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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샤갈전 - 서울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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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속으로/전시회

2010. 12. 15.

 

 

올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할 때 정동 서울시립미술관의 <샤갈전>을 감상한 후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영화 <클라라>를 봤다.

이렇게 짧은 거리에 미술관과 영화관이 있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표소는 샤갈이 색채의 마술사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강렬한 색채로 꾸며져 있다.

 

 

 

전시관 정면은 샤갈의 '도시 위에서'로 장식해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도 이처럼 행복한가요?"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 앞에는 꿈 같은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 줄 귀여운 자동차가 자리하고 있다.

문득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전철마다 그려있는 재치 넘치는 그림들이 생각난다.

우리나라도 행복한 그림들이 그려있는 자동차들이 다니는 동화 같은 작은 시골마을이 있으면 어떨까?

 

 

 

 

 

전시장안으로 들어가니 입장을 못하게 한다. 그렇게 사람이 많단 말인가?

매표소 앞에는 그정도의 사람들은 없었는데....

잠시 후 입장을 시킨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림을 설명해주는 시간이 있다고 한다.

<고려불화대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중년여성이 매우 능숙하고 자세하게

그림을 설명해주는 것을 멀리서 귀동냥했었다. 비록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명을

듣기위해 주위에 몰려있어 그냥 지인과 함께 따로 감상을 했지만 이번에는 그리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설명이 너무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이루어지기에

그 시간을 굳이 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입장을 지체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배려가 아닌가 싶다.

어린이를 위한 도슨트(전시물 설명 안내인)는 어린 대학생이, 성인들을 위한 도슨트는

여러면에서 경험이 풍부한 분이 선발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청년기인 1910~1922년의 초기작품에 초점을 맞춰 유화, 판화 등 160여점이 전시되어 있어 샤갈의 다양한 작업시도를 감상할 수 있다.

 

샤갈의 그림을 보기 전에 샤갈에 대해 다음을 기억해둔다면 좋을 것 같다.

1. 러시아 빈민가 출신의 유대계 프랑스화가

2. 첫 번째 부인 '벨라', 동거녀 '버지니아', 두 번째 부인 '바바' 

3. 그의 고향 비테브스크(비쳅스크)

4. 유대교 신비주의 하디시즘 - 사람과 동물등 모든 생명체와 교감

5. 러시아, 베를린, 파리, 미국, 프랑스 등을 전전한 도피의 삶

6.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 - 피카소 -

   구도나 데생보다는 색채를 더 중시해 자연 본래의 색이 아닌 자신이 느끼는 대로의 색을 창조해 강렬한 색채로 표현

7. 평생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미술세계 구축

 

 

 

[이번 전시의 주요작품 내 마음대로 감상하기]

파리시기(1910-1914)

나와 마을, 1911, 종이에 연필, 수채

불타는 집, 1913, 캔버스에 유화

 

    

[나와 마을, 1911]

샤갈의 작품에는 교회와 염소가 자주 등장한다. 샤갈은 유대교인이었기 때문이고, 당시 러시아시골에서는 소젖이 아닌 염소젖을 먹었기 때문이다. 염소의 젖을 짜는 여인은 벨라를, 오른쪽의 초록색 얼굴은 샤갈 자신을 나타낸다고 한다. 왼쪽의 동물은 오른쪽 남자의 눈을 마주보며 서로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다. 서로의 눈에는 사랑의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여기서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암소나 수탉과 같은 동물의 몸으로 들어간다는 하시디즘을 엿볼 수 있다. 벨라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듯 샤갈의 손에든 생명수는 벨라를 상징하는 동물의 가까이 들려있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어있다. 벨라와의 결혼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샤갈의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목걸이는 자신이 유대교임을 그리고 신 앞에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는 의미로 느껴진다. 저 멀리 교회에도 한 남자가 결혼을 갈구하는 간절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생명수 왼쪽의 빨간 사과는 아담과 이브가 먹은 금단의 열매인 사과일까?

격렬히 반대하는 벨라의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결혼을 하려는 자신들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의 결혼이 금단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같은 죄악인가요? 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1911년이면 벨라의 부모님이 교제를 강하게 반대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빨간 사과가 아닌 푸른 무화과 열매라고 하는데 샤갈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샤갈은 낫을 들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벨라는 두손으로 어서 들어오시라고 반가이 맞이한다.

아래는 밝은 낮이고 위는 어두운 밤이다. 낮이나 밤이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가운데 집 두채와 벨라는 거꾸로 그려져있다. 현실 속에서 아직 못이루는 결혼을 이상의 세계 속에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담긴 샤갈의 마음일까? 아니면 벨라는 현실 속의 여인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동화 속의 순백색의 천사라는 찬미일까? 또한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낫을 든 검은 옷을 입은 농부로 표현한 것같다. 비록 자신은 가난하지만 벨라를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겠다는 맹세는 아닐까?

그의 그림은 보면 볼 수록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불타는 집, 1913]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 샤갈은 초기에 야수파의 강렬한 색채와 입체파(큐비즘)의 대상에 대한 기하학적 분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고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집은 전혀 손상시키지 않은 채 붉은 색을 중심으로 불타는 집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데생이 아닌 색만으로 무서운 불길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이 그림 앞에서비로소 깨달았다. 이래서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는 것이구나!오른쪽의 조각들은 집이 불에 타 부서진 잔해를 표현한 것 같다. 오른쪽 나이든 여성은 어서 피하라고 소리치며 손짓하고 젊은 남자는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뛰어온다. 어김없이 동물도 등장시켜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강조하며 자신은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러시아시기(1914-1922)

곡예사, 1914, 캔버스 위 종이에 유화

누워있는 시인, 1915, 패널에 유화

도시 위에서, 1914-1918, 캔버스에 유화

산책, 1917-1918, 캔버스에 유화

비테브스크 위에서, 1915-1920, 캔버스에 유화

무용, 1920, 캔버스에 템페라, 과슈

유대인 예술극장 소개, 1920, 캔버스에 템페라, 과슈

 1922년(35세) 이전의 작품들이 샤갈의 가장 눈부신 작품들이다.

 

[도시 위에서, 1914-1918]

1914년이면 샤갈이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벨라와 결혼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해이다. 벨라와 결혼식을 올린 해는 1915년이니 벨라와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4년에 걸쳐 이 그림을 완성했다는 의미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궁금해진다.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묘사한 이 그림처럼 달콤한 신혼의 꿈에 취해 행복한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 두 남녀 아래의 도시는 그의 고향인 비테브스크인데 도시의 풍경 또한 따뜻한 색감으로 밝게 표현한 반면 긴 검은 담장은??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의 삶을 표현한 것일까? 그런데 왼쪽 울타리 아래에서 엉덩이를 드러내고 웅크리고 앉아 일을 보고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단순히 해학을 가미하기 위한 유대인 특유의 유머였을까?

 

 

 

 

[비테브스크 위에서, 1915-1920]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모티브가 된 그림으로 눈을 이렇게 평면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새삼 알 수 있었다.

 

 

 

 

 

[누워있는 시인, 1915]

결혼 후 평화로운 샤갈이 그리고자 하는 시의 세계가 느껴진다.

 

 

 

[파란 집, 1917]

벨라와 결혼 후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후에도 그림은 여전히 경쾌하고 밝다. 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궁전과 대저택들을 배경으로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우울한 파랑의 통나무집 안에 두 사람(샤갈과 벨라?)이 앉아 있다. 현관이 곧 문이 되는 초라한 집이지만 문 앞의 세명의 그림자는 밖이 아닌 집안으로 향하고 있다. 샤갈과 벨라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을 표현한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즐거운 나의 집'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산책, 1917-1918]

1917년 두차례의 러시아혁명으로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샤갈은 벨라와의 단꿈만을 화폭에 담고있다. 정치에는 관조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산책길인 산과 들뿐 아니라 집까지도 초록색으로 칠한 것이 인상적이다. 벨라에게 늘 하늘을 나는 황홀한 나날로 채워주고 싶은 샤갈의 마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자신은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서있다. 사랑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음을 나타내듯 빨간색이 초록색과 강한 대조를 이루며 더욱 빛을 발한다. 저 멀리 분홍색 궁전처럼 보이는 건물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처럼 보인다.

 

 

 

 

 

파리시기(1923-1941)

농부의 삶, 1925, 캔버스에 유화

두 얼굴의 신부, 1927, 캔버스에 유화

수탉, 1928, 캔버스에 유화

라퐁텐 우화, 과슈

 

 

[The Wandering Jew (방랑하는 유대인), 1923-1925]

관람객들이 그림을 보며 그의 색채에 감탄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그러나 평소 동화 같은 샤갈의 그림에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나에게는여전히 샤갈의 그림은 왠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큰 감동은 없이 그림을 보고 있을 때이 그림이 내 마음을 끌었다. <생폴 작업실>과 함께 가장 인상깊게 봤던 그림이다.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상징하는 염소와 교회는 이 그림 속에도 등장한다.기본적 배경은 같다. 그러나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닌이국땅에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한 명의 방랑자가 주제이다.1923년은 샤갈이 이념적 갈등으로 자유를 찾아 러시아에서 파리로 망명한 시기이다.사랑하는 벨라와 동행한 파리에서의 삶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명의 방랑하는 유대인일 뿐이다.어느 유파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샤갈이었기에 창조의 고통 속에서그의 정신은 늘 이렇게 어둠 속을 걸어가는 방랑자와 같은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그러나 유대인은 어둠이 짙을 수록 더욱 밝게 빛나고 있다.눈에는 다소 고집스러울 정도의 강렬한 의지가 보인다.고개는 꼿꼿이 들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어떠한 어둠도 그의 빛나는 재능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그의 허리 윗부분에는 한 여인이 그려있다. 아마도 벨라이리라.샤갈은 언제나 벨라를 품고 있다. 그래서 샤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얼굴의 신부, 1927]

자유를 찾아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삶의 터전을 옮긴 샤갈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이국땅 프랑스에서의 삶의 시작은 마치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신부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그림은 보다 자유롭게 그릴 수 있을지 몰라도 가난과 언어의 장벽이 그들의 삶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왼쪽의 베일에 가린 신부의 얼굴은 밤마다 달을 쳐다보며 고향을,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오른쪽의 신부는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잔뜩 부풀어있다. 샤갈과 벨라는 비록 예술의 도시, 낭만의 도시, 자유의 도시 파리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어찌 첫 만남의 가슴 뛰는 추억이 있는 비테브스크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어김없이 러시아의 향수를 상징하는 염소가 등장한다. 오른쪽의 악사들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듯 즐겁게 연주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의 여인은 샤갈의 아내 벨라라고 한다.

 

 

 

미국망명시기 (1941-1948)

아라비안나이트의 네 가지 이야기, 석판화

 

프랑스정착시기(1948-1985)

파란 서커스, 1950, 캔버스에 유화

바바의 초상, 1953-1956, 캔버스에 유화

다프니스와 클로에, 판화 :  2~3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연애소설

생폴 작업실, 1967     

     

[바바의 초상, 1953-1956]

프랑스 니스의 샤갈미술관에는 샤갈이 쓴 ‘나의 아내 바바, 나의 기쁨, 나의 환희’라는 글이 붙어있다고 한다. 과연 샤갈은 첫 번째 부인 벨라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일까? 벨라가 죽은 후 다음 해에 버지니아와 동거하며 버지니아에게 매혹되었고, 버지니아와 결별하자마자 바바와 결혼했다. 바바와 결혼한 후에는 바바를 찬미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과 상반되는 그의 행동에 그의 사랑에 의심을 품게된다. 샤갈은 혹시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이 아니었을까?

 

 

 

<샤갈미술관> 

프랑스남부 니스에 앙드레 말로가 설립한 작은 규모의 샤갈미술관에는 성서를 주제로 한 샤갈의 후기작품이 대부분 전시되어 있다. 친구는 샤갈미술관에 가기위해 니스를 찾았지만 휴관이라 못보고 그냥 돌아온 것을 내내 아쉬워했다. 친구에게는 이번 전시회가 더욱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샤갈의 여인들>

첫 번째 부인 '벨라' - 샤갈은 자신의 여자 친구인 테아의 집에 놀러갔다가 그녀의 친구인 벨라에게 첫눈에 반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다. 부유한 보석상인 유대인가정의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샤갈과 미국망명 도중 병으로 사망했다.

 

벨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샤갈을 먼저 미국으로 도피시킨 후 아버지의 그림을 지켜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어머니 벨라가 병사한 후 실의에 빠진 아버지 샤갈을 위해 버지니아와 바바를 소개해주었다.

 

버지니아 - 젊은 영국여성으로 벨라가 죽은 다음해에 샤갈과 동거하기 시작했으나 8년 후 결별하였다.

 

두 번째 부인 바바 - 샤갈보다 25세 연하의 유대인으로 샤갈의 비서에서 부인이 되었다.  6년 후 바바와 이다의 다툼으로 바바와 이혼했으나 바바에 대한 더 많은 호의를 베풀겠다는 동의하에 즉시 재결합했다. 그녀는 샤갈의 무덤 곁에 나란히 묻혀있다.

 

 

 

[Lunaria, 1967] 사진출처 : Olga's Gallery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화사하게 다가왔던 그림은 <생폴 작업실, 1967>이다. 그 그림 앞에서 한참을 감상했다.

그래서 <생폴 작업실>과 비슷한 위의 그림을 보며 흰색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지 기억해두려 한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Moishe Shagal이며 Marc Chagall은 미국식 이름이다. Marc Chagall로 확정짓기 전에 Mark Shagal이라는 서명도 사용했다. 그런데 나는 이번 전시회에서 샤갈의 서명이 다양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같은 해에 같은 경향의 작품에도 서명이 다르다는 것에는 의문이 들었다. 또한 어떤 그림에서는 서명을 찾을 수도 없었다. 왜일까?

활동하던 나라가 다양했을 뿐 아니라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까?

아니면 이번 작품의 절반 이상이 종이작품인데 혹시 진품이 아닌 것도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괜한 의심의 눈치로 전시작을 감상했다.

 

러시아시기(1906-1910) - 페테스부르크에서 화가수업. 자연주의적인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 당시의 미술의 주류를 수용

 

파리시기(1910-1914) - 파리에서 환상적이고 신비한 자신만의 스타일 개발. gouache(구아슈 또는 과슈 : 불투명수채화)기법을 배움. 프랑스어를 못하는 샤갈은 이방인이었고 외로운 자였다. 러시아 전래설화, 그의 하시디즘의 경험, 고향 비테브스크, 그의 가족과 벨라가 그림소재의 밑바탕이 됨.

 

러시아시기(1914-1922) - 비테브스크와 하디시즘, 유대인 특유의 전통적 생활, 벨라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바탕이 됨.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궁핍한 생활을 함. 예술적 승화와 더 많은 자유를 찾아 파리로 출국비자 신청.

 

프랑스시기(1923-1941) - 입체파, 상징주의, 야수파 등 모더니즘의 황금기를 경험하며 유대인 화가로서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강조. 고향마을에 대한 향수, 프랑스의 풍경, 동물의 우화, 성경, 벨라와 샤갈 자신이 그림의 주요소재

 

미국망명시기(1941-1948) -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의 유대인 박해.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도피. 전쟁과 예수수난이 주요소재. 1944년 부인 벨라가 죽은 후 색채가 어두워짐.

 

프랑스정착시기(1948-1985) - 마을 배경은 비테브스크에서 파리로, 모델은 벨라에서 버지니아로 다시 바바로 바뀜.

바바와 결혼 후 파랑색이 기본 바탕이 됨. 직선이 없는 곡선으로 대상이 서로 동화되는 느낌을 줌.

                                           

                                           

출생 - 1887.7.7 러시아 유대인 빈민촌 비테브스크(현재의 벨로루시)에서 출생

사망 - 1985. 3. 28(98세) 프랑스 생폴 드 방스

국적 - 프랑스

 

1907년 (20세) 페테르부르크왕실미술학교 입학

1910년 (23세) 파리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큐비즘기법을 배움

1914년 (27세) 러시아로 귀국해 벨라와 결혼 후 파리로 돌아갈 계획으로 비테브스크에 거주.

1914년 (27세) 시인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알게 된 베를린의 화상 헤르바르트발덴의 도움으로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

독일 초현실주의미술에 결정적 영향을 줌. 큰 성공을 거둔 후 러시아 비테브스크로 귀국했으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벨라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어긋남.

1915년 (28세) 비테브스크에서 벨라와 결혼 ⇨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로 이사

1922년 (35세) 베를린- 판화기법을 배움1923년 (36세) 파리로 이주    1931년 팔레스타인에서 활동
1932-37 네덜란드, 스페인,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활동

1937년 (50세) 프랑스로 귀화

1941년 (54세) 미국으로 도피(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42년 (55세) 차이코프스키 발레 ‘알레코’의 무대장치를 디자인

1944년 (57세) 부인 벨라 사망 - 9개월간 붓을 들지 못하고 절망에 빠짐.

1945년 (58세) 딸 이다의 소개로 젊은 영국여성 버지니아와 동거

1947년 (60세) 프랑스 파리로 귀국

1950년 (63세) 남프랑스 방스에 정착

1952년 (65세) 버지니아와 결별하고 딸 이다의 소개로 25세 연하의 두 번째 부인 유대인 바바와 결혼

1962년 (75세) 앙드레 말로의 의뢰로 파리 오페라하우스의 천장을 다시 그림

1965년 (78세) 자서전 <나의 생애> 출간

1966년 (79세) 남프랑스 생폴 드 방스에 정착

1985년 (98세) 프랑스 생폴 드 방스(방스 옆에 있는 생폴)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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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전에 대한 행사일정, 작가소개 및 전시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