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여행과 영화, 책, 음악, 그림 그리고 이야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댓글 1

책과 함께하는 산책/외국서적

2010. 12. 17.

 

 

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며칠 전 새벽에 잠이 깨 다시 잠을 청하기도 애매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를 읽었다. 몇 년 전 베르베르의 <뇌>를 읽었을 때는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고, 몇 달 전 손에 들었던 <타나토노트>는 도중하차했다. 그러나 <나무>는 18개의 짧은 단편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인지 매우 흥미 있었다. 어쩌면 <나무>는 조용함 속에서 집중해서 읽었기에 작가가 전달하고자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내 마음속에 투영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무>의 한국어판에는 뫼비우스의 그림이 실려 있어 글자세계에서 잠시 그림세계로의 무료여행도 제공된다. <나무>를 읽고 나니 그는 타고난 글쟁이이고 이야기꾼일 뿐만 아니라 글자를 시각화하는 묘한 재주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를 읽으면 저절로 그 이야기의 영상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나무>는 이 책에 실린 18가지의 이야기 중 하나의 제목이다.

베르베르는 이 책의 서두에 <나무>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프랑스어판 제목이기도 한 <가능성의 나무>는 컴퓨터와 체스를 두어 패배한 뒤에 떠오른 생각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컴퓨터가 체스를 두면서 다음 수(手)를 모두 내다볼 수 있다면, 컴퓨터에 우리 인간의 모든 지식과 미래에 대한 모든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가 나아갈 길을 단기적으로, 중기적으로, 장기적으로 제시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처럼 이 책에 실린 18가지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설명처럼 저마다 하나의 가정을 극단까지 몰고 갔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만일 별똥별 하나가 파리 뤽상부르 공원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만일 인간이 투명한 살갗을 갖게 된다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소설가다. 프랑스인답게 그의 소설은 어려운 프랑스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철학적이고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 매료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는 소설 <개미>를 탄생시키기 까지 20여 년간 개미를 세밀히 관찰했고 12년에 걸쳐 120여회의 수정작업을 했다. 그렇기에 그는 과학을 소설 속에 끌어들여 성공한 소설가이고 작은 생명체에 대한 진지한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그 후에는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그래서 이 <나무>의 이야기들 속에도 하나의 극단적인 문제점이 던져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내고자 주인공을 변론하는 식의 전개가 계속된다.

 

 

 

 

<황혼의 반란>은 노령화사회로 접어든 세계에서의 노인들의 삶에 대한 문제점을 던진다. 베르베르는 어떤 양로원을 방문한 후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70세가 되면 정부로부터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제외된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한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에 대해서 약값과 치료비의 지급을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지고 레스토랑 문에는 <70세 이상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마침내 수백 명의 노인들이 반란군을 조직하고 노인을 배척하는 법률에 대한 철폐를 요구한다. 반란군의 세력은 더욱 확산되고 정부와 강경 대립한다. 정부는 마침내 노인들의 반란을 완전 종식시키기 위해 독감 바이러스를 노인들의 은신처에 살포한다. 주인공 프레드도 20세도 안된 젊은이로부터 주사를 맞고 죽음을 맞는다. 프레드는 자신에게 주사를 놓은 자의 눈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는 <수의 신비> 다. 베르베르는 어린조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카의 반에 열까지 셀 줄 아는 아이들과 그보다 큰 수를 셀 줄 아는 아이들 사이에 서열이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숫자를 가지고 철학을 이토록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의 명상의 깊이가 궁금해졌다.

 

1은 고독의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세상에 왔다가 홀로 떠난다. 

.

.

1에는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뱅상은 몇 년 동안 1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공부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2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2는 1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2는 분할이며 상호 보완성이다.

2는 사랑을 뜻한다.

2는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

2는 오로지 자기 자신, 즉 1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2는 남과의 대립을 상징한다. 따라서 2는 전쟁이기도 하다.

2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충돌의 뜻하며, 이 충돌이 창조적으로 승화되면 3이 생겨난다.

.

.

몇 년 뒤에 뱅상은 3의 의미를 배웠다.

3은 삼각형을 만들어내며 1과 2가 벌이는 싸움의 관찰자가 된다. 

.

.

4는 3의 효과를 상쇄하면서 힘의 균형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수에 대한 의미를 계속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지식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정신에도 천장이 있다면, 그의 천장이 갑자기 훌쩍 높아진 셈이었다. .... 하지만 이제 정신의 천장이 높아지고 보니, 그 모든 지식이 한낱 감옥일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줄을 조금씩 늘여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를 여전히 매어 두고 있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박일 뿐이었다.

 

무릇 학문이란 자유의 행위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미리 짜놓은 틀이나 숭배의 대상이나 지배자나 선입견에 속박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유, 그런 자유가 보장될 때 학문은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유명한 화가들이 루브르박물관에서 그 이전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알고 있던 모든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허물을 벗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의 세계를 창조했던 것처럼 학문도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강조하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창조의 세계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극단적인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들을 그냥 비웃음으로 던져버리기에는 우리의 정신세계는 무한하며 자유롭다.

그는 <완전한 은둔자>에서 정신과 육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미 인간은 모든 지식이 자기 안에 있기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감춰져있던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드러낼 뿐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이미 깨달은 존재인 우리가 자기 안에 감춰져 있는 진리를 깨닫게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육신을 유지하고 부양하기 위해 우리 에너지의 대부분이 허비되고 있지만 우리의 뇌만 놓고 보면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쓰고 있다. 또한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이기에 감각기관들이 보내는 신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한 감각기관들이 보내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해석하다보면 미망에 빠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몸은 우리 생각이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육체가 없는 뇌는 온도만 맞춰진다면 영양액 속에서 언제까지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나 뇌가 없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죽음을 맞기 직전 그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심연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렇듯 의학에서 말하는 뇌의 소멸이 곧 죽음이라면 죽음의 세계가 곧 우리가 인지하는 사라짐이고 무(無)일까? 만약 의식작용을 하는 뇌는 사라졌지만 무의식은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가 혹 죽음이라면 그 세계에도 정신세계의 깨달음의 정도에 의해 계급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육신도 없고 뇌의 활동도 없고 무의식도 없는 그 무의식의 끝은 어디일까?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 하나뿐인 심연이라는 것일까? 그 유일하게 존재하는 심연은 육신을 가진 인간의 정신세계로는 경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품은 황홀하고 신비한 ‘하나’이겠지?

<나무>를 읽고 나의 정신세계의 탐구는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고 오늘도 이렇게 비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