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ye Sophia] 혼자의 힘으로 과연 깨달음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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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2022. 6. 30.

 

 

세존의 마지막 유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뒤에

그동안 내가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아 의지하여 머물고

남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늘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열반경에 나오는 이상의 유훈은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의 지침이 되어 왔습니다.

정리하면

불법에 의지해서 자력으로 수행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세존 외에 다른 스승은 필요없게 됩니다.

불법을 제외한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을 금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자력 수행이 탄력을 받게 되고

스승을 찾지 않고 홀로 불법을 공부하며 수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쭙잖은 스승의 말을 듣는 것보다는

불경을 펼쳐 부처님의 가르침 되새기는 편이 낫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불경이란 것이

어디까지가 세존의 말씀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초기경전도

세존의 가르침을 옮기는 과정에서 숱하게 왜곡되어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세존은 시시때때로 방편과 대기설법을 폈기에 그 진의를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로 혼자서 불경을 공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존은 타인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수행이 녹록지가 않은 현실인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달마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서

선지식을 만나기 전의 불법은 모두 가짜 불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중생의 시각에선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알 수 없다는 선언인 셈입니다.

 

그런데 달마대사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 다시금 타인에 의지하는 풍토가 생깁니다.

어떡하든 깨달은 스승을 찾아야 하고

이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세존의 말과 배치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기인가요?

 

세존은 佛法(진리)에 의지하라고 했는데

만일 佛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불법인 셈이 됩니다.

따라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는 달마의 말은

세존의 유훈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존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선지식(覺人)

어떻게 구별하느냐입니다.

까막눈인 중생은 선지식을 구별할 안목이 없습니다.

인품이나 학식, 화려한 말솜씨 같은 것들을 잣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은

불교의 고차원적 깨달음을 평가할 잣대로는 부족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군가 선지식을 지정해 줄 필요가 있고

그래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 바로 법맥입니다.

법맥이란 쉽게 말해 공인된 선지식(道人)’인 것입니다.

 

달마의 선지식 찾기 선언은 법맥이 되어

혜가(慧可)로 이어지고, 이후 승찬과 도신, 흥인을 거쳐 혜능(慧能)에 이릅니다.

그리고 선종이 크게 번창하면서 그 한 줄기가 한국불교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법맥은 선지식을 찾게 해주는 나침반으로 봐야 할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세존의 유훈을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존은 분명히 남에게 의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뜻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지식이라고 주장해도

절대로 의심을 버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짜 선지식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목과 지혜를 키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선지식을 구별해 스승을 찾아야만 세존의 유훈에 부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남들이 추앙하는 법맥’, ‘법통’, ‘인가같은 것에 휘말린다면

자등명의 유훈을 어기고

더불어 법등명마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선지식의 가면을 쓰고 있는 수행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스승이 선지식이 돼야 합니다.

그러니 수행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스승을 선지식으로 포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수만 개의 사찰마다 수만 명의 선지식들이 자리하게 됩니다.

수행자들의 절만 이상은 견성을 한 것이 되고

이러다 보니 견성이란 것이 꽤 쉬운 것이 됩니다.

 

견성이 쉬운 것이 되려면 힌두교의 참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나의 이름을 불성으로 바꿔 쓰게 된 것은 필연입니다.

 

그리고 불성을 가리고 있는 번뇌망상만 제거하면

견성하여 깨우치게 된다는 논리도 따라붙게 됩니다.

번뇌망상의 뿌리인 분별을 없애기 위해 생각을 끊어야 한다는 발상도 연이어 나오게 되고요.

 

결국 자기를 돋보이기 위해 스승을 선지식으로 포장하고

이런 과정에서 저절로 힌두교의 수행교리에 흠뻑 물들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달마대사가 주장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백 번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로 인해 법맥이 바로 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는 반면에

힌두교의 교리가 절간에 횡행하는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당신은 세존의 유훈인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을 지키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지혜로서 끊임없이 선지식들을 의심하여

법통이나 인가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끝없는 의심 끝에 참된 선지식을 찾는다면

달마의 말처럼

自力他力이 하나가 되어

당신의 수행을 正道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