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역사

박충권 목사 2015. 2. 7.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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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舊約 中間史 要約


- 中間期의 歷史的 背景-















제 1장 남 왕국과 북 왕국의 멸망의 배경


1. 북 왕국의 멸망과 그 배경


주전 745년경 스가랴(Zechariah)왕이 죽은 후에 약 25년간 이스라엘은 마지막으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때 앗수르 왕은 티글랏빌레셋 3세(B.C. 745-727)였다. 그는 앗수르를 흥기시켰고 세력을 키워서 오리엔트 세계의 정복에 발돋움을 할 때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때가 바로 혼란기요 암흑시대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왕위가 다섯 번이나 교체되었는데 세 왕이 살해되었다. 앗수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사마리아가 포위 된지 3년 만에 멸망하였으며 앗수르왕 사르곤은 그의 비문에서 자기가 즉위한 초기에 사마리아 도성을 정복하고 50대의 전차와 97290 명의 포로들을 끌어왔다고 하였다. 사마리라 도성은 B.C. 722년 함락되어 북이스라엘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북쪽에는 남은 백성들과 타민족의 혼혈로 이루어진 사마리아인들이 신약시대까지 존재하였으며 오늘날도 아주 소수로서 모세오경만 인정하는 작은 부족이 팔레스타인에 존재하고 있다.


2. 남 왕국의 멸망과 그 배경


남쪽의 유다 왕국은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므낫세(B.C. 687-642)가 왕이 되면서 정치, 종교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어서 사회적으로 우상숭배가 만연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친앗시리아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50여 년간 유다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므낫세 이후 그의 아들 아몬이 2년간 통치하다가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요시야(B.C 640-609)가 3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요시야는 각 방면에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유다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특히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율법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며 종교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대와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고 죽고 말았다. 요시야 사후 여호아하스(609), 여호야김(609-598/7)이 이어서 왕이 되었으며 599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에 침략해 왔으며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598-597 3개월간)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즉각 항복하였다. 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많은 사람들(귀족과 사회 지도층)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때 예언자 에스겔도 포로가 되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B.C. 597-587)를 왕으로 세웠으나 그는 무능한 가운데 친 이집트파에 밀려 반 바벨론 정책을 취하였으며 이에 시드기야는 B.C. 589년 바벨론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벨론의 공격에 패주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의 목전에서 아들들의 죽임을 목격했고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에 압송ㄹ 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립나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제 2장 바벨론 포로기의 유다


B.C. 587년 예루살렘은 멸망하여 나라도 없어지고 국가의 제의, 제의적 공동체는 완벽하게 훼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흩어진 가운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회당(synagogue)을 중심으로 유대교(Judaism)를 탄생시켰다. 한 편 사마리아 지역은 앗시리아 왕들이 강제로 끌어다가 정착시킨 이민족들과 혼합되어 그 순수성을 상실하였다.


1) 587년 이후(587-539) 유대인들의 상황


B.C. 587년의 참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바벨론 군대는 유대를 초토화시켰으며 남은 사람들은 전투와 굶주림, 질병으로 사망하여 중간시대에는 인구 밀도가 희박했다고 한다. 한편 바벨론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의 정치, 종교, 정신적 지도층으로 이들은 닙푸르(Nippur) 주변에 정착하여 제한적인 자유를 누렸다. 따라서 그들의 가정생활과 지파별로 이루어진 집단 거주로 그들의 본래적인 사회 구조에 따라서 그대로 유지될 수가 있었다.


2) 포로기의 공동체 운동


바벨론 포로기 중에는 유대 공동체는 성소 대신 종교학교인 회당을 만들어 예배 모임을 가졌으며, 안식일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바벨론인들 사이에서 그들과 반대로 할례가 강조 되었다. 포로기에 야웨 신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이방 민족들이 야웨 신앙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바벨론 유배자들은 비록 숫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향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재건하기 위한 추진력을 기르며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할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바벨론 제국은 그 군주체제가 몰락하는 가운데 고레스(Cyrus)에게 패망하였고 유대인들은 그를 해방자로 맞이하게 되었다.




제 3장 페르시아 통치 기간의 유다


1) 유대인의 귀환


B.C. 539년 근동 아시아의 패권은 바벨론 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다.


고레스는 바벨론 왕들과 달리 제국 내의 민족들에게 유화, 관용 정책을 실시하여 그 덕분에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B.C. 537년 제 1차 귀환이 있었다. (42,000명) 그러나 바벨론에는 귀환을 포기한 유대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라 부른다.


고레스의 관용 정책은 포로 시대 이후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해주었다.


드디어 귀환과 더불어 왕족 세스밧사르에 의해 성전 건립을 위해서 금전과 헌물이 봉헌 되었으며 바벨론의 디아스포라들도 헌금을 하였다.


2. 성전 건축과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B.C. 522년까지 유대 총인구는 20,00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며 초기 팔레스타인은 거의 폐허 그대로였다. 여기에 새로 귀환한 자들은 고난과 궁핍의 생활이었고 인근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의 영토까지도 자신들의 영토로 간주하며 귀환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바벨론에게 귀환 후 18년이 지난 때에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백성들을 지도하고 독려하여 중단했던 성전 건축을 착수하여 B.C. 513년 4월 성전은 완공 되었고 성대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슥 6:13-18)


3. 에스라와 느헤미야


포로 귀환 후 에스라는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 생활을 재조직하고 개혁하였으며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정치적 지위를ㄹ 확고히 하고 행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B.C. 444년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호위대의 보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 후 성벽 보수 공사를 52일 만에 끝내고 많은 유대인들을 자유롭게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켰다. 느헤미야는 종교적인 면에서 성전에 십일조를 내게 했으며 서민들이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일반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하게 했으며 그 자신 총독으로서 어떠한 사례금도 받지 않았다.


한편 에스라는 율법의 사본과 아울러 그 율법을 시행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그에게 허용한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는 유대 공동체의 종교 개혁에 힘썼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율법 책을 낭독하였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결혼을 금지 시켰으며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한 경우에는 이혼 하도록 하였다. 이에 토착민들은 자신의 딸들이 이혼당하고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부정한자로 정죄 된 데에 격분하여, 에스라의 이러한 조치는 중대한 소요를 일으켰다. 결국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궁중에 소환되어 문책을 받고 그곳에서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하였다. 에스라 이후 총독으로 임명 되었던 바고아스(Bagoas)는


B.C. 337년에 아닥사스다 3세를 독살하고 2년 후 그는 왕세자 오아르세스(Oarses)를 암살하고 다리오 3세(B.C. 335-331)를 왕 위에 앉혔다. 이러한 때 바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여 헬레니즘(Hellenism)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다.




제 4장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 아프리카, 페르시아와 인더스강 건너까지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33세에 병사하였지만 오리엔트 세계는 헬라 문화의 영향권 하에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웠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강력한 그리이스 군대에 굴복하고 재빠르게 그들의 문화를 수용한 가운데 페르시아 시대에 누리던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였으며 이제 중근동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리이스어를 이해하고 사용하게 되었으며 헬레니즘 문화가 중근동 세계를 지배하였다.


1. 프톨레미 치하의 유다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사령관들의 세력 다툼으로 인하여 알렉산더 제국은 붕괴 되고 3대 강국이 출현하였다. 그것은 B.C. 323년부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던 프톨레미 왕국과 B.C. 311년부터 바벨론,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를 차지했던 셀류커스 왕국이고 유럽에 있던 안티고니덴 왕국이었다.


한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 치하에서 가혹한 조세 부담에 시달렸으며, 그 동안에 이집트에는 유대인 거류민이 급속히 증가한 가운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중근동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유대를 떠난 재외 유대인의 숫자가 본토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본토 유대인 외에 다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이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의 각오 끝에 완성된 그리스어 번역 성경이 바로 70인경(Septuagint. LXX)이다.


2. 셀류커스 치하의 유다


B.C. 198년 안티오쿠스의 군대는 요단강 부근 파니움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셀류커스 제국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셀류커스 왕조도 변화하여 안티오쿠스 3세의 뒤를 이어 셀류커스 4세(187-175), 이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175-163)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부터 유대와 예루살렘에는 결정적인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B.C. 167년 시리아 (셀류커스 왕국)의 아폴로니우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유린되었다.


마침내 예루살렘은 그리스의 도시처럼 폴리스화 되었고, 배교자 메넬라오스에 의해 우상 숭배가 실시되었다. 유대인들은 금기인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우상 신상(제우스)이 세워졌고 가증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다. 이에 신앙에 충실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고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제 5장 마카비 독립 전쟁과 하스몬 왕국


1. 마카비 전쟁


시리아 군대의 유대 장악으로 반 헬라주의의 경건한 유대인들이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스에 의해 무장 봉기가 시작 되었으며 그의 사후 그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에 의해 주도 되어 마카비의 군대는 시리아 군대와 맞서 싸움에서 연정 연승을 거두어 드디어 164년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정화하였다.(B.C. 164년 12월)


B.C. 162 년 친 헬라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시리아 군대가 재침하여 유다는 160 년 전투 중 사망하였으며 그의 동생 요나단(160-142)이 독립 운동을 지휘하였다. 요나단은 시리아 군대와의 전면전 보다 시리아에서 계속 되는 왕위 쟁탈을 교묘히 외교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알키무스가 죽은 후 공석이 된 대제사장직을 차지하였다.


B.C. 143년 요나단이 시리아의 음모로 살해되고 그의 동생 시몬이 유대의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이 되었다. 시몬은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142), 대제사장과 유대의 사령관, 유대인들의 지도자의 직위가 B.C. 140 년에 백성들에 의해 세습되도록 주어져 하스몬 왕조가 성립되었다.


2. 하스몬 왕조


B.C. 134 년 시몬이 그의 사위에 의해 살해된 후 통치권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에게 돌아갔다. 힐카느스는 용맹한 마타디아스의 손자답게 정복자의 생애를 살았다. 요한은 그의 사병이라 할 수 있는 용병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B.C. 128 년 사마리아인의 성지인 그리심 산을 빼앗고 에돔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 시켰으며 107 년 사마리아에 진군하여 헬라화 된 도시를 파괴하고 점령하였다.


힐카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잔인성과 이기심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공개적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B.C. 103년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은 후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죽은 왕의 동생들을 석방하고 제일 큰형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고 율법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인 그와 결혼하였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알렉산더 얀네우스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이어 계속적으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다. 얀네우스는 죽기 전 그의 부인 살로메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녀는 9년 동안 여왕으로 통치하면서 대제사장직을 그의 아들 힐카누스 2세에게 맡겼다. 살로메가 죽은 후 왕위는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으나 아리스토불루스가 우세한 가운데 이두메의 총독 안티파텔이 힐카누스 편을 들어 다마스커스왕 아레타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왔다. 따라서 힐카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를 중재자로 불러들였다. B.C. 63 년 폼페이우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힐카누스의 추종 하에 정치적인 권력은 로마에 이양 되었고 힐카누스는 종교 면에서만 대제사장이 되었다. 유대는 완전히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제 6장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


-폼페이우스 집정부터 바코흐바 전쟁까지-


폼페이우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된 후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아들들은 로마로 압송되고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의 직분을 얻었다.


B.C. 57년 로마 총독 가비니우스에 의해 팔레스타인은 5개 행정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되고 줄리어스 시저가 집권하자 힐카누스와 안티파텔은 시저에게 가담하였고, 이집트에 원군을 보내어 시저의 환심을 샀다.


시저는 유대인들을 로마와 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안티파텔의 세력을 강화 시키려고 했던 것같다. 시저가 죽은 후 안티파텔은 독살되었고 안티파텔 사후 그의 아들 헤롯이 그 지배를 세습하였다. (유대, 갈리리) 로마에서는 시저가 죽은 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력 다툼을 하다가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서 패배하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유대 통치를 승인 받았으며 그의 사후 팔레스타인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나 유대는 몇 년 못가서 아켈라오가 추방되고 총독이 직접 다스렸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서 B.C. 4 년부터 A.D. 39 년까지 통치한 인물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여우(fox)라 불렀다.


빌립은 동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34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사후 대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가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고 (A.D.37) 2년 후에는 갈리리까지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A.D. 44년 충으로 죽었으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한주로 변경되어 총독들이 다스렸다.


A.D. 66 년 총독 플로루스는 성전 금고를 강탈하였으며 유대인들의 저항과 비난을 받았다. 이에 플로루스는 군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약탈하는 것을 허용하여 로마 군대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마침내 예루살렘은 과격파 유대주의 폭도들(열심당)에게 장약되었다. 따라서 로마황제에게 봉헌하던 제물이 중지 되고 안토니 성채가 점령되었다. 이에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가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 하였으며 예루살렘은 포위 되었고 주민들의 항거는 47일간 계속 되었다. 당시 요세푸스는 동료들의 자결 주장을 거절하고 베스파시안에게 항복하여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베스파시안은 그를 살려주었고 그의 예언은 우연히 적중 되어 그는 후에 역사가로 살아남아 유대전쟁사와 고대지를 남겼다.


A.D. 70년 예루살렘은 티투스(Titus)에 의해 함락되고 성은 철저하게 파괴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A.D. 73년 소수의 무리가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자결하였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회당 예배에서 성전 의식의 단편들이 전승되었다. 그러나 회당에는 로마로부터 성전세라는 명목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A.D. 132년 황제가 예루살렘을 식민지화 한다는 포고령을 내리자 바 코흐바(별의 아들)라는 별명을 지닌 시몬의 주동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투쟁도 헛되이 실패하고 황제(하드리안)의 계획은 그대로 관철되어 예루살렘은 식민도시가 세워져 앨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불리게 되었다.




제 7장 바리새파


-다른 당파와 연관하여-


신약 시대와 중간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본래 종파의 성립은 셀류커스 왕의 헬라화 정책 시도 및 하스몬 왕가의 종교 정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예루살렘 상전이 붕괴된 이후 유대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존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Pharisee)란 명칭의 어원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들(the separated one)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구별된 자로 이스라엘의 참된 공동체 성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에세네파(Essenes)의 기원은 바리새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스몬 왕조 초기에 율법에 엄격했던 핫시딤들은 율법에 대하여 온전한 순종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사해 근처 광야로 물러가 공동생활을 하였다.


바리새파는 예정론을 주장하였으며 이 교리가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합치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인간 각자의 자유에 따라 자신의 인생과 역사가 좌우 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좌우 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바리새파는 영혼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이를 부정했다. 바리새주의는 종교적 성향이 너무 강해서 자기의적 형식주의로 전락되기도 하였다.


A.D. 70 년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된 후에 바리새인들만이 유대 사회에서 유대 공동체 주민 생활을 재건시키는 과업을 수행한 유일한 당파였으며 유대주의의 사상적 배경에는 바리새주의가 존재 했었으며 그것이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존하게 되었다.



정리: 김문영


참고도서: 최광선, 신구약 중간사(서울:한국로고스연구원, 1990)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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