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제갈건]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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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그라운드(2021)

2021. 7. 30.

 

 

 

...

 

불교에서 자주 제시되는 화두 중에서

매달린 절벽에서 어떻게 손을 뗄 것인가?”

인생을 비유한 거잖아요.

우리 인생의 형국을 이미지화한 거잖아요.

이미지네이션 한 건데

 

어떤 사람이 호랑이한테 쫓기더라는 거예요.

산에서 호랑이한테 쫓겨서 도망을 가다 보니까 절벽이 나오더라는 거에요.

이 호랑이한테 잡아먹힐 수는 없으니까

절벽의 덩굴 같은 걸 타고

절벽 밑으로 내려간다고요, 호랑이 못 쫓아오게.

 

호랑이가 절벽을 타고 내려갈 수는 없고

위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잡아먹으려고 위에서 대기하고 있고

이 사람은 덩굴 타고 밑으로 기어 내려가서 도망가려고 보니까

밑에는 완전히 독사들이 우글우글한 독사굴이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덩굴에 그냥 매달려 있는데,

 

바위틈에서 까만 쥐새끼가 한 마리 기어 나오더니

덩굴을 막 갉아 먹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 까만 쥐가 들어가니까 조금 있다가 하얀 쥐가 이쪽에서 기어나와서

또 이 덩굴을 갉아 먹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쥐새끼들이 다 갉아먹어서 이 덩굴이 끊어지면

밑에 독사굴로 떨어져 죽는 거 아니에요.

그랬을 때 이 까만 쥐는 밤을 의미한다는 거예요,

하얀 쥐는 낮을 의미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딱 그렇다는 거예요.

위에는 호랑이고, 아래는 독사밭이고,

그 와중에 이 덩굴에 매달려서 낮과 밤이 매일 하루하루를 조금씩 우리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데

그와 중에 절벽 한 귀퉁이에서

벌집에서 꿀이 똑똑똑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근데 덩굴에 매달려서 그 꿀을 혓바닥으로 받아먹고 있는데

너무나 달콤하더라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인생을, 한 인간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이미지화하면 이런 형국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호랑이와 독사라는 끊임없는 괴로움이 밀어닥치고

낮과 밤이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갉아먹어 들어가는데

떨어지는 순간 순간의 즐거움

그것에 도취가 되어서 살아간다는 거죠.

모든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인간 군상이 그렇다는 거죠.

 

인생을 표현하라고 그랬을 때,

인생을 BD사이의 C다 그러잖아요.

Birth하고 Death사이의 Choice.

그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올라가서 호랑이랑 죽기 살기로 싸워볼 것이냐,

아니면 1% 가능성의 도박을 걸고

이 독사밭으로 떨어져 볼 것인가,

안 물리고 재빨리 나갈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그냥 매달려서 죽기를, 인생을 갉아먹어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래도 꿀 몇 방울 얻어먹었으니까 잘 살았다하고 갈 것인가

그 선택은 개별 개인의 몫이라는 것이죠.

 

정답은 없죠.

...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못 사는 것이 무엇이 있냐?

...

 

옛날에는 지식 명예, 이런 것은 돈으로 못 산다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근데 요새는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스마트폰 들고 다니면 어디 가서 사실은

오히려 아는 척을 안 하는게 더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유식해 보인다는 거예요.

괜히 말 잘못했다가 찾아보고 니 말 다 틀렸는데?

이러면 완전 바보 된다는 거예요.

 

지식도 이제는 다 돈으로

어떤 물질로 치환이 되는 문제가 됐고

명예도 사실은 굳이 따지자면 돈으로 해결이 된다는 거예요.

 

그랬을 때 단 한 가지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꼽아봐라 했을 때는

/떳떳함/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설적으로 현대어로 표현을 하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렇죠?

 

명적 사태가 이 괴로움을 유발하는 가장 큰 그거 같아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건데

우리는 보통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부터 괴로워한다는 거예요.

 

아까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왜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왜 나는 이렇게 생겼고

쟤는 같은 시험을 봐도 같은 기간 준비했는데, 쟤는 붙고 나는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끊임없이 괴로움만 가중될 뿐이지

결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아무런 별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 못한다는 거예요.

이런 관점은.

 

...

 

제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해 보니까

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시는 분들이.

석사 박사 정도 하실 분들이 되면 철학에 조예가 있는 분들이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느꼈던 것들, 철학을 저도 전공하는 학도로서

느꼈던 것 중에 한 가지가 무엇이 있냐면

 

인문학 하면 우리가 문학 역사 철학

이 순수 학문을 통틀어서 인문학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대표적으로.

그중에서 철학을 가장 상위 단계의 학문으로 치부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근데 치명적인 단점이 뭐냐 하면

착각에 빠지기가 쉽다는 거예요.

 

내가 뭔가 많이 알고 있다는 그런 착각

근데 그러다 보면 나쁘게 표현하면 자만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착각에 빠져서 교보문고 같은데 가서

중앙에 딱 한 번 서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과연 작은 책장 하나에 있는 책에 있는 내용이라도 다 알고 있는가?

그랬을 때 얼마나 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지식이

하찮고 보잘것 없고 너무나 작은 것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뭔가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잣대로 남을 끊임없이 판단한다는 거예요.

 

철학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몇몇 철학하는 분들로부터

그런 느낌을 좀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건 타산지석이잖아요.

그러면서 그분들의 그런 행태를 보면서

제 스스로를 여러 차례 돌아봤다는 거예요.

혹시 나도 저러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가에.

 

근데 장자 철학의 기본 관점은

/판단하지 말라/는 거에요.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판단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할 때만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자가 혼돈에 비유를, 이것도 비유예요.

그러니까 혼돈이라는 어떤 인물을 하나 설정하는 거예요.

 

이 혼돈이 중앙의 왕이에요.

복조의 왕이 있고 동서남북에 또 다 왕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랬을 때 이 동서남북의 왕을 혼돈이 전부 초대해서 놀러 간다는 거예요.

혼돈네 집에.

속된 말로 하면 혼돈 네 집에 놀라갔더니 혼돈이라는 인물을 직접 만나 보니까

달걀 생각하시면 돼요. 달걀 귀신 같은 거.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얼굴 형상만 있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갔는데 이제 혼돈이 너무나 잘 대접해 주더라는 거예요.

너무나 공평하게

동쪽 왕한테는 고기 한 점 더 주고 이게 아니라 너

무나 공평하게 너무나 지극정성으로 대접을 잘해주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서남북의 왕들이 한 사람도 기분 상한 사람 없이

너무나 4명 다 만족해서

우리도 뭔가 혼돈한테 보답을 해 주고 싶다.

 

해서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 보니까

근데 저놈 불쌍하다 애가 눈도 없고 입도 없으니까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아름다운 것도 못 보고

저거 음악도 못 듣겠는데? 귀도 없잖아.

이러다 보니까

우리가 전부 가서 불쏘시개 같은 거 갖고 가서

눈도 뚫어주고 콧구멍도 뚫고 다 만들어주자.

그래서 우리처럼 보고 싶은 거 보고 하면 얼마나 좋으냐?

그래서 가서 눈도 막 뚫어주고 아무것도 없던 얼굴에다가

눈코귀입을 다 만들어줬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혼돈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혼돈이 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었냐? 라고 했을 때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으니까

전혀 일체 세상 만물을 판단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 정의의 여신 같은 거 보면 눈을 가리고 있잖아요.

그거랑 같은 맥락이에요.

객관성을 유지했다는 거예요.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 늘 객관성을 유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올 수 있었는데

눈이 생기니까 일단 저놈은

이쁜 놈 못생긴 놈, 구분을 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귀도 뚫어놓으니까

이거는 좋은 소리 저거는 듣기 싫은 소리

끊임없이 판단하니까

 

이게 안 그랬던 사람이

엄청난 가치 판단의 요소들이 밀려 들어오니까

미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더라는 거예요.

이게 일종의 유의한 철학적 비유죠.

 

참 그런 것 같아요.

아까 댓글 같은 것도 말씀하셨지만

댓글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거예요.

공감하는 댓글도 있고, 칭찬하는 댓글도 있고, 미워하는 댓글도 있고

다 좋다는 거예요.

내 감성을 표현하는,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근데 끊임없이 판단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남을 판단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

그거는 과연 그것이 과연 나 자신에게도 득 될 것이 있는가에 대해서

좀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대인춘풍 지기추상

_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

 

이게 대인춘풍 지기추상

이게 바로 같은 맥락이라는 거예요.

대인춘풍이라는 것은

남을 대함에 있어서 남을 판단할 때는

우리가 그렇다고 아예 판단을 안 할 수는 없다는 거에요.

 

우리는 혼돈처럼

혼돈이라는 것은 장자라는 인물이 만들어낸 가장의 그런 존재이지

우리는 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기 때문에

판단 안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

윤편의 고사가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이 윤편이라는 거는

바퀴 륜, 바퀴 만드는 한 마디로 바퀴 만드는 사람이야.

옛날에는 나무를 깎잖아요. 수레 굴러가려면

 

윤편이 이 수례바귀를 만드는 사람인데

하루는 왕이 책을 읽고 있는 거를 윤편이 길을 가다가 본다는 거예요.

근데 윤편이 그 왕이 읽는 책을 보고 열심히 읽고 있으니까

왕인 줄 모르고

뭔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습니까?” 하니까

그 왕이 이거 옛날 훌륭한 선조들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읽고 있다 ..

 

윤편이 이 바퀴 만드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아이고 참 찌꺼기 같은 것을 열심히 읽고 계시네요.

하고 약간 비아냥거리듯이 지나가니까

왕이 이제 약간 속된 말로 빈또가 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잠깐 이리 와 보라고 해서

뭐라고 그랬냐고 똑바로 설명해 보라고

안 그러면 내가 기분이 상하니까

너 혼 좀 나야겠다고 얘기하니까

 

윤편이 그때 이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내가 나이 지금 한 70 먹도록 이 노인네가 되도록

평생을 바퀴 깎는 일을 했다는 거예요.

근데 이 바퀴라는 게 마차가 있으면 갖다 바퀴를 끼는데

조금만 더 이거를 깎아내면

구멍을 갖다 맞춰 껴야 하는데

조금만 이걸 감을 잘 못 잡아서 더 깎으면

바퀴가 헐거워서 굴러가다 빠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차가 제 구실을 못 하고,

 

그렇다고 이걸 조금만 덜 깎으면

뻑뻑해서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껴가지고 덜덜덜 거리고

 

그러니까 순전히 이것은 내 어떤 내가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노하우를 통해서 얻은 감에 의존해서 하는 것인데

이걸 안내서가 있어서 아들을 불러서

자 아빠가 오늘부터 가업을 잇게 해 줄게.

자 오른쪽으로 한 70번 깎고

그다음에 이쪽으로 돌려서 왼쪽으로 한 60번 깎고

그다음에 갖다 끼면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순전히 마차를 보고

다 크기가 다르고

다 지름이 다르고 축이 다르고 한데

 

이걸 순전히 감에 의존해서 한다고 할 때

깨달음이 이렇다는 거예요.

깨달음이라는 거는 그렇게 스스로의 어떤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옛날에 아무리 훌륭한 학자를 데려다가

아무리 훌륭한 위인의 말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고자 해도

본인이 스스로 행해서 깨닫는 것만 못하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