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여행과 영화, 책, 음악, 그림 그리고 이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댓글 0

책과 함께하는 산책/외국서적

2020. 12. 4.

 

 

 

 소로의 무소유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 전행선 옮김 / 더 클래식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Walden)>은 워낙 유명한 책이기도 하지만 그의 자연주의 철학이 늘 궁금했기에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다 이제야 비로소 월든 호숫가 숲속으로 생각의 걸음을 내딛었다. 책 표지에는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이 머리맡에 남긴 책’이라 소개하고 있다. 즉 이 책은 1845년 20대 후반의 소로가 자신의 고향인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로 홀로 이주하여 2년 2개월 간 무소유의 삶을 통해,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직접 작은 오두막을 짓기 위해 석공기술까지 배웠으며, 최소한의 가구와 의복으로만 생활하였고, 직접 곡식을 재배하여 얻은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사실 세계 곳곳에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도 많았을 것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많겠지만, 그런 무소유의 삶속에서 각자 받아들이는 크기는 매우 다를 것이다. 가난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자발적 빈곤’의 실험적 삶이 객기나 사치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보통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선뜻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삶은 아니기에 급격한 유행의 변화와 넘쳐나는 물질에 떠밀려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소로는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철학자이자 수필가이며 시인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시민불복종>을 저술하였고 노예해방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예이츠는 <월든>을 읽고 이니스프리 섬에서 소로처럼 생활해 보려는 야심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의 글이 소로가 <월든> 숲속 생활을 하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나는 의도적인 삶을 살아보고자 숲으로 들어갔다. 필수적인 요건만 충족한 채 살아도 삶이 가르쳐 주는 진리를 배울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또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었다. 삶이란 소중한 것이기에, 삶이 아니라면 살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체념한 채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깊이 있게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은 모두 파괴해 버리고 강인하게 스파르타 인처럼 살아가길 바랐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은 이 구절인 것 같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물론 소로는 월든에 살면서 일반사람들처럼 최대한 절제된 생활을 하는 데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호수를 감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호수에 바닥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100군데가 넘는 지점의 수심을 직접 재어 호수의 깊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소로가 이러한 “호수에서 관찰한 것은 인간 세상의 윤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부연설명을 하는 대목과, 비탈진 언덕을 관찰하면서는 인간의 몸에 비유하며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부분에서 그의 철학자적 면모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소로는 식물과 동물, 새, 곤충, 지리, 지질 등 다방면에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그러한 지식을 활용해 관찰하고 경험하고 나아가 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이처럼 훌륭한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420쪽의 아주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지는 못하였다. 조금 읽다 영화를 보고, 다시 조금 읽다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3일이나 걸려 완독을 하였다. 소설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이 많던 젊은 시절보다 철학이나 고전, 자기 계발, 정치, 심리 등의 서적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명을 받았다는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를 읽었을 때 나는 전혀 아무런 감동도 지식도 얻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그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마다 이해와 느낌이 다르듯, 한 개인이 어느 시기에 읽느냐에 따라 상당한 감동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철학이나 심리학, 자기 계발 서적은 젊은 시절에 읽어야 더 큰 지침을 얻을 것 같다. 많은 경험을 하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후에는 그들 사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이미 동화의 단계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소로의 <월든> 가운데 긴 부분은 제외하고 비교적 짧은 부분만을 발췌해 소개해 본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아는 것만 계속해 사용하면서 어찌 자신의 무지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고대로부터 이어 온 사고나 행동 방식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중략) 옛사람이 옛날 방식을 따랐다면, 새 사람에게는 새로운 방식이 있는 법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곧 참되게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피조물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란 ‘먹을 것’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자연주의자 다윈은 티에라델푸에고 섬을 방문했을 때, 그의 일행은 옷을 두툼히 챙겨 입고 불가에 앉아 있어도 별로 따뜻한 줄 몰랐지만, 그곳의 벌거벗은 원주민은 불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더워 어쩔 줄 모르며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예로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소박하고 빈곤한 삶을 살았다. 고대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외적으로는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내면은 그 누구보다도 풍족했다.

 

인간이 자기 살 집을 직접 짓고, 한 점 부끄럼 없이 소박하고 정직하게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린다면, 새가 부지런히 일하는 동안 상시 노래하듯, 인간도 누구랄 것 없이 시적 재능을 꽃 피울 수 있지 않겠는가.

 

대체 이러한 노동 분업은 어디서 끝이 날까? 이러다가는 누군가 나를 대신해 생각까지도 해 주는 날이 오게 될지 모른다.

 

세상에는 남의 말을 곧잘 의심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때로 그들은 내게 사람이 푸성귀만 먹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 오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즉시 문제의 핵심을 치고 나간다. 핵심이야말로 신념이 아닌가. 그런 질문이야 수도 없이 받아 봤기 때문에, 나는 대못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는 말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살아간다면 지상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은 여가처럼 즐거운 것이지 결코 고난이 아님을 경험으로 터득했을 뿐 아니라, 확신하기까지 한다.

 

아는 사람 중에 땅 몇 에이커를 물려받은 젊은이가 있는데, 그는 ‘그럴 수만 있다면’ 자기도 나처럼 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사람이 내 생활 방식을 차용해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내 생활 방식을 다 익히기도 전에 나는 다른 방식을 찾아내 살아가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능한 한 다양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단,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이웃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 따르라고 말해 주고 싶다.

 

화형당할 처지에 놓인 인디언들이 고문을 받는 와중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고문 방식을 제안하자 선교사들이 몹시도 당황스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인디언은 육체적인 고통에는 이미 초월해 있었기에, 선교사가 제안하는 위안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선교사의 가르침이 인디언의 귀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적을 사랑했으며, 적이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했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류의 생각을 담은 가장 고귀한 기록이다.

 

독서를 잘하는 것, 다시 말해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훈련이며, 오늘날 찬탄해 마지않는 그 어떤 훈련보다도 더욱 독자를 힘들게 한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교제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사람을 곧 지치고 산만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벗을 아직은 만나 보지 못했다. 대체로 우리는 방 안에 홀로 머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 더 외로움을 느낀다.

 

커비와 스펜스의 작품(<곤충학 입문>)에서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곤충학자들은 “몇몇 곤충은 성충이 된 후에는 섭식 기관을 완벽히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진술하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 아닌가. 또한 그들은 “성충 단계에 있는 거의 모든 곤충이 유충이었을 때보다 훨씬 적게 먹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게걸스러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고...... 탐욕스러운 구더기가 파리로 변하고 나면” 한두 방울의 꿀이나 그 밖의 달콤한 액체로 만족하게 된다고 단언한다.

 

나 자신의 순수함을 되찾게 되면, 우리는 이웃의 순수함도 알아볼 수 있다.

 

남아도는 부는 쓸데없는 사치품을 사는 데만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