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e Sophia] 참나의 실체를 공개한다! 정말 깨어 있는 것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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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20.

 

 

 

요즘 들어 참나열풍이 점점 가열하게 불고 있습니다.

특히 참나 찾기는 속성 견성법이어서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나라의 정서에도 잘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참에 참나를 한 번 찾아서

견성의 상태를 경험해 보는 건 어떨까요?

 

참나를 찾으려면 우선 선문답과 간화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문답의 원조 격인 정전백수자를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한 수행승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질문에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을 합니다.

조주선사는 왜 질문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답을 하였을까요?

 

첫 번째는

분별하는 습성에 충격을 가해 잠시라도 깨어 있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떤 수를 써도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연결 고리가 전혀 없기에 생각이 멈칫거릴 수밖에 없고

이때 잠시라도 분별에서 깨어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 점을 고려해 선문답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연타를 날리며 분별 깨기를 이어가게 됩니다.

 

혹자는 선문답을 할 때 모른다는 생각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저 모를 뿐하는 의식엔 알려는 욕망분별을 지우려는 작위가 감쪽같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문답에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문자봉을 휘두르거나

그것에 얻어맞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는

분별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순이 사라지며 답을 찾게 됩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뜰 앞의 잣나무로 인해 잠시라도 깨어 있게 되면

그 질문의 답을 얻게 됩니다.

 

조주선사가 달마의 뜻을 이론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동문서답이고

이처럼 뜰 앞의 잣나무를 통해 분별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문답은

어떤 것이든지 분별을 깨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렇기에 점수를 건너 뛰어 돈오라는 명제가 부각하게 됩니다.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같은

급성 깨달음이 가능하게 되는 원리입니다.

 

분별과의 분리, 이것은 모든 수행의 공통분모입니다.

사마타는 생각 자체를 뿌리째 없애 버리려 하고

위빠사나는 생각을 관찰해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장구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보다 확실하면서도 빠른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선문답이며 간화선입니다.

 

어떤 수행법을 택하든 목적지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경지입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휘말리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할 줄 아는 의식 구조인 것이지요.

 

이때의 관찰자를 일러

참나’, ‘진아’, ‘불성등으로 다양하게 부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 ‘깨어있음같은 기본적인 수식어와

청정법신’‘응무소주같은 좀 더 화려한 수식어를 붙입니다.

 

그렇다면 사마타나 위빠사나, 그리고 선문답이나 간화선을 통해 이룬

알아차려 깨어 있는 상태가 깨달음이 맞을까요?

다시 말해 싯다르타가 언급한 무상정등각에 부합하는 걸까요?

 

이것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참나의 상태로 몰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조주선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질문을 합니다.

선사님, 달마가 왜 서쪽에서 온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 매우 탁월한 법문을 듣겠거니 하면서 기대를 합니다.

 

이때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라고 짧게 한마디 합니다.

 

생각은 자석과 같아서

연결 고리가 있는 소재들에 찰싹 붙어

2, 3의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뜰 앞의 잣나무는 그런 연결 고리가 전혀 없고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멈칫거리게 됩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일으키고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선사님, 도대체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조주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합니다.

이때 사람에 따라 반응이 천차만별로 갈립니다.

 

첫 번째, “이 사람이 나를 놀리나?”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두 번째, “뜰 앞의 잣나무를 어떤 암시로 보고 해독하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 번째, 예상 밖의 답변을 듣고 생각이 교란되어 있거나 멍 때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세 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좀 더 강한 충격을 주면

어느 순간 분별과 분리되면서 대상을 관찰하는 의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분별이 만든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함몰해 있다가

어느 순간 빠져나와 관객이 되어 영화를 바라보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분별에 휩싸여 그것을 라 인식하다가

이제는 분별에서 빠져나와 그것이 그려내는 현상계를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분별이 그려내는 탐진치도 별개의 문제이고

특히 생로병사 같은 것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이렇게 흘러가다 붕괴하여도 먼 나라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깨어나서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일러 참나라 하고

이때의 의식 구조를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문답이나 간화선을 통해 참나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분별이 만든 현상계에 머무름이 없을 테니 응무소주이고,

가끔씩 생각을 내어 그것을 감상하니 이생기심입니다.

 

응무소주와 이생기심을 자유롭게 하면서

어떤 걸림도 없으니 깨달은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런 경지는 사실 불교나 힌두교 수행자들만 이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천주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의 수도자들 가운데도 빈번히 발생합니다.

 

신을 향해 모든 것을 바쳤을 때의 심리를 가정해 봅시다.

생각의 한 올 한 올까지도 신을 위해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이렇게 를 철저히 버리게 되면

어느 순간 를 구성하는 분별이란 것들이 수그러듭니다.

 

이때 외계의 모든 것들이 화면처럼 바뀌면서

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에 잠깁니다.

이런 현상을 일러 성령이 깃들었다거나 거듭났다는 표현을 씁니다.

 

영화(분별) 속의 에서

관객(참나)로 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보이는 종교에서도

대승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힌두교나 불교, 또는 종교의 믿음을 통해

참나로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상태에 만족하십니까?

응무소주하고 이생기심 하니 썩 좋으신가요?

 

양파를 깔 때 한두 겹 벗겨냈다고 해서 다 깐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피상층을 한두 겹 벗겨냄으로써 오는 카타르시스나 심적 안위는

구도의 끝이 아닙니다.

 

물론 깨달음을 참나로 정의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싯다르타의 무상정등각에 견주면 안 됩니다.

 

세존의 무상정등각은 생각의 껍질을 벗기거나 분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나알아차리는 행위를 통해 깨어난 결과를 만들어낸

이분법적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분별을 적으로 삼기에

늘 대칭에 얽매여 있고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을 따지고

심지어 참나에 등급을 매겨 10지 보살 같은 괴상한 이론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어쨌든참나는 분별에서 빠져나와 분별과 대치하는 불안정한 상태이고

이것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와 닮아 있습니다.

 

요컨대 참나알아차려 깨어 있는 상태

현상계에서 분별의 때를 벗겨내면서 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래서 뇌과학에서 얼마든지 그런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고

머지않아 대중화가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참나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쉼터는 될지언정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고된 수행의 여정에서 쉼터의 달콤함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눌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가리킨 목적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