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 景

Blue 2009. 11. 7. 05:36
日전승기념식장 ‘쾅’
軍요인들에 치명상
몇시간뒤 호외로 알려
《“폭탄현행범인은 조선인 윤봉길(25)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범인의 근본은 아직 판명되지 안엇스나 ○○○○(상해정부)의 일파라고도 한다. (…) 군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백천(白川) 군사령관은 좌안(左顔), 대퇴부 등 전신 수개처에 파편을 바덧는대 모다 2주간 내지 5, 6주간에 전쾌할 정도이다….

―동아일보 1932년 4월 29일 2차 호외》


 중국 칭다오 체재 시절의 윤봉길.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당일(1932년 4월 29일) 윤봉길과 함께 아침을 먹은 사람은 김구였다. 김구는 당시 윤봉길이 논밭으로 힘든 일을 하러 가려고 농부가 자던 입에 일부러 밥을 넣듯이 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백범일지’는 계속된다.

“윤 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줬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 군이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윤봉길의 폭탄은 일왕 생일과 전승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같은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거사가 실패로 끝난 데 대한 아쉬움을 일시에 씻어주는 쾌거였다. 불과 몇 달 전인 1월 8일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던진 폭탄이 불발되자 중국 언론들은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不幸不中·불행부중)’고 썼다.

윤 의사의 거사 소식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동아일보 호외로 국내에 전해졌다. 첫 번째 호외에서는 거사자가 ‘조선인’, 부상자는 ‘시라카와 대장 및 시게미쓰 공사’라고만 했으나 두 번째 호외에서는 ‘윤봉길 이십오세’, ‘시라카와 안면 중상, 시게미쓰 오른쪽 다리 중상, 노무라 사령관 실명 염려…’라고 정확히 보도했다.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의 전신)가 이날 석간에 ‘범인 같은 자’라고만 썼고 다른 신문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 거사는 조선인의 항일투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세계인에게 각인시켰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평했다. 이후 중국정부는 임시정부를 동맹국 정부로 대우했고 조선의 청년들이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연대투쟁도 본격화했다.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 20일, 동아일보는 “윤봉길은 17일 저녁때 대판(大阪·오사카) 위수구금소에서 금택(金澤·가네자와)으로 호송되어 19일 아침 7시 40분에 금택형무서에서 총살로 사형을 집행하.다”고 전했다. 광복 후 윤봉길의 유해는 가네자와 쓰레기소각장에서 발굴돼 1946년 6월 30일 백범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김진경 기자

입력 2009-11-07 03:00:00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