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2강 불교란 무엇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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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7. 4.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꿈꾸는 줄 알아요? 몰라요? 모릅니다. 꿈에 강도가 칼들고 쫓아오면 도망가죠. 경험 있습니까? 그런데 뭐 하러 도망가요? 꿈인데. 도망가는 이유는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도망을 간단 말이오. 그런데 자다가 사람 살려하면 깨어있던 사람이 이렇게 보고 뭐라고 그럽니까? “새끼, 헛소리 하고 있네.” 사람이 강도가 쫓아와서 목숨이 위태로워서 살려달라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헛소리 하고 있네.”에요. 아주 자비심이 없죠. 비인간적이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 남 죽는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니 꿈인 줄 모르니까 즉, 그것이 그 꿈꾸는 그 시간 안에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요. 아시겠습니까? 현실이란 말이오. 허상이 허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실상이오. 그 사람을 탓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알고 그러는 게 아니오. 그 사람에게는 그게 현실이란 말이오. 같이 길을 가다가 어떤 환상을 본 사람은 내가 볼 때는 너 미쳤다.”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게 현실이에요. 그 사람에게는 명백한 현실이란 말이오.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자리를 뭐로 본다? 현실로 보는 것과 똑같은 거요.

 

그런데 깨고 나면 사실이 아니죠. 눈 딱! 뜨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아이고 꿈이었구나.” “에이, 꿈이네.” “꿈이네이게 헛거였구나.” 이 말 아니오. 그러니까 깨어야 꿈인 줄 알지 깨기 전에는 꿈인 줄 알 수가 없는 거요. 여러분들이 깨달아 봐야 내가 얼마나 무지 속에 있었는지 알지 그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지금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강도 만났다고 사람 살리라고 고함치는 사람보고 , 임마. 꿈 깨이러니까 귀에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겠어요? 귀에 안 들어오죠. 들리지도 않고, 설령 들었다 해도 거꾸로 화내겠죠. “미친놈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말이나 하지 말지.”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오.

 

그러니까 딱! 깨어야 , 이게 꿈이었구나.” 이래요. 여러분이 탁! 깨달아야 , 30년간 헛 살았구나. 괜히 쓸데없는 것을 내가 붙들고 있었구나. 아무 소용없는 것을.” 이렇게 탁! 다가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꿈속에서 해결방법은 내가 힘이 나서 강도를 때려잡아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힘 있는 어떤 존재가 와서 강도를 잡아주거나, 그렇지 않으며 힘 있는 존재가 나를 숨겨주거나 해결책이 이런 것 밖에 없죠. 거기에서는 미워해야할 강도와 나를 구해준 은인이 있단 말이오.

 

그러나 꿈을 깨면 에이 꿈이네.” 이럴 때는 강도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어요. 미워해야할 강도도 없고, 살려줬다고 고마워해야할 은인도 없고, 해결해야할 괴로움도 없는 거요.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는 게 아니에요. 해결할 과제가 없어요. 그러면 아까 있었던 것은 뭐냐? 그것은 꿈이에요. 착각이에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상태 하에서 그 강도를 쫓은 것도 아니고, 강도를 힘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누가 숨겨준 것도 아닌 상태에서 강도로부터 벗어나버린 거요.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 깨야, 꿈을 깨봐야 꿈인 줄 아는 것처럼, 아까도 안경을 한번 벗어봐야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에이, 안경 색깔 때문에 그랬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죠.

 

그런데 날 때부터 안경을 끼고 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안 벗은 사람은 그 벽색깔이 하얀데 내 안경색깔 때문에 파랗게 보인 거요? 본래 파래요? 본래 파래요.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안경은 즉, 개념은 날 때부터 끼고 나서, 자라면서 거기다 색깔을 변해가면서 한 번도 벗어본 적이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런 얘기가 귀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해서, 한번만 안경을 벗어본 경험이 있다면, 끼고 있더라도 한번 벗어봤다 이거야. 그러면 파라니, 빨가니 싸울 때도 어떤 생각이 들까? “혹시 이거 내 안경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죠. 그러니까 싸우다가도 내가 잘못 봤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돌아보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같은 꿈을 꾸면서 몇 번 깨 본 사람은 나중에 꿈속에서도 꿈일지 모른다.” 꿈을 꾸면서도 그런 생각해 본 경험이 있어요? 그럴 때 도망가요? 눈뜨려고 해요? 눈 뜨려고 합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딱! 드는 순간 도망가는 사람 없습니다. “, 꿈이다이런 생각만 들면 눈떠야지이러는데 눈이 잘 안 떠지죠. 하 눈꺼풀 참 이거 무겁습디다. 이래도 안 떨어져요. 딱 붙어 있어요. 그러다 어떻게 하다 으악! 하고 딱 떠보면 역시 맞아요. 그러니까 뜨려고, “이게 꿈이다하는 것만 알면, 조금 시간이 금방 떠지느냐? 조금 시간이 걸리느냐의 차이밖에 없지 떠집니까? 안 떠집니까? 떠져요.

 

오늘 우리가 허상을 보고 있다. “, 눈떠야 되겠다. 깨달아야 되겠다.” 이렇게 딱 생각하면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깨달음에 집중을 하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즉시 눈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조금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즉시 딱 은하에 관념이 벗겨지는 사람도 있지만, 10년 만에 30년 만에 와서 눈뜬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런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아이고 저 사람 30년이나 걸렸네.” 하지만 본인한테는 1초나 30년이나 똑같아. ? 본인은 거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는지 본인은 별 생각이 없어요.

 

딱 거기 집중되어 있는 사람은 1, 금시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1시간씩 잔 경우도 있고, 1시간 잔 줄 알고 눈을 떠 보니 10분밖에 안 지난 경우도 있죠. 그래서 다 뭐라고 그러냐? 스승이 그렇게 말할 때, “딱 꿈깨라 하는 작업이 된 사람은 눈뜨고 와서 스승에게 눈뜬 소식을 이야기 했을 때, ‘그가 잠시 있다가’” 이렇게 말하는 거요. 잠시30년이 될 수도 있고, 1초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잠시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해석해서 아이고 모든 스승은 다 잠시 만에 뜨는데, 나는 이거 안 떠진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뜨려고 해야 떠지지,

꿈이라는 생각을 놓쳐버리고

뜨려고 안하는데 떠질까? 안 떠질까? 안 떠져요.

 

그런데 우리는 어쨌든 다 꿈꾸고 깨 보고, 꿈꾸고 깨보고, 이렇게 수도 없이 경험을 하는데도 이정도 3040년 잘 때마다 꿈꾸고 아침이면 깬 경험을 해도 꿈꿀 때 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거 꿈이구나.” 이런 생각을 못하죠. 그냥 꿈에 빠져버리잖아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내 삶에 있어서 눈을 떠본 경험이 불교를 안 접해도 수도 없이 있습니다. “아이고, 이거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잘못 알았구나.”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살려서, 그것을 딱 잡아서 , 이거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거 정말 근본적으로 돌이켜봐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사는 거요. 그게 뭐냐? 매일 자고 매일 꿈꾸면서도 꿈속에 빠져서 , 꿈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못하고 사는 거와 같아요. 그러니 못 깨닫는 거요. 깨달을 기회는 수도 없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가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 그것은 밝은 길은 아주 가기가 쉬워요? 안 쉬워요? 쉽죠. 길이 분명해요? 안 해요? 분명하죠. 길이 간단해요. 그런데 어두운 깜깜한 밤에 가게 되면, , 길을 모르면 복잡해요. 도대체 동서남북을 구분 못하니까 헷갈려요. 정말 한발 한발 디디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세상살이가 엄청나게 어렵고, 복잡하고 그래요. 그런데 눈을 딱 뜨면 세상살이가 간단하고, 분명해지고, 아주 쉬워집니다.

 

불교는 깨달으라는 말은 세상을 쉽게 살라는 거요? 어렵게 살라는 거요? 쉽게 살라는 거요. 쉽게 살라는 것은 대충대충 살라는 것으로 알면 안 돼요. 눈감고 대충대충 가면 큰일 나요. 눈뜨고는 아주 쉬워. 그러니까

 

불교의 특징이 3가지요.

첫째가 간단하다 가르침이.

두 번째는 아주 분명하다.

세 번째 아주 쉽다.

 

앞으로 복잡한 불교 아니에요. 그것은 눈뜬 소식이 아니라 눈감은 소식이오. 어려우면 그것은 눈뜬 소식이 아니고 눈감은 소식이오. 그게 불분명하면 복잡하게 흐리멍텅하면 그거 불교 아니에요. 아주 명료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고 간단하고 쉬운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전깃불 탁 켜면 이 방이 싹~ 다 보여요. 눈 있는 자 다 보이죠. 그런데도 나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이런 사람 있어요. 어떤 사람이오? 눈감고 있는 사람이오. 아무리 바깥이 밝아도 눈감고 있으면 안 보여요. 눈감고 있는 사람, 이 불을 켜놔도 눈감고서 안 보인다고 외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종류가 있다고 그래요. 한 종류인데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난 게 두 종류에요. 하나는 나 다 안다. 나 다 알았다. 깨달았다. 난 다 알았다.” 이런 사람이오. 두 번째 사람은 난 아무것도 모른다. 아이고, 난 모르겠다.” 이런 사람이오.

 

남편이나 아내가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아내가 아이, 몰라요.” 이거 듣고 싶다는 말이오? 듣기 싫다는 말이오? 듣기 싫다는 말이오. 또 한사람은 다 안 다니까.” 이래요. 이 사람도 듣고 싶다는 말이에요? 듣기 싫다는 말이에요. 듣기 싫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잘 살펴보면 다 안다는 사람하고 모르겠다는 사람은 듣기 싫다는 사람이오. 듣기 싫다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가 않습니다. 이게 구제불능인 사람이오.

 

팔이 부러졌거나, 다리가 부러졌거나, 어느 종교에 갔거나, 무슨 계급이거나, 무슨 피부빛깔이거나, 언어가 뭐거나, 남녀나, 지식 아무 관계가 없는데, 그 싫다는 생각을 꽉 잡고 있는 사람은 아무튼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싫다는 생각을 주로 어떨 때 하느냐? “난 기독교인이니까” “난 절에 처음 왔으니까” “난 오래 다녔으니까.” “나는 중이니까뭔가를 하나 잡고 그것을 거부한단 말이오. 이것을 법성게에서는 하늘에 비가 내립니다. 그러면 빗물이 필요한 사람 바가지 들고 나가면 다 받을 수 있죠.

 

그래서 큰 바가지 가지고 나간 사람 많이 받고, 작은 바가지 가지고 나간 사람 적게 받고, 근기에 따라 다 받아갑니다. 다만 그릇 양에 따라서 많고 적음이 있지 다 물을 받아가요. 그런데 하루 종일 서 있었는데, 노력만 크고 옷만 젖고, 한 방울도 못 받아간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 바가지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 바가지 거꾸로 떡 들고 있는 사람만 엄청나게 애는 쓰는데 한 방울도 안고여요. 바가지를 거꾸로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이게 아까 싫다하는 마음을 낸 사람이오. “듣기 싫다.” “나는 모른다.” “아이고, 모르겠다.” “지난번에 했던 그 얘기 하네.” 이런 사람이오.

 

그래서 지난번에 했던 그 얘기 하네.” “, 똑같은 얘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대승에서는 뭐라고 그래요? 증산만 비구라고 그래. 증산만 비구. 부처에 오르기 직전에 이를 정도로 도가 높은데도 이 증상만 때문에 해탈을 못해요. 이거 무서움이죠. 그러니까 계율을 파한 것은 참회하면 되지만, 법에 이렇게 증산만을 내면 이것은 깨달음에는 불가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