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여행과 영화, 책, 음악, 그림 그리고 이야기...

영화 ‘프리다(2002)’를 통해 보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과 생애

댓글 1

그림과 사진 속으로/화가와 그림 이야기

2020. 12. 25.

감독 줄리 테이머

주연 살마 하이에크(프리다 칼로역), 알프레드 몰리나(디에로 리베라 역), 애슐리 저드(티나 모도티 역), 에드워드 노튼(넬슨 록펠러), 안토니오 반데라스(시케이로스 역), 발레리아 골리노(루프 마린, 리베라의 두 번째 부인 역), 제프리 러쉬(트로츠키 역), 로저 리스(기예르모 칼로 역), 미아 마에스트로(크리스티나 칼로 역)

 

제 75회 아카데미 분장상, 음악상 수상 /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미술상, 의상상, 주제가상 후보작

청소년 관람불가

 

 

며칠 전 문하연의 ‘다락방 미술관’을 읽었다. 그 책에서 멕시코 출신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를 소개하였다. 남미여행을 꿈꾸며 영화 ‘프리다’를 통해 그녀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화가 프리다의 격정적인 인생 이야기를 떠나 연출, 분장, 의상, 영상, 색감, 삽입된 노래 등 모두 훌륭하다. 무엇보다 잠깐씩 깜짝 등장하는 내로라하는 유명 연기파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만나는 재미 또한 놓칠 수 없다. 또한 멕시코 원주민의 전통의상과 액세서리, 특색 있는 골목들과 시장의 풍경, 결혼식 풍습, 목재 버스, 전통음식인 타말레와 아톨레와 칠리 그리고 데킬라, 멕시코 민요, 판초, 거대 피라미드들이 있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멕시코 민속명절 ‘죽은 자[망자]의 날(Day of the Dead)’ 등 멕시코를 상징하는 거의 모든 것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다. 이러한 볼거리 이외에도 멕시코 혁명 후의 정치와 사회상도 엿볼 수 있어 멕시코 역사공부도 하게 된다. 아카데미 6개 부분의 후보로 오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블로그에 올리려 평점을 보니 의외로 높지 않고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나는 반가운 배우들도 많이 나와서 너무도 자세히 재미있게 봤는데...

어쨌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멕시코, 쿠바, 칠레 등을 여행하게 된다면 참고하기 위해 프리다의 작품을 중심으로 멕시코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두고자 한다.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 그리고 관련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다보니 매우 길어졌다. 또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달라 확인하는데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주로 프리다칼리박물관 홈페이지, FridaKahlo.org, DiegoRivera.org, 영문 Wikipedia와 신문기사들에 근거하여 작성하였다. 그곳도 각기 조금씩 정보가 달라 이 또한 각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것은 생략하였다.

 

멕시코 초현실주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 드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는 사진작가인 독일인 아버지(기예르 칼로)유럽인과 아메리카 토착민 사이의 혼혈(메스티소, mestizo)인 어머니 사이에서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외모에서 멕시코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최초로 루브르에 진출한 중남미 출신의 여성작가이며, 1939년 프랑스 패션잡지 ‘보그(Vougue)’의 표지모델로 선정되었다. 생전에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명성에 가려 화가로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재조명되었고 그 후 남편보다 더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 화가로서뿐 아니라 페미니즘, 양성애자, 장애자의 아이콘이다. 결혼 후 남편의 영향으로 그녀는 메스티소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오아하가(Oaxaca, 멕시코 남부에 있는 주)의 여성들이 입는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멕시코 전통의상(Oaxacan Huipil Dress)을 입었다. 리보조(rebozos, 멕시코 여성이 사용하는 긴 숄)를 어깨에 두르고, 머리는 땋아 올리고, 무거운 원주민의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하였다. 이렇듯 적극적으로 멕시코 문화를 미국과 유럽에 알린 그녀였기에 멕시코 문화의 아이콘으로 멕시코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의 멕시코 500페소가 나오기 전까지 500페소 지폐에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앞뒷면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심각한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신을 모델로 그린 자화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 그녀의 그림 제목에 등장하는 테우아나는 오아하가주에 있는 도시이다. 

* 영화 속 그림들은 원화가 아니어서 프리다의 그림과 약간씩 다르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Museo Frida Kahlo) 일명 블루 하우스(the Blue House)>

현재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이 된 강렬한 파란색으로 칠해진 코요아칸(Coyoacán)의 부모님 집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침대에 누운 병색이 짙고 나이가 든 프리다를 어디론가 데려가기 위해 엄청난 크기의 침대를 옮기고 있다. 그녀의 베개에는 ‘TESORO MIO’ ‘AMOR’라는 빨간 글씨의 자수가 크게 새겨져 있다. 스페인어로 ‘TESORO’는 ‘보물, 부, 재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나의 보물(TESORO MIO)’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예술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말년까지도 ‘사랑(AMOR)’을 갈구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출된 것인지 실제로 그녀의 베개에 그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지 궁금하다.

 

장면은 다시 1922년 15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총명했던 프리다는 의사가 되기 위해 국립예비학교(Escuela Nacional Preparatoria)에 진학한 고등학생이다.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고작 35명뿐인 멕시코 최고의 명문이었다.

※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있었던 이 학교는 현재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그녀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짧고 가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한쪽 다리가 짧은 장애를 가진 소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짧은 다리 때문에 오른쪽 구두를 높은 것을 신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구분하기 힘들다. 장애를 느낄 수 없는 총명하고 짓궂고 당돌하고 활달한 예쁜 얼굴의 소녀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가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여러 겹의 긴 양말을 신은 것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한쪽 다리가 짧은 배우가 연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프리다는 남자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함께 학교강당으로 뛰어간다. 그들은 강당벽화를 그리고 있는 멕시코 벽화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모델과 바람을 피는 장면을 몰래 엿본다. 이를 눈치 챈 리베라가 그들을 향해 ‘어린 무정부주의자’라고 고함을 지르자 프리다는 당당히 리베라에게 ‘balsón(발손)’이라고 비난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멕시코 어원으로 ‘질척대는 땅’이라고 한다. ‘balsón’은 때때로 도를 넘는 당돌함을 보이는 프리다와 도덕적 죄의식 없이 여러 여자들과 습관처럼 관계를 맺는 리베라의 문란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 것 같다. 그러한 프리다의 말에 오히려 그 단어를 즐기는 듯한 리베라의 반응에서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것이 영화 속 그들의 첫 만남이다.

 

[국립예비학교 볼리바 강당 벽화, 디에고 라베라, 1922~23]

<국립예비학교 볼리바 강당 벽화, 디에고 리베라, 1922~23>

얼마 후 강당에서 리베라의 완성된 벽화를 보고 프리다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 이 벽화는 1907년 21살 때 스페인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활동하던 디에고 리베라가 1921년(35살) 멕시코 정부의 초청으로 오랜 외국생활을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와 작업한 첫 번째 벽화이다.

 

 

[목재 버스]

1925년 프리다는 학교를 마치고 남자친구와 함께 코요아칸 행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간다. 작은 목재 버스에 올라타며 마르크스와 헤겔에 대해 남자친구와 논쟁을 벌인다. 프리다가 문학과 정치와 사상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탄 버스가 전철과 충돌하여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일어난다.

 

 

남자친구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나 프리다는 버스 손잡이 철근이 허리를 관통하는 심각한 중상을 입는다. 영화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그녀의 상태를 멕시코 전통명절인 ‘죽은 자의 날’을 연상케 하는 해골들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것이 신선하다. 철근이 골반을 뚫고 질을 관통하여 골반 뼈가 부러졌다. 오른쪽 어깨가 탈골되고, 한쪽 쇄골과 갈비뼈 두 개가 골절되었으며, 척추는 세 군데가 부러졌다. 오른쪽 발은 으스러지고 다리는 11곳이 골절되었다.(프리다 칼로 미술관 홈피 참조) 너무도 큰 충격에 휩싸인 엄마는 3주가 지나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는다. 충격이 컸다 해도 이해하기 힘든 매정한 엄마였던 것 같다.

 

 

퇴원을 해서도 3개월 동안 얼굴과 목 그리고 오른 팔을 제외한 온 몸에 깁스(cast)를 한 채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1927년 남자친구가 찾아와 슈펭글러와 쇼펜하우어 책을 선물로 주며 숙모를 따라 유럽으로 가게 됐다며 작별의 인사를 전한다. 그녀는 하얀 깁스에 나비 그림을 그리며 좌절과 슬픔을 달랜다. 여러 번의 수술과 병원비로 부모의 재정은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이제 포기하자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굴하지 않고 그녀를 걷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준다. 어느 날 깁스에 남은 여백이 없게 되자 아버지는 이젤과 그림도구를 사다주고 침대 기둥을 높여 침대지붕을 만들고 그곳에 커다란 거울을 부착해준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나는 너무도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 프리다 칼로 -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Self Portrait in a Velvet Dress), 1926>

※ 사실 이 그림은 영화와 달리 프리다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다고 느낀 남자친구 고메스 아리아스가 그녀를 멀리하자 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증표로 그린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이 그림을 아리아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며칠 안에 초상화가 너의 집에 도착할 거야. 액자 없이 보내는 것을 용서해 줘. 그림은 마치 네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네가 볼 수 있는 낮은 곳에 두길 바래.”

이 그림을 받고 아리아스는 다시 프리다에게 돌아왔으나 그의 부모가 반대하여 다음 해인 1927년 유럽으로 떠난다. 1928년에 그녀는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의 초상화>를 그린다. 아리아스에 대한 사랑이 어릴 적 풋내기 사랑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메스 아리아스는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멕시코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였고, 멕시코에서 유명 연설가이자 정치 수필가이며 존경받는 언론인이 되었다.

 

[나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화(Portrait of Cristina, My Sister, 1928)]

<나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화(Portrait of Cristina, My Sister, 1928)>

1927년 마침내 깁스를 떼어내고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프리다는 휠체어에 앉아 정원에서 여동생 크리스티나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강한 의지력으로 기적처럼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시 걷게 된다.

 

 

수차례의 수술비용을 대느라 부모님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그녀는 생계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 팔 결심을 한다. 그래서 화가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혼자 지팡이를 짚고 리베라를 찾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에 오르기 전 버스 기사를 보며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듯한 표정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때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당당한 프리다도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고 거리의 상인이 “맛있는 타멜레 팝니다.”라고 외친다. 타멜레는 멕시코의 전통음식이다. 이렇듯 영화 곳곳에서 멕시코의 상징들을 빠짐없이 소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멕시코 문화를 알리고자 했던 프리다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공립학교(Secretaría de Educación Publica) 벽화, 1923~1928]

<공립학교(Secretaría de Educación Publica) 벽화, 1923~1928>

1927년 자신의 그림을 들고 공립학교(현재 교육부청사)건물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는 거장 디에고 리베라를 찾아간다. 프리다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자 리베라는 작업 중이라 여학생과 잡담할 시간은 없다고 대답한다. 프리다는 당돌하게 이렇게 말한다. “I’m not a schoolgirl, balsón.(나는 여학생이 아니에요, 발손)” ‘balsón’이라는 말에 몇 년 전 강당에서 보았던 소녀임을 눈치 채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린 소녀의 당돌함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거구의 몸집만큼이나 포용력이 있는 리베라의 인간성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리베라에게 화가로서의 가능성이 없으면 부모를 위해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니 솔직하게 평가해달라고 당차게 요구한다. 이것이 리베라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 리베라는 1923년부터 3층 건물의 공립학교 건물 벽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116점의 벽화를 그렸으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여기서 리베라가 기자에게 자신과 함께 멕시코 벽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동료화가들을 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로즈코는 진정한 예술가야. 시케이로스는 주위를 챙기지 않아서 대가가 못됐어.”

다윗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는 리베라와 함께 멕시코 벽화의 3대 거장이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Self Portrait in a Velvet Dress, 1926)]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Self Portrait in a Velvet Dress, 1926)>

리베라는 프리다가 학교 건물 앞에 이름과 주소를 적은 쪽지와 함께 놓고 간 그녀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미구엘 리라의 초상화(Portrait of Miguel n Lira) / 나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1928]

<미구엘 리라의 초상화(Portrait of Miguel n Lira)>

그녀의 초상화를 본 리베라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에 그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의 그림들을 찬찬히 살펴본 리베라는 기교가 없는 독창적인 그림이라 평하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 용기를 준다.

 

 

리베라는 프리다를 급진파들의 모임파티에 데려간다. 이탈리아 출신의 혁명가이자 미모의 여류 사진작가티나 모도티는 리베라에게 ‘거장’이 왔냐며 극도의 존경심을 담아 반갑게 맞이한다. 티나는 리베라에게 시케이로스가 리베라를 비난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의 신봉자인 리베라와 스탈린주의자인 동료 벽화화가 시케이로스는 격렬히 언쟁한다. 한때 멕시코 미술의 변화와 사회주의를 함께 토론하던 동료였지만 이론적 대립으로 앙숙이 된 것이다. 시케이로스는 리베라에게 정부와 갑부 후원자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버는 공산주의자이며 취향까지도 돈으로 사는 부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장기집권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된 무장투쟁인 멕시코혁명(1910~1920)이 공식적으로는 끝났지만 1920년대에도 여전히 사회주의, 자유주의, 무정부주의 등 여러 사상이 대립하였다. 리베라와 시케이로스의 언쟁은 당시 멕시코 사회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시케이로스의 역으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나오는데 영화 속의 반가운 반데라스 얼굴을 보면서 ‘왜 저렇게 젊지? 분명 반데라스인데.’라며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확인해보니 이 영화는 아주 오래된 2002년도 작품이었다.

 

프리다는 티나 모도티가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을 감상한다. 그 중에 티나의 연인이었던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사진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그는 쿠바의 공산당 창당멤버 중 한명으로 쿠바에서 추방당한 정치적 망명가였다. 리베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루프 마린은 메야가 총에 맞아 암살당할 때 티나가 함께 있었다고 알려준다.

※ 영화에서 그 이후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스탈린주의자인 티나는 메야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티나가 메야의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리베라의 적극적인 변호로 풀려나게 된다. 1929년 메야가 암살되었을 때 메야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그는 스탈린과 트로츠키 권력투쟁의 희생자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1945년 해방 후 신익희, 김구, 여운형, 장준하 등의 정치인 암살과 좌우익으로 분열되어 살벌하게 싸우던 우리나라의 사회상이 연상되었다.

※ 영화에서는 이 파티에서 리베라가 티나에게 프리다를 소개해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티나와 메야의 소개로 프리다와 리베라의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리베라가 ‘블루 하우스(the Blue House)’로 찾아가 프리다의 그림들을 보고 평가해준 것이다.

 

<무기고에서(En el Arsenal, In the Arsenal, 1928)>

1928년 리베라가 독특한 눈썹을 가진 프리다를 모델로 벽화를 그리고 있다.

※ 이 그림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리베라의 대표작으로 공립학교건물에 그린 벽화 <혁명의 발라드(Ballard of the Revolution, Corrido de la Revolution, 1923~1928> 중 일부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주로 멕시코 역사와 멕시코 혁명,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묘사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멕시코 역사교과서와 같은 작품들이다. 위 그림 역시 멕시코 혁명을 표현한 작품이다. 프리다는 붉은 상의에 공산주의 상징 마크인 붉은 별을 달고 무기를 나누어주고 있다. 왼쪽 탄띠를 매고 있는 남자는 시케이로스이고, 그 뒤 붉은 별이 있는 모자를 쓴 남자는 리베라 자신이다. 오른쪽 탄띠를 들고 있는 여자는 티나 모도티이고, 티나를 보고 있는 검은 모자를 쓴 남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리이다. 스탈린주의자인 그는 메야와 트로츠키의 유력한 암살범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비달리는 메야가 살해된 후 티나의 연인이 되었다.

※ 이 그림에서 붉은 별을 달고 있는 리베라와 프리다 그리고 시케이로스가 멕시코 공산당 당원임을 알 수 있다. 1922년 멕시코 공산당 당원이 된 리베라의 영향으로 프리다도 1927년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그녀는 공산주의에 깊이 빠져들었고 침대머리에 스탈린과 레닌, 마르크스 등의 초상화를 붙여놓았다.

※ 이 제목 중 코리도(Corrido)는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가사중심의 멕시코 음악이다. 주로 억압, 역사, 범죄 등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민중을 대변하기에 특히 멕시코 혁명기에 큰 사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민요 ‘라쿠카라차(La Cucaracha, 바퀴벌레)’가 20세기 멕시코 혁명기에 만들어진 ‘코리도’이다. 코리도는 지금까지도 멕시코에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서사적인 음악장르이다.

 

프리다와 리베라는 그림으로, 그리고 모도티는 사진으로 혁명에 앞장선다. 1929년 프리다와 리베라는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노동자, 예술가, 화가, 조각가 들의 선봉에 서서 시위를 주도한다. 이 장면은 티나 모도티가 찍은 사진이 바탕이 된 것 같다.

 

 

[버스(The Bus, 1929) /  자화상-세월은 빠르게 흘러만 간다(Self Portrait - Time Flies, 1929)]

<버스(The Bus, 1929)>  <자화상-세월은 빠르게 흘러만 간다(Self Portrait -Time Flies, 1929)>

그렇게 프리다와 리베라는 혁명의 동지이자 동료 화가이며 친구로 지낸다. 리베라가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그들은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리베라가 그녀의 그림을 칭찬하자 “12살 때 자긴 더 잘 그렸을 거야”라고 말한다. 프리다의 리베라에 대한 화가로서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리베라는 10살 때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20살 때 첫 전시회를 열 정도로 일찍부터 재능을 드러냈다. 그런 리베라가 자신이 그리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라며 그녀와 같은 그림은 절대 못 그린다고 그녀의 재능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남녀의 애정을 넘어 예술적 공감대와 정치적 신념을 함께 하는 동료이자 동지이자 친구인 것이다.

 

1929년 22살의 프리다는 21살이나 많은 거구의 리베라와 티나 모도티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두 번의 이혼에 여러 명의 딸들이 있고, 공산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리베라와의 결혼을 그녀의 어머니는 탐탁지 않게 여긴다. 게다가 리베라는 유명세를 이용해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 바람둥이였다. 이들의 결혼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라 비유하면서도 아버지는 저당 잡힌 ‘블루 하우스’의 융자금을 갚아주고 막대한 고가의 병원비를 감당해 줄 부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하였다. 이 결혼식에 리베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루프가 자진해서 리베라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주었고, 티나 모도티가 결혼식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술에 잔뜩 취한 루프가 질투심을 못 이기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자신을 버리고 왜 앙상한 다리(소아마비로 가늘어진 다리를 빗대어 말한 것)를 가진 프리다를 선택했냐며 프리다를 모욕한다. 프리다는 분노하고 루프는 술에 못 이겨 쓰러진다. 루프 마린은 이미 1928년에 재혼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프리다가 결혼식 사진을 그림으로 옮긴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Frieda & Diego Rivera, 1931)>와 거의 비슷하게 배우들을 분장시켜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아카데미 분장상을 거머쥔 이유를 쉽게 짐작하게 한다. 머리는 땋아 위로 올리고, 커다란 귀걸이와 알이 굵은 목걸이를 하고, 짙은 두 눈썹은 잇닿아 있으며, 테우아나 드레스 위에 붉은 리보조를 어깨에 두른 전형적인 멕시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다소곳이 리베라의 손 위에 올리고 고개는 팔레트와 붓을 쥐고 있는 리베라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 리베라의 손은 듬직하게 그녀의 손을 받쳐주고 있다. 예술가로서의 남편에 대한 존경과 그에게 의지하고픈 프리다의 마음이 은연중 드러난 것 같다.

 

 

 

[루프 마린의 초상화(Portrait of Lupe Marin, 1929)]

1929년 결혼 후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얼마 후 프리다는 리베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루프 마린이 아이들과 함께 위층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루프가 재혼한 남편과는 1933년에 이혼하였기에 어떻게 함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처음에 프리다와 루프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루프가 프리다가 리베라를 위해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요리를 가르쳐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프리다가 <루프 마린의 초상화(Portrait of Lupe Marin, 1929)>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 루프는 프리다와의 언쟁 후 그림을 가위로 잘라버려 흑백의 초상화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코르테스 궁전벽화(Palace of Cortés, 1929-1930)>

1929년 프리다와 리베라는 멕시코시티 남쪽에 위치한 모렐로스주쿠에르나바카(Cuernavaca)로 이사한다. 리베라가 코르테스 궁전을 벽화로 장식할 것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 이 궁전은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점령 후 자신과 가족이 거주하기 위해 16세기 초에 건축한 것이다. 리베라는 이곳에 정복자 코르테스와 그의 군대가 멕시코 점령 후 원주민들에 가한 잔학행위에서부터 멕시코혁명이 승리한 1920년대까지의 역사를 그렸다.

 

이 시기부터 멕시코 토착민 인디언들과 멕시코 아즈텍(Aztec) 문명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작품에 표현하는 남편의 영향으로 멕시코 토착민의 장식품들을 즐겨 착용하고, 화려한 자수의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는 위로 땋아 올리는 등 멕시코 원주민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그녀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간다. 영화에서는 이혼한 두 번째 부인이 프리다에게 리베라가 3일간 외박해 분한 마음에 그가 아끼는 아즈텍 조각 두 개를 갈아 그 가루를 고기를 끓이는 국물에 넣어 ‘아즈텍 스프’라고 속여 주었다고 말하는 대사와 리베라가 프리다에게 알이 굵은 토착민의 목걸이를 선물하며 직접 그녀의 목에 걸어주는 장면으로 이러한 사실을 묘사한다.

 

코르테스 궁전벽화를 그리는 리베라에 대해 파시스트들은 위험인물이라고 비난한다. 혁명에 앞장서고 민중을 대변하며 정부의 벽에 사회주의를 심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리베라는 분노한다. 스탈린과 노선을 같이 하기로 한 당에서 트로츠키를 신봉하는 리베라를 쫓아낸다. (이때 프리다도 함께 탈당한다.) 리베라는 미국의 초청으로 프리다와 함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1931년 리베라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단독 전시회 제안을 받고 프리다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간다. 프리다가 영화관에서 혼자 킹콩 영화를 보고 있다. 리베라가 뉴욕에서 끊임없이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느라 프리다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음을 묘사한 것 같다. 뒤이어 뉴욕이 온통 리베라에게 열광하고 있음을 흥미롭게도 킹콩의 한 장면을 패러디하여 표현하였다. 거대한 몸집의 리베라와 킹콩의 절묘한 매치였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Frieda & Diego Rivera, 1931)]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Frieda & Diego Rivera, 1931)>

※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뉴욕에 앞서 프리다는 1930년 첫 번째 유산을 한다. 같은 해에 리베라는 미국의 초청으로 프리다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작업실을 차리고 활동한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6개월 동안 프리다는 자신의 결혼식 사진을 그림으로 완성한다.

 

 

[디트로이트 산업, 북쪽 벽(Detroit Industry, North Wall, 1932-1933)]

<디트로이트 산업, 북쪽 벽(Detroit Industry, North Wall, 1932-1933)>

1932년 리베라와 프리다는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긴다.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가 리베라에게 디트로이트 미술학교(Detroit Institute of Arts) 남쪽과 북쪽 벽화를 의뢰하였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작업과정과 거대한 공장시설을 그린 이 작품은 공립학교 건물벽화와 함께 리베라의 대표작이 되었다. 

 

미국에서 리베라는 끊임없이 수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린다. 카페에 리베라의 애인인 그레이스와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과 액세서리를 한 프리다가 함께 앉아있다. 그레이스는 리베라의 바람기를 용납하는 프리다의 포용력에 경외심을 표한다. 그러나 프리다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양성애자이다. 프리다는 남편의 애인인 그레이스와도 관계를 맺는다. 프리다가 리베라에게 결혼조건으로 부부의 정절이 아닌 성실성을 요구한 이유가 이런 그녀의 성향 때문인 것이다.

 

1932년 리베라는 뉴욕 록펠러 센터 로비를 벽화로 장식할 것을 주문받고 1933년 3월 프리다와 함께 뉴욕에 도착한다. 뉴욕에 있는 동안 프리다는 자신의 미술 양식을 발전시켜나간다. 리베라가 프리다가 자신보다 더 유명해질 거라고 기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 사실을 묘사한다.

 

 

[헨리 포드 병원(Henry Ford Hospital, 1932]

<헨리 포드 병원(Henry Ford Hospital, 1932)>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만 리베라는 록펠러 로비벽화와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수많은 여정이 남아있기에 프리다의 몸 상태로는 무리라고 출산을 반대한다. 그러나 이내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아이를 잃고 만다. 프리다는 죽은 아기를 앞에 놓고 병실에 누워 그림을 그린다.

※ 이 그림은 1932년 디트로이트 헨리포드 병원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낙태시킨 후 그녀의 감정을 묘사한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 그녀의 꿈은 의사였기에 그녀의 그림은 솔직하고 과감하고 분석적이다. 그녀는 죽은 태아와 골반 뼈, 여성의 복부 등이 연결된 탯줄을 쥐고 있다. 오른쪽 위 달팽이는 느린 수술과정을 상징한다고 한다. 영화와 달리 그녀가 죽은 아기를 데려가기 원했지만 병원에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1930년에 첫 아이를 유산하고, 1932년 디트로이트에서 의사의 권유로 두 번째 아이를 낙태시킨다. 그리고 1934년 27세에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다. <나의 탄생(My Birth, 1932)>도 두 번째 낙태 후 그린 것이다.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프리다는 멕시코로 돌아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본다. 장례를 치른 후 프리다의 아버지가 하는 후회의 말에서 그녀의 부모님이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디에고 리베라 - 교차로의 남자(Man at the Crossroads, 1934) 일부]

<교차로의 남자(Man at the Crossroads, 1934)>

프리다는 다시 남편이 있는 뉴욕으로 간다. 리베라는 록펠러 센터에 공산주의 활동과 레닌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비판의 신문기사가 실리며 위기에 봉착한다. 넬슨 록펠러는 원래의 스케치대로 <교차로의 남자>의 레닌 초상화를 익명의 노동자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1934년 이를 거절하자 넬슨 록펠러는 약속한 거액을 지불하고 작업을 중지시킨다. 벽화는 천으로 가려놓았다가 얼마 후 파괴한다.

 

[록펠러 센터 - 교차로의 남자]

※ <교차로의 남자>는 리베라의 후원자들에 의해 <인간, 우주의 지배자(Man, Controller of Universe)>라는 이름으로 멕시코시티벨라스 국립예술궁전(the Palacio de Bellas Artes)에 다시 그려졌다. 중앙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우주의 지배자가 있고 오른쪽에 블라디미르 레닌, 칼 마르크스, 레온 트로츠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상징하듯 좌우로 대비시켜 그렸다.

 

[물이 내게 준 것(What the Water Gave Me, 1938) 일부]

영화에서 디에고 리베라의 화가로서의 추락을 공룡이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패러디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발이 잠겨있는 욕조의 물에 뉴욕의 고층건물이 비친다. 이것은 그녀의 그림 <물이 내게 준 것(What the Water Gave Me, 1938)>을 연상시키기 위한 연출인 것 같다.

 

 

궁핍해진 생활과 뉴욕의 자본주의 사람들에 신물이 난 프리다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한다. 리베라는 그들과 싸워 반드시 그 그림을 다시 그릴 것이라며 거절한다. 시카고 세계무역박람회장 벽화마저 취소되었고 이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창밖에 걸린 한 벌의 멕시코 전통의상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프리다의 쓸쓸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곳에 걸려있는 나의 드레스(My Dress Hangs There, 1933)]

<그곳에 걸려있는 나의 드레스(My Dress Hangs There, 1933)>

※ 이 그림은 뉴욕에 있는 동안 그리기 시작했으나 멕시코에 돌아온 1933년에 완성하였다. 위 영화 장면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윗부분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상을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혁명을 부르짖으며 시위하는 군중과 가난한 노동자들의 사진을 오려 붙인 것 같다.

“나는 미국에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옷만은 나의 삶이 있는 그곳 멕시코에 걸려있다.” -프리다-

 

1933년 말 프리다는 리베라를 설득해 멕시코로 돌아와 산 앙헬(San Angel)에 있는 리베라의 작업실에서 생활한다.

※ 산 앙헬의 리베라 작업실은 현재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집-스튜디오 박물관(Diego Rivera and Frida Kahlo House-Studio Museum, Museo Casa Estudio Diego Rivera y Frida Kahlo, 1931)이 되었다. 1934년 프리다는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이 해에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하고, 오른쪽 발 수술을 받으며 발가락 몇 개도 잘라냈다.

 

프리다는 이혼한 동생 크리스티나와 화해하고 동생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병까지 들어 작업실만 어지럽히며 지낸다. 프리다는 크리스티나에게 리베라의 조수로 일할 것을 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다는 여동생과 리베라가 불륜을 저지르는 광경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남편이 숱한 여성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려도 자신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기에 괴로우면서도 관대했지만 여동생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남편에게 프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엔 두 가지 커다란 사고가 있었어. 차사고와 당신. 당신이 훨씬 더 최악이야.(There had been two big accidents in my life, Diego. The trolley and you. You are by far the worst.)”

 

 

 

그녀는 남편과 별거하고, 머리를 자르고, 술에 의지하고,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점점 폐인이 되어간다.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여동생 크리스티나도 남편과의 일로 아이들과 함께 그녀의 곁을 떠난다. 계단을 밟기도 힘들 정도이고 가구 살 돈도 없이 궁핍한 그녀를 리베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루프 마린이 돌봐준다. 그녀의 방 벽에는 두 개의 그림이 걸려있다. 

 

[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 Portrait with Cropped Hair, 1940)]

<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 Portrait with Cropped Hair, 1940)>

※ 사실 이 그림은 영화와 달리 1939년 남편과 이혼한 후 남편이 좋아하는 긴 머리를 자르고 그린 것이다.

 

[몇 번의 가벼운 찌르기(A Few Small Nips, 1935)]

<몇 번의 가벼운 찌르기(A Few Small Nips, 1935)>

위 그림에 대해 프리다는 루프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신문에 났던 거야. 아내를 22번이나 찌른 남자한테 판사가 이유를 묻자 그 대답이 가관이야. ‘몇 차례 가볍게 콕 찔렀을 뿐인 걸요(I just give her a couple of little nips!)’”

※ 이 그림은 남편이 자신의 여동생과 관계를 맺은 것을 안 후 그린 것이다.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그림 속 여자에 투영시킨 작품이다. 리베라가 좋아하는 긴 머리를 자르고,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하고 병원에 누워 몸과 마음이 심하게 비틀어져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그토록 그녀가 원했던 아이를 세 번이나 유산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그녀에게 대못을 박았건만 리베라는 그림 속 남자처럼 숱한 여자와의 관계는 별 의미 없는 생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트로츠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리베라는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암살하려하자 그의 망명을 도우려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레닌과 함께 1917년 볼셰비키혁명[10월 혁명, 러시아혁명]을 주도하였다.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당의 노선을 두고 분열한다. 권력투쟁에서 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되고 스탈린에 의해 1929년 국외로 추방된 후 각국을 떠돌다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영화 '코코']
[영화 '코코']

리베라는 멕시코 전통명절 ‘죽은 자[의 날(the Day of the Dead)’에 어머니의 묘소를 찾은 프리다를 찾아간다. 멕시코에서는 '죽은 자의 날'에 망자가 좋아하던 음식과 음료를 갖고 묘소를 찾아가 오렌지색 금잔화와 붉은 맨드라미, 해골장식(calavera)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놓고 망자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영화 '코코'의 프리다 칼로 망령]

영화 <코코>는 ‘죽은 자의 날’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도 프리다 칼로가 망령으로 자주 등장한다. 코코가 델라 크루즈의 해돋이 쇼의 리허설을 보러 갔을 때 의상 디자이너가 ‘프리다의 옷까지 잃어버려?’라고 말한 뒤 등장하는 망령이다. 이때 프리다는 역시 그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거미원숭이를 안고 있다. 영화 ‘프리다’에서도 그녀가 원숭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인해 갖게 된 다리의 불균형, 끔찍한 교통사고, 포기해야만 했던 의사의 꿈, 남편의 끊임없는 외도, 세 번의 유산, 35차례의 수술 등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외로움을 달래 준 것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리베라는 (멕시코) 대통령이 트로츠키의 망명을 허락했다며 장인의 집에 그가 머물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프리다에게 간청한다. 혁명을 꿈꾸는 동지인 프리다는 흔쾌히 승낙한다. 1937년 1월 트로츠키부인 나탈리아와 함께 ‘블루 하우스’로 들어와 프리다와 리베라 등 동지들과 함께 정치적 토론을 벌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데스마스크를 쓴 소녀(Girl with Death Mask, 1938) / 나의 탄생(My Birth, 1932) / 기억, 심장(Memory, the heart, 1937)]

<데스마스크를 쓴 소녀(Girl with Death Mask, 1938) > <나의 탄생(My Birth, 1932) > <기억, 심장(Memory, the heart, 1937>

 

1938년 멕시코를 여행 중인 초현실주의 주창자프랑스 화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이 트로츠키를 만나기 위해 ‘블루 하우스’를 방문한다. 그녀의 여러 작품을 본 후 브르통은 놀라운 작품이라고 격찬한다.

리베라는 줄리앙 레비(뉴욕 줄리앙 레비 갤러리의 소유주이자 아트 딜러)도 그녀의 그림 6점을 사서 에드워드 로빈슨에게 한 점에 2백 달러씩 팔았다고 덧붙인다.

에드워드 로빈슨은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배우로 갱스터 영화의 전형을 창조해낸 전설적인 배우이며 미술품 수집가이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갱스터 에드워드 로빈슨이라 번역되어 마치 로빈슨이 갱스터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그는 굉장히 유명한 성격파배우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영화 <리틀 시저>는 1931년도 작품이다. 따라서 로빈슨이 프리다의 그림을 샀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만한 시기이다. 오랜만에 에드워드 로빈슨을 떠올릴 수 있어 반가웠다.

 

※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1938년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프리다는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뉴욕에 있는 줄리앙 레비 미술관에서 그녀의 첫 단독 전시회를 연다. 프리다는 자신을 초현주의 화가로 정의되는 것을 싫어했으나 전시회는 크게 성공을 거둔다.

 

 

[도로시 헤일의 자살(The suicide of Dorothy Hale, 1938)]

<도로시 헤일의 자살(The suicide of Dorothy Hale, 1938)>

※ 미국의 여배우인 도로시 헤일은 남편이 자동차사고로 죽고 배우로서도 실패를 거듭한다.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한 도로시는 부유한 친구의 고급 아파트에 얹혀살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도로시의 절친한 친구인 클레어는 비탄에 잠긴 도로시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기위해 도로시의 초상화를 프리다에게 의뢰한다. 일반적인 초상화를 원했던 클레어는 완성된 그림을 받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림 아래에 프리다는 사건의 내용을 붉은 글씨로 써넣기까지 했다. 프리다의 이렇듯 초현실주의적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이 내게 준 것(What the Water Gave Me), 또는 물속에서 내가 본 것(What I Saw in the Water, 1938) 일부]

<물이 내게 준 것(What the Water Gave Me), 또는 물속에서 내가 본 것(What I Saw in the Water, 1938)>

※ 미국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화산폭발로 불타고 있는 고층건물은 록펠러센터인 것 같다. 레닌의 초상화로 인해 리베라의 록펠러센터 벽화가 부서지자 공산주의자인 프리다 역시 큰 분노를 느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음을 표현한 것인지 배 한척이 떠있다. 미국에서의 그레이스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듯 침대에는 두 여자가 누워있다. 긴 머리를 풀고 프리다는 물에 반쯤 잠겨있다. 프리다의 목에 감긴 가는 줄이 간신히 그녀가 익사하는 것을 막아 주고 있다. 부모님과 멕시코 전통의상을 그려 넣어 3년 이상의 미국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묘사하였다. 죽은 딱따구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딱따구리가 악마를 상징하기도 한다는데...

 

 

트로츠키 일행과 리베라 부부가 멕시코시티 북동쪽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으로 여행을 한다. 나이 많은 트로츠키와 다리에 장애를 가진 프리다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른다. 카메라가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자리하고 있는 광활한 ‘테오티우아칸’의 전경을 비춰준다.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트로츠키는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프리다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감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멕시코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게 하는 장면이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하는 자화상(Self Portrait Dedicated to Leon Trotsky, 1937)]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하는 자화상(Self Portrait Dedicated to Leon Trotsky, 1937)>

트로츠키와 프리다는 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한다. 스탈린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영구 추방되어 떠돌다 멕시코로 망명한 혁명가가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문만 무성할 뿐 확인되지 않은 일화라고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듯 그를 암살한 측에서 트로츠키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해 지어낸 말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짓 추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나탈리아는 트로츠키와 격렬한 언쟁을 벌인다. 1939년 트로츠키 부부는 블루 하우스에서 나와 인근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사실 프리다는 스탈린주의자였다.

 

 

1939년 1월 프리다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기위해 건너간다.

※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한 그녀의 작품이 피카소, 칸딘스키 등 거장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1939년 그녀의 초상화 <The Frame, 1938>을 루브르박물관에서 구매한다.

 

 

프리다는 1939년 프랑스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표지모델로 선정된다. 그녀는 화가로서보다는 그녀의 이국적 모습이 그들의 호기심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그녀만의 눈에 띄는 매력으로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는다. 리베라 역시 멕시코에서 문란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12년 결혼생활이 분노의 연속이었지만 자신보다 리베라를 더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리베라가 ‘보그’의 표지모델인 프리다를 보는 장면은 그녀의 화가로서의 성공을 바라는 리베라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1939년 트로츠키와 리베라의 사이에 멕시코혁명에 관한 의견충돌이 생긴다. 프리다가 멕시코로 돌아와 리베라를 찾아간다. 리베라는 자신이 트로츠키가 죽기를 원한다는 의심을 받게 되자 캘리포니아로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프리다에게 이혼을 제의하지만 프리다는 거절한다.

 

1939년 프리다는 리베라와 이혼한다. 이때 나이든 여성이 부르는 멕시코 민요 <라 요로나(La Llorona, The Weeping Woman, 우는 여인)>가 프리다의 ‘절규’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 민요는 영화 <코코>에도 삽입되었다.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 1939)]

이혼 직후 프리다는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 1939)>를 그린다. 작품의 크기를 알 수 있도록 이 장면을 연출한 것 같다.

※흰색의 유럽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을 입고 있는 프리다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 차림의 프리다가 앉아있다. 잘 보이지 않는데 멕시코 의상을 입은 프리다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라고 한다. 두 개의 심장은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혈통을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혈관의 흐르는 피와 가위는 그녀의 계속된 수술과 고통의 나날을 의미한다. 멕시코 아즈텍 문명과 공산주의자인 리베라는 멕시코 여성인 프리다를 사랑하고, 유럽식 여성의 프리다를 싫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살펴볼 때 그녀의 패션은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영향이 컸음은 확실하다.

 

<벌새와 가시나무 목걸이를 한 자화상(Self Portrait with Thorn Necklace and Hummingbird) 1940>

※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 작품도 이혼 후 그린 것이다.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벌새는 멕시코 민간설화에서 잃어버린 사랑을 위한 행운의 부적이라고 한다. 또한 아즈텍 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태양의 신인 우이칠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 왼쪽의 파란 벌새)를 상징한다고 한다. 

 

몇 차례의 암살 위기를 넘겼으나 1940년 프리다가 전시회를 위해 파리와 뉴욕을 여행하는 사이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언쟁을 벌였던 리베라가 용의자로 지목되며 프리다가 체포된다. 남편의 행방을 불라는 심문에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항변한다.

뒤늦게 소식을 알게 된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프리다의 석방을 요청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동생은 프리다에게 과거 자신의 잘못의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한다.

 

발가락이 썩기 시작하고 석고형 코르셋으로도 몸을 지탱할 수 없어 의료용 철제 코르셋을 부착하기에 이른다.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 1944)]

<부서진 기둥(The Broken Column, 1944)>

※ 철제기둥이 척추를 이루고 얼굴과 온 몸은 날카로운 못이 박혀있다. 눈물은 흐르지만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정면을 향해 자신의 굴하지 않는 굳건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사실 영화에서와 달리 이 그림은 리베라와 재혼한 후 척추수술 직후 그린 것이다. 

 

그녀는 다시 휠체어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리베라가 그런 그녀를 찾아와 다시 결혼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녀는 “발가락을 잃었고 등도 불구야. 간염도 있고 술과 흡연에다가 욕쟁이야. 애도 못가지고 병원비도 바닥났어. 계속할까?”라며 거절한다. 실제로 그녀는 스페인어로 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마음 속의 디에고(Self Portrait as a Tehuana, Diego in my thought, 1943)>

※ 이혼 후 1940년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1943년에야 완성하였다. 끊임없는 여자관계로 그녀에게 고통을 주는 남편이지만 리베라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자신의 이마에 리베라의 초상화를 그려 표현하였다. 배경의 거미줄은 그녀가 리베라의 덫에 갇혀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우아나는 리베라가 좋아하는 의상이었다.

 

 

1940년 그들은 이혼한 지 1년 만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과 경제적 독립을 조건으로 재결합을 하고 행복하게 보낸다.

1941년 프리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프리다와 리베라는 이때부터 줄곧 ‘블루 하우스’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프리다의 병세는 악화되고 극심한 고통에 리베라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그런 그녀를 리베라는 묵묵히 보살핀다.

 

 

<The Wounded Deer(상처받은 사슴), 1946>

1946년 프리다는 뉴욕에서 또다시 척추수술을 받는다. 수술이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에 대한 좌절과 실망을 상처투성이의 나약한 사슴의 몸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디에고와 나(Diego and I, 1949)>

※ 1949년 리베라는 자신의 그림모델이자 프리다의 친구인 멕시코의 유명배우 마리아 펠릭스와 공공연한 염문을 뿌린다. 이 일로 거의 이혼할 위기까지 간다. 프리다의 이마에 사랑하는 디에고 리베라가 있고, 다시 리베라의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있다. 리베라가 마리아를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도 프리다는 냉정한 표정으로 몇 방울의 눈물만 흘릴 뿐이다.

 

 

프리다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크리스티나를 신경질적으로 부른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팔에 급하게 약물을 주입한다. 이미 약물중독 상태인 것 같다.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죽어서까지 누워있고 싶지 않다며 화장해달라고 부탁한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Portrait of Diego Rivera, 1937)>

그녀가 더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1953년 4월 그녀 나이 46세에 멕시코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독 전시회를 열어준다. 남편의 만류에도 그녀는 전시회 개회식에 참석하겠다며 자신의 의족을 달라고 소리친다. 의사도 기관지염이 번지면 폐렴으로 발전한다고 반대한다. 그녀의 방문 옆 벽에는 그녀가 그린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 영화와 달리 1953년 7월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의족을 착용했다. 다리를 잘라낸 그녀는 절망감과 고통에 두 번이나 자살기도를 한다. 상상 이상의 견디기 힘든 온갖 고통을 겪어왔던 그녀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라면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시회는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녀는 동생의 도움으로 침대에 누운 채 전시회장에 들어선다. 영화의 첫 장면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화면에 그녀의 그림들이 하나하나 스치듯 지나간다. 그녀의 삶의 회상의 시간들처럼.

 

[인생이여 만세 (Viva la Vida, 1954)]

그녀의 마지막 작품은 <인생이여 만세 (Viva la Vida, 1954)>로 수박에 제목과 같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멕시코에서 수박은 장례식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세계적인 영국의 록 밴드 콜드플레이의 최고의 히트곡 <Viva la Vida>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시킨 곡이라 한다.

 

서서히 화면에 그녀의 베개에 수놓아진 커다란 글씨를 보여준다. ‘DUERME AMOR MIO’ ‘잘 자요. 내 사랑’이란 뜻인 것 같다. 퍼렇게 변해버린 주사자국들이 선명하다. 마지막 힘까지 짜내며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몇 달 후 폐색전으로 결혼 25주년 은혼식을 며칠 앞두고 남편의 곁에서 세상을 떠난다. 1954년 그녀의 나이 47세였다.

“이 외출이 즐겁기를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기를. - 프리다(I hope the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 – Frida)”의 글을 남기고.

 

[꿈(The Dream, 1940)]

<꿈(The Dream, 1940)>

영화는 그녀의 바람대로 그림 속 프리다를 화장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녀는 영화 속 프리다의 대사처럼 ‘꿋꿋한 불구자’로 쾌활함과 강한 의지력과 신념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 모두를 국보로 지정했다.

 

그녀가 태어나고 숨을 거두었던 멕시코시티코요아칸(Coyoacán)에 있는 부모님의 파란 집은 1957년 리베라가 그녀를 기리기 위한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기증하여 1958년 ‘프리다 칼로 박물관(Museo Frida Kahlo)’으로 개관하였다. 강렬한 파란색으로 칠해져있기에 ‘파란 집(The Blue House, La Casa Azul)’으로도 불린다. 박물관 홈페이지는 매우 잘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 프리다의 작품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멕시코 여행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멕시코시티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관광명소이다.

 

그런데 엄청난 교통사고를 겪고도 굳세고 열정적으로 살다간 그녀의 삶이 궁금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면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와 회화와 조각작품들이 더 궁금해졌다. 그의 작품은 위에서 소개한 건물들 이외에 아나우아칼리 박물관(Museo Anahuacalli)에 다수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멕시코시티 어느 곳을 가든 그의 벽화를 볼 수 있다 하니 여행하면서 20세기 멕시코 벽화운동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디에고 리베라의 조각작품]
모딜리아니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 1914>

이 그림은 디에고 리베라의 친구인 모딜리아니가 그린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이다. 실물보다 너무 못생기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