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강좌

piglist 2017. 11. 13. 04:19


[92] 중앙박물관 석물의 비밀과 장물아비 와다 쓰네이치

명정승 이항복 살던 남산 아래 쌍회정
구한말 후손 이회영 형제, 독립운동 다짐한 곳
근대 학교와 공장도 이 정자에서 설립
친일파 이완용이 매입해 나라에 고가로 팔아치워
일제 강점기, 일본인 와다가 살면서 보물급 석물들 사들여 오사카로 팔아넘기기도
총독부 조선공진회, 야외 전시용으로 전국 석물들 가져다 경복궁에 전시
아직도 귀향 못하는 기구한 운명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서울 남산에는 쌍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백사 이항복이 지었다. 구한말 이유원이라는 후손이 정자를 두고 흥선대원군과 크게 다투고 이름을 홍엽정이라 바꿔버렸다. 그 정자에서 독립운동가인 아들 이석영, 회영 형제가 국가를 걱정하다가 만주로 떠났다. 그 자리에 민족 학교가 생기고 담배 회사가 생기고 양잠 회사가 생기더니 이완용이 헐값에 사서는 나라에 세 배로 팔아치웠다. 나라가 망하고 일본인 와다 쓰네이치가 정자 주인이 되었다. 그 무렵 경성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와다의 집에 아름다운 석물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자, 고향을 떠나 와다 따위 모리배를 거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물들 이야기다.

남산 쌍회정

조선 광해군 때 대동법 시행을 위해 선혜청을 만들었다. 선혜청 쌀 창고가 숭례문과 남대문 시장 사이 언덕에 있었다. 창고가 있다고 해서 주변을 창동이라고 했다. 지금 북창동, 남창동이 이 지역이다. 경치가 아름다워 역대 고관대작들 별장과 정자가 많았다. 선조 때 살았던 검소한 정승, 백사 이항복도 창동에 살았다. 집은 작았다. 대청마루는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였고 두 칸짜리 바깥채는 바닥에 종이도 바르지 않았다. 다만 정자 하나와 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완상했을 뿐이다. 그 후손이 7, 8대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어 집을 팔았다. 집을 산 이는 정자를 쌍회정(雙檜亭)이라 이름 지었다. 헌종, 철종, 고종 대에 영의정을 지낸 후손 이유원이 마침내 집터를 되찾았다.(이유원, 〈춘명일사〉)

흥법사 진공대사 석관(石棺).
흥법사 진공대사 석관(石棺).

이유원은 돈에 관심이 많았다. 매천 황현은 이유원을 일러 "자택이 있는 양주 가오실에서 서울까지 80리 왕래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닌" 사람이라고 했다. 회나무 한 그루가 죽고 없길래, 이유원은 한 그루를 가져와 심고서 쌍회정 낙성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그때 흥선대원군에게 현판을 부탁했는데, '雙檜亭'이라 일필휘지하고선 이리 말했다. "중국 주나라 때 재상 셋에 버금가는 나무로다!" 이유원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바깥에서는 흥선이 이렇게 떠들고 다니는 게 아닌가. "송나라 때 폭신 진회(秦檜)는 이름에 '檜'가 하나인데, 이유원은 회나무가 둘이니 그 해(害)가 크리라." 놀림당한 사실을 안 이유원은 이를 갈며 회나무를 베어버리고 단풍나무를 심었다. 정자 이름도 홍엽정(紅葉亭)이라고 바꿨다.(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이후 정자에서 벌어진 일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과정과 한 치 어긋남 없이 똑같다.

이완용이 팔아먹은 홍엽정

이유원이 죽고 양자 이석영이 재산을 물려받았다. 조상 이항복의 기개도 물려받았다. 동생 이회영도 그랬다. 1898년 9월 이회영은 이상설, 여준과 함께 홍엽정에 올라 국민 계몽과 정치가 규합, 그리고 확고한 정책 수립을 논의했다. 이상설은 훗날 간도로 가서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세웠고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다. 이듬해 5월 홍엽정에서 광성학교가 설립됐다. 교장 박기양, 교감 서상면, 교사는 신해영인데, 입학생이 폭주하자 곧바로 옆 동네로 이전했다.(황성신문 1899년 5월 3일) 그 자리에는 향연합자회사라는 담배회사가 설립됐다. 그해 11월 담배를 진상받은 고종이 말했다. '민간에 재력이 흥왕하면 국세가 자연히 부하리니 부디 권면하라.'(독립신문 1899년 11월 10일) 향연합자회사는 이듬해 3월 대한제국 인공 양잠합자회사를 만들었다. 사장은 김가진이고 평의장은 박기양, 간사는 서상면과 서병숙이었다. 계몽과 자강(自强) 정책 실천이 이 홍엽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다음 주인은 만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 이완용이다.

1908년 4월 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한인 언론 해조신문에 따르면 '총리대신 이완용씨가 홍엽정을 13만원에 정가하여 탁지대신에게 총리 관사로 사라 강청하니 탁대가 부득이하여 6만원에 낙가하여 결정하였다. 국고금은 이 총리의 사사 전대로 다 들어가리라더라.'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이완용이 정자를 산 돈이 13만냥이다. 1원은 5냥이 통상이다. 자그마치 다섯 배 폭리를 노리고, '총리 관사' 명목으로 팔아서 자기가 눌러앉겠다는 억지였다. 터무니없는 놀부 심보요 나라를 상대로 부동산 투기를 한 흔적이다. 2년 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넘겼다. 홍엽정 원주인 이석영과 동생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다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어 만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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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야외전시장이 있다. 원공국사승묘탑은 그 전시장에 있는 석물 중 하나다. 백사 이항복 집터에 살던 일제 강점기 일본인 와다 쓰네이치가 자기 집에 가져갔던 승탑이다. 함께 있는 석물들 모두 일제 때 고향을 떠난 보물들이다. /박종인 기자

이완용에 이어 홍엽정을 차지한 사람은 와다 쓰네이치(和田常市)라는 일본인이다. 와다가 누구인가. 총독부가 만든 '경성부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경성 거류민 가운데 선각자로 공을 세운 와다 쓰네이치가 이 정자와 부근 땅을 구입해 자택으로 삼았다.' 1912년 총독부가 작성한 토지대장에는 홍엽정이 있는 남미창정(南米倉町) 202번지 소유자가 와다로 적혀 있다. 1925년 조선상업은행 6대 주주로 적혀 있으니 대단한 부자였다(7대 주주는 조선 총독이었다). 백사 이항복의 집을 친일파에 이어 일본인이 차지한 것이다. 약종상, 무역상, 광산 개발까지 다방면에 사업을 확장했던 인물이었다.

그 많은 사업 속에서 그가 시종일관한 일이 있으니, 바로 조선 문화재 장물아비다. 그 장물을 그러모아 놓은 창고가 바로 홍엽정이 있는 자기 집이었다. 현주소는 남창동 202번지다. 일신교회가 들어서 있다.

장물아비 와다 쓰네이치

'원주에는 철불, 석불, 석탑이 흔해 빠지게 널려 있는 것이 경주도 놀라 맨발로 도망을 갈 정도입니다.'(1914년 조선고적조사약보고)

총독부가 고려청자와 신라 고도 경주에 집중해 있는 사이, 일본 학자들은 강원도 원주 땅에서 노다지를 찾아냈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한강 이남으로 가는 군사·교통 요지인 데다 왕실이 후원하는 큰 절들이 많았다. 세월 속에 폐사된 절터에는 그 영화(榮華)를 알리는 석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고 20세기 초에는 더했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 텅 비었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강원도 원주 거돈사지. 텅 비었다.

1911년 가을 명동에서 잡화점을 하는 도굴꾼 모리 무라타로(森村太郞)가 원주 법천사지에서 지광국사 현묘탑을 강탈해왔다. 와다는 이 탑을 구입해 명동 한 병원에 전시했다가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아주 아름다운지라, 일본 오사카에 사는 후지타 헤이타로라는 자가 이를 알고 큰돈을 주고 오사카로 가져갔다. 그때 총독 데라우치가 이를 알고 와다를 협박해 다시 가져와 경복궁에 가져다 놨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영원히 일본 땅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체불명 칠층석탑과 귀면(鬼面)이 새겨진 좌대도 와다의 남창동 정원에 있었다. 원주 거돈사지에 있던 원공국사승묘탑도 있었다. 1928년 와다가 죽고 6년 뒤 총독부는 원공국사승묘탑을 보물 314호로 지정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보물 190호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석물 9개

1915년 조선 총독부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잔치 이름은 조선물산공진회였다. 경복궁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거나 팔고, 잔디밭과 근대 건물을 만들었다. 너른 잔디밭에는 '옮기기 편한 석물(石物)들을 찾아' 팔도에서 모은 탑들을 전시했다. 공진회가 끝나고 석물들은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잔디밭에 남았다.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지고 나라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석물들은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대신 이들은 1960년 6월 2일 대한민국 국보가 되었다. 나라가 해방되고 25년이 지났거늘, 국보로 지정한 법령은 총독부가 만든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었다. 이후 석물들은 귀향을 포기했다.

해방 후 총독부 청사는 정부청사가 됐다. '중앙청' 이름은 작가이자 정치인 정인보가 지었다. 1986년 중앙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됐다. 1996년 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했다. 석물들도 따라갔다. 이들 가운데 9개가 박물관 남쪽 노천 전시장에 모여 있다. 와다가 사들였던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보물 190호)이 맨 동쪽에 있다.

왼쪽부터 염거화상탑, 홍법국사탑, 진공대사탑.
왼쪽부터 염거화상탑, 홍법국사탑, 진공대사탑.

서쪽 끝에서부터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362호), 대경대사 현기탑비(보물 361호), 흥법사 진공대사 탑과 석관(보물 365호), 홍법국사탑(국보 102호)과 탑비(보물 399호)가 줄지어 서 있다. 염거화상탑은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다.

귀향을 기다리는 석물들

해방 후 보물 목록을 검토하던 미군정 문화재 당국은 1948년 원공국사승묘탑을 서울 성북동 개인 집에서 발견했다. 와다 가족으로부터 남창동 집을 구입했던 이아무개가 해방 후 미국인에게 집을 팔면서 가져간 것이다. 이 또한 경복궁으로 반환됐다. 와다 쓰네이치가 팔아먹었다가 돌아온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은 해방 후 6·25전쟁 때 폭격으로 1만2000조각으로 부서졌다. 미군 공습이라고도 하고 인민군 박격포 사격이라고도 했다. 1956년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에 기적처럼 복원됐지만, 복원이 불안전해 불면 꺼질세라 옮기지 못하고 경복궁 잔디밭에 남았다. 지금은 문화재청이 첨단 기법으로 해체 복원 중이다. 정체불명의 칠층석탑과 귀면 좌대 행방은 아직 미궁이다.

강원도 원주 사람들은 총독부가 가져간 법천사 지광국사탑과 거돈사 원공국사탑을 돌려달라고 주장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라고.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절터로 귀향하면, 탐욕스러운 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냐고. 석물에 입이 달려서 똑같이 묻는다면 어찌 답할 것인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1/20170921003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