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두리에서

일상의 소소한 얘기들

서울 서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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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의글

2009. 5. 31.

서울 서울 서울

연일 내리 쬐는 불볕더위로 30도를 웃도는 기온은 가위 찜통더위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열기를 머금은 아스팔트가 걸음을 내딛는 발목을 후끈거리게 한다.

이곳 서울의 도시 한복판이 밤에도 내리지 않는 기온으로 열대야현상까지 불러오는 것은 고층건물의 콘크리트 벽에서 낮동안 머금은 열이 잘 빠져나가지 못한 때문이라는 보도다.

나는 항상 탈서울을 꿈꾼다.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한적하고 외진 곳으로 옮겨 살리라 마음을 먹고 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무더위에 찌든 중에도 엊그제 받은 막내의 일본국비장학생 선발시험 결과가 '합격'이라는 낭보는 시원한 한줄기 소낙비와도 같았다. 막내는 4월에 시험을 보았는데 전국 각 대학교에서 일본어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한 명씩의 학생을 뽑아 치렀기에 합격여부를 기다린 몇 달간의 초조함이 스르르 풀리며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던지 모를 일이었다.

한여름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울특별시립박물관까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 때처럼 내가 한가롭게 걸어 본 적이 없었음이 새삼 생각되었다. 무더위를 피해 피서지로 떠난 차량들 덕분에 한결 여유로워진 거리 풍경이다. 평소 소음이 난무하던 거리모습과는 달리 탁 트인 도로위로 거북이 걸음 같던 차들의 속도도 오늘은 '휭휭 … ' 빠르기만 하다.

막내의 일로 마음이 들떠서인지 만만찮은 더위도 별로, 체감하지 못하고 걷다보니 옛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린 시절부터 여태까지 나는 무척이나 바쁜 걸음으로 살아왔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 마냥 바쁘게 살아 왔지만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둘은 결혼하여 출가시킨 이 시점에선 그리 바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느긋한 마음으로 박물관 내 「서울 600년 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성판윤전'을 보러 문을 들어서니 반가운 고서연구회원들이 반겨 준다. 나는 이 모임만큼 자랑하고 싶은 게 없다.

회원 거개擧皆가 학계의 박사님들이며 교수님들, 훌륭한 출판인들로서 우리의 옛 서책을 아끼고 사랑하여 수집하고 연구하는 분들이다. 감히 내가 끼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만 그분들의 발뒤꿈치만 보고 머리 조아리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참여하고 있다.

한성판윤은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조선시대의 직위다.

서울특별시립박물관에서는 2000년 개관을 위한 준비작업의 하나로 한성판윤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 수도로서의 한성부의 기능과 역사, 그리고 수준 높은 서울의 문화를 재조명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었다.

회원 중에는 숙종 재위기간(1675∼1720년)동안 다섯 번의 판윤을 지낸 강현과, 정조 7년(1783년)에 판윤을 지낸 표암 강세황, 그 후 정경을 지낸 또 한 분의 선비를 배출한 가문의 직계자손이 있다. 강경훈이라는 분이다.

표암선생은 시문에도 탁월하였고 특히 미술사에 손꼽히는 분이었다고 한다. 오사모烏紗帽에 옥색도포 차림의 전신부좌상(보물 590-1호)자화상도 이번 전시회장에서 볼 수 있었다. 그는 풍속화가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했다.

강경훈님이 소장하고 있는 조상들의 인장과 백여점 소장하고 있는 간찰簡札중에 여러 점이 전시되어 인상깊었다. 강선생님과 함께 회 활동을 한다는 일만으로도 살맛 나게 한 날이기도 했다.

서울 정도 600년 동안 태조 4년(1395년)에 취임한 성석린成石璘을 필두로 지금의 시장은 1442번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판윤이 왜 자주 교체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방영되고 있는 역사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왕권쟁탈이 분분했던 불행한 역사의 흐름과 이조 후반기의 일제침략 등 파란많은 정치사와 무관하지 않다 생각되어진다. 고종 11년(1874년)에는 1년 사이 열 번이나 바뀌었고, 철종때 김좌근, 고종때 이기세와 한성근, 임응준은 가장 단명하여 1일 시장으로 끝난 사례도 있었다.

조선왕조는 무엇때문에 이곳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터전을 닦았을까 ! 빼어난 자연환경 조건이 왕도로서 적임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서울지방의 자연지리적인 조건을 놓고 극찬한 선현들이 있고 보면 수백 년이 지난 후 조선초기에 와서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은 이미 형성되어 있지 않았나 싶었다. 왕도는 산하 형세도 중요시하나 국토의 중심지역이어야 하고 국방상 방어조건이 좋아야 하며 교통 등 모든 조건이 합당한 곳이어야 한다.

서울의 옛 모습을 그린 것은 현재 확인된 것이 95점인데, 80점 이상이 18세기 실경산수화가 겸제 정선의 작품이다. 요즘의 화학물감이 나오기 전이라 천연물감인데도 어쩌면 색상이 그리 곱고 선명한지 놀라웠다. 중국에서 온 당채唐彩였지만 몇 백년을 견뎌온 종이며 색채는 자연적인 재료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 매우 포근했다.

19세기 중반에 유숙이 그린 세검정도洗劍亭圖를 보매 정자 왼쪽 언덕엔 송림이 우거지고 장마로 인해 불어난 계곡 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 그리운 옛날이여.

저 맑은 물이며 공기를 이 찌든 서울하늘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 백년 전 영국 왕실 비숍 여사가 이 나라의 경치에 반하여, 네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여 남긴 글에도 금수강산을 노래하고 있었건만, 어쩌다 이토록 비대해진 서울의 모습은 찌든 공기로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공기뿐이겠는가 ? 모두가 닫힌 마음으로 무장한 내부에는 부정부패, 각자의 논리고집 등으로 꽉 차있다.

돈을 젓가락으로 집어주었던 과거 우리네 선비들의 고매한 품격이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온고지신溫故之新이란 철학으로 세종로 1번지에 보존되어 온 것은 아닐까 ?

인사만사人事萬事는 결코 정치사의 철학만은 아니리라. 모두가 "내 탓이요"라고 말할 줄 아는 책임자세가 이 사회의 패러다임이 될 때, 정직히 강물처럼 흐를 때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가정도 희망도 생기는 게 아닐까.

그 날 조순 서울시장이 한 무리의 인사들을 거느리고 전시회 관람을 왔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벼슬자리가 얼마나 선망의 대상인가 하는 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약간의 감동마저 일어나는 선조들의 발자취를 보고 나니 세월은 지나고 보면 쥐고 있는 권세도, 손에 잡힐 듯한 욕망도 한낱 물거품 같은 것을 … 권세가 있든 없든 종국엔 기다리는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허무한 미물이 아닌가 하는 비애가 몰려왔다. 나는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다.

버리자, 버리자. 한 뼘도 못미치는 목에 마치 깁스라도 하듯 꼿꼿했던 알량한 자존심도 버리자. 누가 먼저 달려가 많은 부를 거머쥘까 ! 내가라도 하는 듯한 그 치사하고 무모한 경쟁심도 버리기로 하자.

관람이 끝난 후 일행들에게 윤형두 회장님이 사 주신 시원한 맥주를 두어 잔 들이키고 나니 알딸딸한 기분 속에 버릴 것과 취할 것이 무엇인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자.

선비를 조상으로 두어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으리라는 알량한 우월감마저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다만 겸허하게 살리라 다짐해 본 날이다.

의미 있는 하루. 많이 느끼고 기분 좋은 토요일 오후.

연정이라도 일듯한 황홀함이여. 결코 맥주 한잔의 기분, 취기醉氣만은 아닐 터이다. <1998. 5. 고서연구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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