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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내몽고] 제 2일 : 북경(7) - 자금성 외조(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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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기/중국

2010. 8. 23.

  

천안문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매표소 : 천안문을 올라갈 수 있는 표를 파는 곳

 

오문 앞 매표소 :   자금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표를 파는 곳과

                           외국인들을 위한 오디오 투어 서비스가 유료로 제공되는 곳이 있음. (한국말도 있음),

                           단 여권을 맡긴 후 북문에서 오디오와 여권을 교환

 

오문 입구 주의 :   단체와 개인 관광객의 입구가 다르다고 합니다.

 

자금성 직선 코스 : (전문) - 천안문 -  단문  - 오문(정문) - 태화문 -  외조 (태화전 - 중화전 - 보화전) - 건청문

                            - 내정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 곤녕문 - 어화원 (흠안전 - 퇴수산) - 신무문(후문) :

                            후문에서 정문으로 반대로 관광할 수도 있음

                            약 2시간 ~ 2시간 30분 소요

 

                         * 태화전 : 황제가 앉던 옥좌가 있음. 황실의 결혼식, 황제 즉위식, 출정식 등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

                            중화전 : 황제가 공식 행사 중 잠시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외조 건물 중 역할이 가장 미미했던 곳.

                                         의식에 참여하는 궁궐 호위병의 사령관과 행정부의 고관들이 먼저 황제를 알현하는 곳.

                                         [황제가 궁궐 내에서 타고 다니던 가마인 승여가 전시되어 있음] 정사각형의 정자식 건물

                            보화전 : 청대에는 황제가 연회를 베풀던 곳, 과거시험이 치뤄지던 곳

 

                         * 건청궁 : 명청 양대에 황제의 침실이자 집무실. 청말엽에는 외국사신 접견장소

                            교태전 : 황후가 큰 행사나 생일축하를 받던 곳. 청대에는 옥새를 보관.

                                         중화전과 같은 정사각형의 작은 건물.

                            곤녕궁 : 본래 황후의 침실이었으나 청대의 옹정제가 건청궁에서 양심전으로,

                                         황후는 곤녕궁에서 체순당으로 침소를 옮기며 곤녕궁의 서난각은 제를 올리는 곳으로

                                         동난각은 황제가 결혼하여 3일 간 신방을 차리던 곳으로 변모.

                                         명나라 말엽 이자성이 난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숭정제의 황후가 목을 매 자결한 장소.

                                                                 

 

 

 

 

[천안문(天安門 : 톈안먼)]

 

자금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천안문(남쪽 정문)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아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네요.

경복궁의 남쪽 정문인 광화문도 복원공사를 마치고 8월 15일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지요.

우리의 광화문 안으로도 많은 외국인들이 입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자! 이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자금성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전에 가이드님이 자금성 안으로 들어가면 화장실에 가기 힘드니

사진 오른쪽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 올 분은 다녀오라 하네요.

사실 자금성은 원래 궁궐의 미관과 위생을 생각해서 화장실과 하수도를 설계하지 않았는데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최근에 자금성에 화장실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아직 일행들과 서먹해 혼자 이리 저리 고개만 두리번거리며

친구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 물병 두개를 사들고 왔네요.

화장실 입구에서 물도 팔다니....

친구도 화장실 사용은 안해 청결상태는 잘 모르겠다네요.

 

 

 

[천안문 입구]

 

자금성을 들어가기 위해 천안문 앞에 놓여있는 금수교를 건너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납니다.

북경여행은 지구상에 정말 엄청난 인구가 살고있다는 것을 실감케해줍니다.

13억의 인구가 일생에 단 한번만 북경여행을 해도 북경은 늘 인산인해를 이루겠죠?

우리는 일행을 놓치지 않아야하기에 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냅니다.

 

가이드님이 호텔에서 <전문대가>거리로 올 때 버스에서 자금성을 설명하면서

자금성은 입구와 출구가 달라 남문의 정문인 천안문으로 들어갔다가

북문인 신무문으로 나오게 되니 자금성을 구경하다 힘들다고

다시 되돌아 나오게 되면 버스는 북문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안되죠? 라며

자금성은 출입구가 다름을 재미있게 설명해주었답니다.

 

또한 자식들이 효도관광시켜드린다고 북경으로 보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나이드신 부모님들이 천안문광장을 지나 자금성을 구경하려면

4km(자금성의 담의 길이가 4km) 이상은 걸어야하기에 이 길을 힘들게 걸으시며

늙으신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이 괘~씸한 것들! 이 괘~씸한 것들!'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우리 일행은 파안대소했답니다.

찜통더위에 일행들이 힘들어할까봐 미리 마음 단단히 먹고 북경여행을 하라고

배려하는 가이드님의 농담때문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북경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이드의 능력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 여행이었답니다.

  

 

 

 

 [단문(端門) - 천안문과 오문 사이의 문]

 

천안문을 통과하니 단문(端門)이 나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자금성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의관을 단정히 고치고 예를 갖추도록 했다고 합니다.

자금성에는 자객이 침입하면 쉽게 발각될 수 있도록 나무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천안문과 단문 사이에는 양 옆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자금성이 아직 시작도 안됐다는 암시겠지요.

  

 

 

 

 

 

 [오문(午門 : 우먼) - 자금성의 정문]

  

어! 그런데 단문을 지나니 가이드와 몇몇 일행들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뒤에 오는 일행과 함께 가이드를 찾아보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제 친구가 휴대폰으로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어봅니다.

오문(午門) 앞에 있다하는 데 수 많은 인파 때문에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때마침 군인(?)들이 행진을 합니다. 다른 분들은 행진을 구경하며 사진도 찍건만

저는 가이드를 찾느라 정신없는 친구에게 미안해 할 수 없이 함께 눈을 크게 뜨고

군중 속에서 가이드가 입은 짙은 군청색옷만을 찾아보지만 보이지가 않습니다.

드디어 친구가 찾았습니다. 아니 그런데 우리는 오문이라 해서 오문 바로 앞을

주로 찾았는데 오문의 왼쪽 성벽이 시작되는 구석에 다른 일행들과 서 있었네요.

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서계시지...

 

그런데 지도를 보니 천안문에서 오문까지의 거리가  오문에서 북쪽의 신무문까지의

거리의 3/4은 되는 것 같습니다. 단문에서 오문까지의 길이만해도 400m나 되고...

그런데 우리는 가이드를 찾느라 정신 없어 그렇게 먼 길인줄도 몰랐네요.

그리고 오문에 이미 가까이 와 버려 멀리서 오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문(午門 : 우먼) - 자금성의 정문]

 

자금성에 다녀 온 한 아이가 중국의 궁궐은 붉은 색 천지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말 천안문도 오문도 벽이 온통 자주색이네요.

 

자금성을 직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벽에 각각 한 개씩 총 네개의

성문만을 두고 있는데 이 오문이 고궁박물관이 된 지금의 실질적인 정문입니다.

 

 'ㄷ 자형'의 웅대한 오문(午門) 앞은 황제의 뜻에 반역한 고위관리들에게

장형(태형보다 한 단계 높은 형벌)을 집행하던 형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황제가 성루에 올라 오문 앞에 끌려 온 죄인들(?)에게 몇 대의 곤장을 칠 것인지 하명했는데

이곳에서의 장형은 매우 끔찍해 명대에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여색만을 탐하는 황제를

극구만류하는 130여명의 조정대신들이 이곳에 끌려와 장형에 처해졌는데

그 중 11명은 곤장을 맞다 즉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를 황제가 직접 이 오문까지 나와 맞이하기도 했으며

'ㄷ 자형'인 것은 적의 침입 시 ㄷ자형으로 포위해 화살을 쏘며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함보다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성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문 옆쪽으로 매표소가 있는데 가이드의 손에는 벌써 입장표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일행 속에 다른 사람이 끼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곧장 오문 안으로 들어가라네요.

어제 처음 만났는데 우리 일행의 얼굴을 모두 정확히 기억할 수 있으려나?

나는 처음 담임을 맡아 아이들 얼굴과 이름 그리고 번호를 익히려면 참 애를 먹었는데...

사실 14명 밖에 안되고 경력이 풍부한 가이드인 것 같으니 그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겠지요.

 

 

 오문(午門)을 통과하는 데 사람들마다

육중한 문에 장식되어 있는 둥근 징들을 계속 만지며 지나갑니다.

그것을 만지면 행운이 있나보다 생각해 친구와 저도 정성껏 하나 하나 만지며 지나갑니다.

이 커다란 둥근 장식은 9개씩 9줄로 되어있는데 중국에서는 9는 길조(행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오문(午門 : 우먼) - 자금성의 정문]

 

자금성 안으로 들어 와 태화문 앞에서 본 오문에는 중앙의 3개의 출입구 이외에 양쪽 끝에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 한개의 문들이 또 있습니다. 오문의 성루(?)로 올라가는 문입니다.

오문의 성루에 오르면 천안문광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문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으나 황제가 결혼할 때 황후가 단 한 번

중앙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과거시험의 최고과정인 전시에 상위 급제한 3명만이

단 한 번 이 문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도 이 오문의 중앙문으로는 출입을 할 수 없었답니다.

이 오문을 지날 때마다 서태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오문과 태화문 사이 안뜰]

 

가이드를 따라 오문을 통과해 오른쪽에 모였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성큼 성큼 앞쪽으로 계속 전진하네요.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이내 일행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기에 한 분 때문에 나머지 일행이

마냥 기다리는 신세가 될까봐 뒤쫓아가며 부르는데 안들리는지 더 빠르게 앞으로 갑니다.

할 수 없이 가까이 뛰어가 부른 후에야 겨우 뒤돌아봅니다.

아마도 이것이 직업병인가봅니다.

가이드에게 말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면 되는데

가이드가 행동에 옮기기 전 제가 먼저 뒤쫓아가 불러오니....

 

 

 

 

 

 

 [오문과 태화문 사이 안뜰]

 

다시 겨우 일행이 다 모였음을 확인한 후 앞으로 전진합니다.

오문을 들어서자마자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금수교라는 멋진 대리석다리가 여러개 있습니다.

금수교는 금수하(金水河)를 건너는 다리로 천안문 앞에도 있었고 이 곳에서는

이런 다리를 두 번 건너야 하는데 저는 많은 인파 속에서 일행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느라

밑을 볼 겨를이 없어 이곳에 물이 흐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궁궐 안뜰의 광장과 같은 광대한 넓이에 압도 당해 자칫하다가는 또

터키의 톱카피궁에서처럼 일행을 잃어버리겠구나 하는 염려가 앞서

나란히 놓여있는 아치형 다리들이 참 아름답다는 것만 느꼈을 뿐인데!

정말 물이 있었나????

 

 

 

 

 

 

 

 [태화문(太和門 : 타이허먼)]

 

 전문부터 시작하면 천안문, 단문을 거쳐 오문까지 4개의 문을 지나왔는데도

아직 자금성의 실질적 전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또 태화문이 나타납니다.

몇 년 전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대원군이 했던 뭉클한 대사가 생생하게 다가서는 순간입니다.

 

 

 

[태화문(太和門 : 타이허먼)]

 

문호개방에 대해 대원군은 우리도 일본처럼 문을 열어야 하지만

우리가 문을 열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들이 힘으로 우리의 문을 열고야 말거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경복궁 재건의 타당성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영국공사가 자금성으로 서태후를 만나러 갔는 데 하나의 문을 지나니

또 하나의 문이 나오고 그리고 또 하나의 문이 나오고........

그렇게 열두 번째 대문을 들어선 후 가마에서 내리니

그제서야 자금성의 육중하고 웅장한 큰 대문이 천천히 열리더랍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금성의 수 많은 전각들이 크고 작은 산처럼 영국공사의 눈 앞으로 밀려오니

영국공사가 저도 모르게 '한 번에 집어 삼키기엔 너무 큰 나라가 아니냐'라고 부르짖었답니다.

 

계속해서 대원군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대궐은 어떻습니까? .... 열두 대문은 아니더래도 광화문은 지나야 경복궁을 만나야지요.

자금성에는 못 미쳐도 크고 작은 전각이 작은 동산만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 년, 이십 년은 못 기다려도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해서야

어찌 이 나라의 명맥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 그 말 입니다." 

 

 

 

 

 

 

 [오문과 태화문 사이 안뜰]

 

태화문 앞 오른쪽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수사자 조형물이

왼쪽의 청동 암사자와 짝을 이루며 궁궐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대한 청동상에 비해 옆에 있는 석등은 매우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미가 돋보입니다.

 

 

 

 

 

[오문과 태화전 사이 : '무영전'으로 통하는 출입문]

 

자금성은 동서 753m, 남북 961m에 이르는 세계최대의 궁전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유럽의 궁전과 달리 이 큰 궁궐 내부에는 나무가 없습니다.

그것은 황제를 암살하려는 자객이나 외부 침입자들이 숨을 곳을 없애기 위함이고

목조건축물이기에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유럽의 궁전이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면

베이징의 자금성은 980개의 건물과 9,999.5칸 이라는 숫자로 위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옥황 상제가 사는 곳이 1만 칸이기에 황제는 그 보다 반 개 적은

9,999.5칸을 갖게 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8,707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4개의 기둥들 사이를 칸이라 일컫는 것이기에 

실제 방의 개수는 현재 980개라고 합니다. - frommers.com의 자료 -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궁의 방수는 700개이니

자금성의 건물의 규모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베르사이유궁은 왕궁의 면적만은 2만평이지만 정원을 포함한 전체적 규모는

250만평이 넘으니 비록 자금성이 건축면적은 15만평으로 훨씬 넓지만 전체면적은

베르사이유궁의 1/3도 안되는 72만평이기에 자금성과 서로 비교하기가 조금 애매해지네요.

코끼리 열차를 타고 베르사이유궁의 정원을 돌며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저로서는 베르사이유궁이 자금성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왼쪽 : '문화전'으로 통하는 문 /  오른쪽 : 홍의각]

 

월대(궁전 앞에 있는 돌층계)의 기둥장식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자금성은 자주색과 황토색 그리고 용, 용, 용 무늬 일색입니다.

이렇게 구석 구석까지 황제의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명과 청왕조가

오래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 억측해봅니다.

언제 시간이 나면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역사 속의 왕들에 대해 공부해봐야 겠습니다.

현재 살아있는 왕으로는 태국의 왕이 가장 존경받는 왕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진 오른쪽 건물은 '홍의각'으로 제례에 사용되던 제기 및 옥기를 보관하던 곳입니다.

베이징에서 사온 책자에도 소개될 만큼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건물인 것 같습니다.

 

 

 

 

[태화전 월대에서 바라본 태화문]

 

그러면 이 거대한 자금성을 지은 왕은 누구일까요?

황제인 조카를 내몰고 명왕조의 제3대 황제자리에 오른 영락제 (재위 1402-1424) 가

수도를 난징(남경)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기 위해 10만명의 전문 장인들을 포함한 100만 명의

인부를 동원 1407년에 착공 1420년에 완공한 것입니다. 무려 14년이란 세월이 걸렸지요.

우리나라의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자금성보다

13년 빠른 1394년에 착공 1395년에 완공했습니다.

 

가이드님이 버스에서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정사에는 영락제가 정실부인의 자식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영락제는 한민족의 피가 반 정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즉 영락제의 어머니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락제는 죽을 때까지 주원장의 정실부인인 마(馬) 황후의 아들로 알았다고 합니다.

 

청나라 때는 3대왕인 순치제(청태조 누르하치의 손자)가 제일 먼저 자금성에 입성

그 때 나이 겨우 6살로 허울 뿐인 황제였다고 합니다.

순치제는 23세에 홀연히 산서성 오대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는데

스님이 된 황제는 순치제 뿐이었다고 합니다.

 

가이드님은 영화 '마지막 황제'로 우리에게도 너무도 친숙한 푸이(재위 : 1908-1912)가

3살 때 자금성에 입성한 마지막 황제라고 설명하며

푸이는 남자구실을 못했는데 황후가 임신을 하자 황후와 내연관계였던

일본군관을 죽여 그의 간을 빼내 황후에게 강제로 먹였고 그 일로 황후는 미쳐버렸다고 합니다.

푸이에 관해 읽다보니 황후가 일본군관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자

그 갓난 아기를 그대로 아궁이에 던져버렸다고도 하는데

과연 이것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렇게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부터 청나라 푸이(溥儀 :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까지 500여 년간(1421-1924) 명, 청대의 황제 24명이 거쳐 간 궁궐입니다.

사실 푸이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1912년 퇴위되어 청나라는 망하고 푸이는 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지만 자금성에서 생활은 계속했고 자금성에서 쫓겨난 것은 1924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락제도 푸이도 모두 남자구실을 못했다고 하네요.

 

 

 

 

 

 [태화문에서 바라본 태화전]

 

  태화문을 통과하자 가이드님이 간단한 설명을 마친 후 저 멀리 앞을 가리키며

몇 분까지 태화전 왼쪽 작은 출입문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어느 문이요? 재차 물어 확인해야 할 정도로 문과 문사이의 거리가 엄청 멉니다.

9만 명의 병사들이 집결할 수 있는 규모라니 궁궐 안에 광장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중국은 정말 거대한 나라구나'라는 위압감을 주었던 장면인

어린 황제 '푸이'가 수만 명에 이르는 신하들의 알현을 받던 곳이 바로 이 태화전입니다.

 

가운데 대리석 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던 길이었기에 일부러 이 길로

걸으며 황제의 기분을 느껴보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멀리서보면 태화문과 태화전은 매우 비슷해 보이는 데

지붕을 자세히 보면 태화문은 팔작지붕이고 기둥이 태화전보다 2개 적은 10개입니다.

 

 

 

 

 [태화전]

 

태화전은 자금성 안에서 가장 큰 건물로 황제의 즉위식, 황실의 결혼식, 중요 법령 낭독식,

출정 전날의 장군 임명식 등 나라의 큰 행사가 열렸던 곳입니다.

 

<태화전> 앞 계단 중앙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구름 위를 나는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된 거대한 대리석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주요 건물의 앞 뒤에 있으며 '운용석조(雲龍石雕)'라고 합니다.

이 돌은 보화전 뒤의 '운용석조'와 달리 세개의 돌을 연결해

청나라 때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길은 황제만이 다닐 수 있었는데 황제는 가마(乘輿)로만 다녔기 때문에

실제로 이 미끄러운 길은 가마꾼이 밟았고 황제는 그 가마로 이 길을 지났을 뿐이라고 합니다.

문득 터키 아야소피아의 예배당이 있는 2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반들 반들한 경사진 돌길이 생각나네요.

여왕을 가마에 태우고 올라가야 했을 가마꾼들의 노고와 비교되어서...

이곳보다는 아야소피아의 구비 구비 도는 낮고 좁은 돌길이 더 힘들었겠죠?

그러나 가마꾼들이 감히 황제를 상징하는 거대한 용이 새겨진

돌 위를 걸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네요.

가마의 넓이가 넓어 가마꾼들은 옆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태화전 - 사진 : LSW]

 

태화전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목조건물도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오히려 놀라운 것은 땅 밑을 파고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40여장의 벽돌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철옹성과 같은 자금성도 1900년 의화단을 도운 서태후가 일본을 비롯한

유럽 8국 연합군에게 패배해 자금성을 버리고 장안으로 피신해야 했지요.

 

사진에서 알 수 있듯 3층의 기단 위에 커다란 세발 청동향로들이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황제가 도착하면 이 모든 향로가 피워지고 향로에서 피어나오는 연기들 사이로

황제가 마치 구름 위를 노닐듯 가마를 타고 올라가고

태화전 아래의 궁중악대가 일제히 연주를 하며 수 많은 문무대신들이

오체투지하면서 산이 울리도록 황제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태화전의 단청 - 사진 : LSW]

 

태화전은 2년 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2008년 7월 16일 재개방되었기에 단청이 매우 선명합니다.

단청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황금색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용마루 양끝에 있는 치미(=망새)에도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치미는 화재와 같은 재난을 막는 상징적 의미로 장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태화전]

 

 

[태화전]

 

태화전의 치미, 잡상, 섬세한 처마 그리고 아름다운 단청이 건물의 미를 더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에서 느껴지는 지나친 사치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아 거부감이 조금은 덜합니다.

그러나 기와의 모습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에 비해 매우 단조로운 것 같습니다.

 

 

 

 

 

 [태화전의 잡상 - 사진 : LSW]

 

태화전의 잡상입니다. 잡상이란 추녀마루에 얹은 장식용기와로

오직 궁전이나 궁전과 관련있는 사찰과 같은 건물에만 놓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악귀를 쫓고 화마로부터 보호한다는 주술적 의미 때문에

홀수로 배열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건물의 위상이나 중요도에 따라 잡상의 수가 달라지는데 주로

황제가 있는 건물에 11개를 배치하고 그 아래로 9개, 7개, 5개 등 홀수로 놓습니다.

우리나라의 잡상은 주로 삼장법사를 비롯해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 저팔계...사오정 등이 뒤에 배열해 있는 반면

중국의 잡상은 맨 앞에 선인을 비롯해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 산예, 압어,

해치(해태), 투우, 행십(원숭이) 총 11개의 잡상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잡상에 비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해 보입니다.

 

 

 

 

 

 

 [태화전]

 

잡상의 맨 뒤에 있는 커다란 동물인 나티는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잡상의 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진 맨 오른쪽 용마루 끝에 있는 것은 치미입니다.

 

 

 

 

 

[태화전 앞 월대]

 

저 멀리 왼쪽에 보이는 것이 태화문. 그 뒤로 단문이, 그 뒤로 오문이 살짝 보이네요.

 

사진 왼쪽의 3층 계단에는 황제의 만수 무강을 기원하는 청동학이 있고

 

그 옆에 보이는 탑모양은 중국 고대 곡물계량기로 곡물의 표준분량을 측정하던 도구였다고 합니다.

 

또한 태화전의 3단의 대리석 계단을 자세히 보시면 툭 튀어나온 용머리조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142개의 용머리 조각들은 배수구로 비가 오면 용의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태화전 앞 거북]

 

시간에 맞춰 가이드님이 약속장소로 정한 태화전 옆 작은 출입문에 왔건만

이미 와 있는 분들도 많은데 아직 안 온 사람이 있는지 이동할 생각을 안하네요.

그래서 10분 이상을 이곳에서 이동도 못하고 이곳 저곳 카메라 셔터만 눌러댑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도 찍고....

 

 

 

 

 

 

 

 

[태화전 앞 물항아리]

 

우리의 약속장소인 작은 출입문 앞에 놓여져 있는 큰 항아리는 무엇일까 기웃거려도 보고...

 

 

 

 

친구는 작은 출입문 위에 있는 네 개의 장식물을 찍었네요.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태화전 앞 부속건물]

 

자금성은 중국어로 꾸공(故宮) 영어로는 Forbidden City(금단의 도시)라고 합니다.

가이드님은 자금성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습니다.

자금성의 '紫(자)'자는 '자색 자'로 하늘에는 흰구름, 검은 구름, 자색구름이 있는데

자색구름에는 하늘 최고의 신(옥황상제)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주색은 북극성을 상징하는 데 북극성이 바로

하늘 최고의 신이 사는 궁전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금(禁)은 '금할 금'자로 영어와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의 금지구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즉 천자(하늘의 아들)인 황제의 궁전은 천제(옥황상제)가 사는 자미궁(紫微宮)에 버금가는

이 땅 위의 최고의 궁전으로 일반인들의 금지구역이라는 의미인 것이겠죠?

 

 

   

 

 

 

 [태화전 문창살]

 

우리나라 건축물을 볼 때 문창살의 아름다움에 많은 관심을 갖기에 태화전의 문창살을

눈여겨 보았지만 제 눈에는 우리나라의 문창살이 더 아름답게 보이네요.

아전인수격 관점일까요?

 

황금색이야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의 상징이었던 색이지만

벽과 기둥 그리고 문창살까지 온통 붉은 계통의 자색(紫色: 자주색)입니다.

그래서 자금성의 紫가 '자색 자'자이기에 '자색을 금하는 성'으로

잘못 해석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색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색으로

황제만이 자색 즉 자주색(보라색)을 사용했고 일반 백성은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황금색과 자주색을 사용 못했던 백성들은 얼마나 더 황금색과 자주색에 대한

동경이 강했었을 지 능히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물론 악귀들이 불의 색인 붉은 색을 싫어해 붉은 색 가까이 근접을 못한다는

주술적 의미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자금성의 부속건물들은 대부분 팔작지붕입니다.

박공의 황금색 용이 유난히 반짝이며 하늘에서 노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금성에서 황실 서가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은 황색유리기와로 되어 있습니다.

검은색은 물을 상징한다 하여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유리기와란 기와의 윗부분에 유약을 발라 유리처럼 반들거리게 만든 기와로

황금색을 내는 이 유리기와는 오직 황실에서만 썼다고 합니다.

만약 일반 백성이 사용했을 경우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했다고 합니다.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으로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사실 제 눈에는 황색(노란색)으로 보이지 않고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주황색으로 보이네요.

 

이 유리기와를 굽던 곳이 바로 전문대가와 인접해 있는 유리창이라는 곳입니다.

자금성을 짓기 위해 쓰여진 기와가 무려 2억만개라고 하니 유리창에서 얼마나 많은

도공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을지 상상이 갑니다.

 

 

 

 

 

 

  

자금성 내에는 수 많은 내시(=환관)들이 있었는데 명나라 때는 2만 명에 달하는 환관들이 있었으며

명대의 환관들의 권력은 막강해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청대의 강희제는 9,000명으로, 건륭제는 3,000명 이하로 줄였다고 합니다.

명, 청대의 내시들은 이 궁궐에서 살지 않고 출퇴근을 했는데

많은 내시들이 퇴근하면서 궁궐의 작은 귀한 물건들을 훔쳐 갖고 나가 팔았다고 합니다.

그 물건들을 팔았던 곳이 바로 <전문대가>에 인접한 유리창이라 한 것도 같고

십찰해(스차하이)의 골동품거리였던 것도 같고...

가이드님이 한 번에 여러 설명을 계속하니 받아적기도 힘들고 외우기도 힘들고....

 

 

 

 

[태화전 내부 - 사진 : KDH]

 

사람들이 이제야 다 모였는지 가이드님이 태화전 안에 황제가 앉았던 자리(옥좌)를 

들여다 보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 고개만 잠깐 기웃하고 이내 발길을 돌립니다.

바닥에도 계단에도 기둥에도 용, 용, 용(龍)으로 가득하네요.

태화전 안의 액자에는 '건극수유(建極綏猷)'라는 글이 써있습니다.

'나라를 세워 편안함을 꾀한다'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베르사이유궁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

황제의 방과 황후의 방에 비하면 겉보기에는 소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바닥은 4,718개의 금벽돌로 깔려 있다하니....

 

 

 

 

[중화전]

 

사진 중간에 보이는 태화전 옆담에 있는 작은 문을 통과해 나오니 중화전과 보화전이 바로 보입니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을 합쳐 전삼전(前三殿)이라고도 합니다.

사진 왼쪽이 중화전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이 태화전입니다.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의 옥좌에 오르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장소입니다.

중화전과 교태전은 정사각형 전각으로 지붕 위 둥근 치미는 황제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중화전 내부에는 고궁안에서 황제가 타고 다니던 가마(=乘輿)가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화전의 잡상은 9개라는 데 왜 제 눈에는 맨 앞의 선인을 비롯해 8개일까요????

 

 

 

 

[중화전 앞]

 

 오른쪽 살짝 보이는 건물이 보화전입니다.

즉 윗사진과 대조해 보시면 알 수 있듯 중화전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태화전의 뒷부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보화전의 정면이 보입니다.

중화전 앞으로 화려한 월대가 있구요.

 

 

 

 

 [중화전 앞 물항아리]

 

보화전의 전체적 모습이 태화전과 비슷하고 그 옆의 작은 출입문과 왼쪽 부속건물의 모습도

물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유사합니다.

작은 출입문 앞에 금박이 거의 벗겨져 버린 커다란 청동 항아리가 있는 것도 똑 같습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니 가이드님이 나중에 설명해 주었는데 화재시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담아 두었던 것으로 이것으로 이 큰 궁궐의 불을 끌 수는 없을테니

화재를 예방하고 픈 상징적의미였을 거라고 합니다.

 

  

 

 

 

항아리 밑받침 오른쪽에 나 있는 구멍은 물이 얼 경우 불을 때서 물을 녹이기 위한 아궁이라고 합니다.

  자금성 내에 금을 입힌 물항아리가 308개가 있었으나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으로 

연합군이 자금성에 주둔해있을 때 모두 긁어 가 여기 저기 긁힌 자국 밑으로

검은 속살이 드러나 국가를 수호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역사의 산 증거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중화전 앞 월대]

 

태화전을 지나자마자 중화전이 있고 바로 옆에 보화전이 있어

우리는 이곳에서 3층 월대 아래로 내려가보지 않고 바로 보화전 뒷쪽으로 내려가

중화전 앞뜰 동쪽의 월대가 자금성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지 못했네요.

 

 

 

사진에서 알 수 있듯 보화전과 중화전은 태화전과 함께 3층의 높은 월대 위에 있습니다.

가이드님이 발로 바닥을 탁탁 치며 이 월대의 높이가 얼마나 될 것 같냐고 또 질문을 합니다.

가이드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높이가 8.15m로 주택의 높이가 이 높이를 넘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보화전]

 

보화전 안의 액자의 글씨는 청대의 건륭제가 쓴 것이라고 하네요.

'황건유극'이라는 뜻은 '황제로서 천하의 최고의 준칙을 세운다'라고 해석하는 것 같은데

해석이 조금????

 

 

 

 

[보화전 - 사진 : KDH] 

 

 보화전은 명대에는 황제가 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였고

청대에는 황제가 연회를 베풀던 곳이자 과거시험이 치뤄지던 곳입니다.

보화전 또한 태화전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으나 보화전은 태화전 보다

전체적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지붕이 팔작지붕이고

기둥이 태화전보다 2개 적은 10개이고 처마마루에 있는 잡상의 수도 적습니다.

 

보화전도 중화전처럼 단청이 새롭게 단장되지 않아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입장 수입이 상당할 테니 곧 보수하겠지요?

그러나 모두 보수되어 새로 지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보다 이렇게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는 건물들도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보화전 뒤 월대에서 내려다 본 내정의 정문인 건청문] 

 

 비슷한 건물만이 계속돼 조금의 지루함을 느낄 즈음 눈 앞에 여러 전각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아기자기한 예쁜 장식들도 눈에 띄는 전혀 색다른 분위기의 자금성이 보입니다.

이곳을 경계로 건청문 뒤로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인 내정과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외조(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가 구분됩니다.

 

 

 

 

[보화전에서 내려다 본 내정의 정문인 건청문] 

 

 저는 개인적으로 보화전 월대에서 바라보는 이 자금성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에

이 3층 월대 위에 서서 즐겁게 한참을 이곳 저곳 내려다 보았습니다.

 

 

 

 

 [보화전에서 내려다 본 자금성] 

 

이곳에서는 뒷 편에 있는 건축물들도 볼 수 있어 9,999칸이라는 자금성의 큰 규모를

조금이나마 어림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것 같습니다.

저 뒤로 지붕이 뾰족이 나와 있는 건물은 동서남북 모서리에 있다는 '각루'인가했는데

베이징에서 사온 책자를 보니 '우화각(雨花閣 : 위화거)'이라고 소개되어 있네요.

티베트 전승불교인 밀종(密宗)을 학습하는 중요 불교건축물로

자금성 안에 있는 수 많은 불당 중 가장 크다고 합니다.

 

 

 

 

 

 

 [보화전에서 내려다 본 자금성] 

 

건청문 앞에는 소화용 대형 물항아리가 유독 많이 보입니다.

내정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그런가????

 

오른쪽 2층 건물은 봉선전(펑셴뎬)으로 명청대에 황실의 선조에게 제를 올리던 사당이라고 합니다.

 

 

 

 

 

건청문담장 뒤로 건청궁의 기와만 보이네요.

건청문 옆 벽에는 예쁜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대형 화분과 벤치도 마련되어 있어

잠시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도록 관광객들을 배려한 곳이기도 합니다.

 

 

 

 

 

 

[보화전의 뒷편에서 본 '운용석조'] 

 

보화전 3층 월대 위에서 건청문쪽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문양들을 구경하고 계단을 내려오니

가이드님이 계단 중앙의 거대한 돌을 자세히 보라고 합니다.

 

 

 

[보화전 뒷편 - 사진 : LSW]

 

[보화전 뒷편 '운용석조' - 사진 : LSW]

 

보화전의 이 '운용석조(雲龍石雕)'가 자금성에서 가장 큰 돌이라고 합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9마리의 용과 장수와 복을 의미하는

산과 절벽, 바다 그리고 운해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거대한 돌이 특별한 것은 조각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 돌이 세개를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이라는 것입니다.

길이 17m, 폭 3m, 무게가 20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로 북경에서 50km나 떨어진

방산에서 채취한 것으로 한 겨울에 이 돌을 운반하기 위해 500m 간격으로 우물을 파서

그 물을 뿌려 땅을 얼려가며 조금씩 굴려 2만 명의 인부들이 28일 걸려 운반했다고 합니다.

 

하나의 돌이라는 설명을 듣자마자 서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사진을 찍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리 일행 중

이 돌의 전체적인 모습을 찍은 분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맨 아래 절벽과 파도부터 윗부분까지 찍은 '운용석조' 사진을 보니 매우 멋진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다른 일행들 눈치도 보여

이내 일행쪽으로 와 버린 것이 무척 아쉽네요.

베이징에서 사 온 책에도 사진이 없고....

 

 

 

 

 

사진 바로 앞의 긴 돌이 '운용석조'인데 저는 먼 곳만 쳐다보느라 못보고 그냥 지나쳐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었네요.

 

 

 

 

[보화전과 건청문 사이의 안뜰]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보화전 뒤편의 월대에 병사들이 일렬로 정렬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을 이 궁궐에 사는 황실 가족들이

과연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나라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권모술수에도 능해야 했으니....

그로인해 권력은 오래갈 수 없는 것이고....

인생은 무상하거늘 왜 이렇게 권력에 집착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