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지역.향기]

    서라벌 2010. 5. 20. 00:24

     

    100519_아름다운 한국 KOREAGEOGRAPHIC

    소읍기행 | 포항_구룡포

    빼어난 해안절경, 풍부한 바다어장...

     

    포항 구룡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처럼 빼어난 절경과 풍부한 어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어업 전진기지로 침탈의 현장이 된 아픈 역사도 담고 있다.

     

     

     

     

    한반도 남쪽 땅끝이 해남이라면, 동쪽 땅끝은 구룡포 석병리다. (이윤정기자)


    포항 구룡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처럼 빼어난 절경과 풍부한 어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어업 전진기지로 침탈의 현장이 된 아픈 역사도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요리집(좌)이었던 일본인가옥의 현재 모습(우) (이윤정기자)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무능성, 즉 ‘말의 무능력, 생각의 무능력, 판단의 무능력’을 지적하며 모든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악의 평범성’을 되짚는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못했던 무능함’이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었던 ‘악의 원천’이었다.

     

    구룡포의 산증인 구룡포에서 태어난 서상호(92)옹은 거의 한세기를 이곳에서 살아왔다. 90이 넘은 나이지만 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즐길 정도로 정정하다. 해방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한 서상호옹은 일제가 세운 신사와 송덕비를 철거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1945년 가을 구룡포에 있는 청년들이 모두 모여 ‘왜색일소’를 외치며 신사를 부수고 송덕비 비문에 시멘트를 부었다고 한다. (이윤정기자)

     


    경북 포항의 어촌마을 ‘구룡포’에는 일제강점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 어업을 점령한 침탈 현장이다. 국권을 빼앗긴 암울한 기억 앞에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수 있는 유능함’으로 역사를 마주한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전시관 일본인 수산업자가 살던 저택은 일반에게 공개된다. 마당과 집 외관은 물론 내부도 보존상태가 좋아 당시 일본인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윤정기자)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바다, 호랑이 등끝 ‘구룡포’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가옥거리 서상호(93)옹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인은 구룡포 뭍 안쪽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1920년대 구룡포항이 축항되고 방파제가 조성돼 땅이 생기자 일본인들이 골목길을 따라 일본식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사진은 서인만(사진)씨가 일제강점기 당시 지도를 보며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윤정기자)

     


    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한다면 구룡포는 호랑이의 꼬리, 즉 등 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꼬리의 위쪽 끝 부분은 호미곶이지만, 동해와 만나는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 석병리(경도 129.35.10, 위도 36.02.51)다. 지방도 925번을 타고 구룡포 해안선을 훑으면 구룡포의 탄생을 짐작할 수 있는 자연의 기록을 만난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에 마치 용이 불을 막 내뿜은 듯 주상절리와 판상절리가 자리 잡고 있다. 용암이 급격하게 냉각 수축되면서 5, 6각형 모양의 현무암 조각들이 층을 이룬 것이다.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1마리가 떨어졌다는 구룡포의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투명한 동해바다로 스며들고 있다.

     

    후지산이 그려진 유리창 일본인이 살았던 집 유리창에서 사진 속과 같은 그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후지산이나 일본 가옥 등을 그려놓은 모습이다. (이윤정기자)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에 위치한 다무포 앞바다는 고래 서식지로 유명하다. “고래는 울산한테 뺄껴부꼬, 대게는 영덕한테 뺄껴부꼬, 오징어는 울릉도한테 빼앗깄다 아이가. 구룡포는 과메기, 대게, 고래, 오징어 할 것 없이 어장이 어마어마해” 구룡포에서 만난 한 어민이 구룡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장을 자랑하듯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바로 이 비옥한 구룡포 앞바다의 물숨이 일제강점기 기구한 역사가 시작된 원인이 되고야 만다.

     

    문틀에 붙은 일본 잡지 구룡포 일본인가옥 내부에는 다다미는 물론이고, 일본식 창과 선반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일본인가옥 문틀에 붙인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잡지를 찍은 것이다. 외설적인 삽화도 눈에 띈다. 사진을 찍은 방의 벽은 일본 신문으로 도배돼 있었다. (이윤정기자)


    어업기지를 위한 구룡포 축항, 침탈 현장이 되다

    구룡포의 넘실대는 골목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는 마치 물이 흐르듯 유선형으로 굽어있다. 골목 끝에 서면 옆집 넘어서의 광경은 길 속에 숨겨진다. 물이 흐르듯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을 걷는 느낌이 색다르다. (이윤정기자)

     


    “일제가 구룡포 앞바다에 축항을 한거야. 그게 1920년대고. 일본인이 대량 어획을 하는 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기 어업은 일본인이 다 장악했지. 그 뒤로 한국인은 무조건 일본인 밑에서 일하라는 거야” 서상호(92)옹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 거의 한세기를 구룡포에서 지낸 산증인이다. 90이 넘은 나이지만 서상호옹은 당시의 변화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구룡포공원 일본인가옥거리 중심부에 구룡포공원이 있다. 원래는 일제가 신사와 송덕비를 세웠던 곳이다. 지금은 대한민국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주민이 마침 프레임 속으로 들어왔다. (이윤정기자)

     


    구룡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어부 이외에는 가족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나가는 정도였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구룡포는 최적의 어업기지로 떠올랐다.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한 것이다.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수산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몰려왔다. 방파제를 쌓아 생긴 새로운 땅에는 일식가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현재 구룡포우체국 옆쪽 골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인 가옥거리’가 그것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채 남아있던 일본인가옥은 현재 50채 가량 남았다. 거리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이 붙어 있어 현재 모습과 비교하며 둘러볼 수 있다. 집 내부에는 다다미는 물론, 일본 잡지로 도배한 방문, 후지산이 그려져 있는 유리창 등 일제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공원 비석에 숨겨진 이야기 공원 계단을 따라 늘어서있는 비석들에는 원래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해방이 되자 구룡포 주민들은 이 비문을 모두 시멘트로 막고 비석을 돌려세워 한국인 이름을 새로 새겼다. ‘구룡포공원 입구’라고 쓰인 비문 옆으로 일본인가옥의 나무 외벽이 보인다. (이윤정기자)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의 중심부에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공원에 서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원래 일본인이 세운 신사와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가 있던 곳이다. 해방 이후 구룡포 청년들로 구성된 대한청년단 30여 명은 신사를 부수고 송덕비에는 시멘트를 부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서상호옹은 “일제강점기에 친구는 군대로 징집되고 마을 처녀들은 정신대 끌려갔어. 해방 되고 일본사람이 다 떠나간 그해 가을에, 우리는 ‘왜색일소’를 외치면서 신사를 해체하고 송덕비에 새겨진 도가와 비문에 시멘트를 부은 거야”라고 설명했다. 현재 구룡포공원에는 대한민국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최근 마을에는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를 다시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일본인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민족에게는 ‘침탈의 역사’가 일본인에게는 ‘번영의 역사’로 비칠지 모른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침탈의 역사에 대한 뉘우침과 교훈’으로 남길 바란다는 주민들의 당부가 나오는 이유다.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 구룡포공원에 세워졌던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다. 1945년 가을, 구룡포의 대한청년단원 30여 명은 ‘일제말소’를 외치며 신사를 부수고 비문에 시멘트를 발랐다. 최근 이 송덕비를 복원해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지각 있는 주민들은 한민족에게는 ‘침탈의 역사’가 일본인에게는 ‘번영의 역사’로 비칠지 모른다며 복원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윤정기자)


    구룡포 역사 따라 물길 따라, 일주일이 부족하죠

    일본인가옥 뒤뜰 일본인가옥 2층 테라스에 서서 뒤뜰을 찍었다. 좁은 공간에 집을 지으면서 뒷마당까지 조성해놓았다. 마치 평생을 살 것처럼 견고하게 지어놓았다. 일본인이 떠나간 이 집에서 최근까지 살던 할머니가 뒤뜰 정원을 아기자기하게 가꿔놓았다. (이윤정기자)

     


     



     

    일제강점기 기구한 역사는 사실 구룡포의 작은 단면일 뿐이다. 구룡포읍민도서관 서인만(51)관장은 “구룡포를 제대로 보려면 일주일이 부족해요. 선사시대 유적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 물길에 숨어있죠”라고 말한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의 주상절리, 대보면과 구룡포읍 경계에 위치한 고인돌, ‘목선(나무배)’을 만들던 조선소,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와 머구리(해남), 하루 세 번 어판장이 열리는 구룡포항의 모습은 너울대는 동쪽 바다의 매력을 한없이 부풀린다.

     

    다다미 구룡포 미각반점 주인의 허락을 받고 2층에 올라갔다. 구룡포읍민도서관 서인만(51)관장이 집 내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장판을 들어 올리자 바로 일본인이 사용했던 다다미(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윤정기자)

     


    조선 말기까지 말을 기르던 목장의 흔적을 찾는 것도 구룡포 여행의 백미다. 말을 가두기 위한 돌울타리가 구룡포에서 눌태 구릉지, 응암산, 공개산 서북쪽을 걸쳐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지도, 경주도회자통지도 등 고지도에도 나오는 돌울타리는 길이 12km, 높이가 3m에 달했으며 아직까지 약 5.6km의 구간이 남아있다. 목장 내에는 말을 물 먹이는 못이 50군데, 말이 눈과 비를 피하는 마구 19채, 목장 내 근무 인원은 141명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까지 운영되던 대규모 목장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완전히 폐쇄되었다. 구룡포 염창골에서 시작해 응암산, 매암산, 체력단련장을 거쳐 다시 구룡포해수욕장까지의 말봉재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말목장성’이라 불리는 돌울타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의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말봉재 정자에 올라서면 우리 땅 동쪽의 눈부신 어항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치가이다나 두 장의 판자를 좌우에서 아래위로 어긋나게 댄 일본식 선반이다. 다른 지역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와 비교할 때 구룡포일본인가옥은 2층까지 올린 큰 집이 대부분이다. 대량어획을 하며 많은 부를 축적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살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내부는 세세한 장식과 견고한 구조를 신경 써서 지은 집이 많았다. (이윤정기자)


    구룡포 주상절리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에서 현무암이 급격하게 냉각수축돼 만들어진 주상절 리를 쉽게 볼 수 있다. 3~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안선을 따라 군사용 철책이 쳐져 있어서 주민들은 주상절리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신생대 후기 화산활동으로 추측되는 주상절 리가 투명한 동해 바다로 스며들며 절경을 연출한다. (이윤정기자)


    가는길

    고인돌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인 다무포 인근에 집채만한 고인돌이 세워져있다. 언덕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인돌을 쌓은 건 어떤 부족일까. 고래 서식지이기도 한 다무포 인근에 살았던 부족은 ‘고래잡이’를 하던 부족은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이윤정기자)
     

    김포공항에서 포항공항까지 하루 8번 비행기가 운행된다. 서울에서 새마을호 기차는 하루에 2번 운행되며 5시간 20분이 소요된다. 고속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 약 4시간 30분이 걸린다. 포항 시내에서 구룡포까지는 시내버스 200, 200-1번을 타면 된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는 구룡포항에서 구룡포우체국 옆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찾을 수 있다. 구룡포공원에 서면 구룡포항은 물론 일본인가옥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목선(나무배)를 만들던 조선소 구룡포항 인근에 목선을 만들던 조선소가 들어서있다. 나무에 그린 간단한 도면 하나만으로도 배를 뚝딱 만들어내던 장인들이 조선소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제 목선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배를 수선하는 게 주업으로 바뀌었다. 3년 전 목선 한 채를 만든 것이 마지막이란다. (이윤정기자)

    추가정보

    마지막 목선 목선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사진을 요청했다. 어렵사리 3년 전 마지막으로 만들었다는 목선의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목선의 제조과정을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 작가의 사진이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최흥태작가 제공)
     

    구룡포 인근에는 볼거리가 넘쳐난다. 국립등대박물관과 해맞이광장으로 유명한 호미곶면과 구룡포읍이 바로 붙어있다. 지방도 925번을 타고 구룡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구룡포해수욕장, 관풍대,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 ‘구룡포읍 석병리’, 고래 서식지 ‘다무포 해안생태마을’, 호미곶 관광지를 모두 만난다. 말봉재를 오르고 싶다면 구룡포읍 구룡포2리 염창골에서 시작되는 산행코스를 따라가면 된다.



    말목장성 구룡포에서 눌태 구릉지, 응암산, 공개산 서북쪽을 걸쳐 동해면 흥환리까지 말을 가두기 위한 돌울타리가 약 8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구룡포 염창골에서 시작해 응암산, 매암산, 체력단련장을 거쳐 다시 구룡포해수욕장까지의 말봉재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말목장성’이라 불리는 돌울타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윤정기자)

     



    구룡포의 저녁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구룡포의 골목으로 석양이 지고 있다. 최고의 어항을 끼고 있는 구룡포항에는 하루 종일 바쁘게 어선이 오간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거래하는 공판이 하루에 3번 열릴 정도로 바쁜 항구다. (이윤정기자)

     

     

    경향닷컴 이윤정기자 yyj@khan.co.kr>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100519_아름다운 한국 KOREAGEOGRAPHIC

    소읍기행 | 포항_구룡포

    빼어난 해안절경, 풍부한 바다어장...

    옮김_seorabeol_T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