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 비난에 대한 수행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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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4. 20.



부처님 당시에 어떤 한 장자가 너무너무 예뻐서 정말 시집보내기가 아까워. 이렇게 아름다운 딸을 누구에게 시집보낼 것인가 고민고민 하다가 정말 내 딸을 데리고 갈 남자는 천하제일 훌륭한 남자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부처님의 생각난 거야. 그래서 , 그렇다. 우리 딸을 부처님께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나쁜 마음에 이런 것은 아니오. 자기는 부처님을 좋아하다보니까 이렇게 생각이 미친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하고는 이런 자초지종을 말씀을 드렸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을 다 들으시고는

 

장자여, 이 육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정말 헛된 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을 담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것은 금방 허물어질 항아리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갖가지 비유를 들어서 육신에 집착하지 말 것을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성도하실 때, 마왕의 3딸이 부처님을 유혹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수행자여, 이렇게 따뜻한 봄날, 홀로 외로이 숲에서 그렇게 음식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고행을 하다가 죽어버린 다면 누가 알아주겠느냐? 그러니 이 좋은 봄날, 우리와 더불어 쾌락을 즐깁시다. 수행은 늙어서 해도 늦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런 말을 하지마라. 그 육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잘 살펴보면 채색된 항아리에 똥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 그러니 나에게 가까이 오지마라.” 그래도 그 여인들이 유혹을 하자, 그러자 부처님이 그 3여인을 가리키니까 갑자기 노파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이 창피해서 도망갔다.

 

이것은 여인을 비하하거나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것의 내용은 고락에 대한 얘깁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락을 말하고,

그 늙은 노파라는 것은 고를 말하는 거요.

 

우리는 고와 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고를 떠나 락 얻고자 하는 거요.

그런데 사실은 락이 곧 고다.

이게 그 젊은 몸이 곧 노파다. 이런 뜻입니다.

 

옛날에 주로 그런 얘기를 할 때는 여인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요즘 젊 여인들이 경전을 읽으면 기분 나쁠 수가 있어요. “왜 불교는 자꾸 여인을 나쁜 의도로 사용하느냐?” 이렇게 오해할 수는 있는데,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그 여인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주로 수행차원에서는 어떤 쾌락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바로 그러한 얘기를 하신 거죠.

 

그러니까 이 장자가 듣고 크게 깨우쳐서 기쁨을 얻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아버지를 통해서 듣고 딸은 억수로 기분이 나쁜 거요. 부처님이 나를 비하했다. 이거야. 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똥무더기 취급했다. 이거야. 앙심이 딱 품어진 거요. 그러니 이렇게 말이 잘못 전달되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전혀 의도와는 관계없는 이런 일이 생겨나게 되요.

 

결국은 부처님께 시집보내려다가 못 보내고, 이웃나라의 왕의 청혼을 받아서 왕비가 되었어. 그런데 부처님이 유행을 하시다가 그 나라에 간 거요. 부처님은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시죠. //

 

또 다른데 전해오는 얘기는 요거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주 인물이 잘난 이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이 여인과 결혼하려고 온갖 남자들이 청혼을 했지만, 이 여인의 마음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러다가 어느 날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부처님의 생김새며, 늠름한 자태며, 그 조리 있는 말씀이며 여기에 완전히 감복을 해버려.

 

그래서 늘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러 다니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여기에 정성을 쏟은 거요.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에게 대하는 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거나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지도 않고, 인물도 예쁘지도 않고, 잘사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람을 대하는 거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음속이 너무너무 섭섭했어.

 

그러니까 부처님이 자신에게 대하는 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닌데, 남과 비교했을 때 자기는 조금 특별해야 되는데 하나도 특별한 게 없는 거요. 그것이 섭섭해서 법문 듣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신이 죽었어. 신바람이 안나. 이러다보니까 점점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소위말해서 신심이 식어버린 거요. 그러자 이웃나라에서 왕이 청혼을 하니까 거기에 시집을 갔다. 이런 데도 있습니다. //

 

아무튼 부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한 여인의 어떤 오해로 부처님에 대한 악심을 품게 된 거요. 그런데 부처님이 이 나라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기뻐했어. 그런데 이 나라에 궁녀들이, 또 왕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너무 기뻐하는 거요. 궁중 안에서도 늘 그 얘기를 하는 거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잖아요. 전자의 경우 같으면 어떤 케이스요? 나를 모욕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존중받는 게 기분이 나쁜 거요. 후자인 경우는 부처님이 옛날에 누구 거였다? 내거였다. 이거지. 그죠? 그런데 하물며 이제는 저 다른 궁녀들이나 왕비가 마치 부처님을 자기 것처럼 갔다 와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법문 듣고 와서 좋아하는 꼴도 보기 싫은 거요. 그래서 왕에게 가서

대왕이시오,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 나라 주인이 누구긴 나지.”

그러면 이 나라 사람은 누구를 받들어야 합니까?”

그야 나를 받들어야지.”

그런데 대왕이시여, 이 궁중에 있는 여인들마저도 당신을 주인으로 안 받들고 딴 사람을 주인으로 받듭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여인들을 보십시오. 비록 궁 안에 살면서 겉으로는 대왕을 모시는 것 같지만, 마음은 다 저 밖에 있는 부처님을 좋아하고, 온통 정신이 거기 박혀 있으며, 앉으나 서나 그 얘기만 해요.”

왕이 기분이 나빠졌어. 질투심이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스님 법문 듣고 좋다고 집에 가서 남편한테 아이고, 우리 스님 법문 하는데 어쩌고저쩌고이렇게 얘기하면 싫어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법문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아무리 얘기해줘도. “너나 들어라.” 이래요.

 

어떻게 말해야 되느냐? 가서 남편한테 잘 해야 되요. 그러면 , 당신 웬일이야?” 이러면

, 제가 오늘 절에 가서 스님 법문을 들었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까 내가 고집이 세고, 여러 가지 은혜를 모르는 사람 같았어요. 법문을 듣고 깨닫고 보니 참 당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내가 깨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소.”

 

그러면 쓸데없는 소리.” 이렇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 어때요?

어떤 중인데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이게 포교방법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야 나중에 집에서 성질내고 이러면

요새는 절에 안 가나? 법문 들어야지.” 이렇게 오히려 격려도 해주고.

 

안 간다 그러면 차 태워서 여기 데려다주고 자기는 밖에 어정어정하고 있다가 가고, 또 몇 달 지나선 법당에 들어와서 절만 하고 가고, 법문은 안 듣고. 그러다가 어쩌다가 한번 듣기도 하고 이러다가 물드는 거요. 좋은 것도 뭔가 저항심이 있는 거요. 왜 그럴까?

 

법문들 들으면 마누라가 틀림없이 법문 들었죠. 여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 이렇게 할 거 같아서 멀리 하려는 거요. 그래서 이 수행이라는 것은 남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만하면 되는 거요. 얘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마는.

 

그러니까 딴 사람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의 질투심이 생긴 거요. 또 왕에게도 이렇게 말하니까 자기 여인이 딴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하니까 왕도 질투심이 생겨서 이 왕비가 제안한 대로 법문을 못 듣도록 했어요. 나아가서는 공양도 접대를 못하도록 했어요. 더 나아가서는 걸식하러 오면 하인을 시켜서 막 욕설하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제자들이 살기가 힘들잖아. 그죠. 딴 데 가면 다 환영하고 공양접대하고 이러는데, 이거는 환영은 커녕, 공양 접대하기는 커녕 욕설만 하니까.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건의를 했어요.

 

부처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고 욕설을 하는데, 딴 나라에 가면 전부 부처님을 존중하고 공양도 올리고이러니 딴 나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물었어.

아난다여, 그 나라 사람들도 역시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부처님 또 다른 나라로 가죠 뭐.”

아난다여, 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비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또 다른 나라로 가죠 뭐.”

 

아난다여, 그것은 쫓겨 다니는 거란다. 전쟁터에 나간 용맹스러운 코끼리가 수많은 창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듯이 수행자는 세상의 온갖 비난에 대해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가 뭔지를 알아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에요.

세상은 늘 제 기분대로, 제 마음 따라 칭찬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칭찬에 우쭐 대서도 안 되고,

비난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비난을 할 때는

돌이켜서 나에게 비난 받을 만한 일은 없는가하고 돌이켜보고,

마땅히 비난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돌이켜서 참회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다면

비난에 구애받지 말고 거기에 걸림 없이 당당히 살아야 된다.

이것이 수행자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그렇지 않죠. 작은 비난에도 흥분하고, 작은 칭찬에도 들떠서 우왕좌왕 하면서 사는 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마는 칭찬에 들뜨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훌륭하다. 잘한다. 이렇게 칭찬을 하면 누구나 다 우쭐댈 수밖에 없죠. 그 칭찬에 우쭐대지 않기가 정말 어려운 거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칭찬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기 꽃이 한 송이 있는데

이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오.

이 꽃을 보고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이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

칭찬하는 마음은

그의 마음이오.

 

그러기 때문에 꽃을 보고 좋아하면 자신이 좋은 것처럼,

남을 칭찬하면 자신이 기분이 좋은 거요.

 

그들은 그들의 느낌대로 그것을 표현한 것뿐이오.

그것은 내 자신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내 자신하고 관계가 있다면

똑같은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칭찬하고, 어떤 사람은 비난할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칭찬하면 다 칭찬하고, 비난하면 다 비난해야지.

 

각자 다 자기 느낌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일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잘했다. 잘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요.

 

이번에 주일스님 백일 단식사건 말미에, 여기 와 계시고, 우리는 그분이 생명을 구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단 말이오. 우리는 아무런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살길을 열 수 있겠느냐. 이것만 생각해서 했단 말이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여기에는 비난과 칭찬이 함께 들어오는 거요.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우리 비구니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을 스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아이고, 우리 불교 체면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수도원에 있다가 돌아가시거나, 수도원에서 문제가 해결이 되었으면 우리 불교는 뭐 할 뻔 했습니까? 아이고 그래도 잘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정토회가 그런 정치적인 사건에 왜 나서냐?”

정토회가 왜 그런 반정부 활동을 하느냐?”

정토회가 정부 정책을 반대하고 그렇게 하는 게 정토회냐? 정토회는 여태 듣기로는 수행하고 이런 거 가르친다고 하던데, 이제 단체가 커지려니 정치하려고 그러냐?” 뭐 이렇게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족 중에도

아이고 스님, 우리 남편이 정토회 사이비 집단이라고 맨날 하다가 요번 사건보고 정토회 괜찮다고 칭찬 받았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정토회 나가는 것을 남편이 좋아했는데, 요번 사건 생긴 것을 보고 나가지 말라고, 나쁜 단체라고. 그래서 못 가게 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칭찬은 자신의 느낌대로 마음대로 하는 거요.

비난도 자신이 칭찬과 마음에 따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 비난을 받았을 때는

돌이켜 뉘우치는 게 필요할 뿐이지,

돌이켜 봤는데도 문제가 없다면

그 비난은 그냥 받고 나아가야 돼.

 

칭찬도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우쭐 대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그냥 나아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만에 빠지거나

절망에 빠지거나. 이렇게 되기가 쉽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안 되잖아요. 아난존자처럼 되기가 쉽죠. 여기 일단은 나를 환영하는 사람이 있고, 여기 일단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때, 결국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게 됩니까? 칭찬하고 환영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제가 북한 동포 굶어죽는 거 돕자고, 한국에서 안 돼서 미국까지 가서, 인도주의적인 지원은 해야 된다. 이렇게 하니까 결국은 소위 말하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동조를 하죠. 그럼 사람을 만날 때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요? 반대하는 사람 만나러 가요? 동조하는 사람 만나러 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스님, 새가 한 날개로 납니까? 두 날개로 납니까?”

두 날래고 날지.”

그런데 왜 스님은 한 날개만 자구 젖습니까?”

 

미국에서 뭐가 결정이 되려면 민주당 공화당이 다 동조를 해야, 두 날개를 흔들어야 이게 해결이 되는데, 스님은 동조하는 세력만 자꾸 찾아다니면서 한 날개 짓만 한다. 이거야. , 그때 내가 크게 깨쳤어요. 내 뜻에 동조하고 대화가 되는 사람만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음 부터는 방향을 바꾸어서 반대하는 사람, 누가 제일 반대하느냐? 반대하는 사람만 찾아가다보니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하면 워싱턴에서 아는 사람,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부 보수파들이오. 부시맨들이오. 자꾸 가서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과

얼마나 공유점을 마련하느냐, 하는 것만큼

이 세상은 화합이 되고, 앞에 갈 수 있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하는 사람은 자꾸 피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서 우리는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수행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더 평화롭게 만들 거냐. 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된다.

부처님께서 게송을 이렇게 읊으셨어요.

 

싸움터의 코끼리가 날아오는 화살을 잘 견디듯

나 또한 어리석은 자들이 주는 갖은 욕설을 잘 참고 견디리라.

 

오직 훈련된 코끼리만이 싸움을 이끌어 가는 것.

그러기에 왕은 훈련된 코끼리만을 탄다.

 

욕설을 참고 견디는 수행자는

실로 모든 인간가운데 으뜸가는 성자

노새도 훈련시키면 신비의 준바가 되고,

숲속의 현자인 코끼리 또한 그런 법

 

또한 자기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으뜸가는 성자가 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서 욕설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악심이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평화롭게 여여히 살아가셨다.

여기에 바로 부처님의 무애 행_걸림 없는 행, 무애 심_걸림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런 목표를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한발 한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