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e Sophia] 해인을 쥐어라! 세존의 법통은 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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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2021. 12. 3.

 

 

 

 

실존이란 제1원인을 말합니다.

이것을 형상화하면 어떤 모양이 적합할까요?

 

언어로 담지 못하는 실존을 어떤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런 점을 사전에 두고, 가장 근접한 형태의 도상(圖象)을 설정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일체의 머무름이 없으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초월적 존재여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건 딱 두 개뿐입니다.

점과 원입니다.

 

점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습니다.

위치가 있기에 이지만 면적이 없어 입니다.

그래서 非有非無입니다.

 

이런 점과 같은 것이 원입니다.

어딘가에 걸려 있는 모서리를 전부 없애면 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모서리가 없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상 속 이론에선 원이 가능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원은 점과 마찬가지로 非有非無입니다.

 

점과 원이 그나마 실존을 표현하는 데에 쓸 만한 圖象이 됩니다.

이 가운데 너무 단순한 점보다는 원이 보기에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을 실존의 형상으로 꾸며 보면 어떨까요?

 

이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입니다.

모서리(머무름/)가 없기에 삼라만상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을 깨우치면 실존에 대한 대각이 열립니다.

 

원은 존재 그 자체이기에 그냥 깨달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막연하여 느낌조차 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원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지름입니다.

반지름만 세우면 원의 형상이 드러나며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반지름이 그려진 원은 이미 왜곡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있는 그대로의 원이 아닌 생각에 의해 꾸며진 원입니다.

바로 싯다르타가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원입니다.

 

그러니 반지름을 그렸으면 다시 그것을 지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반지름을 지우고 나면 또다시 원의 형상이 모호해집니다.

여기서 양자 모순에 빠집니다.

반지름을 세우자니 원이 아니고 그렇다고 반지름을 지우자니 원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반지름을 그리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반지름이 없는 원이 느껴질 때가 옵니다.

온전한 원이 비추면서 깨달음이 열리게 됩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이루어진 이유는 반지름 놀이를 하던 주체가 바로 원이기 때문입니다.

 

반지름, 이것이 바로 불법입니다.

불법으로써 반지름을 세우고, 다시 그 불법을 버림으로써 원래의 원으로 돌아옵니다.

이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반지름이 그려진 원, 이것을 달리 해인(海印)이라 합니다.

해인이란 거울처럼 만물을 비추고 있는 실존을 의미합니다.

해인의 작동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반지름을 올린 뒤 스위치처럼 누르면서 수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반지름을 세우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불법이 필요합니다.

불법 정도는 되어야 반지름이 쭉쭉 올라갑니다.

 

여기서 반지름을 끝까지 올리려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반야나 不二의 절대, 무주의 해탈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대한 체험과 반야는 반지름을 공고히 하는 데에 매우 유용합니다.

 

그런데 반지름이 무엇이던가요?

그건 한마디로 실상의 왜곡입니다.

따라서 불법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앞의 명제들이 가장 큰 왜곡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지름이 올라갈 때 와 더불어 도 올라가니 그야말로 도고상마고상(道高上魔高上)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불법을 짊어지고 놓을 줄을 모르면

일개 범부 보다 못한 의식 수준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실상을 왜곡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 불법이기에

적당한 때에 놓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행법을 반지름으로 삼게 되면

그것에 의지하는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의지처가 없게 된 마음에서 깨달음을 찾는 것을 일러 中道라 합니다.

그러니 해인이 곧 중도이고 붓다의 법통이 됩니다.

 

요컨대 해인의 반지름

그것을 올리고 내리고 반복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그냥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어느 무엇에 의지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

당신이 본래부터 깨달음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도하게 해 줄 것입니다.

당신의 손엔 해인이 들려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