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알아차림과 중도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댓글 0

법륜스님/즉문즉설(2021)

2021. 4. 21.

 

 

알아차림 중도는 지금 여기에서 자유롭기 위한 핵심적인 방도인데요.

저는 알아차림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니까 두 가지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 마음의 상태나 상황에 대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알아차림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작용과 현상에 원인과 모순을 즉자적으로 깨닫는 알아차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알아차림이 나타나는 현상에 모순을 자각하고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아차림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는 게 맞는지 틀리다면 어떻게 바른 것인지 질문드립니다.//

 

 

지금 질문자가 얘기한 게 80~90% 맞습니다.

있는 현상을 그대로 아는 것도 알아차림이고

그것의 원인을 아는 것도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은 그 둘 중의 한 개만 말하는 게 아니고

그 두 가지를 다 말하는데

먼저 현상에 대해서 무지하면, 현상을 모르면

현상의 원인을 규명한다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현상을 먼저 알아야 현상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할 때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을

? 내가 불쾌해 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면

그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쾌하구나하고 알아차리면 얼마 있으면 사라져요.

그 왜 그럴까?

 

이미 이 알아차림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불쾌하다는 것만 알아차리면

왜 불쾌하지?”가 연구 대상이 되는데

이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거요.

 

?

이 불쾌하게 일어나는 것은 그 사람 말이 불쾌해서 불쾌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내 업식이, 내가 그동안에 살아온 삶의 청체적 결과물인 그 업식에

외부자극이 탁 부딪히면 자동으로 불쾌가 일어난다 이거야.

 

어떤 건 자동으로 유쾌가 일어나고

쾌 불쾌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 쾌, 불쾌는

불쾌할 만한 일, 유쾌할 만한 일이 있어서 불쾌 유쾌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업식 따라 일어난다, 이거야. 업식따라.

 

그러니까 채를 갖고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나고, 북을 치면 북소리가 나는 것은

채에 있는 게 아니다. 이거야.

종에 있고, 북에 있는 거다.

업식에 있는 거다. 업식에.

 

그러니까 이 불쾌가 일어나는 것은

내가 저런 말에는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업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불쾌감이 일어나는 거니까

불괘감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바깥 경계에 반응을 한 거다.

 

그러니까 이 불쾌한 것이 바로 기분 나쁨으로 간다.

싫어하든지, “기분 나빠하든지.

내가 불쾌해 하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면 저절로 사라진다.

감정적으로 안 가고.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미 그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원인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불쾌하구나, 하고 알아차려라 하냐?

불쾌하구나하고 알아차리는데, 불쾌한 것은 알아차림인데

왜 불쾌하지?” 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아니고 생각이잖아요.

까딱 잘못하면 이게 생각에 빠지가 쉽다. 이 말이오.

 

명상할 때는 생각을 하면 안 돼.

다만 주시만 해야지.

 

그런데 연구한답시고 생각을 한다 이거야, 앉아서.

그러면 이건 사유, 사색에 들어가는 거요.

알아차림이 아니다. 이 얘기에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얘기가 80~90%는 맞는 말인데

딱 정확하게 맞는 말은 아니다. 이런 얘기에요.

 

--

그 다음에 내가 상대에게 비난을 하다가

너 때문이야하고 탓하다가

? 이거 내 문제구나하고 알아차렸다.

내 문제구나하고 알아차리면

짜증나던게 확 가라앉는다 이 말이오.

 

이럴 때는 이거는 원인에 대한 모순,

질문자가 말한 대로 모순에 대해서 알아차렸다. 이렇게도 볼 수 있거든요.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게 알아차림이에요.

 

화가 난 걸 난 줄 알아차리는 것도 알아차림이고.

넘어진 걸 넘어졌다고 알아차리는 것도 알아차림이고

모순인 걸 모순이라고 알아차리는 것도 알아차리는 거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알아차리는 것도 알아차림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굳이 그렇게 두 가지를 나눠서 구분할 필요가 없다.

결론은 이거예요.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넘어진 사람이 넘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되고

넘어진 걸 넘어진대로 알아차리면 되는데

넘어져 있으면 됩니까가 아니라

넘어진 걸 알아차렸다는 건 일어난다는 게 전제되어 있는 거요.

 

화가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것은

화를 멈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원인을 규명한다는 것이 자칫 잘못하면

사유, 사색으로 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알아차림을 할 때는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원인을 규명하지 않고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명상할 때는.

 

그러나 명상 끝나고 왜 우리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죠.

다시 말하면 꿈을 딱 깨면

꿈이구나하고 끝나야 한다는 거요.

왜 내가 이런 꿈을 꿨지?” 그것은 나중 얘기에요.

 

학자가 하는 것은

저 사람이 왜 밤마다 뱀꿈을 꾸지?”하고 연구하는 게 학자가 하는 일이고

본인이 할 일은 눈 딱 뜨면서

, 꿈이네, 속을 뻔했네이거로 끝내는 거예요.

 

표정을 보니까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것 같아.

스님 말을 들으니까 뭐.. 이해는 되는데, 명확지 않다. 이런 표정이다.

 

--

.. 네네 그렇습니다.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는 원리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났구나. 그럼 뭐..

남이 싸운다. 싸우구나. 이런 걸 알아차림이라고 안 그래요.

 

그러니까 고집멸도가 있잖아.

싸움이 있다. 싸움의 원인이 뭔가? 이런 원인을 규명을 해야되지

전번에도 내가 법문을 했잖아요.

 

지금 백선엽장군 갖고 국립묘지에 현충원 국립묘지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어야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아예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현실은 어디에 묻었습니까?

대전 국립묘지에 묻었잖아요.

보수는 대전 국립묘지에 묻은 게 불만이에요.

바땅히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진보는 대전 국립묘지에 묻은 것도 불만이에요.

그런 국림묘지에 묻힐 자격이 없다. 이렇게 얘기한다 이 말이오.

 

왜 똑같은 일을 갖고 둘 다 불만일까?

하나는 부족하다고 불만이고

하나는 과하다고 불만이란 말이오.

 

그러면 이 사람의 행위가 1945년도 해방되기 전에

우리가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있을 때는 정의가 나라의 독립인데

이 사람은 간도특설대라는 곳에 소속이 되어, 20대 때,

독립군잡이하는 일본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건 부정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1945년 이후에 미국이 미군정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1948년도에 구성을 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이분은 군대에 들어가서 한국 국군 창립에 기여를 했고

특히 6.25전쟁에서 큰 전봉을 거뒀다 이 말이오.

 

그러면 48년 이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 사람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라는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국립묘지에 묻혀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 일제 앞잡이 했다라는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없다, 이렇게 보는 거란 말이오.

 

이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다툼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다툼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엔 다 그런 성격이 들어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성격에서 현실적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두 가지 복합된 성격을 갖고 있는 나라다. 나라 자체가.

북한 같으면 어떻겠어요?

이런 성격이 없다, 이 말이오.

 

?

친일행동했던 게 정부 구성원이 됐다, 이런 게 별로 없다. 이 말이오.

거기는 일률적이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때 친일을 하면서도 테크놀러지를 익힌 사람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여러 가지 국가를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때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국가 발전에 기여한 부분과

그 이전에 일제의 나라가 억압받고 있을 때, 일제에 기여한.

이런 두 가지 성격 때문에 지금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우리가 중도적으로 통합적으로 앞으로 만들어갈 거냐는

이게 사회적 과제라는 거요.

 

그런데 이게 왜 해결이 안 됐냐?

자꾸 한 가지만 보고 계속 주장을 하기 때문에

자기 편끼리만 모여서 얘기해 보면, 너무너무 상대편 주장이 틀린 거요.

 

어떻게 친일 매국노를 국민 묘지에 묻을 수 있느냐?

어떻게 전쟁 영웅을 대전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

이렇게 갈라기거든요.

 

이런 것처럼 지금 우리 사회 모든 곳에

의사협회 분쟁부터, 개천절 앞으로 뭐다? 행사 한다고 지금 또 부딪히잖아요.

이런 밑바닥에는 다 이런 다른 관점을 가진 집단들이 충돌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잘 현상을 보고 원인을 규명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오.

그게 고집멸도다.

 

지금 질문자가 사회현상에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규명을 하고 인지를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