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20. 2. 18. 23:08

燕巖集卷之七○別集 潘南朴趾源美齋著 鍾北小選○序


北學議序 



學問之道無他。有不識。執塗之人而問之可也。僮僕多識我一字姑學。汝恥己之不若人而不問勝己。則是終身自錮於固陋無術之地也。舜自耕稼陶漁。以至爲帝。無非取諸人。孔子曰。吾少也賤。多能鄙事。亦耕稼陶漁之類是也。雖以舜孔子之聖且藝。卽物而刱巧。臨事而製器。日猶不足。而智有所窮。故舜與孔子之爲聖。不過好問於人。而善學之者也。吾東之士。得偏氣於一隅之土。足不蹈凾夏之地。目未見中州之人。生老病死。不離疆域。則鶴長烏黑。各守其天。蛙井蚡田。獨信其地。謂禮寧野。認陋爲儉。所謂四民。僅存名目。而至於利用厚生之具。日趨困窮。此無他。不知學問之過也。

如將學問。舍中國而何。然其言曰。今之主中國者。夷狄也。恥學焉。幷與中國之故常而鄙夷之。彼誠薙髮左袵。然其所據之地。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凾夏乎。其生乎此土之中者。豈非三代以來漢唐宋明之遺黎乎。苟使法良而制美。則固將進夷狄而師之。况其規模之廣大。心法之精微。制作之宏遠。文章之煥爀。猶存三代以來漢唐宋明固有之故常哉。

以我較彼固無寸長。而獨以一撮之結。自賢於天下曰。今之中國。非古之中國也。其山川則罪之以腥羶。其人民則辱之以犬羊。其言語則誣之以侏離。幷與其中國固有之良法美制而攘斥之。則亦將何所倣而行之耶。余自燕還。在先爲示其北學議內外二編。盖在先先余入燕者也。自農蚕畜牧城郭宮室舟車。以至瓦簟筆尺之制。莫不目數而心較。目有所未至。則必問焉。心有所未諦。則必學焉。試一開卷。與余日錄。無所齟齬。如出一手。此固所以樂而示余。而余之所欣然讀之三日而不厭者也。噫。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抵掌於酒爛燈灺之際。而乃一驗之於目爾。要之,不可以語人,人固不信矣。不信則固將怒我。怒之性。由偏氣。不信之端。在罪山川。


북학의서(北學議序)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순(舜)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帝)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예(禮)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 사(士) · 농(農) · 공(工) · 상(商))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붓, 자〔尺〕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熱河日記)》)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주C-001]북학의서(北學議序) :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D-001]나는 …… 많았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2]심법(心法) :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

[주D-003]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 연암은 정조 4년(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주D-004]재선은 …… 사람이다 :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출처: https://yiweipingdi.tistory.com/37 []

 
 
 

우리역사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20. 2. 11. 22:24

정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내용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집필한 책으로, 48권 16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이 책은 부임()·율기(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애민()·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진황()·해관( : 관원을 면직함) 등 모두 12편으로 구성되었고,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었다.


그의 저작 연표()에 의하면, 강진 유배 생활 19년간의 거의 전부를 경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얻은 학문적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마지막 정열을 기울였다. 이는 1817년(순조 17)에 『경세유표()』, 1818년(순조 18)에 『목민심서』, 1819년(순조 19)에 『흠흠신서()』를 계속 펴낸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저작 활동이 부진해 『경세유표』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천관편()의 수령고적( : 수령의 성적을 살핌) 9강() 54조는 책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정약용의 목민에 대한 구상과 계획은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16세부터 31세까지 아버지가 현감·군수·부사·목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있을 때 임지에 따라가서 견문을 넓힌 일이 있었다. 자신도 33세 때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행정의 문란과 부패로 인한 민생의 궁핍상을 생생히 목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찰방()·부사 등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지방 행정에 대한 산 체험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그는 근민관()으로서 수령의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수령은 모름지기 『대학()』에서 이르는 바 수기치인지학()을 배우는 데 힘써 수령의 본분이 무엇인가를 직시하고 치민()하는 것이 곧 목민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이 뜻은 간단한 것 같지만 여기에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점을 잘 인식하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책에서 심서()라고 한 뜻은 목민할 마음은 있었지만 몸소 실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할 바는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그들을 다스리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슬프지 아니한가!”라고 개탄하였다. 특히 수령 칠사()의 하나인 간활식()에서 수령과 아전의 간활을 배제하고자 노력하였다.


『목민심서』를 비롯해 조선 초기의 『목민심감()』, 후기의 『거관요람()』·『거관대요()』·『임관정요()』(안정복) 등 여러 목민서가 지향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목민관의 정기( :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함)와 청백 사상이 전편에 걸쳐 강하게 흐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청렴은 수령의 본무이며 모든 선()의 원천이며 덕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 능히 수령 노릇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목민심감』은 태종 초에 명으로부터 전래되어 수령들의 지침서로 중요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그 일부 내용이 『거관요람』과 『선각()』(저자 미상)에 수록되며, 『임관정요』에 영향을 미쳤다. 『목민심서』는 안정복()의 『임관정요』를 여러 곳에서 인용함으로써 그의 목민관을 계승하였다. 이 점에서 『목민심서』는 『목민심감』·『임관정요』·『선각』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목민심서』의 편목은 광문사()에서 간행한 『목민심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를 분석해 정약용이 의도하고 있는 수령의 실천 윤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1편의 부임은 제배()·치장()·사조( : 수령이 부임하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함)·계행( : 앞서서 인도함)·상관()·이사( : 일에 임함)의 6조로 구성되었고, 제2편의 율기는 칙궁( : 몸을 삼감)·청심()·제가()·병객( : 손님 접대)·절용()·낙시( : 즐거이 베풂)의 6조로 구성되었다.


제3편의 봉공은 첨하( : 우러러 축하함)·수법()·예제( : 예로 교제함)·보문()·공납()·왕역()의 6조로 이루어져 있고, 제4편의 애민은 양로()·자유()·진궁( : 가난한 사람을 구제함)·애상()·관질( : 불치의 환자나 중병자에게 너그러이 역을 면제해 줌)·구재()의 6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네 편은 목민관의 기본자세에 대해 상세하게 논설하고 있다. 첫째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둘째 청렴·절검()의 생활 신조, 셋째 민중 본위의 봉사 정신 등을 언급하였다.


부연하자면, 수령은 근민()의 관직으로서, 다른 관직보다 그 임무가 중요하므로 반드시 덕행·신망·위신이 있는 적임자를 선택해 임명해야 한다. 또한 수령은 언제나 청렴과 절검을 생활 신조로 명예와 재리()를 탐내지 말고 뇌물을 절대로 받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수령의 본무는 민중에 대한 봉사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국가의 정령()을 빠짐없이 두루 알리고 민의()의 소재를 상부에 잘 전달하며 상부의 부당한 압력을 배제해 민중을 보호해야 한다. 즉, 민중을 사랑하는 이른바 애휼정치()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다음 제5편의 이전은 속리()·어중( : 중인들을 이끌어감)·용인()·거현()·찰물()·고공()의 6조로 구분하였고, 제6편의 호전은 전정()·세법()·곡부(簿 : 곡물의 장부)·호적()·평부( : 균등한 세금부과)·권농()의 6조로 구분되었다.


제7편의 예전은 제사()·빈객()·교민()·흥학()·변등( : 등급의 판별)·과예()의 6조로 이루어졌고, 제8편의 병전은 첨정()·연졸()·수병()·권무()·응변( : 변란에 대응함)·어구( : 왜구에 대한 방어)의 6조로 이루어졌다.


제9편의 형전은 청송()·단옥( : 중대한 범죄를 처단함)·신형( : 형벌의 신중함)·휼수()·금폭( : 폭력의 엄금)·제해( : 해가 되는 일을 덜어 버림)의 6조로 구성되었고, 제10편의 공전은 산림()·천택()·선해()·수성()·도로()·장작()의 6조로 구성되었다. 위의 여섯 편은 『경국대전』의 6전을 근거로 하여 목민관의 실천 정책을 소상하게 밝혔다. 즉, 이전은 관기숙정()을 큰 전제로 아전()·군교()·문졸()의 단속을 엄중히 하고 수령의 보좌관인 좌수()와 별감()의 임용을 신중히 하되, 현인()의 천거는 수령의 중요한 직무이므로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호전은 농촌 진흥과 민생 안정을 큰 전제로, 전정·세법을 공평하게 운용하고 호적의 정비와 부역의 균등을 잘 조절하며 권농·흥산()의 부국책()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갈 것을 내세우고 있다. 전정의 문란, 세정의 비리, 호적의 부정, 환자[]의 폐단, 부역의 불공정은 탐관오리의 온상이 되었다. 따라서 수령은 이를 민생 안정의 차원에서 척결()하고, 나아가 활기찬 흥농()의 실을 거두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예전은 온고지신()의 예법과 교화·흥학의 이정표를 잘 세울 것을 권유하고 있다. 병전은 연병·어구( : 외적을 방어함)의 국방책을 말하였는데, 특히 당시 민폐가 가장 심했던 첨정·수포의 법을 폐지하고 군안()을 다시 정리하며 수령은 앞장서서 평소부터 군졸을 훈련시킬 것 등을 강조하였다.


형전은 청송·형옥을 신중하게 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특히 수령은 먼저 교도()하고 다음에 형벌한다는 신조를 굳게 가져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공전은 산림·산택·영전의 합리적 운영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주로 산업 개발과 관련된 행정 문제를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진황()·해관()의 두 편은 수령의 실무에 속하는 빈민 구제의 진황 정책과 수령이 임기가 차서 교체되는 과정을 적은 것이다. 벼슬길을 잘 마무리하기 위한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황의 항목은 비자( : 자본이나 물자를 비축함)·권분( : 수령들이 관내의 부유층에게 권해 극빈자들을 돕게 함)·규모()·설시()·보력( :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힘으로 도움)·준사( : 사업을 마침)의 6조로 편성되었다.


해관은 체대( : 서로 번갈아 교체함)·귀장( : 돌아갈 차비를 함)·원류( : 고을 사람들이 전임되는 관리의 유임을 청하는 일)·걸유( :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왕에게 청함)·은졸(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하던 일)·유애( : 고인의 의 유풍)의 6조로 이루어졌다. 요컨대, 이 책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지방 행정의 원리는 관()의 입장에 서서 논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민()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고발·탄핵·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901년 광문사에서 인간()한 바 있으며,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와 1977년 대양서적(), 1981년 다산연구회()에서 각각 국역이 간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57세 되던 해에 저술한 책으로서, 그가 신유사옥() 때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에 집필하여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이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해가던 때에 이루어진 저술이고, 민생과 관련된 그의 많은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목민심서 [牧民心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역사 이야기

재휘애비.溢空 2020. 1. 22. 20:06



일연(, 1206~1289)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인각사()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이 책 덕분에 일연은 우리에게 누구보다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가치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하고 치밀한 분석의 손길이 따라야 한다. 13세기 아주 특별한 이에 의해 이룩한 민족의 발견,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 정작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일연은 너무 유명해서 아무도 모른다. 이 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삼국유사]의 지은이로 일연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삼국유사]가 유명하므로 일연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오늘날 초등학생에서 일반인까지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과서와 동화책과 인문 교양서에 이르기까지 [삼국유사]를 변주한 책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삼국유사]라는 책에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친숙하다.


일찌감치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이가 일연이다.


[삼국유사] 3권 1책,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1281년(충렬왕 7년)에 편찬하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연은 20세기에 들어 유명해졌다. 아니 이 또한 [삼국유사]가 유명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일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은 [삼국유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이이다.


하지만 일연은 당대에 꽤 잘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된 이였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사회에서 국사의 위치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고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분들의 생애를 그리워했는가. 단순하게 따지자면 당대의 일연은 추기경과 스님을 합쳐 놓은 분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만한 이가 국사에 올랐고, 단일 종교에 국가 종교였던 불교의 당시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사는 두 분을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다. 일연도 그만한 반열에 오른 이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물며 일연에게는 번듯한 비문이 남아서 전해온다. 한문으로 쓴 1,200자 가량의 꽤 긴 분량이다. 가계와 생몰연대 그리고 주요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에 비하면 꽤 풍부한 자료를 남겨 놓은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석을 세우기 위해 쓴 비문 하나가 정보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오른 고승에 대해 이토록 감감무소식인지 의아할 만큼, 다른 기록에 걸쳐 견주어 입증할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비문에 나타난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그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된 일연의 시대

이름을 안다고 다 안 것처럼 여기는 우리네 불찰이 여기서 한몫 거든다. 일연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알았다고 말하면 너무 싱겁다. 우리의 역사 시간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도 그 이름과 단편적인 몇 가지 내용만 알 뿐, 깊이 있게 이 책의 가치와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유명해서 알았다 여기고 넘어가는 무심함을 이제 깰 때가 되었다.


비록 단선적이긴 하나 먼저 비문을 통해 일연의 생애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 곧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이다. 그리고 꼭 10년 전인 1196년에는 최충헌이 자신의 무인정권을 세웠었다. 일연의 생애는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신난()한 세월이었다.


643년 원효가 창건한 이래 1307년 보각국사 일연이 중창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한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비의 탁본. 이 비는 1295년(충렬왕 21년) 사승 죽허가 왕희지 글자를 집자해서 세운 것으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NIKH.DB-fl_004_001_000_0093)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이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44세 때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첫 직장치고는 꽤 늦었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를 저술하였다. 일연의 많은 저작 가운데 [삼국유사]와 함께 지금까지 전하는 이 책은 그의 수행과 학문이 벌써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히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가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유하는가 하면,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함께 일본 정벌을 하던 때는 일연의 나이 어언 76세가 되어 있었는데,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개성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로 은퇴하여, 주석한 지 5년 만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실로 은퇴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아들 하나 두고, 스물여섯 살에 제 품에서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정사의 상대적인 의미인 ‘대안사서’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라 부른다. 그러나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서는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불렀을 때 상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활사()로 요약해 본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던 이 땅의 민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삼국유사]는 수많은 일화를 적절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곧 일연의 세계관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는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등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왕력 편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 편은 양적으로도 역사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현저히 다른 질적인 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기이 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 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흥법 편 이하의 편들은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일연은 승려로서 분명한 불교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불교 문화사란 그런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흥법 편 이하가 중국의 승전()을 많이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를 반추했을 때 드러난다.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고,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발견하고 민족을 재발견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일연이 전하는 삼국시대 이야기

이렇게 [삼국유사]의 세계를 정리해 보면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이 남았다. 과연 일연은 누구인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매우 치밀하고 장황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일연은 이야기하는 재주를 다양하게 지닌 이였다.


그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풀어 넣는 비상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기술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원효와 의상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짝을 지어 등장시킴으로써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우, 김춘추처럼 주인공의 자리에 조연으로 등장시켜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한 사람을 조명하는 경우 등이 먼저 눈에 띈다. 이는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경우는 한 왕대에 대해 대표적인 한 사건을 서술하여 그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선택과 집중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진평왕의 경우, 왕은 무려 53년이나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일연은 다만 한 가지 천사옥대(), 곧 하늘이 내려준 옥대를 받은 일로 갈음한다. 그의 권위와 업적에 대해서는 이 한 가지로 설명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하늘에서 옥대가 내려온다는 일이 발생 가능한 것인가는 논외다. 만약 거기에 걸려서 쓰기를 주저했다면 아예 단군신화는 설 자리조차 잃었을 것이다.


법흥왕은 기이 편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법흥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흥법 편에서 이차돈 순교 사건의 조연으로 법흥은 나온다. 물론 이는 [삼국유사]를 사건의 나열 방식이 아니라 주제별 분류에 따라 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법흥이 법흥인 것은 신라의 불교공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연은 왕의 재위 순서에 따라 기이 편을 기술하다가도 법흥 같은 중요한 왕을 과감하게 흥법 편으로 돌렸다. 거기서 더 흥미롭게 법흥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유사’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것도 없다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연이 가졌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연 [一然] - [삼국유사]를 쓴 뛰어난 이야기꾼 (인물한국사, 고운기,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