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e Sophia] 깨달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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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2021. 10. 22.

 

 

 

자고로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증명한 사람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불교를 일으킨 싯다르타를 비롯해 예수 역시

자신의 깨달음을 철학적 논거로 증명한 적이 없으니까요.

 

후세 사람들이 붓다나 예수의 행적을 보고

깨달은 사람이라고 믿고 따를 뿐입니다.

 

불경이나 성경의 어느 구절에도 깨달음을 논리적으로 기술한 부분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교리는 사실적으로 접근하다가도 깨달음의 영역에만 이르면

문학이나 시처럼 모호하게 변해 버리니까요.

 

이런 시류는 첨단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전합니다.

세간에 보면 깨달았다는 수행자들이 나타나 저마다의 주장을 펼치지만

과거의 행태에서 변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중요한 깨달음에 대해서는

불립문자 속으로 꽁꽁 숨어 벌리니까요.

 

사과의 맛을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형이상의 세계를 속세의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그런데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논리적 접근이 안 되고

결국 깨달음을 증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정말로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고대인들이 가축을 셀 때 숫자가 열까지만 있다면

열한 마리의 가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한 마리부터는 매듭 같은 표식에 일일이 대응해

가축의 수를 헤아려야만 합니다.

 

이렇듯 상황에 부합하는 언어가 없으면

우리의 뇌는 인지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가 생존할 무렵엔

수학이나 철학이 초보적 수준에 불과했고

특히 숫자 0 허수 i

그리고 무한집합과 같은 중요한 언어가 빠졌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쏟아져 나오는 양자역학의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무튼 깨달음을 표현할 언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이고

그렇기에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전법 할 방법이 없다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만일 싯다르타가 오늘날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었어도 불립문자 타령을 할까요?

수행자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과의 맛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듯

깨달음 역시 같다고요.

 

그런데 깨달음은 사과처럼 어떤 맛을 보는 영역이 아닙니다.

탐진치가 사라지고 번뇌망상이 소멸되어

청정법신이 되었을 때의 기분 같은 건 깨달음이 아닙니다.

 

100% 순도의 청정법신이 되었어도

머릿속이 비었으면 그냥 무지한 속인일 따름입니다.

 

깨달음은 무소유, 해탈, 열반, 청정법신, 진아, 참나 같은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런 것들을 깨달음으로 알고 수행하는 문화가

개그콘서트 같은 희극 프로에 등장할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은 1원인이라 불리는 자존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통해

나의 존재를 찾게 된 의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우주의 시작과 끝을 통해 나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이지요.

 

과거에는 숫자 0을 이해한 사람을 성인으로 여겼지만

오늘날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깨달은 사람이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수준에서 그 깨달음이 공유될 것입니다.

 

깨달음이 성역에서 벗어나 범속과 어우러지는 날

참으로 멋진 세상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