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7강 중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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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7. 11.


  

다 합장하시고, 프린트물 있죠. 맨 위에 있는 삼귀의를 오늘은 따라하지 말고 저와 같이 하겠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중도에 대해서 말씀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쾌락의 길/이 있다. 쾌락의 길이라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을 /세속의 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수행자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게 뭐냐?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사 입고 싶을 때 사 입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함으로 해서 즉,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 해서 생기는 만족감, 그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습니까? 뭔가 하고 싶을 때, 그것을 하고 나면 뭔가 얻고 싶은데 그것이 얻어졌을 때 만족감이 있죠. 그 만족감을 우리가 행복이 이래요. 그런 것 같습니까?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끝없이 추구해 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행복이 얻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죠. 그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되는데, 조건이 안 된단 말이오. 그 하고 싶은 것이 뜻대로 안 돼. 결혼을 하고 싶은데 마음에 맞는 남자가 없다. 애기를 낳고 싶은데, 애기가 안 낳아진다. 집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 혼자 살고 싶은데 이혼을 안 해준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안 되어서 괴롭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뜻대로 안되면 어떻게 되는가?

불행해 지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늘 우리들에게는 뭐가 오고 있습니까?

불행이 오고 있다.

 

이게 잘 살펴보면 뭔가 모순이 있어요. 30년 전에 여기 계시는 분들의 부모님세대에서 아이들 고등학교라도 시켰으면 좋겠다.” 논을 몇 마지기 샀으면 좋겠다. 집에 양식이나 넉넉했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 이런 것들 했어. 이것만 했으면 나한테 무슨 걱정이 있으랴. 그런 것들, 요즘 대부분 다 갖추어졌습니까? 안 갖추어졌습니까? 갖추어졌죠.

 

그러니까 옛사람들이 볼 때는 오늘 우리들의 삶은 괴로움이 거의 없는 삶이라는 거요. 특히 여자 분들은 옛날에 새벽에 일어나서 나무 때서 밥해서 가족들 밥 먹이고, 아침에 들판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와서 또 늦게까지 밥하고, 그 빨래 전부 이고 겨울에 냇가에 가서 빨고, 밤 되면 길쌈하고. 그런 생활에서. 거기다 애들 8명씩 낳아서 키우고, 이런 거 생각하면 요즘 아파트에서 애기 하나나 둘 낳아 키우는 거, 일이에요? 일 아니에요? 일도 아니죠.

 

그런데도 젊은 분들한테 옆에 한번 여쭈어 봐요.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고, 인생살이가 지금 힘드는지.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만족하고 그러면 행복해 진다. 그래서 그 길을 찾아가는데, 문제는 그 욕구가 그 욕망이 자꾸자꾸 커진다는 거요. 멈추지를 않는다는 거요.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욕망이 양쪽으로 커질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자꾸 바뀌어요. 옛날에는 밥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다. 조금 있다가 쌀밥 먹었으면 좋겠다. 조금 있다가 소고기 국에 먹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국이 아니라 스테이크로 먹었으면 좋겠다. 거기다가 그냥 고기도 아니고 안심으로 먹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자꾸 바뀐단 말이오. 그러니 끝이 안 나죠. 그래서 그 행복을 추구하는 그 길에 늘 욕구불만이 뒤따라옵니다. 그러니까

 

행복을 추구해가면서

늘 불행을 맛보는 거요.

이게 오늘 우리들의 삶이다.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지금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뒤따라온다.

 

여러분들이 좀 더 자유롭기 위해서 한 행위들이 즉, 좀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큰집을 구했는데 그 큰집 지킨다고 외출도 못하고 집에 탁 묶여 있다 이 말이오. 이런 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데 도리어 자유와 행복이 자꾸 줄어든다.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술의 예를 들어볼까요? 술이 먹고 싶다. 먹었어요. 그것으로 끝납니다. 또 먹고 싶죠. 또 먹었어. 그럼 그거로 끝납니까? 똑 먹고 싶죠. 그럼 또 먹었어요. 그것은 이제 처음에는 내가 먹고 싶어서 술을 먹었지만 조금 취하면 술이 술을 잡아당기죠. 그 취해서 술을 잡아당긴단 말이오. 이렇게 되면 뭐가 됩니까? 중독이 되요. 중독. 이 중독이 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건강을 해치고, 노동력의 질을 떨어뜨리고,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든다. 그렇게 양만 늘어나는 게 아니오. 질이 늘어나요. 막걸리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맥주로, 양주로, 뭐로, 이렇게 또 질이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애써서 벌은 돈들이 다 거기에 탕진이 된다. 그래서 끝이 안 납니다. 결국은 술 귀신이 붙죠. 그래서 내가 술을 먹은 데서 이것이 자꾸자꾸 지난 뒤에는 중독이 되면 술이 주인이 되고 사람이 종이 되요. 술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한잔 먹고 와서 마누라 저거 두드려 패버려하면 시키는 대로 사랑하는 마누라 패기도 하고, “애 저거 두드려 패버려.”하면 애도 패기도 하고. 이렇게 술의 종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 주객이 전도된다.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이때 술에 사로잡힌다.

 

술이 없으면 괴롭다. 이렇게 되는 거요. 술이 없으면 괴롭다. 이런 사람은 밥을 먹을 때도 술이 없으면 못 먹고, 친구 집에 갔는데도 술 한 잔 대접 안 받으면 섭섭하고, 친구가 찾아왔을 때도 술 한 병 안 들고 오면 섭섭하고. 이렇게 되는 거요. 모든 기준이 그 술에 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술보다 더한 중독이 있어요. 뭘까요? 돈 중독. 그죠? 남의 집에 갈 때 돈 얼마 가지고 선물 사가야죠. 애기들이든 누구든 여러분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애인에게든 선물을 줘도 다 요즘 묻는 게 뭐요? “얼마 줬어?” 이러죠. “이거 얼마짜리야.” 그 사랑이 그 정성이 다 거기에 들어있는 화폐가치로 전부 환산이 된다.

 

우린 지금 꽉 중독이 되었어요. 옛날에는 양반이네 상놈이네하는 이런 게 더 높은 가치였죠. 그래서 옛날에는 상놈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쳐줬습니까? 안 쳐줬습니까? 안 쳐줬어. 부인이 술집에 가서 돈 벌었다 그러면 쳐줬어요? 안 쳐줬어요? 안 쳐줬어. 그런데 요즘은 술집을 해서 벌었든 뭘 해서 벌었든 그런 거 따집니까? 안 따집니까? 안 따집니다. “한 달에 얼마 버는데?”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어디까지 들어왔어요? 절에 까지 들어왔어요.

 

스님, 요즘 잘 됩니까?” 이래요. “뭐가요?” “절이 잘되느냐고요.” “, .” 절이 잘 되느냐 할 때, 어이해야 잘 되는 거요. 첫째 신도수가 많으냐? 둘째는 보시금이 많으냐? 이 두 가지죠. 이게 장사 잘되나?” 하는 거 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아요. “장사 잘되나?” 이게 손님이 많으냐? 이익이 많으냐? 이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법회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손실이 날 수도 있고, 사람이 한두 명이 올 수도 있고, 그러나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났고, 헤어지려는 사람이 헤어지지 않았고, 마음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런 것을 가지고 그 절이 있을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평가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평가가 안 된다. 잘되는 기준은 이미 상업적이에요.

 

어디든지 그래요. “병원 잘 되나?” 할 때도 환자가 많으냐?” 이 말이죠. 환자가 많다고만 됩니까? 알짜배기라야 되지. 신도도 알짜배기 신도가 뭐요? 돈 있는 굵직굵직한 신도가 많아야 알짜배기 신도요. 그러니까 이게 일반 회사든, 장사든, 병원이든, 그렇지 않으면 종교단체까지도 평가가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돈이 최우선이오. 거기 중독이 되니까 이게 너무 자연스럽게 들리는 거요. 옛날 같으면 이게 자연스럽게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이 돈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고, 그에 따라서 대답도 하고 맞장구를 치고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 스님도 돈이 없으면 괴롭습니까? 안 괴롭습니까? 괴롭죠. 부처님 당시에서는 돈이 없어도 부처님이 괴로웠어요? 안 괴로웠어요? 안 괴로웠지. 그런데 저는 없으면 괴롭다.” 하면 이미 나도 모르게 돈에 중독이 되어 있다. 술 먹는 사람이 술이 없으면 괴롭듯이. 그럼 여러분들이 무엇에 중독이 되어있는지 이제 알 수 있겠죠. , 화장품 없으면 괴롭죠.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담배 없으면 괴롭습니까? 그런데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 없으면 괴로운 사람 많죠? .

 

그러니까 그렇게 쭉 살펴보면 내가 왜 중독이 되었어.” 하지만, 중독이 된 게 굉장히 많다. 자가용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죠. 차 없으면 아예 나가지도 않아버려. 그러니까 이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인데 도리어 이렇게 괴로움을 만들고 있다. 이거야. 그래서 이 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완전하게 해결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꾸로 된 길이다. 전도몽상이다. 이런 얘기요.

 

부처님도 이 길을 태어나서 자라면서 29살 때까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셨습니다. 물론 이 길을 갖고는 완전하게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심은 사춘기 때 했지만, 그러나 무슨 다른 길이 없었고, 다른 길로 가려했지만 부모님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냥 그 길만 갔다. 사람들은 다 회의하면서 결혼생활을 회의하면서, 사업하면서 회의하면서, 자식 낳고 회의하면서, 돈 벌어보면서도 회의하면서도 다른 길이 없으니까 자신이 회의하면서도 자식한테는 똑같은 길을 가르치고 선생은 제자에게 똑같은 길을 가르친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것은 아니다.’ 이렇게 반대를 하고 나선 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거다. 이것은 마치 불과 같은 거다. 그러니까 이것은 애초에 생길 때 억눌러 버려야 된다. 이것은 손끝만큼도 그 욕망을 따라가면 안 된다. 욕망은 마귀고 욕망은 사탄이고, 욕망은 마왕이다. 이렇게 규정을 짓고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

 

아주 극단적으로 가면 자신이 자리에 앉을 때 우리는 돌멩이가 있나, 가시가 있나 둘러보고 앉습니까? 그냥 앉습니까? 둘러보고 앉습니다. 비단 방석은 고사하고 그렇게 살피는 것마저도 뭐다? 몸을 편하게 하려는 욕망을 따라는 거고, 세수하고 목욕하는 것도 그렇고. 빨래하는 것도 그렇고. 머리 자르는 것도 그렇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도 혓바닥의 욕망을 따라가는 거다. 이렇게 해서 앉을 때 절대 자리를 돌아보지 않고, 목욕을 절대 하지 않고, 아주 나무열매나 풀뿌리나 거친 음식만 먹고, 이렇게 가는 거요.

 

그런 사람한테는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 이런 것은 아예 얘깃거리가 안 되는 거죠. 잠은 천막치고 잘 건가? 그런 얘기도 안 되겠죠. 앉을 때 자리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로 한 사람인데 거기에 어디 잘 거냐? 나무 밑에 잘 거냐?” 이런 것을 붙일 수가 없단 말이오. 이렇게 함으로 해서 그 욕망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을 쾌락주의의 반대해서 /고행주의/라 이렇게 말해요. 고행주의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서 행복을 좀 맛봅니다. 즉 쾌락주의에 지친 사람들, 그것을 통해서는 도저히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없자, 이 고행의 길을 걸어서 어느 정도 자유와 행복을 맛보기도 하고, 그래서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그 고행을 끝없이 계속 해나간다. 그런데 이 욕구라는 것은 욕구를 한번 살펴보세요. 욕구를 따라가면 점점점점 커지는 특성이 있죠. 그런데 또 어떤 욕구는 이렇게 딱, 충족 시켜버리면 더 이상 안 일어나는 것도 있어요.

 

반대로 욕구가 생겼을 때 아예 그것을 억눌러서 경험을 안 해버리면 즉,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욕구가 경험이 없다는 말은 중독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욕구가 없어져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억누르기 때문에 더욱더 커지는 게 있어요. 한번 해버리면 끝날 거를, 억눌러 놓으니까, 억누르고 있으면 그게 자꾸 억누름 속에서 커지는 게 있어요. 배고픔은 먹으면 끝이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배고픈 거 한번 억눌러 봐요. 해결 될 거 같지만 또 또 또 떠오르죠. 졸리는 것도 계속 자면 계속 끊어질 거 같은데, 아무리 자도 잠이 자꾸자꾸 늘죠. 반대로 아예 안 자버리면 아예 안 올 거 같은데, 안자는 쪽으로 밀고가도 그게 안 끊어집니다.

 

담배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 피운 사람은 중독이 안 들죠. 그것은 피웠기 때문에 중독이 되는 거요. 이런 경우에는 딱 끊으면 되는데, 어떤 것은 억누르기 때문에 더욱더 커져요. 여러분들이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화를 내버리면 숫제 간단한 게 있는데, 거꾸로 가슴속에 넣어서 더욱더 확대 재생산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람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착한 여자입니다. 착한 여자. 착한 여자는 아무리 속에 불만이 많아도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이렇게 살 거든요. 그런데 그게 탁 터질 때면 누구도 말릴 수가 없어요. 그때는 진짜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지죠. 보따리 싸서 그냥 나와 버려요. 그런데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은 미리 늘 불평불만을 하니까 저 불평불만 많구나하고 짐작을 할 수가 있으니까, 무슨 대책이 나오는데.

 

, 여러분들은 화를 참아보니까 괴롭습디까? 안 괴롭습디까? 괴롭죠. 갖가지 욕망을 참아보니까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롭죠. 그러니까 그것을 쫒아가도 괴롭고 억눌러도 괴롭다.

 

부처님이 이 고행을 통해서 해결을 하려고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아마 최고로 고행을 하셨을 거요. 또 부처님이 세속에 있을 때는 이 세상사람 중에는 아마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욕구 충족의 길을 향해갔죠. 양쪽 끝을 다 가 보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을 발견하셨어요.

 

그러니까 29살 때까지 간 길이 우리와 같은 욕구충족의 길이었고, 거기서 6년 동안은 바로 금지의 길, 억제의 길,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뼈골만 앙상한 그런 죽음의 직전상태까지 갔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도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행의 길을 갈 때나 고행의 끝 간 데 없이 갈 때나, 반대로 욕구충족이 끝 간 데 없이 갈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 이 욕구충족이 끝 간 데 없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뭡니까? 왕이에요. . 왕은 세상에 부러움의 대상이죠.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고행이 끝 간 데 없이 간 사람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에요. 여러분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죠?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존경을 합니다. 조금 모순 아니오. 그런데 부처님이 두 가지를 다 버리셨다. 두 가지를 다 버리셨다. 두 가지를 다 버려버리고 제3의 길을 가셨다. 요즘 제 3의 길 많이 사용되죠.

 

자본주의의 길이 사실은 쾌락의 길, 사회주의의 길이 마치 고행의 길 같은 거요. 그 두 가지를 다 버린, 3의 길, 요즘 영국, 독일, 이런 데서 제3의 길, 3의 길. 이러잖아요. 지난 50년 동안 두 가지 길을 걷고 물고차고 냉전구조에서 싸우다가 제3의 길로 찾아간 거요. 그런 것, 그런 얘기가 있죠. 부처님이 고행과 쾌락의 두 길을 다 버리고 제3의 길을 갔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중도/. 이렇게 말합니다. 뭐라고요? 중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