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전 이야기/주역 이야기

수미니 2007. 11. 19. 18:40

 

 

 

 

 1. 주역은 본래 점치는 서적이었다.(1)

 

 

여기서 '점치는 책'이라고 말한 주역은 역경易經 혹은 역경 가운데 역전易傳과 역학易學을 포함하지 않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송宋나라의 위대한 철학자 주희朱熹 역시 역학의 전문가인데, 주희 역시  “역은 본래 점치는 책이다.(朱子語類, 제67권: 易本是卜筮之書.)”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 명제는 역경이 철학 서적이 아니라, 옛날 주周나라 사람들이 점칠 때 사용했던 책이며, 여기에 철학적 해석을 더한 것이 공자역孔子易(공자의 주역에 대한 해석)의 대표적 저작인 역전易傳의 임무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희의 이 주장은 매우 식견이 있는 것으로, 한대漢代 이래의 역학자들이 주역을 사물의 이치(理)를 궁구하고 본성(性)을 완성(窮理盡性)하는 책으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주역이 점치는 책인 까닭에 대해 주희는 좌전左傳(공자가 지었다는 노魯나라의 역사서 춘추에 주석을 단 책, 좌구명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하나 불분명함)과 국어國語(좌구명이 춘추시대 각국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는 책, 이 역시 작자가 불분명함) 그리고 주례周禮(주나라의 정치 사회 제도를 기록한 책, 고대사회의 각종 사회시스템은 예禮라고 칭해졌음) 등, 이와 관련된 선진 시기의 문헌 기록(이 책들 속에는 주역으로 점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에 의거하여 논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희의 주장은 반박하기가 어렵다.

 

고대문헌과 근대에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들이 제공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상고 시대 사람들의 점치는 방법에는 대체로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그 두가지는 바로 ‘복卜’과 ‘점占’을 말하는 것이다.   복卜은 거북점(龜卜)을 말하는 것인데, 거북의 배쪽 껍질이나 짐승의 뼈(견갑골)에 구멍을 뚫고, 이를 불에 구울 때 나타난 균열의 형태에 의거해서, 일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길흉을 판단하는 말을 거북껍질이나 뼈(甲骨) 위에 새긴 것이 바로  ‘복사卜辭’이다.(카피 말하는거 아니다. ㅎㅎㅎ) 이와 같은 복법은 은대殷代에 이미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게 거북이 배껍질을 불에 그을린 데다 글을 쓴거다....  어찌보면 문명창조 행위, 어찌보면 원시인들의 바보같은 놀이..... 이렇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보기 나름!  말 붙이기 나름!

 

 

 

주대周代에 이르러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거북점 이외에도 시초蓍草 숫자의 변화 과정에 의거하여 얻어진 괘상卦象으로 거북 등의 균열을 대체하여 길흉을 추측하는 방식이 더해졌다.(시초蓍草는 주역으로 점을 칠 때 사용했던 풀의 이름이다. 시蓍라는 말은 계사전 이외에도 시경詩經의 조풍曹風 등에서도 보이는데, 시초 줄기를 이용하여 점치는 방식을  시법蓍法이라고 한다. 훗날에는 대나무 가지로 대체되어 사용되었고 이를 서죽筮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점치는 방법을 “서筮”, 혹은 “점서占筮”라고 부른다.

 

시초점(筮法)을 통해서 점치는 일의 길흉을 판단하는 말을 “서사筮辭”라고 부른다.  주례, 춘관의 기록에서는 주대에 유행한 서법筮法은 “역易”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서수蓍數와 괘상이 변화한다는 의미(바꿀 易)에서 취한 것이며, 여기에는 주역과 함께 연산連山, 그리고 귀장歸藏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주역 한 가지 뿐이며, 그 괘상과 서사를 편집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주역이라는 책이다. 주역은 서주西周(주나라는 西周와 東周로 나뉘는데, 서주는 서북의 융족이 침입해오자 동방으로 도망하게 되고 이를 동주라고 한다. 또한 동주 시기에는 지방 제후들에 대한 통제가 약해져 독립하게 되었는데, 역사에서는 춘추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지방의 각 제후국들은 형식적으로는 주나라 왕조를 떠받들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부국강병 정책을 펼쳐 약한 국가를 집어삼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시기에 저작되었으며, 이 책을 편찬한 목적은 점칠 때 그 내용을 찾아보기 편하게 하고 길흉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전해지는 주역의 내용은 64종의 괘상卦象과 괘사卦辭, 그리고 효사爻辭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괘에는 여섯 획의 효爻가 있으며, 이는 기우奇偶 혹은 음양효陰陽爻, 즉 ―과 -- ­­으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로 나타낼 때에는 양효陽爻는 구九라 부르고, 음효陰爻는 육六이라고 부른다. 또한 괘상에 붙인 문장을 괘사라고 부르고, 각 효상에 붙인 문장을 효사라고 부르는데, 괘사는 모두 64조항이 있고, 효사는 모두 384조항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괘상에 근거해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는 것일까? 춘추시대 이전의 점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좌전의 기록자료를 살펴보면, 서법筮法을 통해서 한 가지 괘상을 얻은 후에는 곧바로 주역 중에서 동일한 괘상을 찾아보고, 이 괘상과 괘효사로 일의 길흉을 미루어 판단한다.

 

예를 들면 좌전 장공莊公 22년의 기록에서는 주사周史(周나라 관직 이름)가 주역으로 진후陳侯에게 점쳐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주사周史가 점쳐 얻은 것은 관괘觀卦의 괘상인데, 이것이 본괘本卦이며, 이 괘상 가운데 네 번째(아래에서부터 셈하여 네 번째를 말한다.  주역에서 각 효爻를 지칭할 때는 가장 아래에 있는 효를 초효初爻라 부르고, 두 번째 있는 爻를 이효二爻, 세 번째는 삼효三爻, 네 번째는 사효四爻, 다섯 번째는 오효五爻, 가장 위에 있는 爻를 상효上爻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점쳐서 나온 本卦의 卦象 가운데 네 번째 음효가 노음이기 때문에 양효로 변하여 之卦인 否卦가 된다는 것이다.) 자리에 있는 음효陰爻가 변하여 양효陽爻가 되면 비괘否卦가 되는데, 이것이 지괘之卦이다.(本卦는 점쳐서 나온 본래의 괘를 말한다. 그리고 본괘의 老陰을 양효로, 老陽을 음효로 변화시켜 완성된 괘상을 之卦라고 부른다.)  관괘觀卦에서 비괘否卦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곧 “관괘가 변해서 비괘가 되는 괘상을 얻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괘상을 얻은 이후에는 주역 경문에서 관괘觀卦의 괘상과 괘효사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효사에는 모두 여섯 조항이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이 경우에는 제사효第四爻가 변화했기 때문에 사효四爻의 효사를 찾아보아야한다. 훗날의 해석에 의하면 이 효爻의 효상은 설시?蓍(시초 줄기를 셈하는 것)하여 얻어낸 수數가 6이기 때문에 노음老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일 셈하여 얻어낸 수數가 9라면 그 효상은 노양이라고 부른다. 본괘에 노양이나 노음의 효상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그것과 상대되는 효상으로 변화한다. 효사를 찾아볼 때에는 주로 변화하는 효를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관괘觀卦에서는, 변하는 효爻, 즉 육사효六四爻 효사爻辭에서  “나라의 영광을 보고, 임금의 손님이 됨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於王.)”라고 말하였다.  주사周史는 이 효사를 근거로  “이것은 진陳나라를 이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였는데, 즉 진경중陳敬仲의 후대가 반드시 진陳나라를 부흥시킬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훗날  역전(계사전)에서 말하는 “역易은 지나간 일을 분명히 드러내고 다가올 일을 살핀다.(易彰往而察來)”라고 하는 미래를 점치는 방식이다.        

 

 

 

아래 원문은 좌전 장공 22년 조에 기록된 내용인데, 점치고 이를 해석하는 과정을 기록한 예이다.  바로 위 두 문단은 이 내용을 풀이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기록된 시기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 아무래도 전씨田氏가 강씨姜氏 네를 몰아내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위해 날조했거나, 아님 나라를 뺏은 후에 대국민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선전되던 내용을 기록되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점이 정확하면 ..... 점쟁이 떼돈 번다....... 옛날에는 역사날조가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시간 나심, 여기서 삼국지와 영웅 이야기 한번 읽어보시라..... 역사와 문화라는게 결코 순수한 사실과 현상만은 아니라는 것이 제 갠적인 생각이다......  이런 '니미럴! 뿡이다!'라고!

 

주사周史(주나라 관리) 한 넘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진후陳侯를 만났는데, 진후는 그 넘더러 시초점을 쳐보라고 그랬고, 그래서 얻은 괘가 관지비觀之否였다. 그러고는 이 넘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는 (주역에서 효사를 찾아보면) ‘나라의 영광을 보고, 임금의 손님이 됨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겁니다. 요거 아무래도 진을 이어서 나라를 세울 점괘 같은데요! 근데 그게....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동네(異國), 나라 세울 사람은 대장님이 아니라 자손들이구요....

 

왜 그러냐면요...... 빛(光)이라는게 멀리 비치는 거자나요.... 곤坤은 땅이구, 손巽은 바람이지요. 건乾은 하늘 아닙니까. 땅(土: 곤坤괘를 비유한다.)위에 있는게 바람에서 하늘로 변한건 산山입니다.(이것은 관觀괘의 상괘上卦인 손巽이 건乾으로 바뀌면서, 전체 괘가 비否괘로 변화한 것을 비유한다.) 산山의 재질(材)을 가지면서도 하늘 빛으로 멀리 비추어서, 땅위(土上)에 거처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영광을 보고, 임금의 손님이 됨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뜰에 가득히 예물을 모아놓고, 옥과 비단으로 치장해 놓은건 하늘과 땅의 옷갖 아름다운거를 다 갖추고 있는 거자나요.... 그렇기 때문에 '임금의 손님이 됨이 이롭다.(利用賓于王.)'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장관이 있는거 자나요... 그렇기 때문에 후손에 가서야 (나라를) 가진다는 거구요! 바람은 땅 위에서 불기 때문에 다른 동네(異國)라고 말하는 겁니다.

 

근데 다른 동네가 어디냐면.... 음 분명히 강姜씨 성姓을 가진 나라일겁니다. (왜냐구요?)  강姜은 대악大嶽(겁나 큰 산)의 후예거든요... 산악山嶽은 하늘(天)이랑 짝지울만 합니다. 근데 만물은 두가지가 모두 거대할 수 없으니까 진이 쇠망한 이후에야 이들이 창성할 겁니다!” 

마침내 진이 쇠약해질 무렵에 진환자陳桓子가 제齊나라(제齊나라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강태공姜太公에게 봉해준 지역이다. 훗날 전씨田氏가 권력을 찬탈하였다. 바로 진후陳侯의 후손이라고 한다.)에서 세력을 얻기 시작했고, 진이 멸망하였을 때, 제나라의 정권을 획득하였다.

 

(左傳, 莊公 22年:  周史有以周易見陳侯者, 陳侯使筮之, 遇觀之否.  曰:“是謂‘觀國之光, 利用賓于王.’ 此其代陳有國乎! 不在此, 其在異國; 非此其身, 在其子孫. 光, 遠而自他有耀者也. 坤, 土也; 巽, 風也; 乾, 天也. 風爲天於土上, 山也. 有山之材, 而照之以天光, 於是乎居土上, 故曰:‘觀國之光, 利用賓于王.’ 庭實旅百, 奉之以玉帛, 天地之美具焉, 故曰:‘利用賓于王.’ 猶有觀焉, 故曰其在後乎! 風行而著於土, 故曰其在異國乎! 若在異國, 必姜姓也. 姜, 大嶽之後也. 山嶽則配天. 物莫能兩大. 陳衰, 此其昌乎!” 及陳之初亡也, 陳桓子始大於齊, 其後亡也, 成子得政.)

 

 

 

이어서 점치는 방법이다. 심심하시면 잘 읽어보시고 따라해보시던가.... 근데 점칠때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야하고, 나름 깨끗하고 정돈된 장소에서 해야한다. 안그럼 점이 들어 맞을 수가 없다.........ㅋㅋㅋㅋ  이런게 바로 미리 빠져나갈 방법 다 만들어두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위협이다...... 맞으면 내가 신통! 안 맞으면 니가 잘못!  ..... 그래서 무당님들 지난 일은 잘 맞히시지만...... 앞으로 다가올 재난이나, 사업 등등은 글쎄! 하는거다. 글고 만약 무당님께서 틀린다면..... 그건 무당님 잘못이 아니라, 정성이 부족한 니 잘못이다. ㅎㅎㅎ 이렇게 되는 거다.

 

어떻게 시초 줄기의 수를 셈하여 괘상이 도출하는가에 대한 초기의 기록은 주역, 계사전의 대연지수장大衍之數章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대연지수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먼저 50줄기의 시초를 준비하며, 그 가운데 하나를 덜어내어 쓰지 않는데, 이렇게 하면 49줄기가 남는다. 다시 이 49줄기를 임의로 왼쪽과 오른쪽 두 무더기로 나누는데, 이것이 바로  “둘로 나눈다.(分二)”이며, 그 중에서 한 줄기를 뽑아내는 것이 “하나를 걸어둔다(掛一)” 이다. 나머지 시초 줄기를 네 개씩 한 조로 나누어서 셈하는데, 이것이 바로 “넷으로 나누어 셈한다.(四)”이며, 다시 나머지 시초 줄기(설사四 - 이 설사는 카타르시스 말하는 거 아니다....- 이후 남은 시초 줄기를 말한다.)를 합해서 한 무더기를 만들고 한쪽에 두는 것이 “나머지를 되돌린다.(歸奇)”이다. 이상의 과정이 일변一變이다.

 

이어서 한번 변하고 남은 시초 줄기를 다시 위에서 설명한 순서대로 두 무더기로 나누고(分二), 한 줄기를 뽑아내며(掛一), 네 개씩 한 묶음으로 나누어 셈하고(四), 나머지 시초 줄기를 한켠에 두고서(歸奇) 셈하는 것을 이변二變이라고 한다. 이어서 다시 위에서 기술한 과정대로 셈하는 것을 삼변三變이라고 한다. 삼변三變의 결과로 나오는 전체 수數는 네 가지만 가능한데, 바로 36, 32, 28, 24, 각각 4로 나누면 9, 8, 7, 6이 된다. 만일 나누어서 나온 수數가 9라면 노양老陽의 효상이 되고, 6이라면 노음老陰의 효상이 되며, 7이라면 소양少陽의 효상이 되고, 8이라면 소음少陰의 효상이 된다. 이와 같이 삼변三變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효상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팔변十八變을 거칠 때 하나의 괘卦, 여섯 획의 상象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십팔변하여 괘를 완성한다.(十有八變而成卦)”이다.

 

주역에서 음양효를 구九와 육六으로 부르는 것이나 좌전에서 서법筮法에 대해 해설하면서 본괘本卦와 지괘之卦로 나누는 것에 근거하면, 역전에서 제기한 설시설蓍說(蓍草 줄기를 셈하여 괘상을 뽑아낸다는 이론)은 대체로 믿을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설시설은 수학적 연역법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데, 숫자(數)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단순화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기술한 문헌들이 제공하는 역사적 자료들에 의하면 주역은 바로 주대周代 사람들이 점칠 때 사용했던 전적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역의 작자와 관련해서, 한대漢代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羲氏가 팔괘를 그리고 문왕文王이 이를 발전시켜 64괘와 괘효사를 지었다고 생각했고, 어떤 이들은 주공周公이 효사를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모두 전설이나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청대淸代의 학자 최술崔述이나 근대의 학자 고힐강顧剛 등은 이런 생각들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아래 그림은 삼획의 팔괘와 이를 중춥한 64괘의 괘상 및 이름이다.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간단하다면 간단한 조합이다.... 이걸 전설 속의 고대 제왕 복희씨랑 문황이 그었다 그러면 ㅋㅋㅋ 믿거나 말거나다. 개인적으로는 그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뭐하러?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전혀 고고학적 근거와는 상관없는 것이며, 갠적으로는 중국인 특유의 뻥들이라고 생각한다.

 

 

 

 용어, 인물 해설

 

 

............... 최술崔述(1740-1816): 최술은 청대의 경학자이다. 하북河北사람이며, 자는 무승武承, 호는 동벽東壁이다.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었으며, 14세에 이미 여러 가지 학술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의 학술은 거거考據에 주력하였지만 구설舊說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고, 분석이 정밀하였으며 경험론적 인식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유지기劉知幾의 영향을 받아 참위讖緯 등 미신적 서적들을 부정하여 근대 의고학풍疑古學風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저서로는 최동벽유서崔東壁遺書,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