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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풍의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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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의글

2009. 5. 31.

모네풍의 수련


이십년 된 친구의 초청이 있어 동아쇼핑 십층 전시장으로 향했다. 친구의 친구인 화가가 개인작품전을 연다는 것이다. 이미 열흘 전에 해놓은 약속이었다. 그림에 관해선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할 전시장 상식조차 없어 망설여지긴 했지만 친구의 얼굴을 본다는 기쁨이 먼저여서 퇴근시간을 기다려 바쁜 걸음을 놓았다. 이십년. 그 세월이라면 한마디의 말에도 어떤 메시지가 던져지기에, 충분한 친밀감이 형성돼 있다.


친구의 또다른 친구들도 여럿 전시장에 올것이라 해서 그들에게도 반가움의 표시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을 준비할까 … 아직 자필 수필집을 전하지 않은 두 친구에겐 그것을 주면 될 터이지만 한 친구에겐 무엇을 줄까 망설이다 약전골목으로 향하였다. 아직 약령시가 열리고 있고 약령시 포도(鋪道)의 초입에 차일을 치고 약초 씨를 나눠주던 곳이 있음이 상기된 것이다.

"어제도 한 봉지 얻어갔는데 오늘 한 봉지 더 얻을 수 있을까요 ? "

"물론입니다. 지금 심어도 됩니다."

지금 심어도 된다며 건네주는 산약의 씨앗은 여린 콩나물만큼 이미 싹이 나 있었다.

'그래 씨앗은 희망이지.' 항상 느껴온 감상이 몇 알 되지 않는 씨앗이라고 들지 않을 리 없다.


전시장은 아직 개관식을 하지 않은 채 한산한 모습이었다.

"시간에 꼭 맞춰 오는군요."

"그럼요. 시간 하나만큼은 … " 하며 손으로 두부를 자르는 흉내를 내었다.

"칼."

"하하. 그럼요 칼이지요."

친구가 소개시켜 주는 화가는 특이한 이름이라 오랫도록 기억할 수 있으리라 하는 자신감이 일었다. 서양화가 구두리(具斗理)여사는 영덕 출신으로 아마 유화를 주로 하는 듯 싶다.

"작품부터 감상하고 오세요." 친구가 떠다미는 바람에 작품들을 우선 둘러 볼 수밖에 …

전부터 느껴온 바이지만 유화는 그 강렬한 질감때문에 항상 거부감이 일었다. 그래서 대충 보는둥 마는둥 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오늘도 그런 생각으로 어느 한 면을 두리뭉실 응시하던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 "

인연이라면 묘한 인연이기도 할 그림. 한쪽 벽을 서너 점의 액자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수련(睡蓮)이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바로 '모네풍의 수련'이었다.

"보세요. 화가에게 무엇 하나 물어 봐 주세요. 저 수련의 그림을 '모네풍의 수련'이라고 불러도 될지 … "

"그럼 직접 물어 보세요." 친구는 다시 화가에게 등을 떠다밀었다.

몹씨 난처하였다. 용기를 내어 구 화백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저 수련 그림을 모네풍의 수련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잘 몰라서 물어보는 말입니다만 … "

구 화백은 싱긋이 웃었다. 그리고 양념을 더한 해설을 해 주었다.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그리고 전 모네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 "

수련 그림 몇 점이 공간을 차지하게 된 이유를 덧붙여 해설해 주었다.


언제부터이던가 유화를 보는 나의 눈은 이런 것에 고정돼 있다. 유화를 보려면 원시(遠視)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멀리 있는 물건이 잘 보인다는 원시(遠視). 이제 나이도 있으니 그러려니와 특히 유화를 볼 때는 그렇다.

강렬한 질감을 몹씨 싫어하는 내 성격 탓이리라. 유화는 가까이서 보면 그 강렬한 흡인력이 피부로 느껴지던 터여서 되도록이면 멀리서 보고 싶어하던 버릇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 있다. 그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수련에서 잔잔한 감흥만 받아안을 뿐 그 세계에 빨려들지 않게 자신을 감싸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눈가가 서늘해짐은 지난 해 가을에 발간한 수필집 때문이었으리라.

수필집은 서울에 살고 계시는 누님과 함께 쓴 것인데 그 수필집의 목차에 배경그림으로 넣은 것이 바로 모네의 수련이었다.

"수련의 그림을 보니 화가에게 수필집 한권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그렇지요. 그렇게 하세요."

"난 유화를 보면 또 불상이 떠오른답니다."

친구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 같아서 말을 아꼈지만 정말 부처님이 떠오르는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부처님도 가까이서 보면 그 잔잔한 미소에 흡인되는 것 같아 가까이 하기를 무척 꺼려해 왔던 지난 날들이 되돌아 보였다.

"아. 그래서 나는 속인일 수 밖에 없구나."

그런 감상을 뒤로 남기며 행사가 끝난 전시장을 나왔다. 이미 밖엔 회색 톤의 얇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간간이 내리던 비가 또다시 가냘프게 내리고 있다.


문득 수륜(水輪)을 펼치고 싶었다. 수미산(須彌山)을 받치고 있는 삼륜중의 하나. 수륜은 아마 광음천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모은다고 했지. 그래 수륜을 크게 펼치자. 크게 펼쳐친 동공(瞳孔)으로 야음이 깊숙이 침입하고 있었다.

"어디 노래방이라도 갔으면 … "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과 노래방을 찾아가며 약령시서 얻어온 씨앗봉지를 친구의 친구에게 쥐어 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꼭 일 년이 되는군요."

지난 해 만났을 때 약령시가 열리고 있었음을 그도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인연 아님이 없다지만 어쩐지 멀어지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합니다."

바로 불상을 두고 말함이었다. 항상 부처님과 가까이 하고 싶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어떤 중추(中樞)의 배신이 작용하였음일까.

친구가 딴 곳을 응시하는 순간, 수미산을 향해 합장하며 허리를 굽혔다.

"이 지극한 자멸(自滅)을 용서하소서 … " <200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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