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방송] 고요한소리_ 4장 인력(引力)의 법칙(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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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2020. 12. 11.

 

 

고요한 소리

이 시간에는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법륜시리즈 13번째 책인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재생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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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인력(引力)의 법칙

 

윤회를 이해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또 하나의 기본 원리는 인력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같은 것들끼리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유유상종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같은 종류의 힘들은 서로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법칙은 친화성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특정 강도와 질의 진동을 가진 원자는 진동이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다른 원자를 끌어당긴다.

무선 전신장치들은 주파수가 맞추어졌을 때에만 서로 간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다.

 

이 법칙은 무정물 에너지계에서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세계에서도 작용한다.

새들은 같은 깃끼리 함께 모인다는 속담은 이러한 경향을 가리킨다.

 

새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같은 유형끼리 무리를 짓는다.

인간에 있어서도 관심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린다는 것은 일반 상식이다.

같은 방향의 공부나 취미, 경기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이나 클럽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입증해준다.

 

부처님께서는 상응부2 인연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열한 의향의 중생들은 하열한 의향의 중생들과 한 데 어울리고 서로 뜻이 맞는다.

착한 의향의 중생들은 착한 의향의 중생들과 한 데 어울리고 서로 뜻이 맞는다.

그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해왔고 미래에도 그렇게 할 것이며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

 

정신적 텔레파시는 인력 법칙의 작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인력의 법칙이 인간계에 적용될 경우

다른 계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면이 한 가지 더 있다.

 

사람은 유사한 성향과 경향을 가진 사람을 끌어당길 뿐만 아니라

종종 그가 아주 좋아하는 물건이나 몹시 갈애하는 조건, 상황 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다.

물질이나 조건을 끌어당기는 이런 특수능력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년 전에 잃어버린 친구의 주소를 가장 급하고 아쉬울 때에 전혀 뜻밖의 곳에서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미 절판되서 좀처럼 구할 수 없는 책을 꼭 필요로 할 때에 길가의 헌책방에서 발견하게 되는 일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이 아닌 다른 원리에 따라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연만이 유일한 설명일까?

아니 우연이란 말이 과연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다 원인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 수 없는 것일 때

이 우연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끌어내곤 한다.

 

지금 이야기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네 욕망의 진동 속에 욕망을 구현시키고 그 목적을 찾게끔 해주는

어떤 강력한 힘이나 능력이 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욕망은

그 진동을 멀리 그리고 넓게 퍼뜨려 구해 마지 않는 바로 그 사물이나 조건에까지 다다른다.

그럴 경우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므로 거리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엄청난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법구경은 바로 첫 구절에

마음은 모든 조건들 중 앞서는 것이며

마음이 최고이며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상응부1_6의편 제천상응 39쪽에서 부처님은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끌려간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지배 영역하에 끌어들이는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바로 마음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흔히 바라던 일의 실현을 못 보고 마는 것은

그 일에 필요한 고도의 집중력이나 지구력을 가지지 못하였거나

다른 근원에서 오는 더 강력한 상쇄 진동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욕망을 겨냥한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집중은

압도적인 인력을 일으킨다.

 

그 누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이 압도적 인력은 잠재의식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잠재의식 세계야말로 인력이 힘을 받을 수 있는 장일 뿐 아니라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장이다.

 

사람은 의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잠재의식적으로도 욕망을 가질 수 있다.

욕망으로부터 분출하는 잠재의식적 동기는 의식적 동기보다 더 강력하다.

 

영감에 충만한 작가였던 앱킨슨은

생각이 바로 이와 같은 대단한 인력을 지녔다고 보고

생각-자석 즉, thought-magne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적합한 말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생각, 욕망, 느낌은 자체가 가진 끌어당기는 힘을 십분 발휘해서

다른 생각, 욕망, 느낌 등이 자기 쪽으로 끌려오도록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생각-자석이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잡아당기는 능력은

처음에는 느리게, 다소 천천히 작동하나

눈덩이처럼 혹은 자라나는 수정처럼 점점 커지면서 성장 속도도 빨라진다.”

 

생각은 물체이다.

독자는 이 모든 일이 재생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 관계는 이러하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정물의 세계에서 동기를 유발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욕망 혹은 갈애이다.

그것은 딴하라고 부른다.

 

수없는 가지각색 욕망들이 이 근본 딴하로부터 솟아오른다.

그런데 이 딴하 혹은 갈애에는 3가지 특수한 상이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인간의 삶과 행위면에서 이 형태의 갈애가 얼마나 포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가는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지 않다.

다양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활동 밑에는

거의 언제나 이 존재에 대한 갈애가 깔려 있어서

사람은 살아가는 찰나를 거의 모두 의식적으로, 또 더욱 더 자주 잠재의식적으로

갈애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계속 살고 싶은 욕망은 모든 다른 욕망의 원천이 된다.

계속 살고 싶은 욕망은 행위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밑바탕 흐름이다.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

물론 우리가 죽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에 있어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죽기가 아니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미워한다.

 

꼭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투쟁하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세운다.

거짓을 말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 모두가

근본적으로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자살 행위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살고자 하는 욕망

곧 어려움과 고통이 없는 삶, 장애와 좌절이 없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앞의 논의에 의해 이제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가

사람 마음속에 의식적으로 뿐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도 크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것이다.

 

생각이 모두 다 그러하듯이

갈애도 에너지의 한 표현이며 따라서 없어지거나 소멸할 수 없다.

 

이 강력하면서도 지속적인 갈애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에너지의 표현으로서

사람이 죽는다 하여 함께 소멸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 인력의 법칙에 따라

살고 싶다는 이 강력하고 끈질긴 욕구 혹은 갈애로부터 방출되어서 축적된 에너지가

바로 그 다음 존재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죽어가는 사람에게 끌어당겨 주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를 다시 존재하게 만든다.

살겠다는 의지가 그를 다시 살게 한다.

 

그때 그는 정신적으로 또 다른 존재를 움켜쥐게 된다.

이 움켜쥐는 모습을 서구의 저술가 모리스 월슈는

<오늘날을 위한 불교(Buddhism for Today)>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힘차게 표현했다.

 

죽음의 순간 높은 수준의 정신적 기능들은 멈추어 버리고

과거 업에 말미암은 무의식 형태들이 표면에 떠오른다.

그 가운데 으뜸은 갈애, 딴하의 힘이다.

이 갈애의 엄청난 힘에 의지해서

육체적 새 기반을 잡으려는 본능적인 움켜쥠이 있어

새로운 존재가 잉태되고 새 생명이 시작된다.

 

이러한 설명이 이치상 뭐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가?

죽어가는 사람은 으레 죽어가는 육신이 해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버티며 더 살고자 발버둥 친다.

이 무섭도록 강한 충동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간단히 사라져버릴 수 있겠는가?

 

텔레파시의 기능을 보건대

우리는 마음이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어떤 의미에서는 건너뛰듯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현상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도 없지만

우리는 머릿속에서 죽음의 순간 정신적 도약이 어떻게 일어날까에 대해서도 그려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왓차라는 떠돌이 수행자가

임종의 순간 한 삶을 다음 삶으로 연결시키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움켜쥠을 의미하는 우빠다나라는 강력한 힘에 대해 말씀하시고

죽음의 순간에 딴하 즉 갈애가 바로 이 움켜쥐는 힘이 된다고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상응부 4, 398쪽에서 이에 관해 간결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씀하셨다.

왓차여,

하나의 존재가 그 몸을 내버리고 다른 몸에서 다시 일어날 때

갈애가 새로운 몸을 움켜쥐는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밝혀두노라.

진정으로 왓차여,

그럴 경우 갈애는 움켜쥐는 힘이 된다.”

 

죽음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명백하게 밝혀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가장 강력해지는 존재에 대한 갈애는

의식적으로는 활동이 없을지 몰라도 강력한 움켜쥐는 힘이 된다.

 

갈애가 끌어당긴 재생의 기회를 잡는 것은

바로 이 움켜쥐는 힘이다.

 

취는 애가 강력해진 형태이다.

움켜쥐며 달라붙는 그 힘은 다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가히 압도적이다.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바다 한가운데서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배 갑판에서 떨어졌다고 치자.

그는 삼킬 듯 덮쳐오는 파도와 싸우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미친 듯이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다가 워낙 쉬지 않고 질러대는 고함소리를 배 위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듣게 되어 밧줄을 던져주었다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끌어당길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밧줄을 붙잡을 때

그래서 기어코 배에 올라 한목숨을 건지고야 말 때

그 집요함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데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허우적대는 임종자의 정신적 집착은

이보다도 훨씬 더 집요하다.

 

그 순간 살고자 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갈애로부터 몽땅 뿜어져 나온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에너지는

다른 삶의 기회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게 되며

이 기회를 그는 더할 수 없는 집요성으로 움켜잡는 것이다.

이 기회와 움켜잡는 행위는 순전히 정신적인 현상이다.

 

참으로 생명이란 갈애의 연속이다.

임종하는 사람은 그 동안 축적된 살고자 하는 갈애 위에

죽는 순간의 강력한 갈애가 합해져서 다음 생을 끌어당긴다.

진정 살려는 의지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소식은 12연기의 공식에서 다음 부분에 해당된다.

갈애를 연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난다.

집착을 연으로 해 생성이 일어난다.

생성을 연으로 해서 재생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