼한다고하니

생각해 보고던져야 한다

 

 

 

 

 

 

San Angelo 성

 

 

San Angelo 성과 아체다리

 

 

 

 

 

 팔라티노언덕과 로마 소나무

 

 

 팔라티노언덕과 로마 소나무

 

 

 

 

 

 

 Poro Romano 전경

로 로마노 는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 방대하게 남아있는 유적지.

고대 로마의 정치, 상업, 사법 생활의 중심지 였다.

'FORO'는 '광장'이라는 뜻으로,

로마인들의 문화가 광장 중심으로 이루졌음을 알 수 있다.

 

 

 

 

 

 

 BC42년에 건립된 새턴신전

신전 아래에는 국가의 보물이 매장되어 있었다고함

 

 

 디 콘센테스의 현관

 

 

 

 

 

 

스딴띠누스 대제의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

콘스딴띠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밀비안 다리 전투(312년)에서 물리친 것을 기념해

315년 세운 개선문으로 높이 21m,

벽에는 그의 업적과 전쟁장면을 새긴 부조가 있다.

후에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

 

 

 

셉티미우스 개선문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원래 이 문 꼭대기의 조각은 셉티미우스와

그의 두 아들 를 위한 것이었으나

셉티미우스 사망 후 카라칼라가 동생 제타를 죽인 후

동생의 이름을 조각에서 지워버렸다

 

 

 

아피아 街道 - 모든길은 로마로통한다

로마는 군사적, 상업적 목적으로 도로를 건설하여 12개의 가도를 만들었고

이것이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 375개의 간선도로로

총길이 80,000km에 이르고 지선도로 까지

합하면 150,000km의 도로를 만들었다.

 유럽대륙에서 오래된 도로를 만나 계속 따라 내려오다보면 로마로 온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생겼다.

* 고대 로마의 유적 ⅓이 아직도 지하에 묻혀있어 지하철 건설이 불가능하여

2개 노선의 지하철 밖에 없어 버스가 발달되어있다.

 

이윤기선생의 "그리스로마신화"

비밀댓글입니다

 
 
 

세계사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15. 6. 22. 15:02

 

 

1. ‘미국’이란 나라.
너흰 어떻게 초강대국이 되었니?

 

 

미국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을

'미국(美國)'이란 명칭으로 부르게 된 걸까요?

 

 

 

 

 

 

중국인이 미국인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네 뭐 하는 애들이냐해? 당장, 정체를 밝혀라해!"

 

 

 

 

 

 

미국인이 답했죠.
"아아엠 언 음메리칸"

 

 


 

 

 

 

중국인들은 미국인의 버터 발음을 잘못 들었던 모양입니다.

America(음메리칸)에서 '음'을 빼버리고,

 

 

 

 

 

'메리칸 -> 메이리젠' 이런 식으로 어형을 바꾸었다가 결국 '메이궈'로 표기해 버렸죠.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조선)에 전해져, 현재의 미국(美國, 메이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아름다운 나라라서 '아름다울 미(美)'를 쓴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美'를 쓰지 않고, 쌀 미(米)를 쓰고 있죠.

 

 

 

 

 

어원이 어찌되었던 간에, 미국이 현 세계의 최고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담으로 미국의 국방비가 천 조가 넘는다 하여,

우리나라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천조국'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미국의 국토는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큽니다.

미국 서부에 위치해 있는 LA와 동부의 뉴욕까지는 3940km로,

비행기로 가도 족히 5시간이 걸리죠.

(그에 비해, 국내선 최대 거리인 김포-제주 항공편은 약 50분 소요 ㅠ)

 

 

 

 

 

그만큼 미국의 영토는 광활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동력이

바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있다는 것, 아셨나요?

 

 

 

 

 

 

아시다시피, 러시아의 영토는 미국보다 약 2배가 크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총 경작지는 미국의 70%밖에 되지 않습니다.

 

 

 

 

 

즉, 미국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메리카 대륙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하고 온화한 기후를 가진 영토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축복 받은 영토는 약 50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콜럼버스의 항해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죠.

 

 

 

 

 

콜럼버스가 북미 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알렸던, 15세기 중세 유럽은

우리가 소위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신대륙 개척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요 타겟은 당연히?? 미국을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이었죠.

 

 

 

 

 

 

2. 신대륙 개척기
: 개척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1400년 대의 광활한 아메리카 대륙은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했고,

대신 토착 원주민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위 '인디언'이라 불렸던 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언제부터 미국 땅에 살고 있었을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15,000년 전 빙하기 바다의 수위가 낮아졌을 때

북아시아에서 현재의 알래스카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해요.

 

 

 

 

 

 

그리고 원주민들은 북아메리카 전역에 퍼져 현재의 미국 땅을 최초로 지배한 인류가 되었죠.

 

 

 

 

 

 

그렇다면 깜짝 퀴즈!!!
Q)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1). 필그림 파더스 2).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3). 조지 워싱턴 4). 아브라함 링컨 5). 정답 없음

 

 

 

 

 

 

정답은 '5번'입니다. 이들이 모두 미국인인 것은 맞지만,

사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인이 아닌 '원주민'들이었죠.

 

 

 

 

 

 

어쨌든, 아메리카에는 15,000년 전부터 원주민이 서로 오손도손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통째로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 하나가 일어나죠.

 

 

 

 

 

바로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였는데,

1492년에 항해를 시작해 그해 10월 12일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하죠.

 

 

 

 

 

 

많은 분들께서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한 유럽인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그보다 500년 앞서 노르웨이의 바이킹족이 미국 땅을 먼저 발견했습니다.

 

 

 

 

 

 

다만, 바이킹족은 미국 땅을 발견만 하고 '정착'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콜럼버스가 미국 땅을 발견한 이후,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아메리카에 진출했죠.

 

 

 

 

 

이 '신대륙 발견'은 세계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어요.

콜럼버스의 발견이 계기가 되어, 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즉, 1만 5천년 동안 서로 전혀 모른 채 잘 살고 있었던 '유럽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교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언급했던 대로,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바하마 제도에 발을 들이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는데요.

 

 

 

 

 

미국은 이 날을 기념하여, 매년 10월 두 번째 일요일을 '콜럼버스 데이'로 정해 기념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 데이(10월 12일)은 유럽인들에게는 매우 기념비적인 날인지는 몰라도,

정작 미국 원주민들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날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유럽인들과의 교류는 '파멸'을 가져다 주었던 재앙과도 같기 때문이죠.

실제로 15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대거 몰려오자,

 

 

 

 

 

 

원주민들의 85% 이상(6,400~8,50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 내에 전멸했던 이유는 뭘까요?

 

 

 

 

 

그 이유는, 유럽인들과 같이 딸려 온 '질병'들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를 괴롭혔던 전염병들은 대개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인류가 앓은 전염병은 바로 '가축'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이에요.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류는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가축으로부터 질병을 옮게 되었죠.

 

 

 

 

 

 

위 표는 대표적인 전염병의 사례입니다.

이처럼 인류는 가축 이용이 많은 혜택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인류는 그만큼 희생을 치러야 했죠.

 

 

 

 

 

유럽인들이 대거 몰려오자,

이러한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럽고

있어서는 안 될 사건들이 발생하고 말죠.

 

 

 

 

 

'노예 제도' 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개척한답시고,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건국 역사는 곧 '살육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역사를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15세기 유럽인들은 왜 그리도 신대륙 개척에 올인하였을까요?

엄청난 희생을 치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아마 여러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유럽인으로 둔갑한다면,

매일 이런 소문을 지겹도록 듣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네, 아메리카라고 들어봤나? 저기 대서양을 건너면 신세계가 있는데,

그 곳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네.. 우린 그것을 꼭 찾아야 하네!”

 

 

 

 

 

중세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보물(Treasure)’이었습니다.

현재 만화에서나 나오는 ‘보물섬’이라는 허구가 실제 15세기 유럽인에게는 진짜였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유럽인들에게 보물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국가가 있었어요. 바로 스페인인데요.

그들은 멕시코에 있는 안데스 산맥을 탐험하던 중에 매우 진귀한 보물을 발견했죠.

 

 

 

 

 

 

바로 ‘은’이었어요.

이 보물의 발견으로, 스페인은 일약 역사상 유래가 없던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이 은으로 인해,

‘은화’라는 화폐가 생겨 무역이 활성화되고 전 세계의 부가 급격히 증가하죠.

 

 

 

 

 

 

이러한 스페인의 신대륙 성공은 많은 유럽인들에게 보물에 얽힌 전설을 심어주었어요.

그러자 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은 ‘엘도라도(El Dorado)’를 찾아 나서죠.

 

 

 

 

 

엘도라도는 스페인어로 ‘황금의 것’이라는 뜻으로, 황금으로 만든 도시를 가리켜요.

이것을 시작으로 많은 유럽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 즉 신세계로 향하게 됩니다.

 

 

 

 

 

 

그 중에 아메리카 정복에 가장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선 나라는

에스파냐(스페인), 프랑스, 영국이었습니다.

 

 

 

 

 

당시 ‘무적함대’라 불리던 에스파냐는 16세기 초에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플로리다, 남아메리카를 탐험한 다음,

그곳을 자국 영토로 선포합니다.

 

 

 

 

 

 

반면, 영국은 에스파냐와는 달리 아메리카 중북부 영토를 지배했죠.

이 선택은 ‘신의 한수’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영국이 지배했던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가

훗날 ‘미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곳을 영국이 아닌 스페인이 지배한 동시에 영토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가정한다면,

 

 

 

 

 

 

현재 미국인들은 영어를 쓰지 않고, 스페인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도

앵글로 색슨족이 아니라 ‘히스패닉’ 계열이 되었을 확률도 있죠.

 

 

 

 

 

 

이처럼 역사를 접하다 보면,

아주 작은 선택이 훗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가 재미있는게 아닐까요?(뜬금포 ㅈㅅ)

 

 

 

 

 

 

그렇다면 에스파냐와 영국이 북미 대륙을 한자리씩 꿰차고 있을 때,

다른 유럽의 강호들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15세기, 프랑스는 지금의 캐나다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 미시시피 강을 따라 아래로 진출하면서

멕시코 만(현 미국의 중남부 지방)까지 확장하죠.

 

 

 

 

 

 

이 땅을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라고 불렀고,

그것이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가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지금의 허드슨 강변, 즉 현재의 뉴욕에 자리를 잡고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1664년에 영국이 이를 빼앗아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었죠.

 

 

 

 

 

참고로, 네덜란드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맨하튼 섬(위 지도)을 단 돈 24달러에 사들였죠.

 

 

 

 

 

이렇게 유럽의 강대국(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포르투갈, 프랑스 등)들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치열한 영토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대세는 한 나라에게 집중되어 갔습니다.

바로 ‘영국’이었죠. 당시 영국은 칼레 해전을 통해,

무적함대라 불리던 스페인 함대를 물리치고 대영제국으로 승극합니다.

 

 

 

 

 

 

즉, 당시 세계의 주인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죠.

이것은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양사 지식이 없어서 고맙게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