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e Sophia] 윤회의 비밀! 깨달으면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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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2022. 1. 26.

 

 

 

불교 사상의 몇 안 되는 중요한 것으로 윤회설이 있습니다.

윤회설은 사후에도 연속해서 존재한다는 희망을 갖게 하고

또한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토대가 됩니다.

신도들을 착하게 살게 하면서 수행을 해야 하는 당위성도 만들어 주니

매우 요긴한 이론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윤회가 사실일까요?

 

물질적 개념으로 보면,

지금의 가 죽으면 원자라는 작은 알갱이들로 환원되었다가

다시 그것들이 이합집산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의 구성 입자가 사후에도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이런 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아닙니다.

윤회가 성립하려면 그 주체로서 영혼이 전제돼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영혼은 실제로 존재할까요?

 

아직 이것에 대해 증명된 적은 없습니다.

오로지 수많은 경험이 모여져 영혼의 존재에 대한 추론만 있을 뿐입니다.

현대 과학은 영혼의 실재를 증명하기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계속해서 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물론으로만 보아왔던 과학에 철학이 개입된 것도 모자라

정보라는 매우 모호한 명제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자와 파동의 경계가 무너지고

여기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큰 폭으로 수정되면서 장이론이 득세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정보물리학이 됩니다.

 

정보가 물질의 실체라면

정보 덩어리로 되어있는 영혼 역시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수행의 일정 경지에 오른 분들은 삼라만상을 정보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유식론도 나오고 일체유심조 같은 얘기도 나옵니다.

정보가 폐쇄되면서 소립자가 되고 이것이 모여 원자와 분자를 이루어 물질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뇌과학은 뉴런의 전기적 신호에 의해 상념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면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해 왔습니다.

하지만 연구가 좀 더 깊어지면 뉴런이 쏟아내는 정보를 해석하는 미지의 존재가 등장할 것입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정보를 해석하여 판단하는 제3의 존재

이것이 바로 우리 몸에 실려 있는 영혼이 될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정보를 찾아내는 것에 맞춰

뇌과학에서 그 정보를 해석하는 실체적 자아를 발견해 나간다면

영혼은 베일에서 벗어나고 더불어 윤회론의 입지도 강화될 것입니다.

 

 

영혼이 실재한다면

그 영혼은 4차원의 어떤 특정 장소에 머무르던지

아니면 이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거처를 이동하다가 3차원 물질계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면

윤회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정말 저승 세계가 있는 걸까요?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는 사실일까요?

 

속어에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영혼이 있다면 당연히 저승 세계는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영혼이 저승에서 또 다른 삶을 이어갈지

아니면 일정 시간이 경과 한 뒤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부터는 추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불교의 육도윤회를 살펴봅시다.

육도윤회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6가지 명제인데,

고통받는 크기에 따라서 나눴다고 합니다.

 

그런데 굶어 죽은 아귀나 노여움에 가득 찬 아수라같은 건

시대에 따른 편향된 기준입니다.

또한 고통의 크기만으로 나눴다는 것도 매우 유아적인 발상입니다.

 

따라서 당시 세존이 힌두교(브라만교)에 만연한 육도윤회설을 방편으로 끌어다 쓴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철학에서 보는 윤회란

유유상종이란 말처럼 죽은 뒤에 자신의 영적 진동수와 유사한 세계에 머물다가

다시 육신을 입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는 어김없이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해체의 수순을 밟는데

역시 일정 시간을 보내면 자신을 구성하는 정보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다시 조일 수 있는 것이 물질이고, 그래서 저절로 윤회를 시도하게 됩니다.

 

존재를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윤회를 하는데

이때 인간의 영적 진동수

다시 말해 영력에 맞지 않으면 축생으로 태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존재를 연속하기 위해 차원을 바꿔나가는 현상이 곧 윤회입니다.

 

 

그러면 윤회를 하지 않게 되면 깨달은 것인가요?

 

윤회를 수행의 척도로 생각하는 건 불교나 힌두교의 오랜 풍습입니다.

그런데 이건 크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윤회를 끊었다고 아라한이 되고 붓다가 되는 건 아닙니다.

또한 윤회를 한다고 붓다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가령 여러분이 영화를 보고 있다고 칩시다.

영화에 너무 몰입해 주인공을 라고 착각하다가

얼마 뒤 자신이 관객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영화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주인공인 의 위치에 민감합니다.

사후에 지옥이나 극락에 갈지 아니면 윤회를 끊어 열반에 이를지는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실체가 없는 스크린의 환영이니까요.

 

이처럼 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 꾸며낸 착각이고

그렇기에 깨어나서 보면 그런 허깨비들이 윤회를 하든 말든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윤회란

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정보들이 이합집산 하는 현상이기에

그것들이 꾸며내는 신기루가 어떤 모양을 꾸며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윤회를 수행의 척도로 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참나에서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나를 찾게 되면 영화 속의 주인공에서 분리되어

관찰자의 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나를 찾았다는 분들은 자신은 늘 깨어 있기에

생각이 일으키는 환영에 끌려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윤회란 것도 문제 될 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참나는 영화 속 주인공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된 상태가 아닙니다.

참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수행을 통해 깨달아 붓다가 된 상태입니다.

 

생로병사와 번뇌망상에 고뇌하던 주인공이

알아차림을 통해 깨어남으로써 붓다가 되었고

이 장면에 흠뻑 몰입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된 것처럼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참나로 깨달았다는 분들은 알아차려 깨어난 상태를 늘 강조합니다.

깨어난 시간을 따지거나 심지어 깨달음에 등급까지 나눕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깨닫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에 몰입해 있을 때는 희로애락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다가

관객으로 돌아오면 그런 애욕이 사라지고 평정심을 되찾게 됩니다.

 

, 그러면 관객이 되었다고 이제부터 계속 관객으로 있게 될까요?

전혀 아닙니다.

 

영화관에 왔으면 당연히 영화에 집중해야지요.

집중을 넘어 흠뻑 주인공에 몰입해야지요.

어떡하든, 생각도 일으키고, 감정도 몰입하고, 심지어 번뇌망상도 뒤집어써야지요.

 

이렇듯 제대로 깨달으면

분별이 꾸며 놓은 이 세상의 영화에서 탈출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몰입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원래 붓다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붓다를 거론하고 붓다 상태를 고집하겠나요?

 

그렇기에 깨닫게 되면 화광동진이라고

그 무엇과도 격 없이 어우러지며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이쯤 되어야 번뇌가 보리고, 생사가 열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세존은 자신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일까요?

 

당시 사회는 해탈과 깨달음, 그리고윤회의 종식이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윤회를 끊었다는 표현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지

실제로 윤회를 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윤회란 그 자체로 실체가 없기에 수행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윤회를 끊겠다는 원력을 품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