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11강 삼귀의 2

댓글 0

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7. 19.


 

다르마, , 또는 진리라고 말하는데, 진리는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이 있을 수가 있겠죠. 그러나 이 분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제자라는 말은 신도도 다 포함됩니다.) 불자들에게 그 고뇌에 찬 질문을 했을 때 거기에서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을 고대로 모아서 기록해 놨단 말이오.

 

이것을 수트라, ,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금 말할 때는 팔만대장경 안에 이 사람들이 인정하는 수트라는 아함경, 아함경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아함경만 그들은 경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만 그들은 다르마, , 이렇게 규정을 한다.

 

그리고 승이라고 말할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그래서 옷 모양도 그분처럼, 또 그분의 가르침을 다 읽고 외우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길을 가고 그분이 행했던 행을 그대로 따라하는 요런 사람들만 뭐라고 한다? 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재가신자인 불자들은 승은 될 수가 없다. 불자는 불자라도 승은 아니다.

 

왜냐하면 벌써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눈이 열렸다면 이미 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벗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가사 입고 이미 길을 떠나버린단 말이오. 깨달았니 못 깨달았니 해도 이렇게 머리 기르고 세속에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집착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것은 승의 대열에 넣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하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다? 후원하는 사람, 집단정도로 본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조금 규정을 폭을 넓혀서 규정을 짓는다. 모든 깨달은이는 다 부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깨달은이는 모두다 부처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만 계시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실 수가 있다. 이 우주에는 이 지구에만 사람이 사는 게 아니고, 다른 다른 다른데도 엄청나게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고, 어떤 데는 우리 인간보다도 훨씬 더 고도한 문화를 갖고 있는 그런 세계도 이 우주에는 무한히 많다. 이렇게 대승 불교인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 세계 세계 마다 다 부처님이 계신다. 그래서 저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아미타부처님이 계시고, 저 동방유리방세계는 약사유리광여래가 계시고, 또 어디 에는, 어디 에는, 어디 에는 부처님이 많이 계신다. 이분들도 다 뭐다? 부처님이시다. 또 이사바세계도 역사적으로, 이것은 공간으로 말하고, 시간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에 2만겁 전에 가섭부처님이 출현하셨고, 또 그 전에 구나함부처님이 출현하셨고, 그 또 전에 구루손불이 출현하셨다.

 

이 세계가 이루어졌다가 사라지고 이우러졌다가 사라지는데, 이 이루어졌다가 사라지는 이 이전에 전에 이루어졌을 그때에도 부처님들이 계셨다.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도 수없는 부처님이 출현을 하신다. 시간적으로 모두 출현했고, 출현할 모든 부처님, 공간적으로 무한한 세계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도 다 부처님이다.

 

불법승할 때는 불에는 그 모든 부처님을 불이다. 이렇게 규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분 부처님을 공경합니까? 여러 부처님을 공경합니까? 여러 부처님을 공경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만 다르마가 아니고, 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도 다 다르마다. 그 다음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만 상가가 아니고 바로 이 모든 부처님들의 제자도 다 상가다. 어떤 불교에서 그렇게 생각한다? 대승불교에서.

 

그러니까 이 대승불교와 테라밧다 사이에 이렇게 개념, 소승불교에서는 조금 범위가 좁고, 대신 아주 근본을 중요시하고,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 불교가 전수되어 나가도 어떤 형식이나 문화 같은 것을 잘 바꾸지를 않고 그대로 고수하는 측면에, 대승불교는 형식이라든지 문화 같은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한국 것 받아들이고, 일본에 가면 일본 것 받아들이고, 중국에 가면 중국 것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은 지키지만 이런 것들은 포용성 있게 대하죠. 그러다보니까 인도나 인도이외의 불교가 전래가 될 때, 인도보다 오히려 문화가 조금 비슷하거나 떨어지는 쪽은 테라밧다가 전수가 되는데, 인도하고 문화가 대등하거나 더 높거나 이럴 때는 인도 문화를 고수하면 그쪽에서 잘 안 받아들여질 거 않겠어요. 그죠.

 

문화에 대해서 조금 개방적인 대승불교가 중국에 쉽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런데 있다. 중국 사람들이 생각할 때도, “, 부처님은 인도에만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 중국에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한국에 있는 사람도 한국에도 부처님이 출현할 수도 있고, 또 옛날에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런데 테라밧다 불교적 입장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게 전파되는 데는 오히려 대승불교가 다른 문화권으로 전파되는 데는 용이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 그 다음에 삼보, 3가지 보배 삼보를 3가지로 규정을 합니다. 이것을 삼종삼보라고 그래요. 3가지 종류의 삼보가 있다. 그래서 33보라 그러거든요. 첫째, 뭐냐? 동체삼보다. 동체라는 것은 한 몸이다. 이 말이에요. 같은 거다. 불법승삼보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하나로 돌아가면 근본은 하나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이것은 어떻게 정의되느냐?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또는 불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 마음 깨달으면 그게 곧 부처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자기마음 깨달으면 부처에요.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다르마, 법이라고 하는 것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이 고요하면 그게 바로 법이다. 승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청정하면 승이다.

 

내 마음 깨달으면 부처요,

내 마음 고요하면 법이요,

내 마음 청정하면 승이다.

 

그러니까 일체는 다 한마음에 있다. 이런 입장의 삼보를 뭐라고 한다? 동체삼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동체삼보다.

 

그 다음에 별상삼보가 있습니다. 별상삼보다. 이런 교리 같은 것은 안 외워도 되요. 별상삼보라는 것은 서로 모양을 달리한다. 불 법 승이 모양을 서로 달리한다. 이 말이오. 법신, 보신, 화신은 불보다. 법신, 보신, 화신은 불보에 속한다. 불보라 할 때 불보가 구체적으로 뭐냐? 법신 보신 화신이다.

 

그러면 법신이라는 게 뭐냐?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에 속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말을 하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화신이라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거나 정진을 할 때 여러분과 뭔가 교감하는 것, 여러분들이 그 느낄 수 있는 부처님. 그것을 뭐라고 하냐? 보신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 다음에 진리 그 자체, 진리 그 자체를 법신이라 이렇게 불러요. 부르기를. 법신은 진리 그 자체를 말하고, 내가 진리 그 자체와 교감을 할 때 그 느껴지는 교감하는 그 진리를 보신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것을 교감을 해서 내가 이렇게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는 내가 또는 여러분들이 부처가 되었을 때, 이 한 사람, 한 사람은 뭐라고 말한다? 화신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하늘에 달이 있다면 달 그 자체를 비유를 든다면 법신에 속하고, 그 달빛은 보신에 속하고. 우리가 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달빛을 보고 느끼는 거죠. 그 다음에 그릇에 물을 떠놓으면 그릇마다 다 달이 하나씩 떠 있죠. 이것을 화신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금덩어리 자체가 법신이라면 그 금의 빛깔이 뭐다? 보신이다. 그리고 금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팔찌, 반지, 목걸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뭐라고 한다? 화신이다. 이렇게 의미를 규정하면 그래요.

 

법신은 청정하다. 해서 청정법신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신은 두루 원만하게 다 이렇게 내 마음을 비우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다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원만보신이다. 이렇게 말하고,

화신은 그 모양을 수도 없이 이 세상에 인연을 따라 나투기 때문에 천백억 가지로, 그러니까 무한히 그 몸을 나툰다. 이래서 그 무한하다는 것을 옛날에는 천백억 이렇게 표시했어요. 천백억화신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것을 또 이름을 붙여서

법신은 비로자나불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신은 노사나불이라고 붙이고,

화신은 석가모니라고 붙였어요.

 

그래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부른단 말이오. 그러니까 법신, 보신, 화신이 불보다. 우리가 불보라 할 때 부처님이라 할 때 그 부처님은 어떤 것이냐? 법신 보신 화신을 불보라고 한다.

 

그러면 법보라 할 때 그 법보는 뭐냐?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의 미묘한 이치, 그리고 그 분의 원만한 갖가지 행, 그리고 그 분이 증득하신 깨달음, 이것을 한문으로 뭐라고 하냐? . , . . 이렇게 말해요. 부처님의 교---과 그분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의 이치와 그리고 그 분의 원만 구족한 갖가지 행과 그리고 그분의 증득하신 깨달음. 이 모든 것을 법보라고 한다.

 

그러면 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지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지금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죠. 그런데 이게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면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삼보로 해석할 때 그게 맞고, 어떤 삼보로 해석할 때는 그게 안 맞다. 이런 얘기요.

 

별상삼보는 법신, 보신, 화신을 불보라고 하고, 교리행과를 법보라고 하고, 그다음에 성문 사향사과 팔배현성을 승보라고 한다. 이렇게 별상삼보는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문의 사향사과 팔배현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

 

여러분들이 평소에 화를 벌컥 벌컥 잘 내죠. 그런데 왜 화가 납니까? "저 새끼 하는 거 봐라. 저러는데 어떻게 화를 안내오." 이렇게 되죠. 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죽을 때까지 화를 못 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만히 공부를 하게 되면 이게 나로부터 일어난다 하는 것을 조금씩 자각하게 된단 말이오. 하나씩 하나씩 분석하거든요.

 

가만히 분석해서 자꾸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해보면, 지난번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컵이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화를 안내느냐?” 이러지만, 똑같이 컵이 떨어져도 어떤 경우에 떨어졌냐에 따라서 화가 날 때가 있고 화가 안날 때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컵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내가 옳다는데 연유한다. 그러면 과연 내가 옳으냐. 이렇게 해서 쭉 분석을 해 들어가 보면, “, 화날 일이 없구나.” 이것을 깨닫는단 말이오.

 

이것을 탁 깨달으면 그렇게 화를 잘 내던 사람이 그냥 팍 줄어버려요. 사람이 변해버린다 이 말이오.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이 그냥 얼굴이 훤해져서 싱글싱글하고 다닌단 말이오. 옆에 사람이 보면 저게 쥐약 먹었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변해버려요.

 

그런데 그럼 계속 이렇게 되느냐?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한 달이나 두 달 지나면 어때요? 본래로 슬 돌아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깨달음의 맛을 봤을 때는 정말 다시는 그 어리석은 악몽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지 않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여기 내려와서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사흘 지나 살다보면 안개에 옷 젖는 것 모르듯이, 어느덧 이렇게 자기에 사로잡혀서 똑같이 되어 있단 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해서 그냥 무명에 가려서 그냥 그대로 도로 어리석은 길로 옛과 다름없이 가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은 이 깊은 맛을 한번 본 사람은 그 보기 전하고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화를 설령 내더라도. 옛날에는 한번 확 사로잡히면 10년씩 갔던 사람이, 1년씩 갔던 사람이, 1달씩 갔던 사람이 길어야 하루, 안 그러면 1시간, 안 그러면 금방아차, 내가 미쳤구나.”하고 원래대로 돌아가 버린단 말이오.

 

그러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적어도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이 사람이 깨달음의 길에 들어섰다. 이렇게 말하느냐? 그것이 수없이 어리석음의 길을 반복하더라도 일단 금방 원상복귀를 탁탁해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수준이 되면 이 사람은 일단 중생의 그 늪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요. 빠지더라도 앞으로 계속 빠지더라도 이 사람은 빠져서 허우적대지는 않는다. 자기가 알아서 빠져나오고 자기가 빠져 있을 때라도 옆에서 약간만 건드려주면 금방 빠져나와요.

 

우리 신도님 중에 이런 분이 계셨어요. 굉장히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지고 늘 이렇게 살았는데, 깨달음장에 오셔서 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깨쳤어. 그래서 얼굴이 훤히 펴지고 훨훨 날을 정도로 편해졌어. 집에 여러 가지 우환이 있는데도 놔놓고는 편안해 졌어요.

 

그런데 딸이 약간 정신 이상이 있어서 늘 그게 괴로움의 근본이었는데, 그것을 탁 놔버렸어. 딸은 그대로 있지만 이 보살은 아주 편안하게 잘 지냈단 말이오. 그런데 한 1년 조금 더 지났나 이 딸이 자기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해버렸어요. 방문을 딱 잠겨서 문을 두드려도 안 열려서 이상하다 싶어서 밴치 갖고 방문을 여니까 아파트 창문으로 확 넘어가는 거요. 쫓아가서 잡았는데 팔만 하나 잡았는데 애는 밑으로 떨어지니 힘을 못 이겨서 잡고 있다 놔 버렸어요. 20층에서.

 

어떻게 되겠어. 어머니가. 제정신이 아니겠죠. 어머니가 까무러쳐버렸어. 딸은 죽었고 병원에 어머니도 거의 죽은 사람 다름없이 있는데, 죽은 사람은 죽었고, 이분은 병원에 거의 기절하다시피 되어 있는데 링거를 꽂았는데 액이 제대로 안도는 거요. 그런데 연락을 받고 이틀인가 삼일 후에 제가 갔어요.

 

갔는데 그런 상태로 누워있어요. 거사님이 옆에 계세요. 그래서 내가 거시님보고 조금 나가 계셔 보세요.” 그러니까 거사님 나가고 둘이만 딱 있었어. 내가 흔들어 깨웠어.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세요.” 이러니까 이렇게 눈을 뜨고 스님 오셨어요.” 이러는 거요. 다 죽어 가는 소리로.

 

손을 잡고 "보살님" 그러면서 뭐라고 한마디 탁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둘이만 통하는 얘기요. 그렇게 했을 때, 이 사람이 마치 잠자다 꿈을 깨듯이 정신이 딱 든 거요. 정신이 드니 제일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이 뭔지 알아요? 링거액이 안 떨어지던 게 똑똑똑똑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경험을 서로 공유를 하면 이렇게 긴 말로 설명 안 해도 된다 이 말이오.

 

뭔가 그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그 계기만 서로 공감되어있는 언어를 딱 쓰면 정신이 번쩍 든단 말이오. “아이고이래서 돌아간단 말이오.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 둘이 암호가 있으니까. 그런데 거사님이 방문을 딱 열고 들어오더니 죽은 사람이 살아있단 말이오. 다 죽어가던 사람이.

 

그러니까 스님이 무슨 수를 썼는줄 알고. 수를 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정신이라는 게 이만큼 중요한 거요. 그런 것처럼 첫 시간 때 말씀드린 안경을 끼고 벽을 보던 사람들도 안경을 한번 벗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빡빡 우기다가도 옆에서 ", 안경 벗어. 너 안경 끼고 그러잖아." ", 참 그렇지. 깜빡 잊어버렸네." 이러지, 보통사람보고 그랬다가는 이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래서 더 시비가 되겠죠. “사람 다 죽어 가는데 와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냐?” 이럴 거 아니오. 그죠?

 

뭐라고 그랬게? 얘기해 줄까요? “보살님, 보살님, 보살님 딸 죽었다매? , 해탈했네.” 내가 이랬어. 억수로 칭찬을 해준 거요. “보살님, 보살님. 딸 죽었다매. , 해탈했네.” 웃으면서. 그랬더니 악몽을 꾸던 사람이 꿈에서 깨듯이 정신이 번쩍 든 거요.

 

그런데 만약에 딴 사람한테 그랬다가는 정말 큰 일 나죠. 맞아죽죠. 그런데 만약에 그 얘기를 옆에 거사님이 있는데서 그 얘기를 했으면 맞아죽었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그게 다른 사람한테는 안 통하지만 우리만 통하는 얘기란 말이오. 그렇게 해서 딱 정신이 들었단 말이오.

 

그런 것처럼 그분이 깨달았다.” 이런 얘기를 내가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자각의 경지를 맛보게 되면, 이렇게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안 걸린다. 그래도 이 사람은 또 어때요? 또 헷가닥 하고 또 정신 차리고 이러죠. 그래도 아무튼 이렇게 약간만 탁 건드려도 자각할 소질이 있는 수준까지 왔다. 그러면 이 사람은 적어도 성인의 류에, 성인의 무리에 한발 들여놓은 사람이다.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이것을 인도말로 수다원이라고 그래요. 뭐라고요? 수다원. 한문으로는 예류. 성인의 그 무리에 나도 예비자로 처음 참석을 했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