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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내몽고] 제 2일 : 북경(12) - 이화원(이허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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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기/중국

2010. 11. 13.

 

 

 

 [십찰해 체육운동학교]

 

 

 가이드님을 따라 전용버스를 향해 걷던 중 학교건물이 보여 궁금해 하니 가이드님이

이곳은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체육학교로 올림픽 메달리스트 대부분이 이 학교출신이라고 설명해주네요.

 

 

 

 

 

 

 [십찰해 체육운동학교]

 

십찰해 체육운동학교는 1958년에 설립되었으며 영화배우 이연걸이 이 학교 무술전공 출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용버스를 타고 푸짐한 점심이 기다리는 곳으로 왔습니다. 

음식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하나 하나 다 맛있네요.

그러나 매끼마다 비슷비슷한 요리라 조금 질리기 시작합니다.

 

메뉴를 조금 다양하게 선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화원(이허위안)

 

[위치]  자금성에서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

[용도]  청나라 황실 원림이자 황실의 여름 별궁

[크기]  총 면적 약 300만평. 전체면적 중 3/4이 곤명호. 건축면적은 약 7만평.  전당, 누각, 정자 등 약 3000여칸.

 

[특징]  중국 전통 조경예술의 특징을 계승했으며 중국 고전건축물의 정수를 한 곳에 집중시킴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903년 중국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

 

 

[건축]  금나라 때인 1153년에 처음으로 조성.

           원나라 때 곤밍호와 만수산을 만듦.

           청나라 건륭제가 어머니의 60세 생일을 축하하여 1750년에 보수공사를 시작.

           무려 15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 끝에 1764년(청나라 건륭제) 지금과 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 

           2차 아편전쟁 때인 1860년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원명원과 함께 불태워짐

           1888년 청조 말 서태후가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하는 10년에 걸친 대대적인 보수공사

           이름을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고 고침. 재건에 3000만냥의 은이 소모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과 서양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또 다시 약탈당함

           1902년 서태후가 파괴된 부분을 보수

           1903년부터 서태후가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기에 '서태후 별장'으로 더 유명해짐

 

[구성]  기능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 - 정치활동 공간인 인수전

                                                        황제와 서태후의 생활공간인 낙수당을 중심으로 옥련당, 의운관 및 덕화원

                                                        풍경유람 구역인 곤명호와 불향각을 중심으로 한 만수산

 

[주요명소]  동궁문 → 인수전 → 옥련당 → 낙수당 (패가석) → 선예관(광서제의 황후가 유폐된 곳) → 장랑

                 → 운휘옥우방 패루 →  청연방(석방)

                 곤명호 [지춘정, 문창각, 수목자친, 17공교]

                 동우(銅牛 : 통니우) - 황소동상

 

[별도의 입장료 지불] 통표가 아닌 입장료만 구입했을 경우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곳들

               소주가, 덕화원과 대희루(서태후가 경극을 위한 공연장으로 개조) 

               만수산 [배운문 - 배운전 - 덕휘전 - 불향각 - 지혜해]

 

[주    의] 유람선을 탈 경우 왕복표일지라도 일단 배에서 내리면 다시 다른 배로 갈아탈 수 없다고 함.

 

 

 

 

 [이화원 - 인수전]

 

자! 이제 서태후의 여름별장이라고 불리는 이화원(이허위안)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둥궁먼)은 매우 소박한 편입니다. 가이드님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 건축의 특징은 대문은 작게, 담벽은 높게 짓고, 안은 크고 화려하게 건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은 대문 안에 들어서더라도 안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다시 큰 돌 등으로 막아놓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한 기운이 직접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기능과

그 뒤로 펼쳐지는 풍경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화원 또한 동궁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태호석이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가이드님이 열심히 '인수전'과 '기린'에 대해 설명하고 있네요.

'인수전(仁壽殿)'은 동궁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입니다.

청나라 말년 서태후(자희태후)와 광서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입니다.

'어진 정치를 하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으로 논어의 '인자수(仁者壽)'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인수전 앞 '기린']

 

인수전 앞 오른쪽에는 '기린'이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기린'이란 성인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나타난다고 믿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온 몸은 비늘로 덮여있고 사슴의 뿔, 용의 머리, 사자의 꼬리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궁전은 아름다운 조각들이, 우리나라의 궁전은 귀엽고 재미있는 조각들이 궁을 지키고 있는 반면

중국의 궁전에는 기괴한 돌과 무서운 형상의 동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이고 주술적인 것을 좋아하고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인수전 앞 봉황과 용]

 

자금성에서 보았던 소화용 물항아리도 보이는군요. 

가이드님은 인수전 앞에 있는 황실을 상징하는 봉황과 용을 가리키며  그 배치에 대해

한 마디 던집니다.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왼쪽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오른쪽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인데 서태후는 그러한 배치까지 바꿔가며 자신의 권력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또한 용은 왼쪽 앞발을 들고 서 있는데 그것 또한 서태후의 권력이 황제보다 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태후에게 알현하기 위해 신하들이 오체투지를 할 때

머리를 땅에 박아 울리는 소리가 크면 클 수록 신임을 했다고도 하니

그녀의 독재와 권력욕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옥련당]

 

인수전 북서쪽으로 인수전에 속하는 옥련당있습니다.

 

서태후는 청의 9대 황제인 함풍제의 두 번째 황후입니다.

정실황후는 궁의 동쪽에 머물러 동태후라 불렸고, 자희태후는 서쪽에 머물러 서태후라 불렸습니다.

함풍제가 병사한 후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로 즉위했으나 그 때 나이 겨우 3살이라

서태후가 섭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동치제가 17세가 되어 결혼을 하게되니

서태후의 섭정의 시대도 막을 내려야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맛을 본 서태후는

동치제와 황후의 합방을 방해하고 황후를 핍박했습니다.

그 후 동치제가 성병에 걸려 죽자 함풍제의 조카인 광서제가 즉위했지만 3살 밖에 안돼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계속하게 됩니다. 

 

광서제가 19살이 되었을 때 서태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급관리인 캉유웨이의 개혁정책인 변법자강책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서제의

변법자강운동(1898)을 기득권의 도전으로 생각한 서태후는 광서제를 옥련당에 연금함으로써

그의 개혁운동은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10년 간

옥련당에 유폐되었고 다시 서태후의 섭정체제로 복귀되었습니다.

10년 간 이곳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광서제는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의 명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변법자강을 주도했던 캉유웨이는 일본 전임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 등의 유세에 넘어가 '중국, 미국, 영국, 일본의 4국 합방을

광서제에게 건의할 것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방'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던 서태후가 정변을 감행하여 '합방'을 무산시켰다고 합니다.

-위키백과-

 

만약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중국도 대한제국처럼

미국, 영국, 일본의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죠.

   

 

 

 

 

 [곤명호]

 

옥련당을 지나자 눈 앞에 놀라운 풍광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박한 정문을 지나 구불 구불 길을 걷도록 만들었나봅니다.

누가 이것을 사람의 손으로 직접 한 삽 한 삽 떠서 만든 인공호수라 할까요?

이화원의 3/4을 차지하는 인공 호수인 곤명호(쿤밍후)는 둘레 길이만 8km에 이릅니다.

 실제로 보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인간의 힘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이 호수를 파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스러져갔을까 하는 서글픔과 함께.... 

 

 

 

[만수산과 곤명호]

 

저 멀리 보이는 만수산도 자금성 북문 뒤쪽에 있는 경산처럼 인공산입니다.

곤명호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았다는 만수산(완서우산)의 높이는 59m로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합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지요?

북경에는 원래 산이 없는 평지로 중국인들은 이렇게 인공적으로 산을 쌓아

풍수지리에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진 오른쪽 끝이 낙수당 정문인 '수목자친'입니다.

 

 

 

 

 

이화원은 천안문광장의 6배, 자금성의 10배 정도의 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짧은 시간만 이곳에 머물렀기에 말 그대로 수박 겉핥기식의 관광만 했답니다.

그래서 저 멀리 만수산 위에 있는 건물들만 사진기에 담아봅니다.

 

왼쪽 8각형의 3층 건물이 불향각(佛香閣)이고 그 뒤 건물이 지혜해불전(智慧海佛殿)입니다.

114개의 계단을 올라야 볼 수 있는 불향각은 서태후가 불공을 드리던 곳으로

천수관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저녁이면 곤명호에 연꽃 모양의 등불을 호수에 가득 띄워놓았고

난간에는 등을 매달아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풍경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뿌연 하늘과 보일 듯 말듯 보이지 않는 저 멀리 풍경을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야 합니다.

청나라 당시의 공기는 지금과 달라 청명한 하늘과 쪽빛 호수 그리고 저 멀리 인공섬까지도 

또렷이 감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문창각]

 

저 멀리 '문창각'이 보이고 그 앞을 무성한 연꽃잎들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연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이곳을 찾는다면 더할나위 없는 멋진 풍광에

마치 이태백이 되고 황진이가 된 양 시 한 수를 읊어야 될 것 같은 낭만에 젖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문창각 뒤로 근래에 개방되었다는 박물관인 '문창원'이 있다고 합니다.

 

 

 

 

 

[지춘정]

 

문창각 앞에는 다리가 놓여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그 다리는 인공섬의 '지춘정(知春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양버들이 어찌나 멋드러지게 길게 늘어져 있던지 정자는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지춘정(知春亭)'은 이곳이 얼음이 가장 먼저 녹으며 봄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참 낭만적이네요.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저도 다리도 건너보고 이곳 저곳도 좀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었는데

가이드님은 어찌된 일인지 예정에 없던 쇼핑을 계획하고 있네요.

패키지 여행인데다가 북경은 내몽고에 가기 위한 경유지 성격의 여행상품이라

아쉽지만 여기에서는 이 자리에서만 잠시 서성이다 발길을 돌립니다.

 

 

 

 

 

가이드님이 문 앞 양옆에 놓인 이 조형물에 대해  십찰해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었냐고 질문합니다.

우리가 '아니요'라고 답하니 '이것도 설명을 안 해줬어' 하며 다소 으쓱한 기분으로 설명을 이어가 주시더군요.

위 사진과 같은 둥근 북모양은 무관을 상징하고 사각의 책모양은 문관을 상징한다네요.

따라서 옛날 중국의 전통가옥인 사합원의 앞에 세워진 이러한 석조물과

대문 위에 약간 앞으로 돌출된 나무의 개수를 보면 그 집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흉배 - 무관]                                                                      [조선시대 흉배 - 문관]

 

그러나 조선시대는 관복흉배에 의해 품계와 무관과 무관을 구별했을 뿐

집 앞에까지 이러한 신분 표식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낙수당 현판]

 

[낙수당((樂壽堂)]

 

낙수당은 대형 사합원으로 건륭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을 즐기던 곳이었으나

서태후가 침궁으로 개조하여 말년에 생활하던 곳입니다.

낙수당(樂壽堂)은 '즐겁게 장수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화원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청나라 때 다시 재건된 곳인데 현판은 만주어가 아닌 한자어네요.

 

 

 

 

 

여기는 어디일까? 지붕의 모양에 눈길이 많이 가는 까닭에 나무와 돌과 지붕의 선들이

멋진 조화를 이룬 것 같아 찍어봅니다.

 

 

 

 

 

와! 멋진 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게 해주고 있네요.

 

 

 

 

[회화나무]

 

가이드님이 잠시 이 나무를 설명하기 위해 멈춥니다. 이 나무는 회화나무로 부적쓸 때 사용한다고 합니다.

회화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찾아보니 우리나라 선조들도 이 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인물이 나온다고 하여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겼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나무는

신비한 힘을 지닌 나무로 여겼기에 일반인의 집에는 심을 수 없었고 궁궐과 절 그리고

고관대작 또는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 고결한 학자의 집 안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에 부적의 재료로 사용되었나 봅니다.

 

 

 

 

어미 뱀이 새끼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굵은 나무 줄기가 어찌 저리도 유연하게 구불 구불 몸을 비틀며 자랐을까요?

 

 

 

 

[낙수당 앞뜰에 있는 '청지수'] 

 

자금성 어화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에는 정원마다 태호석이 있는데 태호석이 없으면

권력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낙수당 앞뜰에 있는 태호석 '청지수'는

특이하게도 패가석이라고도 불립니다. 그 이유는 명나라 때 관료 미만종이 빙산에 있던 

영지모양과 비슷한 푸르고 빛이나는 거대한 돌을 발견한 후

이 돌을 집으로 운반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쓰다가 운반비용을 지불 못 해

돌을 길에 버렸고 결국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건륭제가 상서로운 돌이라고 서태후를 설득시켜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청나라도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섰으니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조금 전 곤명호를 바라보며 감상할 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금색  기둥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패가석 뒤로 가까이 보이네요. 패가석 뒤의 건물이 바로 낙수당의 정문인 '수목자친'이라고 합니다.

수목자친 앞에는 부두가 있어 서태후가 배를 타고 이곳에서 내려 낙수당으로 들어왔다고 하네요.

 그러나 패가석 때문에 낙수당 정문을 통해 곤명호를 직접 감상할 수는 없답니다.

 

 

 

 

 

 

 [화창]

 

낙수당 벽면에는 곤명호를 내다볼 수 있도록 다양한 모양의 창을 내었습니다.

세세한 것에까지 멋을 부려 운치를 더해주었네요.

 

 

 

 

  

 이렇게 담장에 나 있는 창을 '화창'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마치 창마다 한 폭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월문]

 

이제 장랑이 시작되는 동쪽의 요월문(邀月門)으로 들어갑니다.

요월문은 만주어와 한자어로 병기되어 있는데 '달맞이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낭만적인 이름이네요.

 

 

 

 

[장랑]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길이가 무려 728m에 이른다하여

장랑(창랑 : 長廊)이라고 불립니다. 중국에서 가장 긴 이 장랑(긴 복도)은 낙수당으로 이어지는 데

비와 눈을 피해 이동도 할 수 있고 무더운 날에는 이 장랑의 그늘 속에서

곤명호를 감상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곳입니다.

 

 

 

 

  

장랑의 대들보뿐 아니라 마릇보(종보)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중국의 역사나

<서유기> <삼국지연의> <홍루몽> <수호지> 등 유명한 고전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명장면을 그린 채색화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8세기 중엽 건륭제가 궁정 화가들을 서호에 파견해 경치를 그리도록 했고

그 546폭의 서호 경치그림들을 모두 장랑의 대들보 등에 옮겨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중국정부는 다시 민족 특색을 나타내는 그림을 더해 장랑을 하나의 화랑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이드님은 14,000여 그림 중 그 어느 것 하나 똑 같은 그림은 없다고 하네요.

 

 

 

 

아니??? 그런데 가이드님이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인원을 파악하니 한 분이 행방불명???

가이드님 몹시 당황하며 주변을 찾아봅니다.

지금까지 너무도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주는 일행이라 잠시 마음을 놓았던 모양입니다.

 할 수 없이 가이드님은 황급히 왔던 길로 다시 뛰어갑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찌 찾는담?????

 

 

 

[장랑에서 본 곤명호 맞은 편 연못]

 

우리는 그 동안 장랑의 난간에 걸터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구경합니다.

저 담 너머에 만수산이 있다는 것인데 나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즉 장랑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곤명호가 북쪽에는 만수산이 서로 마주보도록

풍수지리 원칙에 따라 배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곤명호 유람선]

 

장랑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가이드와 행방불명된 일행 한 분은 오지 않습니다.

일행과 떨어져 어디로 움직일 수도 없고해서 모두들 이곳에서 붙박이되어 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찍을 곳이 없어 유람선만 찍은 후 걱정하며 왔던 길만 주시하고 있는 친구를 계속 찍어봅니다.

그러다가 일행 중 신혼부부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좋아하며

장난기어린 표정을 짓습니다. 오랜 시간 같은 차를 타고 여행하면서도 눈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야 서로 말을 주고 받게 되었네요.

덕분에 친구와 저도 함께 곤명호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찰칵! 찰칵!

 

얼마를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못찾으면 어쩌나?? 가이드님도 고생하고 일행분도 얼마나 놀랬을까

모두들 걱정했는데  드디어 짜~잔! 두 분이 나타났네요.

나중에 어떻게 만났는지 들어보니 다른 여행사의 우리나라 가이드에게 휴대폰을 빌려

우리의 가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게 되었다는군요.

이런 일을 대비해 가이드의 휴대폰번호는 꼭 챙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 겠어요.

자! 이제 즐겁게 앞으로 전진!

 

 

 

 

장랑은 273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 중간에는 이렇게 중국고사가 크게 써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처마의 팔각정자로 1년 4계절을 의미하는 4개의 정자가 장랑 사이에 이어져 있습니다.

  

 

 

 

[불향각]

 

일행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와! 멋진 건물 포착!

무조건 사진에 담아놓고 보니 저곳이 바로 만수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불향각이네요.

아니 조금 전 그렇게 멀리 보이던 산 높이 있던 건물이 어째서 이렇게 가까이 보인단 말인가!

북경에서 사온 책자에 실린 공중촬영한 만수산을 보니

불향각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전각들의 규모와 수가 굉장하네요.

그러나 밑에서는 수풀에 가려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운휘옥우]

 

친구가 찍은 패루를 보니 패루의 아름다움 보다는 와! 엄청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그러나 사진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배운문 앞에 서 있는 이 운휘옥우(雲輝玉宇) 패루가

전문대가의 패루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았답니다.

 

  

 

 

[청연방]

 

 배운전 앞 패루부터의 경치는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그것이 이화원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금성은 웅장하지만 그 건물이 그 건물인 것 같았는데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성적 세심함이 엿보이는 다채로운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어

이화원을 둘러보면 중국의 모든 건축양식과 조경을 한 번에 다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한 번쯤은 가 볼 만한 멋진 곳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은 돌로 만든 배로 청연방 또는 석방(石舫 : 스팡)이라고 합니다.

이 대리석 배는 청나라 건륭 20년(1755년)에 처음 건조되었고 그 후 서태후가

그 위에 2층 건물을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운행을 하는 배가 아니라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석방은 이화원에서 유일한 서양식 건축물로 프랑스풍의 인테리어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중국식 건축물과 정원 속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축물과 달리 색감이 파스텔톤으로 정말 우아하고 화사합니다.

아쉽게도 너무 빠른 걸음으로 일행들이 움직이는 까닭에 저는 사진을 찍지 못했답니다.

친구가 찍은 사진도 급하게 멀리서 찍은 탓에 석방의 멋스러움을 담아내지 못했네요.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것 중 하나인데 너무 아쉽습니다.

 

 

 

 

 

다리 위에 정자가 있는 것도 독특하고 패루와 함께 멋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같아

일행을 따라가며 급하게 한 장 찰칵!

 

 

 

 

돌다리를 건너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만 작은 배를 타고 유유히 물놀이를

즐기는 관광객만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만 봅니다.

 

 

 

 

이화원을 대충 훑어 본 후 밖으로 나와

가이드님이 일행 모두에게 오이와 과일을 각각 한개씩 사주네요.

덕분에 길거리에서 이런 것을 사 먹는 재미도 맛보게 됩니다.

 

 

 

 

잠시 후 과일 특히 체리만 보면 그냥 못 지나가는 친구가 또 걸음을 멈추네요.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저는 '와! 모양이 특이하네!'라고 생각만 하고 그냥 지나치는 타입인데

친구는 체리와 복숭아를 사들고 과일값이 싸다며 마냥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