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제02강 반야심경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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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반야심경

2017. 5. 16.


  

안녕하세요, 반야심경 두 번째 강의가 되겠습니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으로 시작이 된다. 다시 말씀드리면 경에 설해진 배경이 있고, 그 다음에 질문자와 대답자의 문답이 있고, 그리고 이 경을 들은 사람들의 어떤 표정, 그리고 이 경을 널리 전하려고 하는 그런 서원, 이런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크게 나누면, 배경을 서분, 문답이 오고간 가장 중요한 내용을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 이렇게 나누어지는데,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서분과 유통분이 생략되어있다. 그래서 정종분만 독송하고 있다.

 

전체 다 갖추어진 것을 광분이라고 부르고, 이 정종분만으로 우리가 독송하는 것을 약본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독송하는 약본은 여러 번역본 가운데에서 당나라 때 현장스님이 번역한 현장역본을 우리가 지금 독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분에 어떻게 기록되어있습니까?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대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 중에 계실 때 여러 대비구와 많은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광대심심삼매에 드셨다.

그때 회중에 한 보살마하살이 계셨으니 이름이 관자재라 했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다 공했음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액에서 벗어났다.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합장공경하고 관자재보살마하살에게 사뢰었다.

선남자시여,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행을 배우고자하면 어떻게 닦아야 하오리까?”

그때 관자재보살마하살이 장로 사리불에 말씀하셨다.

 

이제 말씀하셨다고 다음부터 어때요? 우리가 지금 독송을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선정에 들어계셨다. 그 선정을 뭐라고 이름 했다? 여기서는? 광대심심삼매다. 그때 지혜제일인 사리부트라 존자가 바로 대승보살가운데에서 아주 공사상에 투철한 제법이 공함을 꿰뚫어보신, 이 관자재보살에게 질문을 했다. 대승의 공사상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 사리부트라에게 아주 친절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이제, 끝부분 여러분이 독송하고 있는

아재아재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사바하. 다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사리불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행을 이와 같이 행하느니라./

여기까지가 관세음보살이 말씀하신 거요.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세존께서는 곧 광대심심삼매에서 나오시어 관자재보살마하살을 찬탄하셨다. “옳다, 그렇다. 선남자여, 그러하고 그러하니라.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다행은 마땅히 그와 같이 행해야 하니, 이와 같이 행할 때에 일체 여래가 모두 함께 기뻐하시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장로 사리불은 크게 기뻐했고 관자재보살마하살 또한 크게 환희하시고 그때 회중에 함께 있던 천 인 아수라 건달바 등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여 믿고 받아 받들어 행했다. /

 

그러니까 질문자도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대답하시는 분도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직접 대답을 안하셨다하더라도 이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대답을 한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관자재보살의 그냥 입의 빌어서 했을 뿐이다. 이런 얘기에요. 이럴 때 부처님의 역할을 뭐라고 한다? 증명하셨다. 부처님께서 증명하신 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관자재보살이 지나치게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등장인물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그 진리를 이 경우에는 어떤 방편으로? 사리부트라와 관자재보살이 문답하는 형식을 빌어서 진리를 설파하셨다. 부처님께서 증명해 주시니까, 관자재보살이나 사리부트라 존자가 다 기뻐했다. 법문을 들은 대중들도 기뻐했다. 이 자리에 모양과 형상이 없는 저 하늘 사람들,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일체 신중들까지도, 다 기뻐했다.

 

그래서 이 부처님 말씀을 아주 받들어서 널리 세상에 전파할 것을 다짐했다. 이렇게 끝이 나 있다. 그러면 이 정중분만 가지고 또 이글을 분석해보자. 현재 이 정종분은 260자로 되어 있습니다. 경 제목만 가지면 270자고, 본문은 260자로 되어있습니다. 이것도 내용을 분류하면 한 3단락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러니까

 

/관자재보살~ 부증불감/ 반야심경 정종분의 내용(1)

여기까지는 대승의 요지를 관세음보살님께서 바로 설파하신 내용이에요. 대승의 요지를. , 대승불교의 요지, 공사상을 바로 설파하신 거다.

 

/시고~ 무지역무득/ 반야심경 정종분의 내용(2)

여기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이 소승불교에 사상을,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소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냐? 그게 아니라 소승불교도 똑같이 불교다. 그런데 왜 소승불교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얘기를 했느냐? 그것은 소승불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 말씀대로 행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 내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러니까 드러난 모양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좀 어긋났을 때가 있다. 이런 얘기요. 또다시 말씀드리면 소승불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 ,

 

불교의 가장 핵심사상은 뭐요?

연기법입니다.

그것을 다시 교리로 설명하면

무상과 무아에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아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아함경의 핵심사상은 무아사상이에요. 그런데 불교가 아닌 이 세상은 어떤 사상이냐? 유아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면서 유아사상의 관념에 젖어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무아사상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 무아를 유아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무아라는 용어는 써도

결국은 유아적 사고를 갖게 된다.

그러면 이것은 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용어를 쓴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진의는 아니에요.

 

이런 것을 우리가 뭐라고 그러냐? 언어와 문자에 매여 있다. 언어와 문자에 사로잡혀서 그러니까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선에서는 뭐라고 그래요?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마라.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는 완전한 진리의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불립문자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문자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문자의 그 형상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 위험을 경고한 거요.

이것을 또 잘못 알아 듣고

문자로 된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면 이건 치우치게 되는 거요.

 

이렇게 언어와 문자에 집착한 것을 불교에서는 법집이다. 이렇게 말해요. 내가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뭐라고 그래요? 아집이다. 이렇게 부릅니다. 그럼 부처님의 말씀은 아집을 버려야 된다. 타파해야 된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자기 상태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보면

진리를 볼 수가 없다.

마치 그것은 색깔이 있는 안경을 낀 사람이

벽의 색깔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저 벽이 희다.” 이거야. 그러나 내가 푸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저 벽을 보면, 푸르게 보입니다. 그럴 때 내가 푸르게 본다.” 이래야 말이 맞습니다. 안 그러면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이래야 맞아요. 그런데 자기가 안경 끼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저 벽 색깔은 푸르다.” 이렇게 되요. 저 벽 색깔이 푸르기 때문에 내가 푸르다고 인식을 한다. 푸른 것이 나의 주관이 아니고, 푸른 것이 객관이다. 객관이란 말은 푸른 것은 사실 그대로다. 진리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나

 

푸른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것은 내 안경색깔 때문에

나에게 푸르게 보인 거요.

 

이 안경 색깔과 같은 것이

업식이에요. 나의 업식이에요.

내 눈에 그렇게 보인 거다.

나에게 그렇게 인식이 된 거다.

내 업식에 의해서 내가 그렇게 안 거요.

 

그러면 사실대로 푸르게 보이더라도

, 내 눈에 푸르게 보이네. 내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 이렇게 말은 해야 되는데,

저 벽 색깔은 푸르다.” 이렇게 말해버린다.

, 주관을 객관화 시켜버린다.

이것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말해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자기의 주관이 곧 객관이 되어버려요.

자기 생각이 곧 진리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는 이 안경을 벗어야 됩니다.

안경을 벗었을 때만이 벽 색깔의 진실을 볼 수가 있다.

이 안경을 벗는다. 이것이 뭐냐?

아집을 버린다. 이 얘기에요.

자기의 사로 집힌 상태로부터 벗어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안경을 벗어본 경험이 없다. 이 사람은 벽색깔이 푸르다 그러겠어요? 푸르게 보인다고 그러겠어요? 푸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푸른 색깔의 안경을 낀 사람에게 벽색깔이 붉다.” 이러면,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도대체 저게 어떻게 붉으냐?” 이렇게 되는 거요. 여기에 붉으냐? 푸르냐? 갖고 심리를 가리는 논쟁이 된다. 갈등이 생긴다. 이건 양보가 될 수가 없어요. 합의가 될 수 없는 것은 붉은 것을 푸르다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 어떻게 사람이 거짓말을 하느냐? 그럼 같이 타협하자고? 아닌 것을 맞다고 해야 되느냐?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자기 생각을 버리라고 해도,

버릴 수가 없어요. ?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설법을 듣고 그런가보다. 하고 나가도 문 열고 나가면 어때요? “그래도 푸르다.” 이렇게 되는 거요. 설법을 들을 때는 , 내 눈에 붉은 게 보였나?” 이렇게 약간 돌아가다가 문만 열고 나가면 그래도 푸르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가 돈다.”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이 갈등이 해결이 안 됩니다. 마치 그것처럼 자기의 생각을 버려라.” 하는 것은 이제 이렇게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건 어느 정도 조금만 공부하면 이것은 극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 아상을 버리는 것,

아집을 버리는 게

곧 진리를 보는 거요.

 

그런데 진리라고 하는 것이

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상을 버리면 실상을 보는 건데,

허상이 아닌 실상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또 새로운 상이 생기는 거요.

 

전에는 자기 생각으로 진리를 삼았다면 이번에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진리를 삼는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이건 진리고 그것은 진리가 아니야. 이유는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저 벽을 보고 푸르다고 고집을 하는 것은 일정하게 설법을 들으면 어느 정도는 물러서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푸르다고 했더니 그게 아니다. 그럼 뭐냐? 희다. , 저 벽은 희구나. 희다는 것으로 아예 답을 정해버려요. 이것을 법집이라고 그래요.

 

진리는 그 어떤 색깔도 아니에요.

어떤 색깔로 보이는 것은

다 각자의 업식이에요.

 

그 업식을 벗어나면

그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얘기이지,

그 진실은 무슨 색깔이다가 아니에요.

 

이래서 소위 법집이 생긴다. 새로운 상이 생긴다. 새로운 진리라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 법집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실상을 보려면 이 법집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 이것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그대로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이에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형상화해서 거기에 집착해 버린다. 이러면 불교하고 멀어져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폐단에 대해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말씀인, 오온, 12, 18, 12연기, 사성제, 팔정도, 깨달음. 이런 것을 잘못 이해해 버렸다. 그래서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 또는 진리라고 하는 그런 용어에도 상을 짓고, 즉 모양을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 제법 무아다.

 

그래서 그 폐단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게 그 다음 문장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해석하면 대승이 소승 자체를 부정한다. 같은 불교 안에 이단논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거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진실로 접근해야 되는데, 그때 우리의 아집이 자기는 내려놓고, 다른 것을 하나 잡습니다. 불교다. 부처님이다. 진리라고 하는 다른 것을 하나 움켜쥐고는 그것으로 사실은 자기 고집을 또 하게 되는 거요. 제 생각이 옳다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딱 바꿔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어.”라는 잣대를 가지고 또 논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여기는

/시고 공즉무색/부터 오온에 대해서, 그리고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나오죠? 이것은 12처에 대해서, 그리고 /무안개무의식계/18계에 대해서. 이것은 나중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무무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12연기에 대해서, 그리고 /무고집멸도/는 사성제에 대해서, 그리고 /무지역무득/ 이것은 깨달음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또 실체화 시키는 거요.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할 것도 없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이 법집에 빠진 것을 바로 잡아서 제법이 공함을. 다시 말하면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인 무아로 되돌이키는 거다. 이것이 가운데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이무소득고~ 모지사바하/....반야심경 정종분의 내용(3)

그리고 다시 관자재보살만 이렇게 정진을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대승의 모든 보살들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대승보살만 그런 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 이 반야바라밀다 행이 위대하죠. 이 반야바라밀다행은 어떤 믿음보다도, 어떤 앎보다도, 어떤 실천보다도, 어떤 증득보다도 더 뛰어난 거다.

 

이것은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가르침이다. 이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대승사상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찬탄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260, 경의 내용이 아주 압축되어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주 내용이 어디 있다고 봐야 되요? 앞에 3줄이에요. 뒤에 얘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앞에 핵심사상이 있고, 이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이것은 이렇게 이렇게 위대한 가르침이다. 하는 내용이 뒤에 있기 때문에 핵심은 앞에 있는 3줄이에요. 이것을 갖고 우리가 지금 계속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 내용은 지금 다 단락을 지어서 설명할 것은 없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반야심경은 소승경전 대승경전 어디에 속한다? 대승경전에 속한다. 대승경전 가운데에서 반야부에 속한다. 그리고 원래 경전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경전은 정종분에 속한다. 그러니까 이 반야 600권 가운데에서 가장 짧고 요약된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또 서분하고 유통분까지 빠지고, 아주 정종분만 있습니다. 이 정종분을 다시 분류를 하면 크게 내용이 3단락을 되어지는데, 하나가 대승사상의 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입장에서 봤을 때, 소승이라는 말은 대승이 쓰는 용어입니다. 소승이 자기를 소승이라고 그럴까? 안 그럴까? 안 그러겠죠. 자기들은 테라밧다라고 그래요. 대승에서 소승이라고 부르는 거요. 소승이라는 말이 나쁜 말 아닙니다.

 

이 언덕에서 건너가는데, 건너 안가겠다는 사람은 수행자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것은. 그런데 건너가는데, 아무도 안 가. 그럼 라도 가야 되요? 안 가야 되요? 가야 돼. ‘라도 가야되고 나부터 가야 돼. 이게 소승이요. 좋은 거요? 나쁜 거요? 좋은 거요. 그런데

 

대승은 나부터 먼저가야 되고,

나만이라도 가야 돼. 이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나만 가서는 만족이 안 돼.

안 가려는 사람까지

갈 마음이 없는 사람까지 끌고 가야 돼.

그런데 이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그 원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내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데리고 가겠다.” 이 정도로 강하다. 이 말이오.

 

그럼 이것은 안 가겠다는 얘기에요? 아니에요. 안 가겠다는 얘기는 수행이 아니니까, 여기서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가는 것은 너무너무 간절한 원이에요. 그런데 끌고 가겠다는 원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내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이 말이요.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이것을 잘못 이해하시면 안 된다.

 

그러면 모든 대승이 어떠냐? 이쪽에서 그냥 놀아요. 왜 안 가느냐? “이 많은 사람들이 안 가는데 나 혼자 가면 안 돼지. 대중과 같이 해야지.” 이건 수행이 아닙니다. 오늘의 대승이 이게 폐단이에요. 이건 공부 자체가 아니에요. 이것은 그냥 저쪽에 가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해탈과 열반을 수행의 목표로 안 삼는 분들이에요. 그런데 어떤 다른 종교, 예를 들어서 어떤 종교는 천국에 가는 게 목표 아닙니까? 그죠? 그런 것처럼 우리 불교인은 어떤 게 목표에요?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인들 중에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한다.

이런 사람 몇 명 되요?

뭔가 조금 잘못되었어요.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는 과정에 딴 것도 조금 부수입으로 좀 얻어간다. 이건 뭐 있을 수 있는 얘기에요. 그런데 해탈과 열반은 포기해버리고, “돈을 얻기 위해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 건강을 얻기 위해서 나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공부한다.” 그럼 이것은 중생세계에서 놀겠다는 얘기에요. 고뇌에서 벗어나겠다는 게 전혀 아니에요. 이것은 돈을 통해서 해탈할 수 있다는 얘기와 같은 얘기에요. 이건 전혀 아니에요.

 

돈을 통해서, 돈을 많이 얻으면 해탈하거나 지위가 많이 높으면 해탈하면 부처님이 출가할 필요가 없지. 이것도 잘못 알아듣고, 돈이 없어야 해탈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이 해탈에는 돈이 있고 없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해야 된다. 그래야 공부에 효과가 있는 거요.

 

왜 절에 1020년 다녔는데,

저는 마음의 평화도 못 얻고, 자유로움도 못 얻고,

소위 말해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지 못합니까?

못 얻는 게 아니에요. 전해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안 삼고 있다는 거요.

 

그런데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안 삼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리화하느냐?

그것은 스님이 하는 거지,

우리 같은 재가신자가 어떻게 그것을 목표로 하느냐?

 

이렇게 하는 것은 불교를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대다수 사람은 괴롭습니까? 안 괴롭습니까? 괴로워요. 속박 받고 살죠.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안 괴로운 게 좋아요. “속박 받고 살고 싶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 그러니까 모든 중생이 다 사실은 해탈과 열반을 원합니다.

 

그런데 해탈과 열반을 원하는데, 즉 아픈 사람이, 그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데, 거기에 마약 같은 것도 있죠. 투여하면 잠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죠. 이런 방법은 그것은 건강해지는 방법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돈이 궁해서 괴로울 때 돈이 있으면 잠시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고뇌는 다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약과 같은 거예요. 이것은 완전한 치유책이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

 

완전한 치유책은

깨달음이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을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스스로의 경험, 즉 여러분들이 굉장히 고뇌하고 힘들고, “이게 사는 거냐? 이게 지옥이지?” 이럴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서

아무 가족관계의 변화도 없고,

재물상태의 변화도 없는데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난,

이런 경험을 크든 작든 하나를 딱 갖게 되면

이게 기적인 거예요. “이야, 정말 신기한 것이구나.”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이렇게 해결되는 게 아니고,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나의 고뇌가 사라진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이게 신심이오. 이 법에 대한 믿음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습니다.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에요? 못 믿는 사람이에요. 안 믿어지니까 믿으려고 노력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그냥 저절로 믿어지는 거지,

믿어야지가 아니에요.

 

이해해야지이해가 된다는 거요? 안 된다는 거요? 아직 안 된다는 거요.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이해를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뜨면 다 보이는 거요.

보려고 할 필요가 없어.

 

이게 좋으면 저절로 하는 거요.

그러면 해야지하고 각오하고 결심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 공부의 대부분이 뭐가 문제냐? 해야지하고 각오하고 결심하는 공부를 하거든요. 이렇게 공부하면 시간만 낭비합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안 되어서 괴롭다 하는 말이 나오는 거요. 아침에 일어날 때, 5시에 일어나기로 했다. 벨을 틀어놓고, “따르르릉하면 일어나면 되는데, 이불 밑에서 뭐라고 합니까?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지.” 각오하고 결심하는데 대부분 다시 잡니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라는 것은 일어나겠다고 굉장히 노력하는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드러난 현상, 겉을 보는 거고, 속을 딱 꿰뚫어보면 일어나기 싫다. 일어나기 싫다. 일어나기 싫음에 사로잡혀 있는 거요. 그러니까 일어나고 싶은 게 아니고, 일어나기 싫음에 사로잡혀 있다. 이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일어나야지하는 생각을 갖고는 못 일어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어납니까?

그냥 벌떡 일어나버려야 되요.

어떻게 일어난다고? 벌떡 일어나면 됩니다.

싹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면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지라는 것은 필요합니까? 없어집니까? 없어집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아직 못 일어난 상태에서 헤매는 소리에요.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 버려야 돼. ‘따르릉하면 싹 일어나버리면 되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해야 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시간만 낭비하고 그래서 힘들다는 거요. 그러니까 12시에 잤든, 1시에 잤든, 2시에 잤든, 3시에 잤든 그런 것은 따질 필요가 없고, 5시에 일어나야 된다면 이 말이야. 안 일어나도 되는 사람은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

 

자기가 일어나겠다고 딱 결정을 했으면

어떻게 일어난다? “따르릉~ 그냥 일어나버려야 돼.

피곤한데, 피곤해도 일어나야 돼.

졸리는데, 졸려도 일어나야 돼.

일어나기 싫은데요, 그래도 일어나야 되요.

어떻게? 그냥. 벌떡. 이렇게. ~ 나가버려야 돼.

그럼 번뇌가 딱 끊겨 버려요.

 

그런데 그 번뇌에 휩쓸려서 일어나기는 나야 되는데, 되는데~~~” 이렇게 하면 못 일어납니다. 이건 공부가 아니에요. “일어나야지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이 말이오. 이건 번뇌에 휩싸여 있는 상태에요.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 거요. 부부지간에 아내를 사랑해야지. 남편을 사랑해야지.” 이러고 지금 노력하고 있잖아. ‘해야지이 말은 사랑이 안 된다 이 말 아니오. 얄밉다. 이 말 아니오. 그러니까

 

사랑해야지하는데 놓여있으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냥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면 되요.

 

, 남자 인물 괜찮다. 말도 잘하네.” 체구가 작으면 아이고, 옷감 적게 들어서 좋다. 방도 덜 차지하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뭐한다? 생각을 하는 거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버리면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나오는 거요.

사랑해야지가 아니란 말이오.

 

그렇게 우리가 진실을, 그러니까 수행을 하는 방법이 지금 조금 잘못되어있어요. 첫째 목표를 제대로 안 잡고 있고,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 조금 본질에서 좀 벗어나 있다. 그러다보니까 애는 많이 쓰시는데, 게을러서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고, 애를 많이 쓰시는데도 힘을 못 얻는다. 얼굴에 기쁨이 생기고, 자유롭고, 그 다음에 자기 수준에서, 자기 가진 수준에서는 그래도 힘이 나오는.

 

비록 돈이 없어도 돈 가진 사람한테 부럽지가 않고,

비록 배운 게 없더라도 박사라고 부럽지 않고,

비록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 부럽지 않고,

이렇게 마음이 좀 뿌듯해야 된단 말이오.

잘났다고 자랑하는 거와는 달라요.

위축되지 않는다. 마음이.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이 좀 비난을 해도, 자기가 딱 살펴보고

내가 비난받을 만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나를 위해서 좋은 거죠. 그죠? 내가 돌이켜 참회하면 되고,

 

딱 살펴보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로 그냥 들으면 되요. ?

그 사람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를 내가 간섭할 수가 없어요.

그는 그의 업식으로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보고,

나를 이렇게 보라.”고 요구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것은 그의 문제니까.

이렇게 되면 내가 얼마나 편안해지겠어요.

 

또 칭찬을 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칭찬하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거기 빠지면 안 돼요.

그러면 교만해지죠. 칭찬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칭찬의 내용에 부합하는 거라면, 담담하게 그냥 들으면 되요.

 

칭찬을 듣는데 보니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그런 일 한 적도 없고, 그런 수준도 안 돼.

그러면 사양한다. “아이고, 무슨 소리 하냐?” 사양할 필요도 없어요.

그것 또한 누구의 업식이니까? 그의 업식이니까.

그 눈에는 내가 좋게 보인 거요.

좋게 보지마라.” 내가 말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좋다니까.

그럼 뭐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면 돼.

진짜로 내가 훌륭한 줄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비난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칭찬해도 크게 우쭐대지 않고,

이렇게 우리가 자기중심을 잡아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 그런 공부를 우리가 해 나가야 되는데, 그런 인생이 되려고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거다. 그런데 이거 공부를 해보고, 그대로 한번 실천도 해보고, 여러 개 해봤는데도 저는 전혀 그렇게 안 됩디다.” 하면, 미리 포기하세요. 이거로 끝내라 이 말이오.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데서 뱅뱅 돌면 시간만 낭비하죠.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확실하게 미련이 안 남아요. 기다 아니다가 분명해 진다. 그런데 대강하니까 안 되었는데도 또 미련이 생기죠? “내가 노력이 좀 부족했나?” 이래서 또 서성대고, 또 서성대고. 확실히는 안하고. 이러면 세월만 흐릅니다.

 

성냥불을 켤 때,

사아알, 사아알, 사아알, 사아알, 요렇게 백번하면 불이 납니까?

백번이나 했는데도 불이 안나. 천 번해도 안 납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일정한 강도로 탁! 켜면 불이 단박에 납니다.

횟수하고 관계없습니다. 절 오래 다닌다고 되는 거 아니에요.

 

경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성냥 많이 가져와서 긋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니까.

일정한 강도가 있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마음을 탁! 내야 되요.

그래야 이 업식을 탁! 벗어나지,

안 그러면 늘 자기 세계에 갇혀서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부처님을 이해하는 거요.

 

그러니까 내 상을 버리고,

내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를 해야 되는데,

자기 생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꿰어 맞춘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안 맞는 것은 버리고,

이렇게 자기 그림을 그려요. 이런 사람 많지?

 

절에 안 올 때는 시어머니하고 갈등이 없었는데, 절에 다닌 후부터는 시어머니하고 갈등이 생깁니다. ? 전에는 불교를 잘 모르니까, 어머니 하시는 거, 조금 못마땅해도 괜찮게 있었는데, 절에 다니면서 교리 공부해보니, “, 시어머니 하는 거 거건 안 맞아. 저건 사이비야. 저건 틀렸어.”그래서 시비가 생겨요. 그럼 이것은 뭔가 불교를 잘못 공부한 거요. 이거는 불교라고 하는 이름, 정법이라고 어떤 이름에 지금 집착하고 있는 거요.

 

전에 갈등이 생겼는데, 공부를 하고 보니까 이해가 되는 거요. “, 어머니는 저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구나.” 그래서 저런 신앙,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거구나. 이렇게 탁 이해가 되어버리니까, 갈등이 있다 갈등이 딱 없어져. 그러면 이게 불법에 조금씩 조금씩 귀의해 들어오는 격이다. 평가 기준이 그래요. 얼마나 많이 아느냐? 이게 기준이 아니에요.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이거에요.

 

많이 아는데 결과는 반대로 간다하면 지금 여기 두 번째 단락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처럼, 뭔가 자기주장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을 내세워서, 스님을 내세워서, 주장을 다시 하는 거요. 이것은 공부해보면 폐단이 생깁니다.

 

지금 부부지간에 남편 하는 거, 아내 하는 것을 가지고,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했단 말이오. 이럴 때는 상대적이죠? 옳다고 세워도 확실히 자신을 못해요. 이러면 싸움이 좀 적습니다. 이 자리에 와서 법문을 딱 들어보니까, 확실히 자기 생각이 맞아. 누구의 힘을 빌었다? 부처님의 힘을 빌었다. 스님 말씀 들어보니, 부처님 말씀에 내 생각이 확실해서, “저 여자가 문제야.” “저 남자가 문제야.” 이렇게 되면 다음부터 얘기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부처님 가라사대.” 이렇게 제기하는 거요. 이제 더욱더 내가 옳다는 것이 강구해져버렸다. 그런데 이 하는 말을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부처가 따로 있나? 내가 부처지. 이러고 몇 마디 배워서, 집에서 남편이나 아내가 절에 간다. 그러면 절에 갈게 뭐 있노? 다 내가 부처인데. 내가 부처니까 나한테 잘해라.” 이런 식으로 이것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늘 적용을 하지 않습니까?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에요. 말은 틀린 게 아닌데, 실제는 잘못되었다. 이게 법집이다. 이 말이오. 이 위험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아집을 버릴 뿐만 아니라, 법집까지도 타파해야 된다.

 

그래서 이 반야심경 내용은 아집을 버릴 뿐만 아니라, 법집까지도 타파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공부를 해나가시면 되겠습니다.

, 이렇게 반야심경의 배경에 대해서 여러분께 설명을 쭉 했는데요, 다음 시간부터는 본문에 들어가서 하나씩 하나씩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