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10강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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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7. 18.



프린트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삼보.

 

/그대들은 지금부터 무인 광야를 가게 되는 터이니 여러 가지 공포를 맛볼 것이니라. 만약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를 마음속에서 이와 같이 염하라. 여래는 응공, 정등각, , 세존이시다 라고. 그렇게 염하면 그대들의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가 설하신 가르침은 현재에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그대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교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의 교단은 잘 수도하는 사람들의 집단,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복전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 그래서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가. 만약에 기독교인들이라면 자신이 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것을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 갈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해서 또 교회에 의지해서, 또 신부님이나 목사님에 의지해서 그곳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종교, 그러한 사상에서는, 거기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단 말이오.

 

또 마르크스 사상 같으면 마르크스 사상 나름대로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죠. 이 세상에는 어떤 단체나 조직, 철학사상에서는 각각 다 나름대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불교는 그런 재해단체들과 같은 인간들이 찾아낸 방법들이니까 비슷한 요인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유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느냐?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게 빌거나 얻어서 자유와 행복에 도달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입장. 어리석은 자기 마음을 깨우쳐서 바로 안온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 공부를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럼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공부를 해 나아가는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느냐? 지난 우리가 정리했던 게 있죠. 불교라는 것은 깨달음이다.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해서 그분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인이라면 그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정리를 해보면 중요한 것을 3가지로 뽑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깨달은 이. 깨달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해서 그들을 깨닫기 위해서 무엇인가 가르침을 펴야 한다. 그러니까 깨달은 자, 깨달은 자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3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보배다 해서 /삼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은이 붓다, 깨달은이의 가르침 다르마,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 상가/ 이것을 우리가 인도의 원래 말로는 /붓다, 다르마, 상가/라고 말하고 한문으로는 /, , /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일반적인 용어로는 /깨달은이, 깨달은이의 가르침,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러니까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어떤 절대자도 아니고, 어떤 신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사상이나 이념도 아니에요. 이것을 가장 중요시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두려움 속에 있다 하더라도 인생이 마치 사람이 없는 광야를 가는 것과 같은 그런 삶에다가 지금 비유했을 때 거기에는 결국은 방황과 두려움이 있다. 괴로움이 있다. 그럴 때 깨달음을 생각하고, 그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깨닫겠다고 노력을 한다면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무인 광야를 가게 되는 터이니 여러 가지 공포를 맛볼 것이니라. 만약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를 마음속에서 이와 같이 염하라. 여래는 응공, 정등각, , 세존이시다 라고./

 

여래는 부처님을 말하는데, 그분의 다른 이름이 응공_모든 괴로움을 떠난 자, 정등각_일체를 깨달은 자, _깨달은이, 세존_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 이런 뜻이거든요.

 

/여래는 응공, 정등각, , 세존이시다 라고. 그렇게 염하면 그대들의 공포가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가 설하신 가르침은 현재에 당장 효능이 있는 것.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 능히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그대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또 그대들은 교단을 이와 같이 염해라. 여래의 교단은 잘 수도하는 사람들의 집단,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 그리고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복전이다라고. 만약 그렇게 염한다면 너희들의 공포는 곧 사라지리라./

 

, 그래서 오늘은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인들은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이 같이 모였죠. “모여서 무슨 행사를 하려면 왜 행사하느냐?” 이거야. 깨닫기 위해서.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무슨 행사를 한다. “건물 이거 왜 짓느냐?” 깨달음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이 문화 공연 왜 하느냐?”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행사를 할 때도 이것을 맨 먼저 확인 합니다. 그래서 어떤 행사든 시작할 때 삼귀의례를 한다. 삼보에 3가지 보배에 내가 귀의하는, 돌아가 의지하는 마음을 먼저 내죠. 그럼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러죠. 이것은 바로 깨달은이를 가장 존경하고, 나도 깨달은이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나도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거기에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두 번째는 어떻게 깨닫느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절에 안다녀도 이론상으로는 깨달을 수가 있죠. ? 석가모니 부처님도 스승이 없는데 깨달았으니까 그것을 생각해본다면 누구나 다 다른 방법으로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분은 처음에 혼자서 그 깨달음의 길을 갔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그래서 그분이 깨달음의 길을 가서 거기에 도달한 뒤에 돌아봤더니 그렇게 많이 해맬 필요가 없더라. 그래서 거기에 오는, 거기에 올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러니까 바로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다. 그러니까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다 그 깨달음의 길로 가는 친구들이다. 이것을 서로 확인하는 작업이 뭐요? 삼귀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어떤 행사든지 시작할 때 삼귀의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의식이 되고, 결국 문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요식행위가 되어서 딴생각하고도 목탁치고 삼귀의부터 하게 되죠. 원래 그랬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불교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이 삼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 프린트물을 보면서 조금 정리를 해 봅시다.

 

/삼보는 불법승을 말한다. 빨리어로는 붓다, 다르마, 상가라고 말한다. 우리말로는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있는 불교는 종류가 여러 종류입니다. 2500년 정도의 역사가 지나고, 그리고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전파가 되다보니까. 즉 역사적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서 불교가 조금씩 이렇게 변했어요. 즉 문화가 변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불법승에 대해서도 무엇을 부처라고 할 거냐. 뭘 법이라고 할 거냐. 무엇을 승이라고 할 거냐 하는 개념규정에 있어서, 크게는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이렇게는 차이가 없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할 때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 할 것인가는 조금씩 다르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스리랑카, 버마, 방글라데시, 타이, 캄보디아, 이런 쪽에 있는 불교를 지역적으로 따져서 남방불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가 문화적으로는 어쨌든 2,500년 전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불교의 원형을 가장 많이 그대로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쓰는 언어도 스리랑카 사람이든, 버마사람이든, 타이사람이든 자국말로 안하고 이 경전을 다 인도당시에 언어인 빨리어로 배워서 경전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틀려도 다 경전은 똑같고, 발음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통하죠. 옷도 조금씩 색깔이 틀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황색이고, 하나짜리이고, 지금도 이 사람은 절에서 밥을 해 먹지 않고, 가서 탁발을 해서 먹고, 하루에 한 끼 먹고. 나름대로는 굉장히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부심이 굉장합니다. 우리가 진짜 불교다. 이런 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불교를 테라밧다라고 그럽니다. /테라밧다를 번역하면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는 진짜배기다. 이런 뜻이에요. 근본이다. 진짜 배기도 이러니까 다른 사람은 또 가짜배기 같고 지역 같은 인상을 주죠. 우리는 다 가짜배기에 속합니다. 이 사람들이 볼 때는.

 

이 테라밧다, 근본불교. 북방에 있으면서 또 대승불교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 보고 뭐라고 그러느냐? 지역적으로는 남쪽에 있다고 남방불교, 또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소승불교라고 불러요. 소승불교권. 이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 우리가 소승이다.” 이렇게 말합니까? 아니오. 그것은 대승불교가 붙여준 이름이지 소승불교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말했는지 못 알아듣습니다.

 

테라밧다. 근본불교다. 이 근본불교에서는 어떻게 삼보를 정의하느냐? _석가모니부처님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 세상에서 깨달은이는 오직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행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러면 이 사람들 교리에 맞습니까? 안 맞습니다. “깨달을 수 있다.” 이 말은 맞는데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여기에 안 맞습니다.

 

우리가 깨달아도, 최고로 깨달아도 그들의 정의로는 언어가 석가모니 부처님만 붓다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은 아라한이라고 부릅니다. 뭐라고 부른다고요? 아라한. 사실은 아라한도 부처님의 10가지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얘기를 하다보면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언어 문제죠.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특별히 높여서 붓다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은 완전하게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조금 다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혼자서 깨달았고,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일단은 완전한 깨달음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제자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급에 놓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거 모르면 같은 불교인들이 만나서 서로 논쟁하기기 쉽다. 그러니까 그들이 쓰는 붓다는 우리가 보통 쓰는 붓다라는 개념하고 조금 다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다, 불이다 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말한다. 지금부터 2600년 전에 태어나셔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셔서 이 완전한 깨달음을 길을 우리들에게 처음 열어놓으신 그분만 뭐라고 부른다?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은 여기에서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됐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