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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내몽고] 제 2일 : 북경(8) - 자금성의 내정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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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기/중국

2010. 9. 5.

   

* 건청궁(乾淸宮: 치안칭궁) : 명, 청(옹정제 이전) 양대에 황제의 침실이자 집무실.

                                          청나라 때는 황제가 사망 후 며칠간 시신을 안치했던 곳.

                                          청말엽에는 외국사신 접견장소

 

   교태전(交泰殿: 자오타이뎬) : 황후가 큰 행사나 황후의 생일에 축하의 예(禮)를 받던 곳.

                                              청대에는 옥새를 보관. 중화전과 같은 정사각형의 작은 건축물.  

 

   곤녕궁(坤寧宮: 쿤닝궁) : 본래 황후의 침실이었으나 청대의 옹정제가 건청궁에서 양심전으로,

                                        황후는 곤녕궁에서 체순당으로 침소를 옮기며 곤녕궁의 서난각은 제를 올리는 곳으로

                                        동난각은 황제가 결혼하여 3일 간 신방을 차리던 곳으로 변모.

                                        명 말엽 이자성이 난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숭정제의 황후가 목을 매 자결한 장소.

                                                                 

 

 

와! 자금성과 명과 청에 대한 기술은 책마다 다르고 인터넷 자료도 다르고 제 생각과도 다르고

제가 원하는 정보는 구하기도 힘들어 보다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소비되네요.

그래도 여전히 오리무중???? 

 

  

  [건청문 현판]

 

 

 현재 자금성의 각 건물의 현판(편액)에는 만주어와 한자가 함께 나란히 써 있는 것과

만주어를 지우고 한자로만 써있는 것이 있습니다.

건청문 현판에는 만주어와 한자가 병기(倂記)되어 있습니다. 왜일까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금성은 명나라 제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세워진 궁전입니다.

명나라는 중국의 주류민족인 한족이 세운 중국의 정통왕조입니다.

한족(漢族: 지나족)은 동아시아 동남쪽 작은 지역에 거주하다가 흉노가 분열하는 틈을 타

한(漢)나라(B.C. 206 - A.D. 220) 때 중원(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사실 한족은 한나라 때 한나라 지역에 사는 모든 백성을 한족으로 정의를 내린

것일 뿐 서로 피를 나눈 혈연관계는 아니라고 정의내려지고 있습니다.

최근 동북공정으로 더욱 적극적인 한족화가 이루어지고 있죠.

 

반면 여진족은 동만주와 연해주방면에 살던 퉁그스계 민족입니다.

한족은 선진화된 문명(이것에 대해서는 원래 한족의 문명이 아니라는 이견들이 많음)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수렵과 목축을 주로하는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습니다. 

이러한 멸시 속에서 여진족인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에 적극 충성(?)했으나 

결국 명나라군에 의해 피살됐습니다. 이를 목격한 누르하치는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여진족의 성장을 경계하며 시종일관 분열정책에 힘쓰던 명나라는 부정부패로 인해 나라의 경제가 기울던 차에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원병까지 보내느라 여진족 분열정책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틈을 타 누르하치는 주변 여진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힘을 키워 1616년 후금(→청)을 세웠습니다. 

이후 제2대 태종(홍타이지)이 한족(漢族)들의 반감을 피함과 동시에 세계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결의로

 과거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금(後금)에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꿨습니다.

이때 여진이란 민족명도 만주로 바꿔 현재는 만주족이라 불립니다. 

 

그 후 제 4대 강희제 때 반란세력들을 모두 제압하고 실제로 전 중국을 통일(1683)하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강희제가 중원(중국 본토)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통일은 이루었다하나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인구가 100만도 채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주족 인구의 100배에 해당하는 1억이라는 엄청난 인구의 한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관리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강희제는 명나라때의 관리 대부분을 그대로 기용했으며,

최고위 관직까지도 한족과 만주족을 같은 비율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문서를 제외하고 만주어와 한자를 같이 사용하게 했습니다.

 

비록 자금성이 명나라의 황궁이었다고는 하나 실질적 지배왕조가 된 청이

자금성 현판들을 만주어로 바꾸지 않고 만주어와 함께 한자를 나란히 새김으로써

청나라가 만주족의 나라임을 알림과 동시에 한족들의 반감을 잠재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청조 3대 황제인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한 1644년 부터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가 1912년 퇴위되기까지 270년 가까이 만주족은 한족을 지배해왔지만

지금은 만주어를 구사할 수 있는 만주족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절대다수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청왕조 스스로 한족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한족화와

뒤 이은 청조의 몰락으로 만주족들이 한족화되거나 뿔뿔이 흩어지며 그들의

언어마저도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강제로 사라져가는 반면 만주족은 스스로 한족에 흡수되어 간 것이죠.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보면 자신의 문명을 지키는 데는 조국의 존속과 함께 숫적 우세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소수민족이 그 많은 수의 한족과 이민족들을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은

만주족이 가졌던 용맹성과 추진력 그리고 지도력이 저변에 깔려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만주어가 지워지고 한자로만 써있는 현판은 어찌된 것일까요?

그것은 최근 자금성을 보수하면서 이민족의 언어인 만주어를 지운 것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천안문만 특이하게

만주어와 한자가 병기된 현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중국 국장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할 것인가 한글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에

자금성의 만주어를 지운 전각 현판들이 예로 거론되고 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자금성의 모든 현판의 門자는 오른쪽 획이

淸자의 月자 획처럼 위로 삐쳐 올라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문을 지나 다니다가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고 매우 설득력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

황제에 대한 존경심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는 없지만 획 하나 하나까지

신경쓰며 살아야했던 당시의 살벌함이 전해집니다.

 

 

 

  

 

 [건청문 앞 황금 동물상 (암컷)]

 

건청문 계단 옆에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큰 몸집의 황금 동물상이 있습니다.  

왼쪽 발을 자세히 보면 발가락 하나가 새끼의 입 속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끼가 누워서 발가락에 있는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황실 후손의 번창을 상징합니다.

 

가이드님이 이 동물의 귀를 주의해서 보라고 합니다.

태화문 앞에 있던 사자상과 같은 줄 알고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귀가 아래로 내려와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이 동물이 사자인지? 개인지? 알쏭 달쏭 하네요.

 

그러면 이것은 동서양의 고대 국가에서 '황실의 개'로 상징되었던 '티베탄 마스티프'???

'티베탄 마스티프'는 머리가 크고 주둥이는 사각형에 가까운 티베트산 토종견입니다.

히말라야 고지대의 혹독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맹견으로  공격성을 키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낮에는 묶어두고 밤에만 풀어두어 가축을 지키도록 했다고 합니다.

목줄에 매어 혹한을 견뎌내야 했던 티베탄 마스티프는 용맹성과 공격적 성격이

매우 강하나 주인에게는 온순하며 충성스러운 개입니다.

 

이 황금 동물상의 목에 방울과 술이 달린 목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자가 모델이었던 것은 아닌 것 같고 티베탄 마스티프 즉 개가 모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사자가 처음 소개된 것은 명나라 영락제 때인 1419년 8월입니다.

즉 환관 정화가 영락제의 명에 의해 남쪽 바다로 일곱차례 대원정을 떠났는데

1419년 8월에 귀국할 때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 중국에는 없는

진귀한 동물들을 가져오며 처음 사자가 중국에 소개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금성이 영락제 때인 1407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황금동물상이 언제 제작되었는지 자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사자를 모델로 해서 이 황금상이 제작되었을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사자의 귀는 짧고 세워져 있는 반면 티베탄 마스티프는 중간 크기의 귀가 

아래로 내려와 있는데 이 황금 동물상도 귀가 내려와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건청문을 들어서면 신하들이 출입할 수 없는 사적인 생활공간인

내전이 시작되기에 이곳의 궁녀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말고, 귀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동물의 눈을 눈썹으로 가리고 귀를 덮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이드님은 이러한 설명은 해주지 않고 개라고만 설명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 가물???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이런 동물상이 없어도

서슬이 시퍼런 황제가 거처하는 내정에 굳이 이런 황금상을 세워 후첩과 궁녀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어느 누군가가 처음 추측해 낸 얘기를 계속 인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몸집이 매우 큰 티베탄 마스티프는 용맹하고 공격적이고 충성스런 경비견으로 약 6,000년의

오랜 시간 동안 티베트의 보호신처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동물입니다.

중국 고대 황실에서도 뭇 짐승을 누를 위엄을 가진 웅대한 풍모와 용맹성으로 인해

'황실의 개'로 총애를 받던 동물이기에 이 건청문 앞에 보호신으로서 세워 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재 중국에의해 점령당한 티베트의 신견(神犬)이 중국 황실의 경비견으로 서 있는 형국인 것이죠.

 

참고로 현재 중국에서도 순수혈통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부의 상징처럼 여기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그 가격이 무려 7억 이상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전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살았던 용맹스런 티베탄 마스티프보다는

몸집도 작고 온순해졌다고 하네요.

 

 

 

 

 

 [건청문 앞 황금 동물상 - 수컷]

 

정말 못생기고 무섭게 생겼죠? 이것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해치(해태)상은 정말 잘 생겼네요.

 

 

이것은 수컷으로 오른쪽 발로 공모양의 둥근 것을 쥐고 있습니다.

여의주라고도 하고 지구라고도 하는데 제 생각에는 우주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 생각하고 있는 황제의 권위를

우주가 아닌 지구로 상징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의주는 매끄러운 옥구슬인데 수사자가 쥐고 있는 것은

축구공처럼 6각형들의 문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 NASA의 발표에 의하면 우주의 모양은 12개의 5각형이 맞물려 있는

12면체의 형태로 축구공 모양과 같다고 했기에 혹시 당시의 천문학자들도 우주가

축구공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제 나름대로 그냥 재미로 억측해 보는 것이죠.

  

 

 

 

 

 

 

 

[태화문 앞 청동사자상]

 

반면에 자금성 초입인 오문을 지나 태화문 앞에 있던 청동사자상은 눈썹도 위로 돌돌 말려있고 

귀도 작고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이곳의 사자상도 수문장의 역할이기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워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되었겠지요. 발톱도 뭉툭하고 모두 모여있네요.

전체적으로 이 청동사자상이 건청문 앞의 황금상 보다 더 정교해 보입니다.

  

그런데 동물상들이 천안문 앞에는 돌로, 태화문 앞에는 청동으로 만들고

건청문 앞에는 황금을 입힌 것일까요?

황제와 황실가족이 생활하는 내정이 더 권위있고 중요한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일까요?

  

 

 

 

 

 

 [건청궁 앞] 

 

건청문을 통과하면 정면에는 건청궁이 있고 왼쪽에는 양심전으로 통하는 문(사진 중앙)이 보입니다.

양심전은 옹정제 때부터 건청궁에서 이곳으로 황제의 침실을 옮기면서 청대 말엽까지

약 200년 간 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며 황제가 국정을 처리하던 곳이었습니다.

유명한 서태후가 수렴청정하던 곳이기도 하며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선통제)가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당한 후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유폐되었던 곳입니다.

우리는 패키지여행이었기에 양심전은 그냥 통과!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긴 담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장면에서 나오는

서육궁(?)과 내정(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을 가르는 긴 담장도 통과!

각종 진귀한 보물을 전시해 놓은 '진보관(眞寶館)'도 통과! 

진보관 남쪽에 있는 아홉마리 용이 새겨진 화려한 '구룡벽(九龍壁)'도 통과!

 

 사진 앞쪽에 있는 청동에 금박을 입힌 탑모양은 '강산사직금전(江山社稷金殿)'으로

간략히 '금전(金殿)'이라고도 합니다.

맨 위에 동그란 것은 중화전에서와 같이 황제를 상징하며 '강산사직'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강산과 사직이 황제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건청궁 내부 - 사진 : KDH] 

  

건청궁은 청대의 옹정제가 비밀 침실인 양심전으로 옮기기 전까지

명대와 청대의 강희제까지는 황제의 침실이었습니다.

옹정제부터는 내정의 전례(典禮)나 외국사절의 접견 장소였으며

황제 임종 시에는 며칠 간 관을 안치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건청궁이 황제의 침실로 쓰였다고는 하나 사실 황제의 암살을 막기 위해

자금성에는 황제의 침실로 사용한 방의 개수는 수 십개에 이르렀고,

몇 개의 방에는 환관에게 황제와 똑같은 복장을 입혀 침소에 들게 했다고도 합니다.

 

건청궁 안에는 고풍스런 큰 거울이 있는데

황제의 침전에 이렇게 큰 거울이 양 옆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황제의 침전이었기에 사람들의 동작 하나 하나를 보다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건청궁 안에는 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가 썼다는 '정대광명'이라는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이 액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전 중국을 통일한 청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에게는 35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했으나 방탕만을 일삼고 심지어 부황의 자리까지 넘보며 강희제의 침소까지

심복을 시켜 엿보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강희제는 둘째 아들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퇴위시켰습니다.

그러자 황태자 자리를 노리는 나머지 아들들의 권력투쟁이 일어났습니다.

할 수 없이 1년 뒤 다시 둘째 아들을 황태자로 재지명했으나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강희제는 다시 황태자의 지위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화가 난 강희제는 죽을 때까지 후계자를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고 후계자의 이름을 밀지에 적어

상자에 보관했다가 자신이 죽은 후 그 밀지에 적힌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했습니다.

그 후 청조는 이것을 이어받아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밀지를 작은 함에 넣어

건청궁 안 '정대광명'이라는 액자 뒤에 보관했다가 황제 사후에 열어보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작도 일어났다는 야사도 전해지지만 황제가 죽기 전까지는

후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황태자를 추종하는 세력이 생길 수 없도록 했고

황자들도 황제의 신임을 얻기 위해 문무 양면으로 더욱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강희, 건륭제 때는 이곳에서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위해 장수연이 베풀어졌습니다.

지금도 이곳에서 팔순잔치를 연다해도 그 분위기가  안성맞춤이라 만약 이곳에서의 장수연이 허락된다면

하루 사용료가 엄청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애용할 것 같지 않나요?

 

 

 

 

[건청궁과 교태전]

 

외조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과 달리 건청문을 들어서면 신하들이 출입할 수 없는

사적인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이 있습니다.

사진 왼쪽이 건청궁이고 오른쪽이 교태전입니다.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교태전 오른쪽으로 건청궁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곤녕궁이 있습니다.

즉, 교태전은 황제의 침전인 건청군과 황후의 침전인 곤녕궁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건청궁의 건(乾)은 '하늘 건'으로 황제는 하늘이고,

곤녕궁의 곤(坤)은 '땅 곤'으로 황후는 땅이요,

그 사이에 있는 교태전의 교(交)는 '사귈 교'니 

교태전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 조화를 이룬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일까요?

질문하기 좋아하는 가이드님이 나중에 이곳들의 이름을 물으면서

"황제는 하늘이고 황후는 땅이라고 설명까지 했잖아요?"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쨋든 외전은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모두 '화할 화(和)'로 우주와의 화합을 이루어 보전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져 그 이로움을 얻는다는 뜻으로 정치적 측면이 강조되어 지어진 반면

내정은 생활공간의 의미로 황제(하늘)와 황후(땅)의 화합을 강조한 것 같네요.

 

그런데 저는 이곳의 난간의 색은 흰색이 아니라 황색과 녹색인 것인지 더 궁금하더군요.

 

 [교태전]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태전은 중화전과 같은 정사각형으로 다른 건물에 비해 작습니다.

자금성의 전각들을 보면 볼 수록 우리나라 기와의 곡선미가 한결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교태전 - 사진 : KDH]

 

교태전은 황후가 생일축하를 받던 곳으로 청대에는 옥새를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액자 위 '聖'자 위 대들보에는 다른 건물과 달리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약 50년 간 실질적 통치자였던 서태후가 황제를 상징하는 용 위에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확인할 수가 없네요.

서태후의 여름별장인 이화원에도 서태후가 황후의 지위가 높음을 암시하는

동물상의 배치를 가이드님이 설명해 주었지만 황후가 아닌 태후(황제의 어머니)였는데

황후와 관련이 깊은 교태전에 일부러 용 위에 봉황을 그려넣었을까요? 

황제와 황후가 만나는 곳이었기에 다른 전각과는 달리

용과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닐런지....

 

가이드님이 교태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주었답니다.

 

황후가 교태전에 오면 황제가 반드시 이 곳에 올 의무가 있었는데 황후가 이것을 남발하면 안되니

교태전 안에는 '무위(無爲)'라는 글자가 써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글씨는 청나라 강희제의 친필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잘 쓴 글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위'라는 액자 아래의 병풍의 '교태전명(交泰殿銘)'은 청나라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하는데

역시나 풍류를 좋아했던 건륭제답게 강희제보다는 필체가 멋지네요.

그런데 모두 만주어가 아닌 한자로 써 있습니다.

서태후도 한자만 알고 만주글자는 몰랐다고 하고...

이것이 바로 만주족인 청왕조 스스로 먼저 한족화되었다는 역사적 증거인가요?

  

그리고 여담이지만 가이드님의 설명을 받아 적는 순간 '할 위(爲)'자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멈칫해야 했답니다. 곧 생각이 났지만 한자를 읽기만 했지 자주 써보지는 않으니 이런 일이....

한자를 의도적으로 좀 더 자주 써보도록 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 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중국을 여행하면 느끼시겠지만 중국은 현재 '간화자' 즉 약자를 씁니다.

그래서 '번체자' 즉 정자를 배우고 있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두고 죽은 한자를 왜 배우냐는 견해를 피력하는 분도 계시다는데

간화자를 쓰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된 이후부터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번체자와 간화자의 사용을 두고 중국에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는데

 

번체자를 죽은 한자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각설하고 다시 교태전 얘기로 돌아올까요?

퀴즈를 내는 것을 좋아하는 가이드님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군요.

'황제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뭐죠?'

이런 저런 엉뚱한 대답이 나온 후 가이드님은 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도장(옥새)이라고 말하네요.

 전국을 호령하는 군주였지만 결국 그 황제의 도장을 맡긴 것은 바로 황후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과 동시에

청나라 때는 이곳 교태전에 옥새를 보관했음을 연관지어 설명한 것 같습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가 청나라 왕조가 25대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5개의 옥새를

만들어 교태전에 보관해 놓았지만 12대에 망했다고 또 묘한 미소를 흘리시며 설명을 덧붙이시네요.

 

요즘 우리나라도 '국새'를 새로 만든 후 남은 금 200돈의 행방과 자격논란 때문에 시끄러웠지요?

그런데 의외로 금세 잠잠해진 것 같네요.

또한 국새는 '한일병합'의 유무효를 밝히는 중요한 사안으로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님에 의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태진 명예교수님은  몇 년 전 '한일병합 조약'의 한국 황제 '칙유'에

 

국새 대신 어새가 날인되어 있고 황제의 이름자 서명도 없다는 것도 몇 년 전 증명하셨습니다.

올해 8월 11일에는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의 원본사진을 입수해 공개함으로써

일본의 국새와 천황의 서명이 있는 반면 순종황제의 국새와 서명은 없음을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이로써 일본이 그동안 주장해온 순종황제의 승인을 거쳐 한일합방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이 모두 거짓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1926.7.8)에는 다음과 같은

순종황제의 구술 유언이 실렸었다고 합니다.

'병합 인준은 일본이 제멋대로 한 것이요 내가 한 바가 아니다.

여러분들이여, 노력해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경술 국치 100년이 되는 올해 일본에 의해 거짓 기술된 식민지 역사관을 바로 잡고자

여러 역사학자분들이 이렇게 애쓰고 계심에 감사드리고 우리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지식을 쌓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에 대한 재평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겠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특집으로 EBS TV <평생대학>에서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님의 강연이 방영되었었습니다. 많은 반성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왼쪽 - 교태전 / 중앙 - 곤녕궁]

  

곤녕궁은 명대 후기부터 청조의 강희제 때까지 황후의 침소였으며 청나라의

강희, 동치, 광서황제가 이 궁에서 혼례를 치뤘습니다.

 

그러나 곤녕군은 명대 최후의 황후 주씨가 황제의 명에 따라 이곳에서 자결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숭정 17년(1644) 3월 18일 저녁 무렵 북경 외성의 서문인 창의문이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가장 총애하던 환관에 의해 열리고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물밀듯이 북경성 안으로 밀려들어왔습니다.

북경성이 뚫렸다는 소식을 접한 숭정제는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명나라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변장시켜 피신시키고 황후에게는 자결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적군의 손에 욕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손으로 어린 공주를 죽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 숭정제의 곁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환관 왕승은만이 있었습니다.

숭정제는 왕승은과 함께 경산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기고

역대 황제들의 위패가 모셔진 수황청 누각 앞의 홰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습니다.

이 때 숭정제의 나이 겨우 서른 넷이었습니다.

 

 

"황제 즉위 17년, 짐이 덕이 없고 보잘 것 없어 하늘이 나를 꾸짖는 구나. 역적이 경사에 쳐들어 온 것은

모두 여러 신하들이 짐을 그릇되게 한 것이다. 짐이 죽어 장차 선조들을 볼 낯이 없구나.

내 황제의 관을 벗기고 헝클어진 머리칼로 수치스런 얼굴을 덮어다오.

도적들이 내 시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은 좋으나, 백성들만큼은 한 사람도 상하지 않게 하여다오."

 

황제를 끝까지 보필했던 왕승은도 황제를 따라 목을 매 자결했습니다.

 

이로써 16대 277년만에 명조는 멸망했기에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는 숭정제를 비정하고 의심많은 황제로

부정적인 면을 더욱 부각시킬 수 밖에 없었겠지만 17세에 황제로 등극해 재위 17년 간 향락에 빠지지 않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하며 정사에만 몰두했다는 것은 황제로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고

서양문물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선각자적 자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왕조를 멸망시킨

무능한 황제였다는 부정적 시각만으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열심인 것과 유능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러면 숭정제의 곁을 떠나버린 명의 대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도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날 청의 막강한 군대가

베이징으로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워 40일 만에 베이징을 떠났습니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 날 청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베이징에 입성했습니다.

이 때 명나라의 문무 백관들은 성 밖까지 나와 환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당했던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문무 백관들은 어떠했을까요???

 

 

 

 

 

곤녕궁은 전부 유리로 막혀 있는데 가이드님이 안을 들여다 보라고 하네요.

유리도 깨끗한 투명 유리가 아니어서 얼굴을 바짝 대고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저는 뭐가 있는 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요.

쌍희 '희(囍)'자가 선명하게 보이지만 과연 황제와 황후는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사진 : BEIJING北京]

 

이렇게 천안문에서 시작해 외조인 태화전 - 중화전 - 보화전을 지나  내정인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까지

다 보았지만 건물마다의 특색보다는 그 건물이 그 건물 같다는 단조로움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금성을 짓도록 명한 명의 제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기에 늘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때문에 궁궐 내의 모든 건물들을

비슷하게 지어 건물들을 구별하기 힘들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영락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홍무제]의 넷째 아들로서 이름은 주체(朱)였습니다.

주체는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운 가장 능력있는 아들이었습니다.

홍무제는 큰아들이 일찍 죽자 넷째 아들인 주체가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첫째 손자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명나라 제 2대 황제가 된 건문제는 자신의 삼촌들 즉 홍무제의 아들들을 차례로 제거했습니다.

마침내 건문제가 주체마저 제거하려 공격해오자 전쟁 경험이 많은 주체는 황제에 대항해 난을 일으켰습니다.

3년 동안의 접전이 계속되었지만 황제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병사들을

지휘할 경험있는 장수들이 부족해 주체가 이끄는 군대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숫적 우세가 있다하더라도 그들을 통솔할 용장, 맹장, 지장, 덕장 그리고

복장(福將)이 없다면 모두 오합지졸의 군대로 백전백패하는 것이 전쟁의 법칙일테니까요.

 

조선의 세조도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좌에 올랐기에 흔히 영락제와 비교되어 설명되어집니다.

그러나 세조는 단종을 영월에 유폐시킨 후 사육신사건을 계기로 살해했다는 야사와

단종이 스스로 자살했다는 정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건문제는 황궁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 승려로 변장해 숨어살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광의의 역사적 해석에 관심을 쏟고 있는 중국에서 갑자기

수백 년 동안 풀리지 않는 건문제의 행방 미스테리에 대한 연구붐이 일고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