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방송] 고요한소리_ 10장, 11장 탄생시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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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2021. 4. 5.

 

 

10장 탄생날 때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불교 심리학에 따라 임종 때의 생각-과정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태어날 때의 생각-과정에 주의를 돌려보자.

 

이미 앞의 8장과 9, 정상적인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와

임종시의 생각-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에서 기술한 여러 정신상태에 비추어 보면,

태어날 때의 생각-과정은 많은 설명 없이도 쉽사리 추적될 수 있다.

즉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신상태는 이미 다 검토를 마친 셈이다.

태어날 때 밟게 되는 생각-과정은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되어 있다.

 

1. 재연결의식

2. 무의식단계의 마음

3. 뜻의 문을 향함

4. 생각촉진

5. 무의식단계의 마음

 

1. 재연결의식

앞 장에서 임종 때의 생각-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열거된 정신상태 중

마지막 상태 즉 재연결의식이 임종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태가 아닌데도 거기서 언급된 이유는

다른 정신상태들이 이 재연결의식과 함께 하나의 연속과정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재연결의식은 다시 태어난 자의 마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은 태아의 마음에 일어난다.

사실상 부모의 정자세포 및 난자세포와 결합하여, 적당한 모체의 자궁에 태아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 재연결의식 형의 정신적 에너지이다.

 

다시 말해 적당한 모체의 자궁에서 새로운 몸과 마음의 결합,

즉 새로운 명색의 세포핵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재연결의식 혹은 재생의식이다.

따라서 태아는 곧 마음과 몸의 혼합체다. 부모의 정·난자세포는 태아의 육체 부분을 만들어내지만 재연결의식은 정신 부분을 제공한다.

죽는 생명을 새 생명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 재연결의식인 것이다.

 

그것이 연결고리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임종자의 죽음직전 생각-촉진 마음의 결과이고

또 동일한 생각-대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각이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 과정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죽는 찰나의 마지막 의식도 이 과정에 예외가 되지 않는다.

같은 몸에서는 아닐지라도 역시 다음 생각을 일으킨다.

새로 생긴 생각이 재연결의식이다.

이는 단지 한 찰나만 지속되고,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그 뒤를 잇는다.

 

2. 무의식단계의 마음

최초의 재연결의식 뒤에는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이어지는데

16심찰나 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아직 밖에 나오지 않은 이 존재는 태아기 동안 모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보통은 외부세계와는 접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태아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잔잔히 흐르는 것은 무의식의 흐름이다.

이제 막 생명이 시작된 만큼 식의 상태가 충분히 성숙되지는 못했다.

 

이 부분에 관하여 쉐잔 아웅은 철학개요의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불교에 의하면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 과거생의 재생산 업의 결과에 따라

육체적 성장이 시작됨과 동시에 선척적인 마음이 주어진다.

잉태 순간 태아의 마음은 순수상태의 잠재의식일 뿐이며

그것은 한층 성숙된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꿈 없는 숙면에 들어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3. 뜻의 문을 향함

앞에 기술한 대로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16심찰나 동안 지속하고는 가라앉는다.

이어 뜻의 문을 향함이라는 식의 상태가 뒤따른다.

무의식의 성격을 띤 태아의 식의 상태는 태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일어나는 욕망 탓으로 의식단계의 마음으로 대체된다.

 

4. 생각-촉진

뜻의 문을 향함이라는 식의 상태가 가라앉은 다음에는 생각-촉진의 상태가 일어난다.

그것은 뜻의 문을 통로로 하여 일어난 생각

즉 새로운 존재에 대한 욕망을 더욱 더 진행시킨다.

이들 생각-촉진은 새 생명의 마음속에 새로이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발전시킨다.

존재욕망 생각-촉진, 이것은 일곱 심찰나 동안 지속된다.

 

5. 무의식단계의 마음

일곱 생각-촉진 심찰나들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나면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잔잔한 흐름이 다시 일어난다.

이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 방해하지 않는 한 계속 조용히 흘러가며 방해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태아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와 독립적인 존재가 되면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정상적 생각-과정이 뒤따른다.

 

 

 

11장 태어남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과 불교적 설명

 

물질과학은 생명 탄생을 눈에 보이는 것

즉 금생이라는 시간대에 한정시켜 물질에 준거하여서만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생물학자는 아버지의 정자세포와 어머니의 난자세포의 결합이 어린아이의 탄생을 가져오고

어린아이의 부모나 조상의 육체적·정신적 특성이 어린아이의 특성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정신적·심적 요소에 대해서 침묵해온 생물학은

유전과 환경 두 가지만을 영향력 있는 원인 요소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것이 충분히 만족할만한 설명인가?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두 형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째서 한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약질이고, 다른 아이는 튼튼하고, 힘이 세며 건강할까?

같은 형제라도 출생시기가 다른 만큼 어머니의 건강상태가 달랐다는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면 같은 유전, 같은 환경, 같은 시기에 태어난 쌍둥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두 사람 사이에 흔히 드러나는 육체적·정신적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태어날 때부터 배꼽이 서로 붙었던 저 유명한 태국의 쌍둥이 장과 엉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들 쌍둥이는 유전과 환경이 완전히 똑같았던 경우이다.

그들이 런던에 온 다음의 행동을 조사한 전문가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성질이 전혀 달라, 장은 알코올 중독되어 있었고 엉은 금주주의자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뿐 아니라 조상 중에 그런 성향을 나타낸 사람이 없는데도

종종 놀라운 신동들이 태어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런 신동의 경우를 유전과 환경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유전과 환경 이외에도 어떤 작용요인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인간과 같은 극도로 복잡한 정신·물리적 유기체가

부모의 정자세포, 난자세포라는 순전히 신체적 인자의 결합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제3의 요인

즉 심적 요인이 끼어듦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심지와 기름만으로는 등불이 켜질 수 없다.

어디로부턴가 불이 옮겨올 때, 심지와 기름의 작용은 불꽃을 내게 된다.

 

하나의 식물은 씨앗과 흙으로만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다.

외부의 근원으로부터 다른 요소 즉 햇빛이 와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순전히 물리적인 두 개의 순전히 물리적인 요소,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은 마음과 물질의 결합인 태아를 형성할 가망이 없다.

정신·신체적 유기체 태아를 낳기 위해서는 심명적 요소가 두 신체적 요소와 결합해야 한다.

 

다음으로 생물학은 태아의 성이 결정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태아는 부모의 유전자라고 알려진 것으로부터 그 특징을 이어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태아는 같은 비율의 모친과 부친의 염색체가 같은 비율로 구성되며

성은 염색체가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남성 세포는 항상 하나의 X염색체와 하나의 Y염색체를 담고 있다.

반면에 여성 세포에는 항상 두 개의 X염색체가 들어있다고 한다.

수태가 되는 순간 남성 정자세포는 여성 난자세포와 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포가 형성되며 그것이 나중에 태아가 된다.

X염색체와 Y염색체가 서로 결합하면 남성세포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다가는 서로 결합하여 여성세포가 되어버린다.

 

생물학은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결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신체적 측면만 따져서는 결코 속시원한 원인 규명이 이뤄질 수 없다.

 

피츠버그 대학의 생물학 교수 피터 그레이가 편찬한 <생물학 백과사전>에는 유전학이라는 제목으로 꽤나 긴 논문이 실려 있고

마지막 문단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 활동을 설명한 그림의 상당 부분은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상세히 밝혀져야 할 일로 남아있다.”

 

에딘버러 대학의 동물 유전학 교수인 C. H. 웨딩톤의 저서 <현대 세계를 위한 생물학>의 성과 재생산 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들 염색체들은 발생단계의 유기체 내에 생성되는 호르몬의 형태를 좌우한다.

XX구성을 갖는 생물은 여성호르몬을 생산한다.

반면에 XY염색체의 존재는 남성 호르몬을 유도한다.

이런 체계에서 남녀라는 기본 잠재성 가운데 어느 쪽에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차이점은

인간 신체 내 가장 신뢰할만한 메커니즘 중 한 작용에, 즉 배세포(胚細胞)가 형성되는 순간 두 쌍의 염색체가 분리하여 한 쌍을 이루는 작용에 달려 있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그 메커니즘이 잘못 진행되는 수가 있다.

인간 염색체를 조사하는 기법은 성염색체의 이상 상태가 언제 확정되는지를 규명할 정도로 정교해지긴 했지만, 그것도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우 그 같은 이상을 탐색하는 작업의 초기 단계에 와 있을 뿐이다.”

 

웨딩톤 교수는 배세포가 형성될 때 염색체 쌍들이 분리되어 단일 염색체가 되는 것을 몸에서 일어나는 가장 확실한 메커니즘의 하나로 이야기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메커니즘이 잘못되는 일도 드물지 않음을 부득이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색체 비율이 남자 태아가 생겨야 마땅한 형태인데도, 생겨난 것은 남성 태아가 아닌 일이 가끔 있었다.

또 이와 유사한 경우로, 때로는 어떤 여성 태아에 있어서 염색체 비율은 제대로인데도 유전적으로 다른 결과가 오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의대 교수 4인 크룹, 쉬워쯔, 자웨쯔, 비글리에리 교수 4인이 합동으로 출판한 <내과 의사 편람>염색체적 성 결정장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장이 나온다.

아직은 염색체적 성과 유전자적 성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웨딩톤 교수의 저술 머리말에서, 한때 철학교수였던 사바팔리 라다크리슈난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과학자는 진리의 충직한 종이다.

그는 자연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 노력 과정에서 인간 정신의 역할을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자연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면 그는 내면적 공허감, 불안감, 의식 분열로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객체, 즉 그저 여러 사물 가운데 있는 한 사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주체이다.

이 주체성이 인정될 때 과학과 인간성 사이의 간격은 좁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기에 애니 베산트 여사의 말을 인용해보자.

현대과학이 점점 더 분명하게 증명하는 바는

고등한 동물일수록 진화에 있어서 유전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모든 정신적, 도덕적 자질들이 부모로부터 자손에게 유전되지 않으며

자질이 높은 경우일수록 이런 사실은 더욱 분명하다는 것이다.

천재가 낳은 어린애가 때로는 얼뜨기이고

평범한 부모들도 천재를 낳지 않는가.”

 

이와 관련하여 달케가 이야기했던 것도 옮겨 볼 가치가 있다.

나라는 존재 전체가 몽땅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이 과학 쪽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나라는 과정이 한 번도 불이 당겨진 적이 없고

부모, 조부모, 등등으로부터 여태까지 추진되어오기만 했다는 것,

즉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고 굴러오기만 했다는 의미이다.

그럴 경우 이 움직임의 처음 시작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한 모든 것에는 간단히 말하여 모든 반작용에는 시작의 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학의 설명과는 대조적으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부모는 물질, 즉 육체를 토대를 제공할 뿐이며, 특정 나라는 과정이 해체되어 방출되는, 이러한 잠재적 가능성에 딱 들어맞는 나라는 에너지가 이런 모든 가능성에 불을 붙인다.

이렇게 볼 때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샘이 산에서 발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샘이 산에서 발원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누구에게나 명명백백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샘이 어디까지나 산에 대해 한낱 이방인 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 쪽이 과학 쪽과는 달리 실상에 충실하며,

또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할 때에만 비로소 생명번식이라는 완전미궁 속의 기적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법칙들과 조금도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세상의 상황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에서 나라다 스님은 유전만으로는,

대대로 존경할만한 조상이 태어났던 오랜 가계에 범죄자가 태어나는 일이나,

악행으로 이름난 집안에 성자가 탄생하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피력하면서

T. H. 파스칼 박사의 <재육화>라는 책으로부터 다음 구절을 인용하였다.

유전에 관한 문제에서 원생세포가 맡아 하는 역할로 되돌아가 본다면, 거듭 말하거니와 육체적 세포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의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유전의 육체적 측면을 밝혀주기는 하되

도덕성이나 지적 능력의 문제는 전과 다름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 남겨두고 있다.

만약 사람이 오로지 하나의 원생세포로만 만들어지는 존재라면

우리는 한 개인에게서 그의 조상이나 부모에게 드러났던 자질들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찾아낼 생각을 못할 것이다.

그들이 갖춘 자질은 결코 부모가 가졌던 것 이상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존경받는 집안에서 범죄자가 나오는 것을 보기도 하고

사회에 전혀 쓸모없이 살아온 부모에게서 성자가 태어나는 것도 보지 않는가.”

 

앞서 이야기한 대로 탄생에 관한 불교적 설명에 의하면

부모의 정자와 난자 같은 순전히 신체만을 근원으로 하는 요소들은 마음과 몸의 결합체인 태아를 탄생시킬 수 없다.

인간은 정신·물리적 유기체이며, 그런 만큼 원인적 요소는 육체적인 것과 심적인 것 양쪽이어야 한다.

<중부> 38경 대애진경에서, 부처님은 부모의 결합이 이뤄지고 모친이 임신하기에 적절한 때에 있다는 조건 이외에도,

부처님께서 간답바라고 이름붙인 어떤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하셨다.

간답바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이방인혹은 멀리서 온 자라는 뜻이다.

동사 ‘gacchati(가다)’의 동명사 ‘gantabba'가 변화한 것으로서 그것은 가야만 할 사람을 뜻한다.

 

이 의미는 어딘가에서 죽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적 요인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임종자의 마지막 생각이 담고 있던 정신적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정신적 내용은 심적으로 중요한 빠띠산디 윈냐나

즉 재연결식을 초래하고 그 재연결식은 부모의 정·난자와 결합하여 태아의 형성을 돕는다.

 

그것은 임종자로부터 배출된 에너지 잠재력이다.

은유적으로 말해서 멀리서 온 자혹은 가야 할 자

즉 그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어디론가 가야 하는 자이다.

빠띠산디는 재연결을 뜻한다.

이것은 임종자 마음의 마지막 의식과 태아의 첫 번째 의식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재연결식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두 형태의 의식 모두 같은 아람마나', 생각의 대상, 즉 세 가지 강력한 죽음의 표시 중의 하나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것이 새로운 정신적 대응부분, 새 나마가 되는데

그것은 새 어머니의 자궁에서 새로운 루빠 새 육체적 대응부분

즉 새로운 부모의 정자세포와 난자세포와의 연계 속에서

새 태아, 새로운 인간 생명의 핵을 발생시킨다.

 

이 새로 태어난 인간 생명은 과거 인간 생의 결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과거생에서 했던 생각, , 행위들이 특정한 에너지 혹은 업력을 낳았고

지난 생을 끝마치는 찰나 그 힘은 충분히 강력해져서

그 힘의 강도와 자질에 따라 같은 것은 같은 것을 끌어 당긴다는 인력의 법칙

또 다른 대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힘입어서

알맞은 장소에 새 삶을 위한 필요조건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탄생의 세 번째 원인적 요소를 만드는 것은 이들 힘이다.

이것은 심적 요인이며, 심적 차원에서 시간과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 잠재적인 업 에너지가

인연 있는 어머니의 자궁 내에 태아 형성에 맞는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생물학적 법칙과 함께 작용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냐나띨로까 스님의 논평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태아에게 잠재해 있는 성격적 특성과 성향 및 능력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삶에 매달리다가

죽는 찰나에 업력을 방출하는데

이 업력은 수태준비가 된 새 어머니의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찾아든다.

 

그러므로 의식의 변화 과정은

다른 공간이나 차원에서라 할지라도 중단 없이 계속되며

한 생의 끝에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한 생 동안 찰나찰나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