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8강 중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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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7. 12.


  

3의 길을 가는 데 그것을 /중도/다 이렇게 말해요. 뭐라고요? 중도다. 이 중도가 뭘까? 중도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고행이나 쾌락은 우리가 추구하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에 도달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삿된 길이오. 잘못된 길이다. 그래서 이것을 양단, 양극단이라고 그래. 양극단. 또는 양변이라고 그래.

 

그런데 그 두 가지를 버린 이 중도의 길은 목적지, 내가 추구하는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가장 완벽하게 도달한다. 그래서 이 중도는 다른 말로 /정도/라고 그래요. 정도, 바른 길이다. 이 정도에는 8가지가 있다 해서 앞에 8자를 붙이면 뭐가 됩니까? 팔정도가 된다. , 그러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한번 해봅시다.

 

술로부터 내가 자유롭고 싶다. 이 술로부터 내가 완전하게 자유롭고 싶다. 이게 내 목표요. 어떻게 해야 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이게 과제란 말이요. ,

 

술이 먹고 싶어요?

그럴 때 먹는 것이 술로부터 자유로움 입니까?

먹고 싶지만 안 먹는 것이 술로부터 자유로움이에요?

안 먹는 게 자유로움이다.

 

, 술은 먹어야 돼. 이게 세속의 길이죠. “,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노?” 술 안 먹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이렇게 우리가 반문을 한단 말이오. “사업을 하면 술을 먹어야 되고, 또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면 한 잔 해야 되고, 생일 때도 술이 있어야 재미가 있지, 술은 먹어야 돼.” “술은 먹어야 돼.” 이게 우리가 말하는 세속의 길이다. 그런데 그 술은 먹어야 돼?’ 하지만, 술 때문에 갖가지 부작용이 많이 나타납니까? 안 나타납니까? 나타나죠. 그러니까 이 술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한잔 먹고 취해서 소위 말하는 사음도 할 수 있고, 한잔 먹고 취해서 화나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도둑질을 할 수도 있고, 살생할 수도 있고, 나머지 계율이 다 술 때문에 생길 때도 있어요. 계율을 파하는 경우가. ‘술을 먹어야 돼.’ 이렇게 생각했을 때 술에 내가 어떻게 얽매이는지 한번 보세요. , 친구 생일 파티 갔는데 술이 없어. 그러면 , 왜 술이 없어?” 이러죠. 친구 집에 오래간만에 찾아갔는데, 차만 내놔. “, 오래간만에 왔는데 술도 한잔 안주나?” 술에 얽매여 있습니까? 안 얽매여 있습니까? 술에 얽매여 있죠. 늘 술에 얽매여 있단 말이오.

 

? 술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술이 없으니까, 늘 없는 경우 술이 없으니까 술을 찾게 되니까 술에 얽매여 있다 말이에요. 반대로 술은 안 먹어야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 스님께서 청정하게 수행하신다.” 이런 얘기를 듣고 우러러 보는 마음으로 삼배를 드리고 보니까, 스님 앉아있는 뒤 벽장에 술병이 쪼로로록 있는 거요. 보면 분별심이 납니까? 안 납니까? 나죠. “아니 수행자가 왜 술을?” 이런단 말이오.

 

그러니까 술이 없어야 되는데 여기 술이 있다 이거야. ‘술이 없어야 되는데여기 술이 있으니까 그 술을 보자마자 걸리는 거요. 둘을 놔버립니다. 둘을 다 놔버리면 술이 있어야 돼.’ 하는 생각을 놔버리게 되면 술이 없어도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술이 없어야 돼. 하는 생각도 놔버리면 술이 있어도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면 그는 술이 있든지 술이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요. 이 사람이 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해가 좀 되세요?

 

두 가지를 다 놔버린다. 술을 먹어야겠다. 술은 먹지 말아야겠다. ‘겠다하는 게 뭐냐? 의지란 말이오. 의지를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행이라 그래. 행은 뭐의 원인입니까? 업의 원인이에요. 그러니까 먹어야 된다. 먹지 말아야 된다.’ ‘먹어야 겠다. 먹지 말아야겠다.’ 하는 둘을 놔버리는 거요. , 의지를 놔버리면 행을 버려버리게 되면 그의 삶에서는 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게 불교 옛날 용어로 하면 /무위/라 그래. /해도 함이 없다/ 허공에 새가 날아갔지만, 그 자취가 없는 것처럼 해도 함이 없다. 그것을 선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어쩌구저쩌구 하면 /방하착/ 이러죠. /그냥 놔라. 놔버려라. 둘을 다 놔버려라. 생각을 놔버려라./

 

그러니까 선사가 쥐를 한 마리 놔놓고 선방에 있는 수자들이 다툰단 말이오. “이게 동당 쥐다.” “아니다. 이게 서당 쥐다.” 이러고. 그러니 선사가 쥐를 쥐고 한마디 일러라. 제대로 이르면 쥐가 살 거고, 제대로 못 이르면 쥐는 죽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동당 쥐다’ ‘서당 쥐다’ ‘죽어야 된다.’ ‘죽이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선사가 목을 탁 잘라버려. 목을 잘랐다는 것은 뭘 말하냐? 분별을 놔라. 이거야. 지금 그런 생각 갖고 기다 아니다 하는 생각 갖고는 깨달음의 길에 들 수가 없다.

 

왜 이 중도의 길을, 중도의 길로 가면 깨달을 수가 있고, 그 실제의 세계가 어떻기 때문에 우리가 중도의 길을 가야 되느냐? 이것은 밀접하게 결합이 되어 있습니다. 술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술 그 자체는? 술을 먹는 사람은 술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건강에도 좋고 혈액순환에 좋죠. , 한쪽에서는 술은 나쁜 거죠. 술은 거기 중독성이 들어있어서 이렇게 이렇게 나쁘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 실제로는 술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술일뿐이에요.

 

거기에는 독이라 할 것도 없고 약이라 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먹으면 약이 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될 때도 있는 거요. 그게 바로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거요. 술 그 자체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고 그것을 공이라 그래. 공한 거요. 공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서는 어떤 조건에 처하게 되면 그게 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안에 독성도 있고 약성도 있어서 한번은 이렇게 나타나고 한번은 저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본래 아무런 성품도 없어요.

 

그게 어제 얘기한 것 하고 비유를 하면,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있지 않는데, 인연을 따라서 서울 가는 길이 동이 되기도 하고 서가 되기도 하고 북이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한다. 여러분들은 누구냐? 공이요. .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연을 따라서 남자하고 관계를 맺으면 아내가 되고, 어린애하고 관계를 맺으면 어머니가 되고, 또 어떤 사람하고 관계를 맺으면 누나가 되고, 어떤 사람하고 관계를 맺으면 여동생이 되고. 전철을 타면 승객이 되고. 절에 오면 신도가 되고. 학교가면 학부모가 된다.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 나타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그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그것에 사로잡혀서

나는 엄마다. 나는 선생이다. 나는 학부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인연을 따라서 잠시 잠시 나타는 나는 것을 가지고

아 이것은 약이다. 이래서 약성이 있어서 약이다. 이것은 독성이 있어서 독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오.

 

주먹을 가지고 사람한테 쳤다. 이게 잘한 일이오? 잘못한 알이오? 인연을 따라 틀리죠.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해서 따라갔어요. 여자는 싫다고 자꾸 하는데 남자는 자꾸 좋다고 따라갔어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가 좋다고 껴안으려고 그랬어. 여자는 싫다고 그래.

 

그런데 어떤 길 가던 남자가 보니까 이 남자 멱살을 잡고 한 대 때려버렸어. 남자가 볼 때는 억울합니까? 안 억울합니까? 억울하죠. 이 남자 나쁜 사람이죠. 그런데 여자가 볼 때는 구세주죠. 좋은 사람이죠. 요즘 같이 다 외면하고 가는 시대에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얼마나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남 연애하는 데까지 와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겠어. 남자가 볼 때는 이렇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선악이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여기서 보면 선이 되고

여기서 보면 악이 되고

이러는 거란 말이오.

 

, 그러니까 본질은 어떠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실체가 없다.

그것을 근본교리에서는 무아다. 이렇게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다. 이렇게 말해요.

 

이게 인정이 됩니까?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는. 다만 행위가 있을 뿐이다.

 

그 행위가 나에 견주어서

나의 어떤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잘했다. 잘못했다. 선이다. 악이다 이렇게 되는 거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절에 다니는 한 사람 꼬셔서 교회 데리고 갔어. 그럼 교회 쪽에서는 잘한 일이오? 잘못한 일이오? 잘한 일오. 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참 나쁜 사람이오. 절에 다니는 사람 굳이 데려갈 게 뭐 있어. 이렇게 되는 거요.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왔어. 집에서 아내가 보면 쓸데없이 돈 버리고 시간 낭비했다고 그러지만, 그가 다니는 단골집 여자주인은 어떻겠어요?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요즘 같은 불황기에 그래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오셔서 보태주고 간단 말이오.

 

이해가 좀 됩니까? 그런데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또 이해가 안 될 거요. ? 선악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다 그러면 당장 어이해야 됩니까? 당장. 이렇게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우선 자꾸 자기 현안 문제로 가면 빠지거든요. 자기한테. 그러니까 조금 떨어져서 자기 문제 아닌 남의 문제를 얘기 들어보면 다 맞는 것 같죠. 그것부터 먼저 공부해야 돼. 그렇게 해서 조금씩 당겨와야 돼.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 안경을 끼기 때문에 가까이만 오면 헷가닥 해버린단 말이오.

 

그럼 다른 얘기 해봅시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아이가 공부는 못하는데, 그냥 내 놀러 다니고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못하는데, 그 아이를 서울대학교 넣어달라고 계속 도선사 와서 기도하고 여기 영주대 와서 기도하고 계속 그래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볼 때 아이고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면 들어가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고 욕심이 많아서 쓸데없는 짓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해서 누군가에게 빌어서 그런 사람이 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면 이 세상이 잘 돌아가겠어요? 어지러워지겠어요?

 

그러면 태어날 때 몸이 약간 불편해서 약간 지능이 모자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신체가 약간 문제가 있다든지 그러면, 특히 신체보다도 정신적으로 약간 질환이 있으면 그런 부잣집 아들인데, 또는 부잣집 딸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런 아들딸이 사위나 며느리를 아주 좋은 대학교 나온 인물도 잘생기고 똑똑한 여자를 구하려고 계속 선보러 다니는 것 보면, 저래서 될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안 들어요? 들지. 거기 만약에 우리 딸이 속아서 걸리면 큰일 나겠죠.

 

그런데 각자는 다 그렇게 해요? 안 해요? 그렇게 하죠. 우리 다 그렇게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의 바램이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헛된 것들을 계속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이 늘 혼란스럽고 세상이 혼란스러운 거요. 부처님이 우리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가르침을 폈어요? 혼란을 안정시키려고 가르침을 폈어요? 안정시키려고 폈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전부 그 세상이 더 혼란해 지는 것을 부처님보고 제발 좀 해달라고 이렇게 매일매일 빌잖아요. 그래서 제가 보통 스님, 기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러면 물어보죠. “뭣 때문에 기도합니까?” “그것을 왜 물어요. 그냥 방법만 가르쳐주면 되지.” 쥐가 쥐약 먹겠다고 나한테 기도를 하겠다면, 말려야 될 거 아니오.

 

그러니까 화가 자처되는 것을 아세요? 기도를 통해서 화를 집으로 초청한다 이 말이오. 화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죽어라하고 기도하는 사라들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선 가기 전에 무조건 가자, 가지전에 길이 똑바른지를 좀 점검해 보자. 지금 그 시간입니다. 길을 좀 점검하고 여러분들 며칠 동안 강의 들을 만 한 건지 점검을 해야 되고, 나도 강의를 할 만한지 점검을 좀 해야 된단 말이오.

 

왜냐하면 서로 생각이 안 맞는 사람끼리 앉아 있으면 시간낭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정 작업을 좀 해야 되요. 며칠. 그렇게 해서 출발을 딱 하면 수행을 하면 수행이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겠죠.

 

, 그러면 깨닫지 못한 세계와 깨달은 세계를 이렇게 나누어서 몇 가지만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는 생멸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게 있어요. 맞습니까?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물건도 하나 만들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그렇죠. 생멸이 있다. 이거 아주 분명한 겁니다.

 

그러면 3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얼음으로 만든 조그마한 구슬 3개를 요런 그릇에 담아 줬어요. 애가 얼음구슬을 가지고 놀아요. 그러다가 놔놓고 바깥에 가서 친구하고 2시간쯤 놀다가 들어와서 보니까 구슬이 없어요. 물만 담겨 있어. 그럼 애가 뭐라고 얘기할까요? “엄마, 내 구슬 어디 갔어? 구슬이 없어졌어.” 이러겠죠. 그리고 또 뭐라고 그럴까요? “왜 물이 여기 생겼어?” 이럴 거란 말이오. 아이는 구슬이 없어졌다. 이게 멸이요. . 물이 생겼다. 이게 생이란 말이오. 아이는 생하고 멸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분명하죠. 이게 생멸관이오.

 

아이는 왜 얼음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물이 생겼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아이는 얼음과 물이 다르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 얼음은 돌멩이 같은 거고 물은 기름 같은 거라고 전혀 다른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개라고 알고 있었다. 별개. 각각이 별도의 존재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얼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또 물이 생겼기 때문에 본인은 그렇게 생각해서 얼음이 없어졌다.” “물이 생겼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이게 우리가 보는 세계를 상징하는 거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조금 철이 들어서, 또는 2시간을 잠깐 얼음보고 잠깐 물을 볼게 아니라, 그 컵에 담긴 얼음구슬이 녹아서 물 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다 지켜보고 있어요. 긴 시간 동안. 전체적으로 다 지켜봤으면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습니까? 얼음이 물로 변했습니까? 얼음이 물로 변했다. 얼음이 물로 변했다는 것은 얼음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은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얼음과 물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니까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 이렇게 관찰이 되었고, 전체로 장시간을 지켜보니까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는 것을 보니까, 얼음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알게 되었단 말이오. 그러면 이쪽은 잘못안 것이고, 이쪽은 제대로 안 거죠. 그러니 얼음이 없어졌고 물이 생겼다. 이것을 생멸이라고 그러고, 얼음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은 생긴 것도 아니다.

 

없어진 것도 아니고 생긴 것도 아니다. 하니까 생긴 게 아니라니까 생긴 것을 부정해야 되니까 불생, 없어진 것도 아니니까 불멸. 그러니까 실제의 세계는 불생불멸이요. 그런데 우리가 잘못 알고 사물을 관찰하면 생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말이오. 제 말 이해되세요? 그러면 불생불멸이라는 말 이해하시겠어요? 불생불멸하다는 말은 영원하다 이런 말이 아니라, 생이 아니면 멸이 아니다.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 이게 불생불멸이오. 그럼 실제의 세대는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냐.

 

그런데 가짜의 세계, 잘못 관찰한 세계에서는 어떠냐? 생이 있고 멸이 있는 거요.

 

, 부분만 관찰하고,

물 따로 관찰하고, 얼음 따로 관찰하고, 또 잠깐만 관찰하면

생 따로 있고 멸 따로 있는 것처럼,

생이 있고 멸이 있는 것처럼 알게 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서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아 그것은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구나.

이렇게 알게 되요.

 

그래서 범부중생은 생멸관에 빠지고,

보살이 보는 세계는 불생불멸이의 세계란 말이오.

 

어려운 것 같은데 쉬워요? 어려워요? 쉽죠. 너무 당연한 얘기죠. 그러면 이 생멸이 있는 세계는 왜 생멸이 있다고 봤느냐하면 얼음하고 물이 따로따로라고 봤어요. 얼음은 얼음이고 물은 물이다. 이게 뭐냐? 아라는 거란 말이오. .

 

얼음은 얼음의 실체가 있고,

물에는 물의 실체가 있다.

이게 아란 말이오. 아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었으니

얼음이다. 물이다. 따로 말할 게 없죠.

그러니 이건 뭐요?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여기는 얼음이라 할 것도 없고,

물이라 할 것도 없다.

, 얼음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고,

물이라고 할 실체도 없다.

 

다만 인연화합에 의해서

잠시 얼음의 모양이 되기도 하고

잠시 물의 모양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공이다.

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 실제 모습은 그렇다.

 

아편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먹으니까 중독이 걸리고, 감기 몸살 걸린 사람한테 조금 주니까 금방 병이 나았어. 진통이 심한 사람한테 주니 진통이 멎었어. 또 어떤 사람은 먹었더니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 이렇게 그 양이나 그 사람의 경우나 조건에 따라서 나타나는 증상이 다 다르단 말이오.

 

이러이러한 조건에서는 약이라고 불리고, 저러저런 조건에서는 독이라고 불리고, 이런 데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리고 이렇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존재 자체는 어떠냐? 실체가 없다. 이것은 무아, . 그런데 그것이 인연을 따라서는 갖가지가 될 수가 있어요. 그것을 여러분들 뒷면에 보세요.

 

법성게에서 이것을 뭐라고 그러냐? 불수자성수연성. 그래요. 법성게 6번째 문장에서 이런 문자 나오죠. 불수자성, 스스로의 성품, 자성은 스스로의 성품이거든요.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 이 세상 만물은 나다하는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이게 뭐요? 무아다. 이 말이오. 법의 실상은 공이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제일 첫 구절에 법성원융무이상.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그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게 모양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이 말이오.

 

불수자성,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수연성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가 이루어진다 이 말이오.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서울 가는 길은 동이다 서다이렇게 어떤 정해진 길이 없다. 인연을 따라서 인천사람은 동이 되고, 춘천사람은 서가 되고, 수원사람은 북이 되고,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아무 빈틈이 없지 않습니까. 논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