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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is

댓글 9

연재중/단편

2020. 11. 2.

 

unus

 아침이 밝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햇살이 얼굴로 쏟아지자 이상하리만치 웃음이 났다. 외면해왔던 햇살은 여전했고, 여전히 티 없이 해맑았다. 어떤 걱정도 없는 햇살은 그저 세상을 비추는 것에만 관심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게 네 일이었지.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다 옆으로 고갤 돌렸다. 내 옆엔 낯선 남자가 누워있었다. 어제 처음 본 남자치곤 진도가 빠른 편이었다. 눈을 제대로 본 것도, 키스를 한 것도 침대 위였다. 옷을 다 벗고 나서야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밤에, 우린 한참동안 서로를 파악했다.

 “예쁘네.”

 그의 눈을 어루만지며 건넨 첫 마디였다. 야속하게도 참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난 입술이 예쁜데, 하며 씩 웃었더니 그가 내 코를 건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코도 예뻐.”

 우린 꽤 오랜 시간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에 의미를 뒀다. 밤은 짧았고,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지금 보니 그의 얼굴에도 햇살이 닿고 있었다. 내 손에만 잡히는 줄 알았던 빛이 막상 그의 얼굴을 비추니 샘이 났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그에게 향하던 빛을 가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다 갖고 싶었다. 빛도, 이 남자도.

남자는 자신을 비추던 빛이 사라지자 이내 눈을 떴다. 그리고 멀뚱히 쳐다보는 나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제 한 약속 기억나?”

 아침에 하는 첫 마디 치곤 거창했다. 어제 한 약속이라니. 어젯밤에 처음 만난 사이도 약속이란 걸 하나?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자 피식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뭐야, 시시하게.

 “시시하게.”

 남자도 나와 별 다르지 않은 생각을 했나보다. 나는 그가 시시했고 그는 내가 시시했고. 아니지, 약속이 시시하다는 건가?

 “무슨 약속?”

 참다못해 먼저 물었다. 아무리 기억을 돌려도 약속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 무슨 약속

 “괜찮아. 나만 기억해도 되니까.”

 그의 모호한 대답이 거슬렸다. 기억하지 못할 약속이란 것도 존재하나 싶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이 더 싫었다.

 “나도 기억하고 싶어.”

 나의 푸념에 남자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내 뒤를 비추는 햇빛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예쁜 눈에 이따금씩 닿는 햇살은 그를 찌푸리게 하는 동시에 아름답게 했다. 난 그마저도 샘이 났다.

 “떠올려봐. 그럼 생각 날 거야

 “그냥 알려주면 안 돼?”

 “. 오늘이 가기 전까진

 “?”

 “오늘이니까.”

 평소와 같은 아침, 햇살, 공기, 이불. 매일이 똑같은데 왜 하필 오늘이냐고 묻지 않았다. 오늘은 오늘이니까.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순간이니까.

 

 

 생각보다 쉽게 그에게 설득된 나는 괜히 싱긋 웃으며 품에 안겼다. 갑자기 안겨든 덕에 쿨럭거렸지만 날 밀어내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오히려 다정한 손길로 토닥일 뿐이었다. 낯선 남자였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의 냄새는 품에 파고들고 싶을 만큼 중독적이었고, 그의 숨소리는 방해하고 싶을 만큼 고요했다. 나와 달리 그는 차분했고, 여유로웠다.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로만 채워진 사람 같았다. 그는 어땠을까.

 10시가 되자 머리맡에 둔 알람시계가 일을 시작했다. 맹렬히 떠드는 시계 덕에 더 이상 누워만 있을 수 없었던 우리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난 햇빛이 만든 요상한 얼룩 안에 있었고, 그는 햇빛이 만든 성의 없는 그림자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고, 난 그런 그가 참 좋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옷을 주섬주섬 입고 거실로 나왔다. 입은 옷이 너무 헐렁한 것 같아 내려다보니 그의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베이지 색의 커다란 후드티는 그의 냄새로 가득했다. 바람과 달, 낙엽의 냄새였다. 그게 뭐지?

 “커피 마실래?”

 남자가 옷을 코까지 끌어올려 킁킁거리는 날 보며 물었다.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바지만 입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론 재밌었다. 감상하기 좋은 매끈한 몸도 그렇고.

 “물은 없어?”

 어제 마신 양주는 숙취보다 갈증에 약한 모양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냉장고를 열었더니 캔맥주 몇 개와 생수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바닥난 우유도 있었고 달걀도 몇 개 있었다. 꽤 단출한 살림이었다.

 “아침 먹나?”

 “아니

 생수를 꺼내 마시자 목이 말랐던 그도 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속을 알면서 괜히 물 대신 손을 건넸더니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생각보다 많이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난 배고플 것 같은데.”

 “나가자고?”

 “아니

 “그럼?”

 “그냥.”

 이번엔 내가 어깰 으쓱였다. 텅텅 빈 냉장고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싶었다.

 벌컥벌컥- 그의 목 넘김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는 내가 건넨 생수를 남김없이 마시곤 다시 커피에 집중했다. 그새 커피 향이 집 안 가득 퍼지고 있었다.

 “이따 몇 시지?”

 “4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4시라.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는 새벽이나 칠흑 같은 밤이면 좋았으련만. 이도저도 아닌 4시는 결정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4시는 특별했다. 4시여야만 했다. 누구도 정하지 않았기에 바꿀 수 없었고 정해진 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때문에 원망할 수도 없었다. 특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원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괜찮네.”

 거듭 생각해보니 4시가 꽤 괜찮게 느껴졌다. 새벽이나 밤은 기대와 환상을 갖기 좋은 시간이지만 4시는...

딱이야.” 딱이었다.

 

 

duo

 남아있던 시리얼로 대충 끼니를 때운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로 하고 LP판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어젯밤 알려준 바에 따르면, 그는 LP판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고, 최근에는 관뒀지만 작년까지 희귀 음반을 구하러 해외에 나가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장은 처음 보는 LP판들로 가득했다. 난 그 중 가장 눈에 익은 가수의 것을 골라 그에게 건넸다.

 “데이비드 보위?”

 “당연하지.”

 그가 고갤 끄덕이며 날 요리조리 훑어봤다. 이유를 묻자 그냥, 이라고 답하곤 바로 음악을 틀었다. 듣고 싶었던 라이프 온 마스가 흘러나오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따라 부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요 며칠 라디오에서 흐르던 밝은 음악과 길거리에 흐르던 어두운 음악이 아니라 더 좋았다.

 “어때?”

 “좋아.”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만족스러웠다. 마치 제법인 걸같은 표정이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보위라니, 세상에. 반면에 그는 라디오헤드를 골랐다. 새벽에 들을 만한 음악이었지만 우리에게 지금은 새벽이자 아침, 저녁이자 밤이었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름다운 선율 뒤로 또 다시 햇살이 쏟아졌다. 아까와는 달리 열기가 느껴졌다. 이젠 밝은 햇살이라는 말보다 뜨거운 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 볕 아래서 우리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조용히 음악을 감상했다. 지나치지 않은 기타소리와 심연을 헤매는 베이스, 요동치는 드럼 소리가 서재의 구석구석을 쓸었다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우린 그 소리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갑자기 적막이 흐르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걸.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 일어섰다.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껌뻑이는 그를 두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옷장에서 아무 무늬 없는 흰색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무거운 후드티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뭐해?”

 기척 없이 따라 들어온 그에게도 티셔츠를 건넸다. 똑같은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입어

 “갑자기?”

 “.”

 “?”

 “그냥

 사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후드티를 입고 싶지 않았다. 맨몸은 너무 추웠고, 후드티는 더웠다. 이 의미도 쓸 데도 없는 이유를 그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고 말없이 옷을 입었다. 왠지 오늘 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모양이었다.

 우리가 방에서 얘길 나누는 동안에도 음악은 계속 흘렀다. 집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 만큼 컸지만 아무도 우리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 밖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리 와봐.” 남자가 날 베란다로 이끌며 말했다.

 “사람들 좀 봐.”

 바깥사람들은 어딘가 분주해 보였다. 어떤 가족은 급히 차에 올라 어디론가 떠났고,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는 도로 한 가운데에서 입을 맞췄다. 그 뒤로는 노부부가, 더 뒤로는 꼬마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가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멀뚱히 서서 태양만 쳐다보던 여자는 알고 보니 소매를 다 적실 정도로 울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이 퍽 신기했다. 오랜만에 보는 눈물이라서 그런가.

 “우리도 나갈까?”

 그가 내 허리를 껴안으며 물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들으니 밖에 나가기보단 다시 침대에 눕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지 않은 것처럼, 영원히 어젯밤인 것처럼 엉키고 싶었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으련만.

 “어디 가고 싶은데?”

 “어디든.”

 그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어제 아침까지 난 어딘가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헤맸던지 내 이름도, 나이도,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보지 않았고, 나도 그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날 부러워했을지 모르겠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목적지 없이 헤매던 나도 오늘은 멈춰야 했다. 오늘이 목적지였으니까.

 “그래, 나가자.”

 아차 싶었다. 생각과 반대로 튀어나온 말 때문이었다. 그의 눈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진한 갈색 눈동자에 홀려서 고갤 끄덕여버렸다. 젠장, 취소해야 되나.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 그는 이미 한껏 들뜬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밖에 나가는 게 그렇게 들뜰 일인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지.

 “시간 안에 들어오긴 할 거지?”

 “그럼.”

 그가 4, 라고 덧붙이며 씩 웃었다. 4시엔 집에 있어야 했다. 그게 어제 우리가 나눈 약속이었다. , 이게 약속이었구나.

 “나 생각났어.”

 “약속?” 그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 어떻게 알았어?”

 “표정만 봐도 알지.”

 내 표정이 어땠길래 그러는 걸까. 그의 눈동자를 읽기 바빴던 나와 달리 그는 내 표정 전부를 읽고 있었나보다. 뭔가 들통 난 기분이었다.

 우린 지체 없이 집을 나섰다. 뜨거운 볕과 달리 바람은 찼다. 새삼 이 찬바람 속에 서있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지나가는 들개도, 타이어 뒤에 숨은 고양이도 모든 게 대단했다. 여전히 서있는 큰 나무들, 유영하는 구름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처음 던져졌을 때 느꼈던 감정처럼 말이다.

 손을 맞잡은 채 걷던 우리는 아까 봤던 울고 있는 여자 옆에 멀찍이 서서 똑같이 태양을 쳐다봤다. 여전히 훌쩍이는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보자 그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슬픈가봐.”

 “그러게.”

 얼마나 서글프게 울던지, 가만히 보고 있던 나도 왠지 따라 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울 작정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나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우는 방법을 까먹은 듯했다. 슬퍼야 울 텐데, 슬픈 게 뭔지 기억하지 못했다. 슬픔이 뭐지? 행복하지 않은 건가? 행복하지 않으면 슬픈 게 되는 건가? 행복하면서 슬플 수 있을까?

 쏟아지는 궁금증을 애써 무시하고 다시 태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지경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태양이 더 커진 것 같아.”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럴 수가 있나?”

 그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대화가 오고간 건 아니었지만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tres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얘기해주세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사랑받았고, 사랑했던 존재입니다. 잊지 마세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켰다. 여전히 LP판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TV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미소를, 당신의 추억을, 당신의 존재를.”

 TV 속 낯선 여자는 슬픈 눈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끝은 없습니다. 또 다른 시작일 뿐입니다.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이내 떨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보던 눈이 밑으로 떨어지자마자 눈물도 톡하고 떨어졌다. 전 국민이 생방송으로 여자의 눈물을 보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여자는 희망을 외치며 절망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우리의 찬란했던 과거를 떠올리세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린 누구보다 살아있었습니다.”

 화면 속 여자의 왼쪽 위에는 숫자와 함께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맘에 들지 않아 심드렁한 얼굴로 채널을 돌렸다. 영화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채널 대부분은 흰색 배경에 삐-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남아있는 채널이라곤 방금 전 그 여자와 검은 배경에 아무 설명 없이 크게 박아놓은 숫자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TV를 끄고 다시 서재로 향했다. 남자는 LP판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 몇 시게

 “글쎄.”

 “2

 남자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짐작한 표정이었다. 머쓱해진 나는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어깨에 머릴 기댄 채 그의 냄새를 맡았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내 옆에 있어서 좋았다.

 

 

 “얼마 안 남았네.”

 “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던 4시는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고개를 들 때마다 4시는 가까워졌고, 공포에 질린 우린 멈추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하나 뿐인 길 위에서 친구라고 생각했던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되어 우릴 밀어냈고, 그 끝엔 4시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4시를 원망할 순 없었다. 4시도 4시이길 원한 적 없으니.

 “TV에서 뭐래?” 그가 내 머릴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억해주겠대. 우리가 누구였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래.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조용히 고갤 끄덕이던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한 번 더,

 “사랑해.”

 떨리는 눈으로,

 “사랑해.”

 그제야 TV 속 여자의 말이 이해됐다. 4시가 됐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사랑해가 전부였으므로. 그 외에 다른 말은 길고 구차하며 낭비될 뿐이었으니까. 모든 감정은 딱 한 마디에 함축될 수 있었다.

 “사랑해.”

 그래서 나도 그에게 똑같이 답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어떤 의미인지 설명도 필요 없었다. 짧고 간결한 사랑해.’

 완벽했다.

 

.

 “!”

 순간, 밖에서 둔탁한 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급히 베란다로 향하자 아까보다 더 아수라장이 된 바깥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여자 같은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몇몇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여자 주위에 몰려있었다. 태양을 보며 슬피 울던 그 여자였다.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위에서 뛰어내린 듯했다. 왠지 피와 함께 남아있던 눈물도 흘러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왜 이른 죽음을 택했을까. 슬픔이 인도했을까? 그를 뛰어내리게 할 만큼 슬픔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쿵. 다시 한 번 불쾌한 소리가 났다. 이번엔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또 한 사람이 죽었을 뿐.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장면을 보던 것도 잠시, 어젯밤 술집 앞에서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제목은 전 인구 자살률 증가.’ 버려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간편하고 조용한 방법이라 많이들 선호한다는 코멘트도 있었다. 자면서 죽는 게 정말 쉬울까 생각했다. 아니지, 저들은 겁쟁이일 뿐이라고.

 “겁쟁이

 “…….”

 “겁쟁이야, 다들

 괜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센 척이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저들을 동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미리 죽는 것은 우리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편한 길을 선택한 것뿐이니까. 저들을 안타까워하거나 애석해하거나,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볼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이 시간에? 말도 안 되지.

 “맞아.”

 그가 뒤늦게 맞장구를 치며 날 쳐다봤다. 다시 바라본 그의 진한 눈동자에서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역시 그는 나에게 없는 것만 골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겐 없는 그 눈이, 나는 너무 갖고 싶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면 내게 될 것만 같아 숨도 쉬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내 눈이 그렇게 좋아?” 그가 살짝 윙크를 하며 말했다.

 “?”

 “뚫어지게 보길래. 그런 사람 처음이거든.”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설명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만 만났어도 하루 온종일 칭찬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네 눈도 예뻐.”

 “거짓말

 방금 안 사실인데, 그는 거짓말을 할 때 눈을 두 번 깜빡이는 버릇이 있었다. 빠르게 깜빡, 깜빡.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아.”

 “거짓말이니까.”

 “그런 게 어딨어.”

 “내 눈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날 담고 있어.” 대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로 가득해.”

 다행이었다.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아서.

 “예쁜 거 맞지?”

 “고마워.”

 조금 망설이다 조심스레 답했다. 이제 슬픔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찰나의 슬픔을 느꼈다. 곧 절망으로 바뀔 것만 같은 슬픔이었다.

 

 샛노랗던 햇빛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TV 화면이 켜졌다.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까 본 그 여자였다. 빨개진 눈으로 정면만 응시하던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3년 간, 여러분께 뉴스를 전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매일 밤 9시마다 여러분과 만났던 이 자리는 저의 오랜 소원이자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허락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가 내 손을 이끌고 TV 앞에 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면 위쪽에 있던 작은 글씨가 지금은 큰 자막이 되어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결국 제 가족의 곁에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시간이 남은 지금, 여러분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갤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3, 3시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아깝지 않게, 아쉽지 않게, 그들에게 꾸준히 사랑한다 말씀해주세요. 좋은 기억만 남기십시오.”

 나도 모르게 그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간신히 말을 마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곤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스튜디오는 텅 비었고, 애꿎은 자막만 흐를 뿐이었다.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시간 00:59’

 

 

quattuor

 빠르게 질주하는 소행성의 최종 목적지는 지구였다. 도착 시간은 오늘 4. 앞으로 한 시간 뒤에 인류는, 멸망할 예정이었다. 지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만 삭제될 뿐.

 “무슨 생각해?” 그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린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던 중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천장만. 꽤 길었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역시 그의 목소리였다.

 “아무 것도.”

 “정말?”

 “. 아무 생각 안 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했던 음악, 영화, 사람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얼른 4시가 되길 기다리는 것도 이상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가 옆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이제 우린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 마지막으로 느끼는 숨. 마지막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와 똑같은 답을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저렇게 슬픈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겠지. 그는 날 보는 걸까, 내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걸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내 곁엔 그가 있고,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 테니까.

 “무섭지 않아?”

 “.”

 “?”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기에 덤덤하게 답했다. 피할 수 있었다면, 숨을 수 있었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나만 죽는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면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슬픔은?”

 자꾸 질문만 하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내 표정이 웃겼는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나도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경쾌함이 거실로 퍼져나갈 때까지 계속됐다. 적막을 향한 반항이었고, 슬픔에 대한 답이었다.

 “막힘없이 대답하길래 신기해서.”

 “고민할 게 없지.”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의 손길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다행이야.”

 다행이란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면, 내가 미친 걸까?

 

 고갤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345. 이제 4시는 코앞에 있었다.

 잠깐이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밖이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 여자는 가족을 만났을까.

 “여자 앵커 말이야.”

 “.”

 “지금 뭐하고 있을까?”

 “글쎄.”

 “…….”

 “우리처럼 있겠지.”

 “…….”

 어쩌면 우린 4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밤, 내가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향한 것도 그에게서 나와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다림을 함께 해줄 사람. 우린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같은 인간이었을 뿐.

 순간 아까와 같은 슬픔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눈이 시렸고, 코끝이 따가웠다. 심장이 계속해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입술이 떨렸고, 숨 쉬기가 어려웠다. 참을 수 없었다.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을, 떠나보내기 싫었다. 그를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이 점점 커졌다. 가져선 안 될 마음이었다.

 “죽기 싫어졌어.”

 울음과 함께 토해내듯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도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잃고 싶지 않아.”

 그제야 깨달았다. 불쌍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나도 다르지 않아.”

 그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네 눈에도 슬픔이 있었어. 네가 느끼지 못했을 뿐.”

 끝으로 치닫는 시계 속 숫자를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내 얼굴을 부여잡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잊지 않으면 돼. 괜찮아.”

 “시간이 없어.”

 “모든 걸 잊는 게 아니라 모든 걸 품고 가는 거야.”

 “너무 늦었다고. 이게 우리의 마지막인 거야.”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줄곧 외면해왔던 후회와 절망을 한 순간에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네가 날 잊지 않으면 우리에게 마지막은 없어.”

 “…….”

 “기억해줘, 나를.”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미소를, 당신의 추억을, 당신의 존재를.’ 앵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기억은 모든 걸 할 수 있어.”

 “그저 기억일 뿐이잖아.”

 “우리에겐 기억이 전부야.”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난 널 기억할 거야. 그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리고 날 품에 안았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날 포근히 안아줬다. 온 몸을 다해 말하는 것 같았다. 날 기억할 거라고. 그러니 너도 날 기억해달라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난 그동안 머릿속에서 삭제되었던 모든 기억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나의 미소, 나의 추억, 나의 존재.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외면했던 감정들이 휘몰아쳤지만 날 쓰러트리진 못 했다. 나에게 기억되고 싶었던 이 남자만이 고요히 남아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는 나로 차있었다. 어렴풋이 미소 짓자 그도 따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느 평범한 오후처럼 평화로웠고 잠잠했다. 이따금씩 거센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지만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오래 힘을 쓰진 못했다.

 더 이상 시간이 궁금하지 않았다. 때는 도래했고, 그는 내 곁에 있었다. 그저 내가 할 말은,

 “사랑해.”

 완벽했다.

 

 

 

fin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