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실천적불교사상 제25강 불음주계

댓글 0

법륜스님/실천적불교사상

2017. 9. 1.



안녕하세요. , 그 다음에 술 먹지 말라. 부처님이 술 그거 한잔 먹었나 안 먹었나 이런 것을 가지고 얘기하실 분이에요? 이것은 중독성 문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전부 중독을 들이는 문화란 말이오. 중독이 들면 창조성이 결여되고 주인의식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바로 주인의식을 심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랬어요.

하늘위에 하늘아래 이 우주에 자기가 주인이 되어야 되요.

그게 깨달음의 길이란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우주의 주인이 되고, 신이 불러도 발로 차버리고, 왕이 불러도 차버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담배에 중독이 되어 기를 못 펴고 거기에 짓눌려 사느냐 말이오. 그러니까 담배를 계속 피우시려면 생각을 똑바로 하세요. 이런 것을 탁 퉁겨버리든지 안 그러면 담배를 그냥 피워요. ‘죽는다이래도 피워요. 아이, 이래죽고 저래죽는데 뭐, 죽을 일이 담배만 있어요? 다른 것도 많은데.

 

암 걸렸다.’ 이래도 생각하세요. “아이 그럼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웠는데 암 안 걸리겠어? 일찍 걸려야 될 일인데, 이제까지 지금 걸렸나?” 이렇게 생각하고 4년 산다 그러면 아이고, 이 정도 피웠으면 1년 밖에 못 살 텐데 아직도 4년이나 남았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요. 그렇게 생각할 자신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할 자신 있으면 피우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업도 안 되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후회한단 말이오. 내가 담배를 피웠는데 그 연기로 인해서 가족이 병 걸렸다. 내가 병 걸렸다. 후회해요? 안 해요? 눈물을 흘리고 후회하죠. , 그때 끊을 걸, 그게 인생의 잘못이란 말이오. 도둑질하고 싶으면 해요. 감옥에 가고 하거든 TV에 고개 숙이지 말고 뻔뻔하게 고개 들고 , 도둑질하면 나처럼 된다고. 여러분들 이렇게 되시지 마십시오. 앞으로.”

 

감옥에 가서도 아이고 이 정도 남의 물건 훔쳤으면 맞아죽어야 되는데옛날 같으면 맞아죽었잖아. 그죠? “그런데 이렇게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잠도 재워주니 고맙다고. 아이고, 그 정도 훔쳤는데, 남의 평생 벌은 것을 훔쳤는데, 그럼 10년도 안 살고 어떻게 하겠냐?” 이렇게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면 하셔도 괜찮아요.

 

불교는 윤리도독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왜 하지마라고 그러냐?

지금도 하면서 괴롭고,

나중에 괴로움의 씨앗을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하지 마라 이거요.

하려거든 뭘 해라?

과보를 받을 줄을 알아라.

 

그러니 부처님이 그렇게 쫀쫀하게 술 알코올 몇 도를 따져서 재서 한잔 먹으면 되고, 두 잔 먹으면 걸리고, 이런 얘기 하실 분이 아니잖아. 천하를 두고 논하시는 분이 무슨 그런 얘기를 하시겠어요?

 

바로 이런 중독성 물질, 중독성 문화는 깨달음의 길에 엄청난 장애가 된다. 바로 우리가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아상실이 되니까 제 정신을 못 차리니까 이런 게 필요하단 말이오. 다 제정신 못 차릴 때 이러잖아요. 여러분들도 담배 피우거나 술 먹는 사람 한번 관찰해 봐요. 글을 쓰는 사람이 글이 잘 써질 때 담배를 빼 뭅디까? 쓰다가 안 써지면 빼 물어요? 쓰다가 안 써지면 빼먹어. 말하다가 안 되면 빼물고, 뭐가 안 나오면 빼물고, 화가 나면 빼 문단 말이오. 그것은 뭘 말해요? 가슴이 답답하다는 거죠.

 

답답한 것을 뭐로 해소하려한다? 물질로 해소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런 거 하고 관계없이 그냥 밥 먹고 나서 심심해서 껌 한 개 씹듯이, 그냥 심심해서 담배 한대 피우시면 피워도 되요. 습관성이 안 된다면.

 

저기 설악산에 올라가서 대청봉에 앉아서 공기도 좋은데 담배 한대 피우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 공장에 굴뚝도 나오는데 담배 한대 피웠다고 방해가 될 것은 없잖아요. 그것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별 해가 안 돼요. 해가 된다면 나한테만 해가 되지. 그러나 좁은 방에서 피우는 것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해가 된단 말이오.

 

타인을 고려해야 될 거 아니오. 그런데 자기 기호에 맞는다고 타인을 고려 안하는 이것 자체가 뭐요? 이기심이죠. 그럼 그런 이기심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깨달음의 길에 들겠어요. 담배나 술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담배 술에 이만한 자세가 딱 보면 벌써 저건 해탈의 길에 장애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냥 피운 것을 갖고 잘했나 잘못했나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금방 얘기를 딱 해보면 알 수 있죠. 아프다면서 피우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죠. 다른 사람이 싫다는데 피우는 사람, 이것은 자기식대로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여러분들이 보세요. 이렇게 법문 딱 들을 때는 하아, 부처님 법문이 좋아야 되는데, 자꾸 담배 생각이 나서 귀에 안 들어와요. 법문이. 그래서 일어나서 나가서 피우고 와야 법문이 귀에 들어온단 말이오. 그럼 이 정도 되면 이건 뭐에요? 큰 장애죠.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그 순간에 중요한 가치가 되느냐? 부처님 법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 그것을 아예 용인하고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딱 끊어라. “어떻게 끊습니다.” 하면 웃지 마세요.

 

그냥 안 피우면 되요.

가볍게 생각해야 돼.

각오를 하면 안 돼.

인생은 각오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수행하는 사람은 각오를 하는 줄 아는데, 각오하는 사람 오래 못가. 각오를 하니까 작심 3일이 되는 거요. 각오 안하면 그냥 가요. TV를 안 봐야 되겠다. 이러면 보고 싶어서 못 견디죠. “바빠서 TV 볼 여가가 없다.” 하이고 이렇게 바빠서 보기는 봐야 되는데 볼 여가가 없어서 한 달 안 보고 두 달 안보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고기를 안 먹어야 되겠다.” 이러지 마시고 아시겠어요? 요즘에 채식이 몸에 좋다더라. 저기 어딥니까? 뷔페 3만원씩 주고 와서도 고기는 안 먹고 전부 상치 그것만 주워 먹고 있어. 그러니 집에서 상치 먹을 때 얼마짜리다. “아이고 오늘 저녁에 3만 원짜리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금기로 받아들이지 마라. 금기로 받아들이지 마라. 금기로 받아들이면 괴롭고 오래가지 못한다. 가볍게 받아들이시면. 가볍게.

 

오늘 안 먹어도 오늘 잘 살 듯이 내일 하루도 잘 살 수 있고,

 

평생 수행한다. 이런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 잘 지나면

오늘 자나듯이 내일 하루도 잘 지내면 되겠죠.

그럼 하루하루가 모여서 뭐가 됩니까?

평생이 되는 거요.

왜 벌써 평생 각오하려고 그래요.

 

부부가 살면서 이 분하고 오늘 하루만 잘 산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평생 잘살 수 있습니다. 평생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잘 못사는 거요. 평생 살 것을 미리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하루면 봐줄 수가 있는데 평생 살 것을 생각하니까 봐줄 수가 없죠. 평생 버릇될까 싶어서. , 그러면 술의 의미 아셨습니까? .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데, 이런 게 있습니다. 개차법이라는 게 있어요. 개차법. , 사람이 딱 서서 말이에요. 앉으면 가랑이가 벌어집니까? 오므라집니까? 앉으면 벌어지지. 서면? 오므라지지. 그게 자연스러움 이죠. 그것을 개차라 그래요. (열개. 닫을 차) 계를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물에 빠져서 막 허우적대. 살려달라고 막 아우성이야. 그런데 손이 안 닿는데 있어요. 그래서 작대기나 무슨 줄을 가져와서 잡아야 되겠는데, 옆집에 쫓아가서 주인한테 작대기 좀 빌려 달라니까 주인이 없어요. 그럼 작대기 가져오면 어떻게 됩니까?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말라 그랬죠?

 

그럼 아무것도 안하면 계율 안 어기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잖아. 빠진 것은 내가 빠뜨린 게 아니잖아. 자기가 빠진 거지. 그러니까 내가 빠뜨렸으면 계율을 어기지만 자기가 빠져있는 것은 그냥 내가 건져주면 복은 되지만, 안 건져줬다 해서 죄가 될 것은 없잖아. 그런데 이 작대기는 주인이 없는데 가져가면 두 번째 계율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작대기를 안 가져오죠. 이럴 때 우리가 바로 소승이라고 그런단 말이오. 이럴 땐 작대기 가져와서 사람을 건져야 되겠죠? 그럼 작대기를 가져와서 사람을 건졌다. 그런데 작대기를 왜 가져왔어요? 사람 살리려고 가져왔지 자기가 무슨 이익이나 어떤 생각을 갖고 가져온 것은 아니잖아. 그죠? 죄가 될까? 안 될까? 안 되겠죠. 그런데 죄 안 되는 것만 알면 안 돼요.

 

죄가 됩니다. 아무튼 그 주인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 순간에 딱 봤는데 작대가 없어졌으면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나겠죠. 가져가는 것을 내가 저 먼데서 오다가 봤으면 도둑놈 잡아라.” 하고 따라 오겠죠. 그러니 명백하게 도둑이에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승려로부터 자격이 박탈당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옥에 1년 살고, 이렇게 결과가 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보디사트바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감옥에 가서 1년 살고 사람 하나 목숨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나는 사람 살리려고 했던 일이기 때문에 내가 왜 죄가 있냐?”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사람을 하나 살리는데, 내가 1년간 감옥에 가 있는 그 정도는 내가 감수를 하는 거고, 사람을 하나 살리는데 도둑놈의 누명을 쓰는 거 정도는 내가 이미 감수를 하는 거요.

 

비둘기를 살리는데 비둘기 살려주려고 했는데 왜 네가 그래?”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니까. 허벅지 살을 베어주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승보살은 이럴 때 계율을 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래요. 그래서 대승보살은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요.

 

그러니 지장보살이 지옥에 가는 거 아니오. 지장보살은 지옥에 가도 안 괴로울까? 아니죠. 지옥의 불구덩이에 뛰어든단 말이오. 자기가. 누가 보내는 게 아니라 자기가 간단 말이오. ? 거기에 있는 고통스러운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가 선택해서 갔으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게 괴로움이오? 아니오? 괴로움이 아니죠.

 

그래서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죠.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이미 완성되어있는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보살이 활동하는 국토다.

 

그러니까 보살은 이 사바세계가 다 정토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음을 내시면 여러분들이 그대로 정토가 되고 보살이 될 거요.

 

그러니까 계율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계율은 지키라고 있죠. 그래서 지키는 게 옳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으면 어느덧 계율을 깨뜨려 버리고, 계율을 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미 계율을 파해버린다. 그러나 계율은 능히 지키되 계율을 파하는 것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더 중생을 이롭게 할 일이 있을 때, 그러니까 그게 희생 아니오.

 

쥐를 죽여야 할 때는 좋은 일이기 때문에 과보를 안 받으려하지 말고 과보는 과보대로 받을 각오를 하라. 살생을 해서 어차피 남의 살코기를 냠냠하고 먹었거든 그 23배로 더 좋은 일을 할 생각을 해라. 이거야. 이미 먹었거들랑. 이미 먹은 음식을 손가락 넣어 토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게 계율을 지키는 게 아니다.

 

비행기를 내가 탔어요. 고기가 나왔어. , 일반식당에서는 안 먹으면 사용이 되지만, 거기서는 안 먹으면 사용이 되요? 안 돼요? 안 되죠. 무조건 어디로 갑니까? 쓰레기통으로 가지. 그러면 그 경우에는 먹으면 계율이 어겨질까? 이런 것을 생각하셔야 돼.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먹는 것만 보고 논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것을 핑계 삼아서 맛에 집착해서 먹으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얘기해도 안 된다. 계율은 자기 양심에 대한 자기 해탈의 길인데, 남의 눈치 볼 이유가 뭐가 있어요?

 

언젠가 대구 우리 법당에 법회를 갔어요. 옛날 한 10년 되었나? 법문을 딱 해주니 신도님들이 다 좋아해요. 그러면서 점심을 먹는데 밥상을 차려 먹는데 스님 상을 차렸는데 내가 아이고 상 넓은데 같이 와서 앉으라.”니까 스님 상에 어떻게 앉아요.” “그래도 같이 앉아서 먹읍시다. 다 상이 따로 차려지면 좋지만, 지금 방이 부족하니까, 같이 앉아야 되니까 같이 앉아먹읍시다.” 하면서 얘기가 나왔어.

 

, 우리 스님 같은 분이 대구에 와서 법문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래. “대구 스님들은 어떤 데요?” “대구 스님들은 청정하지 못해요.” “어떤 게 청정하지 못한데요?” “, 고기도 먹고.” 이래. 그래서 내가 마침 밥상에 이렇게 보니 멸치가 접시에 딱 놓여져 있어요. 그래서 내가 젓가락을 갖고 멸치를 콱 집어서 한 입에 탁 집어넣었어. 그러니 쳐다보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 “이러면 어떻게 되는데? 법륜스님이 멸치 한 젓가락 입에 들어가기 전하고 입에 들어간 이후하고 어떻게 달라졌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불교가 제대로 되겠느냐? 그런 각도에서 법륜스님을 칭찬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거다.

 

누구를 숭배하려고 하지마라. 법의 이치를 알아서 자기가 해탈하는 거요. 왜 누구를 자꾸 숭배하고 우러러 받들려고 그래요.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이 자기보고 먹지 말라고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고기 안 먹고 살아.” 이러고, 그러고는 또 고기 안 먹는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신격화 시켜 우러러 받들죠. 이중적인 태도에요. 이게 중생의 모순이란 말이오.

 

여러분들은 다 결혼해서 살면서 어떤 스님 결혼해 있다하면 욕하잖아. 그죠? 자기도 결혼해서 사는 주제에. 그게 이중적인 태도란 말이오. 그러니까 똑같이 봐라. 뭐든지 다. 똑같이 봐야 돼. 그러나 스님은 나와 타인을 똑같이 보지만, 나는 더 경계해야 되겠죠. ? 신도님들이 나에게 이렇게 절을 하는 것은 내 수행력 때문에가 아니고 이 머리모양과 옷 모양 때문에 절을 하죠.

 

머리 모양 때문에 옷 모양 때문에 공짜로 뭔가 얻어먹은 게 있잖아. 그죠? 그러니 그 값도 해야 되요? 안 해야 되요? 해야 되겠지. 그러니 먹고 싶은 술이나 고기가 있다더라. 좀 참아야 되겠지. 안 그래요? 그런 거 다 하고 싶으면 머리 기르고 하면 되지 왜 하필 머리 깎고 중 옷 입고 장가도 가고 고기도 다 먹고. 그렇게 뭐 하러 하려고 그래? 그럼 사람들이 헷갈리잖아.

 

그러니까 이것은 사는 게 뭐 이러면 더 좋고.” 이게 아니란 말이오. 여러분들은 생각해야 돼. 다 평등하시니까 내 고기 먹으면 스님도 먹을 수 있고, 내가 술 먹으면 스님도 먹을 수 있고, 내가 연애하면 스님도 할 수 있는 거다. 그래도 내가 해탈할 수 있다면 저 스님도 해탈할 수 있을 거다 라고 평등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신도니까 어때요? 스님을 보면 존경을 하고 법을 들을 마음을 내어야 되겠다.

 

자기는 자기에게 이렇게 겸손하게 생각을 하면 승속이 딱 질서가 평등 속에서 어때요? 질서가 잡혀나가겠죠. 그런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안하고, 남만 쳐다보고 어때요? 왜 그렇게 안하냐? 이래요. 이렇게 법문을 딱 듣고 자기를 버려라.”하면 아, 그래. “내가 나를 너무 고집하니 우리 가정이 좀 불화가 있겠구나.” “, 내가 너무 내 고집이 셌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가만히 들으니 저런 법문을 우리 남편이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남편 참 고집이 센데 저 법문을 듣고 우리 남편이 고집을 꺾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 생각을 하고 돌아가서 남편을 절에 오라고 그려러고 한단 말이오. 이렇게 포교하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에요. 그것도 둘이 싸우다가 어때요? 밀리면 스님 말이나 부처님 말씀을 거봐라. 요게 요러라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당신이 왜 안 해?” 이래요. 그렇게 하면 안 돼.

 

불법은 남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불법의 가르침이 모든 고뇌가 나에게 있다. 일체가 유심소조이기 때문에 나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보고 ", 이것은 정말 잘못이 나한테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불법인데, 여러분들이 이 사람을 보고 ", 부처님이 모든 게 다 너한테 있다고 그랬어. , 네가 임마 너를 좀 똑바로 봐." 이렇게 말하면 이미 불법이 아니에요. 그래서 불법에서 뭐라고 그러냐? 가르치려고 하지마라. 가르치면 이미 불법이 아니다.

 

지식은 가르칠 수 있죠. 태권도라든가 목탁 치는 법이든지. 이것은 가르침이 달마가 아니란 말이오. 달마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남을 가르치려고 그래. 거기서 자격증 딴다는 게 뭐요? 법문 듣고 뭘 배워서 가르치려고 그래요. 그것은 지식이란 말이오.

 

법사라는 것은 다르마를 전하는 거란 말이오. 다르마를 전한다는 것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실천하면 다른 사람이 따라가는 거란 말이오. 부부가 갈등을 일으켜서 어땠으면 좋겠나.” 이러면 우리도 부부가 갈등을 일으켜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다가 부처님 법문 듣고 어때요? 그것을 극복했단 말이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물으면 지식이 필요 없어.

 

아이고, 참 답답하시겠습니다. 저도 옛날에 답답했는데요, 저는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법문 듣고 이래이래 해보니 해결됩디다.” 그게 제일 좋은 법문이란 말이오. 그럼 여러분들 다 법문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겠지. 스님이 여기 와서 얘기하면 들을 때는 좋지만 자기 생각하고 안 맞으면 에이고, 지가 결혼을 해 봤나? 남자니까 그런 소리 하지. 중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이렇게 해서 오히려 실천에 도움이 덜 되요.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여기 와서 법문한다고 부처님이 어쩌고 이러면 지가 뭐 알아? 지가 중이가?” 이렇게 되지만, 자기 삶에 대한 경험으로 딱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다 솔깃해서 듣는 단 말이오. ", 나도 저러면 되겠구나." 그러니까 포교는 저보다 누가 잘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이 잘 할 수가 있다. 법사가 되는 길이 어떤 길인지 이해되시겠어요? 법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법문을 합니까? 내가 어떻게 가르칩니까?” 가르치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여러분들이 자기가 자기를 생각대로 바꾸어집디까? 안 바꾸어집디까? 그런데 누구를 바꾼다는 거요? 자기가 낳은 자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