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법문 - 지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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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종범스님_법문

2020. 12. 7.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한 마디에 법문이 다 끝났습니다.

그게 화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참 좋지요.

그게 또 제일이고, 가장 훌륭한 법문이다.

안녕하십니까, 그 이상 법문이 없습니다.

 

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야

畵種種五陰화종종오음이로다, 나무아미타불

 

一切世間中일체세계중 중에

無法而不造무법이부조로다, 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우리가 지금 강설하고 있는 80권 화엄경에는 없고

60권 화엄경에 있는 게송입니다.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 나오는 게송인데

 

심여공화사라.

마음, 도대체 이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림 그리는 사람과 같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마음은 공화사_그림 그리는 사람.

그래서 그 마음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가?

 

화종종오음이라, 오음은 몸인데

가지가지 몸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 몸을 누가 만들었나?

우리 마음이 만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까지 행동하고, 먹고, 자고, 입고, 이런 것들이

그대로 우리 몸이 됐습니다.

 

뭐 체질이 어떻다, 그거 없습니다.

혈액이 어떻다, 없어요.

체질, 혈액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 자꾸 업을 쌓고 업을 지으면 달라집니다.

 

전부가 자기 마음이 만들어 낸 겁니다.

그래서 화종종오음이라.

 

일체세계중에서, 모든 세계 중에서 무법이부조라.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 마음이.

 

마음이 어떤 세계 중에

어떤 것도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如心佛亦爾여심불역이하고

如佛衆生然여불중생연이로다, 나무아미타불

 

心佛及衆生심불급중생이

是三시삼이 無差別무차별이라도, 나무아미타불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드는데 마음과 똑같이

여심_마음과 같이

불역이하고_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도 그렇게 만든다, 이겁니다.

여불_부처와 같이

중생연이라, 중생도 그러하다

 

그래서 심불법중생_마음과 부처와 그리고 중생

시삼이 무차별이라_이 셋이 다름이 없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라는 말은

80권 화엄경에는 없습니다. 60권 화엄경에만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리고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60권 화엄경에는 없습니다.

80권 화엄경에만 나오는 말씀인데, 내용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 우리를 보고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또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 이 중생이 못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온갖 걸 다 만들어요.

바로 부처도 똑같다 이겁니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다름이 없다.

차별이라는 건 다른 거지요.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만 만들면 되는데

불행을 만듭니다. 큰 문제에요.

좋은 것만 만들면 되는데 나쁜 거도 만들어요.

불행을 자신이 만들어놓고 거기에다가 행복을 또 만듭니다.

이게 중생입니다. 이걸 중생업이라고 그래요.

 

마음이 훤하게 밝아지면 걸릴 것이 없지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럽니다.

이 해탈이라는 얘기는 마음이 쓸데없는 것을 안 만든다, 이 뜻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안 만든다, 이 뜻입니다.

 

우리가 뭐 괴롭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이걸 괴롭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달려들면 영원히 괴로움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 괴로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살펴보면 없어요.

내가 만들어놓은 모든 것은 그림자인데

그림자가 여기 있구나, 하고 이걸 자꾸 도망가려고 하면

그림자가 영원히 따라와서 못 피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림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없습니다, 그림자가.

자기 거예요. 그게, 자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 괴로움이 뭐냐?

납니다, 그게.

내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입니다.

 

행복이 뭐냐?

내가 만들어놓은 그림자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좋다, 나쁘다, 불행하다, 행복하다, 크다, 작다.

이것은 전부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쉬운 말로 하면

주관적 심리상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오늘 우리 집에 며느리가 잘 들어왔는데 참 기쁘다

자기가 좋게 그렇게 기쁘게 만든 거예요.

, 이거 사람 하나 잘못 들어와서 큰일났다.”

큰일이다, 작은일이다, 다 내가 만들어놓은 그림자인데 거기에 속아요.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속는게 중생입니다.

 

그걸 잘 살펴보면 없어요.

이것을 관조라고 합니다. 관조.

관조라는 말은 금강경에서 응작여시관

응당 이와 같이 봐라, 지을 작, 작관인데, 이렇게 봐라.

 

인생이 그림자다.

여몽환포영, 영 있잖아요.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은.

 

이게 도망갈 것도 못 되고 붙잡을 것도 못 해요.

이것이 해결되면 해탈이에요.

 

죽음과 삶과 크다 적다, 보이고 안 보이고

이게 전부다 몽환포영이다. 이겁니다.

그것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몽환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그 다음에 뭐지요?

여로역여전,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건 전부가 붙잡을 것이 못 되요.

붙잡으려다가 그냥 골병드는 거예요.

 

불취불사

불치어상, 그 형상을 취하지 말아라.

그게 지혜입니다.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는 것이

그게 도고, 그게 무가애고 그게 해탈이에요.

 

그림자인데 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면 영원히 잡힙니까?

그림자를 내치려고 하면 쳐질 수 있습니까?

불취불사,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고

 

그러면 그게 무애란 말이지요. 무가애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가애, 그게 해탈이에요.

그렇게 봐라, 이것이 작관이거든요.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개공함을 조견하고

오온, 우리 몸입니다.

몸이 다 공함을 비춰서 보고, 했어요.

 

공이란 무엇이냐?

불생불명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이랬거든요.

 

이것이 법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문 하나 잘 들으면 앉은 자리에서 해탈해요.

이 몸이 그대로 불생불멸이다, 이 말이에요, 부증불감이고

그림자를 그냥 보면 안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림자가 보여요.

 

그래서 이것을 깊이 비춰본다.

이것이 조견입니다.

 

작관, 조견을 합치면 이것이 관조에요. 관조. 관조하라.

그 죽음이 두려워서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자꾸 두려워하지 말고

이 두려운 죽음이 뭔가하고 관조를 하면 없어져요. 보면 사라지는 거예요.

이슬도 그냥 보면 보이는데 깊이 보면 없어요.

이것이 관조입니다.

 

이게 부처님이 중생에게 보인 법문이에요.

이런 법문은 없습니다. 세계에 없어요.

응작여시관, 조견오온개공, 기가 막힌 법문이죠.

 

그렇게 되면 중생들이 내가 만들어놓은 그림에서 다 벗어나게 돼요.

불행도 내가 만들었고 행복도 내가 만들었고

좋은 것도 만들고 나쁜 것도 만들고

중생을 만들어놓고 또 부처 되려고 무척 애를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 중생이라는 생각을 싹 버리면

바로 되는 거예요.

 

행복을 쫓아가려고 애쓰지 말고

불행이라는 생각을 싹 비우면 되는 거예요.

그게 부처님 법문이에요.

그게 화엄입니다.

거 참 기가막히지.

 

중생이 자꾸 이렇게 자기가 나쁜 것을 만드니까

그 만든 것이 장애가 돼서 소통이 안 돼요.

지혜가 생기면 다 소통이 됩니다.

소 자도 그것이 통할 소입니다.

소통이 되면 됩니다.l

 

그런데 지혜가 자꾸 나쁜 것을 만들어서 가리니까

아무리 보여줘도 못 보고, 들려줘도 못 듣고, 전해줘도 못 받고, 소통이 안 됩니다.

마음을 깊이~~~~ 관조를 하고 선업을 계속해서 닦으면 통해요.

지혜가 생기면 다 통해요.

 

그러면 그런 지혜가 그냥 나오냐?

의심도 내가 만들고 신심도 내가 만드니까

신심을 깊이 가지면 되는 거예요.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통해서 되는 거예요.

통하는 것이 신심이에요. 그것이 묘법이에요.

 

나무 깎아서 집 짓듯이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통하는 것이 수행이에요.

만드는 것이 수행이 아니에요.

 

그래서 신심이 수행이지, 자꾸 만들어 조작하는 것이 수행이 아닌데

신심은 안 읽히고 자꾸 조작을 하려고 그래.

그래서 이것이 자기가 만들어놓은 그물에 자기가 계~~~속 걸립니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이 신심에 대한 법문을

여러 군데에서 강조를 했습니다.

 

요지일체법이

자성은 무소유로다, 나무아미타불

 

여시해법성하면

즉견노사나로다, 아무아미타불

 

참 멋진 법문입니다.

정말로 멋진 법문이에요.

 

문수보살이 와서 자장스님 한테 뭐라고 했느냐?

일체법이, 일체법이란 뭐에요?

사람도, 하늘도 땅도, 말도, 생각도

모든 법이 일체법입니다.

 

일체법이라고 하면 모든 우주 만물, 인간 세상, 안 들어가는 게 없어요.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전부 인연법이라는 거예요.

 

하늘은 하늘의 자성, 본질, 하늘의 본질이 따로 있고

또 어른은 어른의 자성이 따로 있고

선생은 선생의 자성이 따로 있고

학생은 학생의 자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서로서로 인연으로 이것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에요.

 

일체법이 자성이 없음을 알아야 하니라,

이것을 법문해 주신 거예요.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릇이라고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흙을 가지고 토공이 이렇게 빚어서 자성이 된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흙을 빼면 그릇이 아니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몸이 자성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다 이렇게 되도록 인연이 여기 지어져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릇도 책상도, 이게 자성이 있는 게 아니에요.

나무에다가 목수의 솜씨가 들어가서 이렇게 된 겁니다.

여기서 솜씨 빼고 나무 빼면 자성이 없거든요.

 

이것 하나를 관조를 하면

지옥, 천당, 행복, 불행 없어요.

이것을 문수보살님이 가르쳐준 거예요.

 

일체법이 자성이 없는 것을 알아라.

알 요, 알 지에요.

여시해법성이면 이와 같이 세상 이치를 알면

즉견노사나니라, 바로 노사나불을 볼 것이다.

이것이 자장스님의 화엄 신행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님을 일생을 원불로 모시고

끝까지 문수보살 신앙을 하고 문수보살을 받들어서 수행을 한 분이 자장스님 수행이에요.

 

원효스님도 두레박을 만들어서 그것을 쓰고 다녔는데

그 두레박이 무애호에요, 무애호.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일체무애인이 일도출생사라.

천하 선지식 삼세제불이 무애인인데 그 모든 무애인들이

한길로 생사에서 벗어났다.

 

거기서 또 가르침을 받아서 이 두레박을 때로는 머리에 쓰기도 하고

때로는 손으로 치기도 하는 그 두레박을 무애호라,

바자기 호, 무애호,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다녔어요.

그게 원효스님의 화엄 신앙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통하면 해탈이에요.

소통, 통하면 그것이 성불인데, 안 통하니까 속박이고 고통이고

통하면 원효스님 법문에 생사가 위열반이요, 열반이 위생사라.

이게 화엄경 서문이 있는데, 서문을 썼는데, 원효스님의 법문이에요.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다.

위 자는 열반이 된다, 이 말인데, 된다는 별 뜻이 없고 바로 열반이다.

 

그래서 통하면 생로병사 자체가 그대로 대열반인 거예요, 이게 법문이에요.

생사위열반, 이게 원효스님의 법문이에요.

 

원효스님이 절대 거짓말 할 그런 분이 아니고

거짓말을 했다면 벌써 들통 났을 거예요.

무수한 도인이 그 후에 막 쏟아졌는데 그냥 놔뒀겠어요?

 

그러면 열반위생사, 열반이 바로 생사다.

이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무애입니다.

안 통하니까 이렇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참 묘한 법문이지요.

 

우리나라 태조 이성계하고, 무학 왕사하고

오후에 따뜻할 때, 만나서 정담을 나누는데

정담을 깊게 나누다 보면 농담이 되는 거예요.

 

농담 중에도 투열 농담이 있는데

투열이라는 것은 전투라고 공격할 투, 하열할 열

상대편을 아주아주 낮게 잡아서 농담하는 것이 투열 농담이에요.

큰스님이다, 무슨 대왕이다, 이렇게 하지 말고

형편없이 낮잡아서 하는 농담, 그런 것이지요.

정이 깊어지면 그런 것이에요.

 

형식 따지고 격식 따지면 천리만리 멀어져요, 인간이라는 게.

이 형식, 격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꾸 가로막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형식, 격식에 얽매이면 안 돼요.

그냥 툭 터놓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친해져요.

 

무학대사하고 태조 이성계하고도 친해지니까 툭 터 놨다 이 말이에요.

두 사람이 투열 농담을 하기로 약속 했어요.

그러니까 무학스님이

먼저 하시라고, 이성계한테 이야기를 했지요.

그러니까 먼저 했어요.

 

친견노사하니_노사를 내가 친히 보니

여저야 라_ 돼지 저, 같을 여

내가 친히 노사를 가만히 보니

여저야 라, 돼지와 같습니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무학대사가 받아야 될 거 아니에요.

아견대왕 하니, 내가 대왕을 보니

여불여 라, 내가 대왕을 보니 부처님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태조 이성계가 못 알아듣고

아니, 왜 투열 농담을 하기로 했는데,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농담을 하기로 했는데

왜 좋게 말을 하느냐? 이렇게 반격을 했어요.

그것이 절대로 좋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멋진 법문이에요.

 

해석을 이제 들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 해석 다 아시지요?

법문 할게 없네, ㅎㅎ

다 아니까 법문 할 게 없어요. 다 알아요.

 

내가 나쁜 것만 안 만들어 내면 되는 거예요.

그냥 알면서 만들어 낸단 말이에요.

이게 참 고생이에요.

뻔히 다 아는데 만들어 내거든요.

 

그러니 어떡해요, 해야지요.

해석이 이저안으로 관지즉저야요.

이불안으로 관지즉불야라.

 

이저안이라는 것은 돼지의 눈으로서 보면 관지즉저야요, 돼지요

이불안으로관지즉, 부처 눈으로 보면 부처입니다.

 

이게 참 멋진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뭔가요?

말은 뭐 부처와 같습니다 했는데

내용은 엄청난 공격이에요.

 

당신은 돼지기 때문에 나를 돼지로 봤는데

나는 부처기 때문에 당신이 부처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냥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은 돼지 되고, 한 사람은 부처된 거예요.

 

이게 품격이고,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통하는 거예요.

당신은 돼지입니다. 이것은 품격이 없잖아요.

품격이 얼마나 좋아요.

부처님입니다. 이랬거든요.

 

거기에 엄청난 지혜가 있는 거예요.

이왕이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손님이 좀 늦게 가셔도

빨리 가시오,” 이러지 말고

오래오래 쉬었다 가세요이것이 주인의 품격이에요.

 

그러면 손님이 가라는 줄 경상도 말로 퍼뜩 알고 후딱 일어나서 가야지

그냥 깔고 앉아있으면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소통이 이게 참 무서운 거예요.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이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먹고 입고 그냥 주무세요.”

그말 듣고 돈은 하나도 안 내고 맨날 먹고, 만날 쉬고, 거기서 자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편하게 쉬라는 것은 주인의 품격이고

그 말을 턱 들으면 잘 쉬면서

돈은 낼 만큼 많이 내라는 이 소린데

이것을 못 알아듣고 그냥 앉아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주지스님이 돈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지혜예요.

 

그래서 닦고, 또 닦아서 확실하게 신심이 깊어지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드는구나.

이걸 확실하게 알아야 해요.

그렇게 확실하게 믿고 닦으면 확실하게 이룹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