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우스 하우스

12월 한계령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시리우스 별처럼... 여기도 영원히...

팝 밴드 - 비틀즈(1959-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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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팝, 가요

2011. 12. 16.

 

1964.2.7 미국 첫 방문, 음악으로 세상을 평정하다


1964년 2월 7일 비틀즈를 태운 비행기가 런던 공항을 출발하자, 미국 WMCA 방송은 마라톤 중계하듯 이 세기의 밴드가 자국에 당도하는 모습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비틀즈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입니다. 그들은 30분 전에 런던을 떠났습니다. 뉴욕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는 중이군요. 비틀즈 주변의 온도는 32도입니다.”

 

 

영국 출발부터 미국 도착까지 일거수일투족 생중계 

미국 출발 전 영국 공항에서 팬들의 배웅을 받는 비틀즈


이날 오후 1시 35분, 비틀즈는 미국 뉴욕에 있는 케네디 공항에 내렸다. 1만 명이 넘는 10대들이 공항을 가득 메우고 함성을 질렀다. 괴성을 질러대는 팬들 사이를 뚫고 비틀즈가 공항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도착했다.


“노래 한 곡 해주시겠어요?”
“돈을 먼저 주셔야죠” 존 레논이 대답했다.
“여러분을 나이 든 세대에 대한 사회적인 반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나요?”
“지저분한 거짓말이군요.”
“베토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멋진 분이죠. 특히 그 분이 쓴 시는 정말 멋져요.”

링고 스타의 대답이었다.

 

이틀 뒤인 2월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가 방송됐다. 이날 방송은 7천3백만 명이 시청했다. 당시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에드 설리번쇼’가 방영되는 동안 뉴욕에서는 자동차 휠캡 도난 사고조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전역에서 10대가 일으킨 주요 범죄는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비틀즈가 미국에서 공연한 1964년 2월 첫 주, 그들의 노래는 미국 히트 차트 1위에 올랐다. 이어 4월 4일자 빌보드 차트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차지했다. 1964년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는 비틀즈의 노래였다. ‘브리티쉬 인베이젼(영국의 침략)’이란 말이 무리가 아니었다. 비틀즈는 음악으로 미국을 완전히 점령했다.


 

 

 

리버풀 노동자가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 

비틀즈는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0.9~1980.12.8),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6.18~ ),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2~2001.11.29),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7.7~) 등 네 명의 영국 리버풀 출신 청년이 모여 결성한 그룹이다. 리버풀 출신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젊은이는 여러 경로를 거쳐 비틀즈라는 거대한 대중음악의 활화산 속으로 모여 들었다. 비틀즈가 언제 출범했는 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비틀즈 유일의 공인 전기로 평가 받는 ‘더 비틀즈(대교베텔스만)’의 저자 헌터 데이비스가 기록한 바를 좇아가면, 존 레논은 분명하게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음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존 레논은 “어린 시절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이라고 밝히고 있다.

 

네 명의 멤버 중 존과 폴이 만난 것을 비틀즈 출범의 한 계기라고 한다면, 리버풀 인스티튜트에서 존이 폴을 만난 1957년 7월 6일을 꼽을 수 있다. 존은 이 날을 “바로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날. 내가 폴을 만난 바로 그날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비틀즈란 이름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한 날을 비틀즈의 출범이라고 한다면 시간이 좀 더 흘러 1959년이 되어야 한다. 리버풀의 퀴리뱅크 고등학교에 다니던 존은 스쿨밴드 ‘쿼리멘’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존과 폴 모두 리버풀 인스티튜트로 진학하면서 더 이상 ‘쿼리멘’이란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이들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서로 다른 색깔의 셔츠를 입고 왔다고 해서 ‘레인보우스(The Rainbows)’ 어떤 때는 ‘문독스(The Moondogs)'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지방 도시 라이브 클럽의 최고 인기 밴드 '실버 비틀즈' 

1959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비틀즈’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딱정벌레(beetles)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그 철자를 BEAT-les로 바꾸어 써보았다. 비트(beat)음악을 연상시키는 말장난이었다.”라고 존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밴드 이름은 길어야 한다는 유행에 따라 ‘키다리 존과 실버 비틀즈(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라고 붙였다. 그리고 한 오디션에서 이름을 물었을 때 ’실버 비틀즈‘라고 말한 뒤부터 ’실버 비틀즈‘는 1959년 내내 이들의 이름이 됐다. 어쨌든 ‘실버 비틀즈’로 활동하던 이들은 1960년 독일 함부르크로 옮겨가 연주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이들의 멤버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과 드러머로 피트 베스트, 베이스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등이었다.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1960년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조지는 당시 겨우 17세로 아직 미성년자여서 학생여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1960년 12월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리버풀 중심가의 최고 라이브 클럽으로 자리잡고 있던 캐번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1961년 1월부터 1962년 2월까지 1년여 동안 이들은 모두 292회의 공연을 가지며 리버풀 최고의 밴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영국의 한 지방도시의 인기 밴드일 뿐이었다.


 

 

 

1963년 11월 무대에 오른 링고스타,조지 해리슨,폴 매카트니,존 레논(왼쪽부터)

 

 

 

리버풀의 인기 밴드가 된 비틀즈는 1961년 4월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을 떠난다. 조지는 18세가 되었고 취업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에서 비틀즈는 첫 음반을 녹음했다. 첫 번째 함부르크 여행에서 데모 음반을 만들기는 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고 이번에는 토니 셰리던이라는 가수의 반주을 맡아 녹음한 거였다. 존은 이번 녹음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팀 이름도 ‘비트 보이스(The Beat Boys)' 였다. 비틀즈 평전 작가 헌터 데이비스는 이름이 바뀐 이유를 “비틀즈라는 이름이 복잡하다고 음반제작자가 생각한 모양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음반에는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참가하지 않았다. 스튜어트는 스스로 베이스 기타보다 그림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폴이 베이스를 맡게 되고 스튜어트는 비틀즈를 떠났다. 1961년 7월 네 명의 비틀즈는 스튜어트를 함부르크에 남겨 둔 채 리버풀로 돌아왔다.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의 미술대학으로 진학해 미술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1962년 4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매니저에게 발탁돼 멤버 교체와 함께 성공가도를 달리다 

비틀즈의 메니저이자 이들을 스타로 만든 정신적 지원자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11월 9일이었다. 이날 점심시간에 맞춰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공연하고 있는 캐번 클럽을 찾았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음반사에 듣도 보도 못한 비틀즈란 그룹이 독일에서 녹음한 노래인 ‘마이 보니(My Bonnie)'를 찾는 사람이 이틀 동안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틀즈를 처음 본 엡스타인의 기억은 별로 상쾌하지 않다. “그리고 비틀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내 생애 최초로 비틀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단정하거나 깔끔하지는 않았다. 연주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관중에게 뒷모습을 내밀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끼리 농담을 하고 낄낄 웃었다. 그러나 관중은 대단히 흥분했다. 무엇인가 인간 자기력 같은 것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에게 빠져 들게 되었다.”라고 엡스타인은 회고하고 있다.

 

그로부터 4주 뒤 엡스타인은 비틀즈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다. 제대로 된 계획과 연주일정, 무대 매너 등 비틀즈의 삶 전체를 관리하던 엡스타인은 1962년 5월 레코드 회사 EMI의 자회사인 팔로폰과 녹음계약을 체결했다. 데카, 컬럼비아, EMI 등 대형음반사를 비롯해 여러 작은 음반사로부터 모두 계약거절을 당한 뒤였다. 그러나 이해 8월 팔로폰과 녹음을 불과 한달 앞 두고 드러머 피트 베스트가 강제 탈퇴 당했다. 그리고 링고 스타가 새로운 드러머로 들어왔다. 이로서 드디어 존 레논(리듬 기타), 폴 매카트니(베이스 기타), 조지 해리슨(리드 기타), 링고 스타(드럼)라는 비틀즈 라인업이 완성됐다.


TV프로그램에서 튜더 왕족으로 분장하고 나와 팬들을 즐겁게 해 준 비틀즈(1964년)


 

 

 

내놓는 곡마다 빅히트 치며 전세계 팝 음악 평정 

1962년 9월 11일 EMI의 자회사 팔로폰에서 일하던 조지 마틴은 비틀즈를 런던으로 불러 비틀즈 최초의 영국 음반인 ‘러브 미 두(Love Me Do)’를 녹음했다. 싱글 뒷면 곡은 ‘피에스 아이 러브 유(P.S. I Love You)'였다. 링고의 드럼은 처음에는 제작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링고는 ‘러브 미 두’에서는 드럼을 쳤지만, ‘피에스 아이 러브 유’에서는 다른 사람이 드럼을 쳤다. 링고는 탬버린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러브 미 두’가 앞면에 실렸다. 비틀즈의 영국 첫 음반 ‘러브 미 두’는 영국 음반 집계 최고 성적이 17위였다. 그러나 1962년 11월 26일 녹음돼 1963년 1월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프리즈 프리즈 미(Please Please Me)'가 1위를 차지했다.


 

 

 

전세계의 시청자들에 중계된 텔레비전 쇼를 마치고,조지해리슨,링고스타,존 레논(뒷줄 왼쪽부터),폴 매카트니(아래) 

 

 

이후 비틀즈는 '어 하드 데이즈 나잇(A Hard Day's Night: 1964년 7월)', '비틀즈 포 세일(Beatles for Sale: 1964년 12월)', ‘헬프(Help: 1965년 8월)', ‘러버 소울(Rubber Soul: 1965년 12월)', ‘리볼버(Revolver: 1966년 9월)',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6월)', ‘더 비틀즈(The Beatles: 1968년 11월)', ‘옐로우 서브마린(Yellow Submarine: 1969년 1월)' 등의 앨범을 펴내며 세계 팝 음악을 지배하는 밴드로 군림한다.

 

비틀즈는 1969년 10월 마지막 걸작 앨범 ‘애비 로드(Abbey Road)'를 펴내고, 1970년 4월 10일 폴 매카트니가 솔로 앨범 발매와 동시에 비틀즈 탈퇴를 선언하면서 해체했다. 비틀즈가 해체한 지 한 달 뒤인 1970년 5월, 그 전에 제작됐던 ‘렛 잇 비(Let It Be)’가 발매됐다. 이후 존 레논은 1980년 12월 8일, 그의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남은 비틀즈 멤버들은 존 레논의 미완성 곡이었던 ‘프리 애즈 버드(Free As Bird)' '리얼 러브(Real Love)'를 각각 1994년 1995년에 공동 녹음했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11월 2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무엇보다 비틀즈가 제작에 동의하고 인터뷰에 응한 유일한 공인전기랄 수 있는 <비틀즈>(대교베텔스만)를 추천한다. 비틀즈가 최절정의 인기 속에 음악성, 대중성 등에서 불세출의 앨범이라고 평가 받는 ‘서전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발표한 뒤인 1968년 출간됐다. 알려지지 않은 맴버들의 어린 시절, 다양한 사진과 기록이 자랑거리다. 리버풀 노동자 집안의 가난한 청년들이었던 이들이 어떻게 밴드 연주자가 되었는지 인터뷰와 증언, 행적 추적을 통해 적고 있다. 비틀즈 마니아, 연구자들에게는 필독서로 알려진 책이다.


비틀즈비틀즈 시집


 

 

 

두 번째로 권할 만한 저작은 아름다운 존 레논의 가사를 옮겨 담은 <비틀즈 시집>(청년정신)이다. 비틀즈의 가사는 초기에는 솔직한 젊은이의 내면을 담은 노래로 시작해 후기에 이르면서 문명비판, 반전운동 등의 메시지를 담는 형식으로 변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다양한 출판사에서 시집으로 묶여져 온 비틀즈 가사집은 지금은 청년정신판이 서점에 나와 있다.


 

 

 

 

배문성 / 시인, 출판 평론가
글쓴이 배문성은 1982년 월간 시지<심상>으로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시집 <당신들 속으로>가 있다. 문화일보 기자를 거쳐 푸른숲 출판사의 부사장으로 책 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전설의 현재진행형 비틀즈를 추억하다 >

기존의 관습과 색다른 현상이 나올 때 언론은 대체로 어떻게 반응할까. 특히 문화적으로 전혀 새로운 트렌드와 마주하면 언론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새것(뉴스·news)을 좇는 매체의 본질상 이 새 현상에 호의적 태도를 보일까, 아니면 비판적일까. 그도 아니라면 호오(好惡)감정을 유보하고 사실보도에만 그칠 것인가. 기존 패턴과 다른 인물이나 현상이 대두될 때 당시 언론보도를 찾아보는 것도 옛날신문을 골라 읽는 재미 중 하나다.


 

 

 

60년대 청춘문화 키워드, 비틀즈의 등장  

 

 

20세기 팝음악의 가장 성공적 밴드로, 사회 문화적 혁명까지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비틀즈. 그들의 출현과 성공, 극성 팬의 등장과 요란한 에피소드, 그리고 결국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보도한 옛날신문을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얘기를 찾을 수 있다.

 

1963년 'she loves you(그녀는 널 사랑해)'와 'I wanna hold your hand(당신 손목을 잡고 싶어)'를 잇달아 히트시켜 영국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비틀즈의 얘기는 이듬해인 64년 2월 한국 신문에 처음 등장했다. 자회사인 동아 방송의 '탑 튠 쇼'를 통해 그들 노래를 처음 소개한 동아일보가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 비틀즈의 분석 기사를 실은 것.'소음인가 노래인가 - 비틀즈라는 이름의 재즈' 라는 제목의 박스기사는 새로 등장한 이 청년들이 영 마땅치 않은 듯 기사 서두부터 사뭇 비꼬는 투다.


소음인가 노래인가. '비틀즈'라는 이름의 재즈
1964.02.13 [동아일보] 6면


 

 

 

"맘보, 로큰롤, 차차차, 트위스트를 무색케 하는 새로운 형식의 재즈가 신사도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발생하여 방금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고 전제하더니 "잘 생기지도 않은 용모에 눈썹까지 머리를 덮어 내린 비틀즈는 소음인지 노래인지 분간키 어려운 기성으로 노래를 부르며 몸을 비꼬고 하여 이른바 비틀즈 스타일을 창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사는 "그들은 1년 전만 해도 코카콜라나 마시며 재즈를 즐기는 아마추어에 불과했다"면서 "그들이 우연히 목소리를 합하여 제멋대로 부른 노래가 디스크로 팔리기 시작하자 이 더벅머리 총각들의 노래와 춤에 도취한 영국 틴에이저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기성을 발하며 심지어는 졸도하는 사람까지 생길 지경"이라고 소개했다.

 

'잘 생기지도 않은' '소음인지 노랜지' '몸을 비꼬고' '우연히 목소리를 합해' '제멋대로 부른' 에다 '미친 듯이' '기성을 발하며' 등 가수와 청중까지 싸잡아 한껏 깎아 내리는 형용구를 골라 쓴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서구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자들이 생기고, 또 사람들이 거기에 미쳐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더니 결국 기사 말미에 "아무튼 비틀즈는 세계를 향해 새로운 음악과 춤을 유행시키는 '괴물들'이다"고 결론지었다.


 

 

 

 

열광하는 젊은이들 행태, 언론은 불만적으로 표시

 

 

비틀즈 선풍, 은막에까지
1964.07.20 [경향신문] 8면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처음 소개된 비틀즈는 그러나 미국에서는 정말로 공전의 인기몰이를 했다. 가는 곳마다 환호하는 틴에이저들에게 둘러싸였고 언론은 그들의 순회공연을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 영국인의 침공)이라고 불렀다. 비틀즈가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는 시청자가 7천만 명이 넘는 경이적 기록도 세웠다.

 

첫 기사가 나간 꼭 일주일 후 동아일보는 이번엔 '비틀즈 선풍 오래 못갈 듯'이란 미 사회학자의 분석 기사를 실었다. 하버드대학의 데이빗 리이스먼 교수는 이 기사에서 "비틀즈는 엘비스 프레슬리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반성적(性的)이고 반 노골적인 가락을 갖고 있지 않다"면서 비틀즈 선풍은 엘비스 선풍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라고 단언했다. 교수는 특히 "엘비스는 음악이나 그 자신이 깡패 같은 건방진 냄새를 풍겼다"고 주장, 비틀즈에겐 그런 야릇한(?) 성적 매력이 없음을 시사했다.


 

 

 

2월말에는 비틀즈의 음반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물론 라이선스는 아니었다. 동아 방송 전파를 탄 '그녀 손목을 잡고 싶어' 등 비틀즈 노래에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냥개'를 모아 미미 레코드사가 만들었다. 이때 신문은 레코드 출시 기사를 쓰면서 말미에 "우리나라 틴에이저들도 비틀즈에 미치고 말 것인지?"라고 여운을 남겼다.


 

 

 

4월에는 경향신문이 '세계의 사회면'난을 통해 비틀즈 분석에 나섰다. '회오리 물결 비틀즈' 제하 기사에서 신문은 이들을 우선 "보잘 것 없는 영국 동(童·아이)"이라고 깔아뭉갰다. 그리고는 "네 명의 묘한 꼴을 한 젊은이가 바로 비틀즈 선풍의 장본인"이라고 범인 다루듯 소개하고 "이들의 창법이란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니다. 로큰롤에다가 요란스레 망치를 두들기며 빽빽 소리 지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역시 '15개월 전엔 담배연기 자욱한 리버풀 지하 재즈 홀에서 그저 이름 없이 노래나 부르던 존재' '21세부터 23세까지의 애송이들'이라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틀즈의 특이한 이발법이 영국 청소년은 물론 성년에까지 미쳐 "꼭 뚜껑을 덮은 것 같은 머리들이 런던시내에 범람하고 있다"고 전했다.


회오리 물결 「비틀즈」
1964.04.13 [경향신문] 8면


 

 

 

 

더펄머리와 깔끔한 양복의 청년들, 전 세계를 공습하다

 

 

비틀즈에 맞선 "대머리 데모"
1964.04.03 [동아일보] 3면


언론은 비틀즈의 음악적 성과나 완성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용모와 거기에 미쳐 환호하는 젊은이들의 행태에만 불만이 많았다. '장발 뚜껑 머리를 모포처럼' 흔들고 '미치광이 춤사위'에 어린 청중들이 '울부짖고 기절하는' 현상에 대해 항상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비틀즈 형 더펄머리를 기른 젊은이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머리를 박박 깎아버리라고 명령한 기사를 의미 있게 다뤘다. 또 영국 공안위원회가 찰즈 왕자의 헤어스타일이 비틀즈를 닮았다고 분개했다는 뉴스나 일단의 독일 군인들이 비틀즈 선풍에 반발해 머리를 깎아 율 브리너 스타일의 대머리를 만들었다는 토픽 기사도 외신면에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66년 여름에는 비틀즈가 일본과 필리핀 등 동남아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의 행태가 또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극성 오빠부대의 열렬한 환영이,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대통령 부인 이멜다 여사의 초청을 받고도 비틀즈가 응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동남아 휩쓰는 비틀즈’란 기사는 첫 문장부터 비틀즈 선풍을 비판하고 나섰다.

 

"수 십 년 후에는 사가(史家)들에 의해 세기적인 농담으로 진단을 받을지도 모를 광폭한 음악의 사절 더 비틀즈가 최근 동남아를 찾아 법석을 떨고 있다"고 운을 떼더니 "한여름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더벅머리를 해갖고 일본 필리핀을 휩쓸며 비틀즈 마니아의 수를 자꾸만 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특히 일본의 비틀즈 팬은 물경 3백만인데 "그중 20만은 거의 미치광이들, 대부분 15-16세의 청소년"이라고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느 근엄한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해 "괴상도 하다. 동경에서 보내온 보도사진을 보니 비틀즈 공연을 보고 나오는 일본 여학생들이 울고 있다"면서 누구는 영화에서 봤던 얼굴보다 여위었다고 울고, 자기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울고,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울고, 그저 덮어 놓고 울고 싶다고 해서 울고…라며 한심하다는 듯 얘기를 풀어 나갔다.


 

 

 

칼럼의 백미는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났다. "런던에 돌아간 비틀즈가 필리핀을 욕하고 있다. '다시 갈 일이 있다면 이번에는 수소탄을 들고 가야겠다.'는 것은 익살이 아니라 독설이다. 비틀즈의 매력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그들에게 광적인 눈물을 쏟을 줄로 알다가는 코 다친다. 너무 까불면 국제친선에도 누를 끼칠 것 같다." 한마디로 "까불면 다친다."는 경고다.

 

독자들도 나섰다. 66년 7월 동아일보에 투고한 독자는 비틀즈 광풍에 대해 "부유하고 여유가 많은 그들이야 무슨 짓들을 하건 우리나라 실정으로써 과연 허용될 수 있는 것들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자유중국(대만)에서는 (경찰이 장발머리를 깎아) 까까중을 만들고 요르단에서는 입국을 거절한다는데 각 나라의 실정과 장래성을 생각하는 장한 일"이라며 우리도 강제로라도 이런 폐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남아 휩쓰는 비틀즈
1966.07.06 [경향신문] 7면


 

 

 

 

해체됐지만 그들의 전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사과하는 비틀즈
1966.08.13 [동아일보] 4면


젊은이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는 만큼 철저한 혐오파도 늘어가던 판에 비틀즈의 이른바 예수 모독발언이 나왔다. 이 사건으로 결국 비틀즈는 공개 사과하고 순회공연을 완전히 접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발단은 멤버 중 존 레넌이 "비틀즈는 이제 예수보다 인기가 있다"고 기염을 토한 데서 비롯됐다. 그가 비틀즈의 더펄머리가 예수의 그것보다 유명하다고 했는지, 그냥 단순 비교법을 사용했는지는 불확실하나 이 말이 전해지자 미국의 방송국 음악담당자들이 비틀즈 보이콧 운동에 나선 것.

 

이런 가운데 한 언론인은 "레넌이 예수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말하는데 어느 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그해 8월 미국 15개 주의 35개 방송국과 캐나다 마니토바의 한 방송국은 앞으로 비틀즈의 레코드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방송인들은 "비틀즈의 음악적 재질은 별 것 아니다"고 비웃었고 이런 내용은 국내 신문에 상세히 보도됐다.


 

 

 

비틀즈는 이후 순회공연을 중단했다. 또 존 레넌,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등 멤버들의 불화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결국 1970년 4월 이들은 해체했다. 인기 절정일 때는 그래도 "노래냐, 소음이냐?" "깨트릴 듯 마구 두드리는 음악" 등으로 분석하던 언론은 끝내 그들의 음악적 성과나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하지 못했다. 그저 ‘현대 대중음악은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는 얼버무리는 얘기만을 내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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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영상] 우주여행 떠나는 비틀즈의 노래…'Across the Universe'

이 곡은 NASA의 국제우주탐사망(DSN)의 거대한 안테나 3대를 통해 동시에 발사되며 빛의 속도로 날아가 약 431년 후에 북극성에 도착하게 된다.
기사원문 : 2009. 02. 04 [YTN]


 

 

 

민병욱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