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별숲] 싯다르타의 깨달음, 부처의 길, 중도를 발견하다. [낭독5회/배경음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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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1

2022. 6. 23.

 

 

 

싯다르타는 동인도 특권 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슈도다나는 왕이었고, 이모인 마하 손에서 자랐지요.

싯다르타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이모에게서

아름다운 여자를 소개받고 1년 뒤 결혼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야소다라였어요.

다행히 둘은 첫눈에 반했고,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행복해했죠.

 

그러나 이것과 별개로 해가 갈수록 싯다르타는

바깥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갔어요.

아내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바깥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솟구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죠.

 

해를 넘기며 거듭된 의문만이 쌓여가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이제는 정말로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모두가 슬퍼할 걸 알았기에 그의 마음도 찢어지게 아팠지만

그래도 결심을 하고 야밤을 틈타 비밀 문을 통해 궁을 몰래 빠져나갔어요.

 

싯다르타는 처음 2년 동안은 인도 동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초기 여행은

그의 전생들을 되풀이하고 복습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조금 달랐던 것이

이미 궁에서 풍족한 삶을 누려봤기 때문에

이 경험을 토대로 다른 경험들과 비교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는 금욕주의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금욕적인 삶도 몇 년 정도 경험하고 나자

그가 중국에서 보냈던 생에서 도달했던 결론에 또 한 번 다다르게 됩니다.

, 금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생에서 풍요롭게 지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점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세상 전부를 소유하고 온갖 신체적 쾌락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고

반대로 또 이 모두를 포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해도

이것 역시 자신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던 거죠.

 

이렇게 해서 싯다르타는 중도를 택하게 됩니다.

이 기간에 싯다르타는 이것 말고도 돌파구라고 할 만한 성취도 이뤘는데

명상에 통달하게 된 거죠.

 

물론 그는 명상만 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깨닫기 위해서는 에고를 지우는 일이 필수 불가결한데

명상만으로는 에고를 지우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명상을 부지런히 연습한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강하게 만들 수는 있어요.

 

그러면 마음을 준비시키고 훈련하는 일이 훨씬 쉬워지고

하나의 사고체계를 연습할 때 마음이 단련되어 있으면 더욱 효과적이지요.

 

싯다르타는 명상을 계속하면서 여러 전생의 기억과

당시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는 앞선 꿈의 생들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떠올렸고

그것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알다시피, 이미 배운 것을 결코 상실할 수는 없지만

이를 기억해내야 할 필요는 있죠.

싯다르타의 경우 이 일을 명상이 도운 겁니다.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방식 대신 중도의 도를 실천하고

명상을 하면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행할 때 따랐던 제자들 대부분이 떠났고

대신 그의 지혜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싯다르타는 어느새 구루로서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이런 것에도 무신경한 채 사람들에 반응할 때도

여전히 자신이 설파한 중도의 도를 적용했답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믿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은 자신이 생각한 것의 결과겠지만

어쨌든 수레 앞에 말을 제대로 갖다놓은 거죠.

 

궁에 있을 때 싯다르타는 교육을 통해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이해했어요.

브라흐만과 세상의 차이를 똑똑히 알았죠.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실재는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 비실재는 있던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듯이요.

 

하지만 싯다르타는 아직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 실제 경험은 없었기에

이 경험을 할 방법을 찾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평생 진실을 실제로 경험하는 걸 목표로 삼았던 거죠.

결코 만만한 목표가 아니었지만 그의 다짐은 확고했습니다.

 

싯다르타는 그가 노자 시대 때 실험해봤던 자각몽을 연습했습니다.

나중에는 싯다르타의 제자들도 자각몽을 연습하게 되는데

꿈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죽음의 순간에도 이 능력을 발휘해서 환생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고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라면

이 방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각몽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는 동안 꾸는 꿈을 자각하는 연습을 하면

자신이 깨어 있는 듯이 보이는 동안에도

자신이 여전히 꿈꾸고 있음을 깨닫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거든요.

 

싯다르타는 자유로워지길 원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했죠.

 

그리고 싯다르타는 또 다른 중요한 통찰도 하게 되는데

그 통찰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욕망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면?

그러면 뭔가가 없다는 이유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이 실재가 아니라면 무엇 하러 필요할까?

누구에게서도 무엇도 얻을 필요가 없다면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있다.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 고행을 할 필요도 없고

세상을 형태적으로 포기할 필요도 없다.

이 일은 마음으로만 할 수 있고 마음으로만 해야 하는 작업이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이것은 그가 얻은 다른 모든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한데

애초에 환영을 일으킨 그것

즉 에고를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거였어요.

 

힌두인들은 에고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에고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이것을 다수로 나타나는 하나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것은 바로 다중성의 세계

즉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이어서

에고를 해제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환영의 원인을 해제하는 방법도 찾아낸 거랍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생각과 믿음이 결합할 때 생기는

시너지 효과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믿기로 선택한 것을 실재라고 여기게 되고

이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했던 싯다르타는

세상에 두었던 자신의 믿음을 거둬들였고

몇 년 동안 연습을 한 덕분에

이제 세상에 아무런 믿음도 두지 않게 되었어요.

대신 싯다르타는 믿음을 두어야 할 마땅한 것

즉 실재인 브라흐만에 두었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세상을 실재라고 믿기를 멈춤에 따라

세상이 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더 약화되었고

그는 자신의 삶이 진정 꿈과도 같다는 것을

점점 더 실제로 경험하기 시작하죠.

 

계속해서 인도 동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고 에고를 지워나간 싯다르타는

세상을 물리적으로 부인하지 않고

심리적으로 부인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을 거부하고

세상을 넘겨다보았으며

환영의 베일 너머에서 느낄 수 있는

실재에만 믿음을 두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개리 레너드의 <예수와 붓다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