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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한계령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시리우스 별처럼... 여기도 영원히...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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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북한산 둘레길

2011. 10. 13.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북한산성이 올해로 축성 300년을 맞았다. 조선시대 숙종 37년(1711) 4월 초에 확장공사를 시작해서 그해 9월, 만 6개월 만에 오늘날의 모습대로 완공했다. 9월이 되면 축성 꼭 300주년이 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삼국의 영토 각축장으로 알려져 있다. 등산객들은 실제로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나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땅에 누가 침입해 들어오며, 누가 이런 땅을 두고 각축을 벌였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는다. 성 내부의 협소한 지형은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 사진은 만경대에서 바라본 백운대 정상과 북한산성 성벽의 모습을 답았다. / 사진·염동우 기자
그러나 비봉 정상에 국보 3호인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걸 보면 실제로 각축을 벌였던 것 같다. 아마 한강의 물이 주는 자연의 생산력과 그 배후지역으로 북한산이 갖는 관방기능 때문에 지형적으로는 험한 악산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북한산은 고려시대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 때 왕실의 피난지로서 이용됐고, 몽골의 침입 때도 방어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북한산성 축조 기록을 담은 <북한지> 연혁부분에 따르면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의 산군이었으며,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했다. 백제의 온조왕이 이를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 5)에 성을 쌓았다. 남평양성은 지금 경도의 북한산성이며, <삼국사기>에는 개루왕(蓋婁王) 5년(132)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1년 고구려 장수왕이 침입하여 이 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은 폐지되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따라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들어와서부터 본격 논의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외침을 막기 위해 ‘한양 도성을 더 높이 축조를 할 것이냐’와 새로운 성인 ‘북한산성을 쌓을 것인가’를 놓고 신하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인다. 이는 도성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 세조 때 첫 축성 상소문

북한산성 축성에 대한 첫 상소는 의외로 일찍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북한산성 축성을 권한다. 그 때가 세조 2년(1456)이었다.

▲ 전란 시 왕의 피난처로 사용했던 북한산성 행궁지의 모습. 1915년 8월 북한산의 대홍수로 건물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경도는 곧 북한산성입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조선이 도읍을 정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을 공제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은 남을 에워싸고, 서에는 임진을 두고 동에는 용진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중략) 이제 중외에 익진(翼鎭)을 열치하였으되 경도의 기내에는 단지 3진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합니다. (후략)’

이후 잠잠하다 효종 10년(1659)에 효종이 송시열에게 북한산성 축성의 필요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1 북한산성 계곡에 있는 북한산성의 수문 터에 대해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2 가파른 능선길에 있는 성벽은 축성 이후 300년이 지난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대개 외침을 받는 나라는 변방의 성곽이 견고해야 끝까지 패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작은 병란만 일어나도 먼저 도성이 무너져 공사간의 비축물자가 모조리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어찌하여 조정의 정책이 이처럼 엉성할 수 있는가? 일찍이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또한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것을 관장하던 관서이며, 현재 종로구 평창동 세검정초등학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를 막아 국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왕의 피난처로 삼았으면 모두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필시 적이 쳐들어와 싸우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적의 사지가 되었을 것이다.’

축성논의가 본격 논란이 된 시기는 1674년 숙종 즉위 첫 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가 “청나라로부터 곧 군사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전하면서부터다. 이 문제로 조정 대신들은 본격 논란을 벌이고 왕이 동조하면서 가속화됐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 29년(1703) 이조 판서 김구는 상소문에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 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만엽이 둘러싸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깎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군부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북한산성 축성을 건의했다.


▲ 북한산성에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문이 대서문이다.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대서문을 통해 북한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우의정 신완도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대저 일을 행할 시초에는 여러 의논이 뜰에 가득한 것인데,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단연코 시행할 뿐입니다”고 산성 축성 입장을 거들었다.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숙종 때 축성 놓고 찬반 상소문 잇따라

그러나 축성 반대 입장도 만만찮았다. 판부사 서문중이 상소를 올려 축성 반대 입장을 밝혔다.

“뭍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물에는 강도(江都, 지금의 강화도)가 있는데, 이제 두 곳을 버리고 따로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땅을 구하려 하면, 신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말하기를 ‘가까운 땅에 성을 만들어서, 급할 때에 임하여 옮겨 들어가서 도성을 비우고 청야(淸野)하면 적이 얻을 것이 없어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다른 군대가 도성을 지키다가 도성이 함락되면 물러가서 북성을 지킨다’고 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중히 여기는 바는 적이 달려오는 바인데, 성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완급이 있지만 성을 공격하는 자 또한 차례가 있겠습니까?”

▲ 북한산성의 암문은 비밀리에 드나들었던 문이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 가사당암문.
예조판서 김진귀도 같은 해 축성 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이미 내 뜻을 개유(開諭)하였다”며 축성 고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반대 상소문은 축성 공사를 시작하는 숙종 37년(1711)까지 계속됐다. 병조판서 최석항은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하니 그 불편한 것의 하나입니다. 도성의 백성과 같이 들어가게 되면 실로 모두 포용할 만한 형세가 못 되니…, (후략)”라며 축성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대체로 축성 반대 이유는 기근과 재난 등으로 경제여건이 익지 않았다는 것과 풍수지리상 도성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것,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에서 축성이 금지되었다는 것 등이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도성 가까이 산성을 축조하면 도성과 산성을 동시에 방어해야만 실효가 있는데, 두 개의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부족하고, 도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해 저항한다면 도성 내의 백성이 갈 곳이 없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용혈봉과 나월봉 사이에 있는 부왕동암문.
이에 숙종은 “도성은 지킬 수 없음을 익히 헤아린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지키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밝혀 축성 공사를 강행했다. 이때가 1711년 4월 3일이다.

장기간 축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 숙종은 공사를 신속히 끝내기를 원했다. 전국에서 부역에 동원된 인원과 승군은 총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으로 구역을 분담해서 성을 쌓도록 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약 12.7km에 달했다. 성이 완공된 뒤에는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했으며, 승군대장에게는 팔도도청섭이란 직책이 주어졌다.

축성 총책임자였던 승려 성능이 <북한지> 편찬

초대 승군대장은 성능이었다. 성능이 바로 영조 21년, 1745년에 <北漢誌(북한지)>를 쓴 주인공이다. <북한지>에 소개된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나한봉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청수동암문.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12.7km에 이르고, 성곽 시설은 수문 1개소와 북·대동·보국·대성·대남·대서문 등 6개소의 성문, 서·백운봉·용암봉·가사동·부왕동·청수동암문 등 6개소의 암문, 그리고 중성문 등 모두 14개의 문으로 이뤄졌다. 성곽공사에 이어 군사지휘소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 장대(將臺) 3개소가 마련됐다. 동장대가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할을 했다.

성 내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 99개소와 저수지 26개소를 숙종 38년(1712) 10월까지 만들어 북한산성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 14개의 성문 중 북문·대동문·대서문·대성문·중성문의 5개 문은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으로 홍예와 초루가 설치되었다. 소동문·소남문·서암문·백운동암문·용암봉암문·동암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 등 9개 문의 높이는 약 7척, 너비 약 7~8척 내외로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 또 수문은 높이 16척, 너비 50척이었다. 소동문은 보국문, 소남문은 대남문, 백운봉암문은 위문, 청수동암문은 위녕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성은 노적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협곡을 차단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형이 평탄해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이 이 일대를 차단하면 행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인명을 보호할 수 있기에 이중으로 쌓은 것이다.

▲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대남문. 도읍에서 왕이 피신하는 문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행궁은 유사시 임금이 옮겨와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다. 숙종 37년(1711) 7월에 행궁자리를 정하고 8월에 착공해 이듬해 5월에 130여 칸 규모로 완공됐다.

산성 내 많은 절을 창건해 승군의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북한산성을 지키게 했다. 당시 병영으로 사용하던 사찰은 도총섭이 머물던 136칸의 중흥사를 비롯해서 태고사·서암사·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진국사·상운사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봉성암 등 2개의 암자가 있다.’

이후 승군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됐고, 사찰도 점차로 해체됐다. 이어 1915년 8월 북한산에 내린 집중호우로 돌로 된 성벽만 남겨놓은 채 행궁과 동장대 등 산성 내부의 주요 시설물 대부분 무너지거나 홍수에 떠내려갔다. 현재의 산성은 1990년부터 서울 정도(定都) 600년 사업 일환으로 복원과 재정비를 거듭, 역사탐방로와 등산로로 활용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문은 모두 14개 문으로 구성

그 북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하고, 먼저 수문 터부터 찾았다. 14개의 성문 중 수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원한 상태지만 수문은 이정표도 없이 내버려져 있다.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500m쯤 올라가니 흐르는 물 아래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게 바로 수문 터다. 수문은 북한산성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문이다. 원래 북한산성의 시구문 쪽 계곡과 중성문 옆 계곡에 두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성문 옆 한 곳의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엔 식수원 역할을 하지만 적이 침입해 올 때는 방어진지 역할까지도 했다고 전한다. 이정표라도 세워 놓으면 오가는 등산객들이 역사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수문 터에서 조금 내려와 대서문으로 향했다. 북한산성의 성문은 일반적으로 대서문과 같이 큰 성문은 홍예(무지개문)와 초루(성문 위 다락집 같은 정자)가 갖추어진 반면 암문은 군수물자나 적의 동태, 시체를 옮기기 위해 조그만 비밀문같이 만들어 사용했다.

▲ 염초봉고 원효봉 사이에 있는 북문. 문의 모양은 홍예로 복원했으나 초루가 없고 두 개의 문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는 의문이다.

대서문은 제법 위용을 갖춘 문으로 웅장하다. 문 위에는 초루까지 갖춰져 소수의 군사들이 머물며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돼있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대서문에서 의상봉 방향으로 성곽이 연결돼 있다.

성곽 따라 계속 올라간다. 가파른 능선길이라 이 방향으로는 도저히 적이 침입할 수 없어 보인다. 그 가파른 능선에도 성곽은 끊어질 듯하면서 연결된다. 숙종 시절 병조판서 최석항이 반대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후략)”한 형국이다.

대서문에서 의상봉까지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시간이 1시간 이상은 족히 소요된 것 같다. <북한지>에서는 의상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북한산 산성주능선 위 위문과 대동문 사이에 있는 용암문.
‘미륵봉 아래에 있으며,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의상조사는 처음에 흥주의 태백산에 이르러 부석사를 창건하고 북한산에 와서 머물렀다. (후략)’

의상조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다. 남한산성처럼 외벽은 깎아지른 듯하지만 성 안으로는 평평한 ‘천작지형’이 아니라 양쪽 모두 험준하기 짝이 없다.

성벽은 끊어지고 험준한 암벽이 대신했다. 암벽 능선은 계속 이어졌다. 최근 깔끔하게 복원한 성곽이 암벽 능선이 끝난 뒤 연결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당암문이 나왔다.

▲ 북한산 정상 백운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위문.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암문은 성곽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 출입구로서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전쟁 때는 비밀통로로 사용됐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사당암문도 조그맣다. 키 큰 성인이 서서 들어가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낮다. 암문은 대개 계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만들어져 있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암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용출·용혈·증취봉을 오르내려 부왕동암문에 이르렀다. 해발 600m도 안 되는 봉우리지만 산세가 험하고 암벽 능선길이라 땀이 뻘뻘 흐른다. 등산로도 험해서 때로는 철제 사다리로 오르내린다. 몇 년 전 용혈봉에서 벼락이 내리친 사고가 있을 만큼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다.

부왕동암문은 윗부분은 홍예로, 나머지 세 부분은 방형으로 복원돼 있다. 원래의 모습은 전부 방형이지 않을까 싶은데….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 궁금해진다.

나월·나한봉을 거쳐 청수동암문으로 향했다. 나월·나한봉은 출입금지구역이라 우회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로 저 멀리 다른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나한봉을 지나 제법 큰 쉼터가 나온다. 성으로 치자면 옹성에 가깝다. 성벽에서 조금 튀어나와 옆의 성벽으로 침입하는 적을 바로 무찌를 수 있도록 한 성이다. 좌우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 북문과 수문 터 사이에 있는 시구문. 시체를 나르던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이라 했으며, 서암문이라고도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동암문이다. 청수동암문에서 성 밖으로 나가면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 나온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이 세운 4개의 순수비 중 가장 높은 곳, 가장 험한 곳에 있는 비석이다.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정말 이곳에 와서 비석을 세웠을까 싶다. 말 타고 올라가기 힘든 길을 그 당시 걸어서 왔을까? 역사는 때로는 사실과 허구(신화)가 혼돈돼서 후세에 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든다.

청수동암문 다음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지만 대남문까지는 약간 우회하는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서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등산로 따라 간다.

한국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교식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많다. 북한산에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을 가까이서 모시는 협시 보살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보통 왼쪽에 있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은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띤다. 북한산에도 그 이름을 따서 이 봉우리들의 이름을 붙였다.
큰 성문은 홍예와 초루 갖춰

길 따라 가다 보니 어느 덧 대남문에 도착했다. 홍예와 초루를 갖춘 웅장한 문이다. 안내판에는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중략)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후략)’고 돼 있다.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성이다. 이 성도 숙종 때 만들면서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지>에 따르면 ‘도성의 북벽(숙정문과 자하문)을 넘어 탕춘대성을 통해 북한산성으로 피난 농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왕이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하기 위해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탕춘대성은 중간의 방어선이고, 북한산성은 행궁을 건립해서 왕이 머물도록 한 것이다.

▲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는 보국문. 소동문으로도 불렸다.
대남문에서 대성문까지 불과 0.3km밖에 안 된다. 대남문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부왕동암문, 동쪽으로 대동문까지 불과 좌우 1km 남짓 되는 거리에 성문들이 줄줄이 있다. 결국 왕이 도성에서 피신해 올 때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기 위해선 많은 성문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대성문에 이어 보국문까지 갔다. 성곽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길게 늘어선 성벽들이 마치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같이 보인다. 만약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일찌감치 건립되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본다.

보국문은 성문이지만 암문 형태로 지어졌으며, 소동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국문에서 대동문까지는 불과 700m. 이젠 등산로도 완만하다. 용암문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도 없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문이며, 가장 큰 홍예문을 가졌다.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은 만경대 남쪽 용암봉 아래에 있는 문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 북한산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대동문.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는 만경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능선이 이어지지만 위험한 암릉 구간이어서 그 밑 우회 등산로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중간쯤 지점에서 노적봉 어깨를 살짝 걸쳐 지나간다. <북한지>에는 ‘노적봉은 만경대 서쪽에 있는데, 솟아오를 듯한 산봉우리와 뾰족뾰족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의 옛 석성이 여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윽고 위문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틀째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후텁지근한 날씨로 땀은 온몸을 적신다. 위문에서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지난다. 바람길이 이곳에 있는 것 같다.

북한산성 행궁도 머지않아 복원될 듯

북한산 정상 백운대가 바로 위에 있다. 원래 백운봉이라 불리던 것이 널찍한 터가 있어 백운대로도 불리고 있다. 탁 트인 백운대에서는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 북한산성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는 중성문. 대서문이 평지에 위치,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성문을 건립해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다시 조금 내려와 위문에서 북문으로 향한다. 능선은 백운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원효봉으로 이어지지만 염초봉 주변이 위험한 리지 구간으로 등산객들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일반 등산로로 우회하기로 했다. 위문에서 상운사를 거쳐 북문까지 갔다. 2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다.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북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두 개의 홍예문으로 연결돼 있다. 초루도 없어 중간에 구멍이 뻥 뚫려, 다른 성문과 또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산성은 도읍에서 피신해 들어올 수 있는 대남문을 중심으로 좌우 방어진지를 확실히 구축하고, 북쪽은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능선 따라 성곽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오르면 원효봉이 나온다.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해골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친 그 원효대사가 연관된 봉우리다. 원효대사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원효봉 밑 조그만 암자에 자리 잡고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원효암이 그 원효암인지는 알 수 없다.

능선 따라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암벽길에 놓인 철제사다리, 혹은 성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벽 따라 걷는 성문 중에 마지막 문인 서암문인 시구문에 다다른다. 시체를 옮기기 위한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렇게 해서 수문 포함 14개의 성문 따라 걷기는 끝났다.

그러나 북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지를 찾아서 출발이다. 북한산성 방향에서 행궁지로 가려면 중성문·중흥사를 지나야 한다. <북한지>에는 ‘중성문은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수구(水口)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얕은 물이 흐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성문은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다. 대서문이 비교적 평지에 위치해 있어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앙으로 향하는 길 정중간에 중성문을 건립해서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쇠퇴하다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전국 승군을 지휘한 팔도 도청섭이 이곳에 기거할 정도로 커졌다. 1904년 화재와 1915년 대홍수로 흔적만 남긴 채 건물은 전부 쓸려갔다고 한다.

행궁지는 중성문에서 중흥사를 거쳐 약 1.8km 떨어진 나한봉에서 북한산성 안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쯤에 위치해 있다. 축성 초기 당시 내전과 외전 합해 총 124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1915년 홍수로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 전하고 있다. 북한산성 전체가 사적 제162호이며, 또한 행궁지도 사적 제479호로 지정돼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고양시에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일단 유물부터 찾은 뒤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한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성 행궁 터는 유적 발굴로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는 상태다. 머지않아 북한산성 행궁도 복원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