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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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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국내여행기

2020. 12. 27.

 

 

작년 말 다녀온 풍수원성당을 복습해 봅니다. 

 

역사가 깃든 풍수원성당을 찾아 찾아 갑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곳은 한적한 외진 작은 마을입니다. 그래서 잠시 헤매야 했지만 다행히 성당 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풍수원성당은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 2리에 있습니다. 매우 한적한 마을이라 검색해보니 서원면 인구가 2,000여 명 남짓합니다. 그러니 유현리 2리의 인구는 극히 적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외진 마을에 위치한 유서 깊은 성당이어서인지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인지 산타 할아버지가 나와 앉아 계십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쪽 팔을 뻗고 계신가 봅니다.

 

 

계단을 올라가 먼저 풍수원성당에 대한 설명을 읽어봅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1803년 경 8일 동안 4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하니 그 유래가 상당히 깊습니다. 산림이 울창한 산간벽지이기에 관헌들의 눈을 피해 세상과 동떨어져 자신들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이라고 합니다.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정면에 다 쓰러져가는 가옥이 보입니다.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보면 이 건물이 르메르 신부가 세운 최초의 본당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마을에 정착한 후 신자들은  8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다 1885년 조선은 프랑스와 천주교 포교를 허용하는 조항이 실린 '조프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를 계기로 이곳에 1888년 프랑스 르메르 신부가 제1대 신부로 부임하여 초가 20칸의 본당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풍수원성당은 아산 공세리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천주교 3대 성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성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습니다. 성당을 빙 돌아보지만 다른 입구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성당 정문 옆에 장식해 놓은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동방박사 인형만 바라봅니다.

 

 

 

이 동상은 정규하 신부님으로 1896년(고종)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 후 1906년(순종 융희 1년) 정규하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1907년 현재의 절충식 고딕 건축물 성전을 준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내판과 이 동상에 새겨진 연도가 다릅니다. 이 동상에는 1907년 착공, 1910년 완공이라고 되어 있어 무엇에 차이점이 있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본당에서 언덕길로 올라가 봅니다. 

 

 

 

풍수원성당 구 사제관(舊 司祭館)은 현재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유물관에는 영어 성경 및 신부님의 성물(聖物)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찍어 놓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곳의 신자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농기구와 생활용품들도 다수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 하나 감상하느라 이곳에 오래 있었답니다. 

 

 

 

유물전시관 외부 통유리 창으로 보이는 농기구들과 장독들이 정겨움을 더합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탄압은 1791년 정조 때의 신해박해이다.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에 대한 유교식제사를 폐지하여 처형당하였다. 

 

헌종 때 기해박해와 경오박해, 그리고 1801년(순조)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이때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난다.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고발하며 외국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베론 성지(충북 제천)에서 작성하여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돼 처형된 사건이다.

 

다시 1866년 병인박해[병인사옥]가 일어난다. 대원군은 초기에는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다. 프랑스 신부를 통하여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 기운이 높아졌다. 이에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여 프랑스인 주교와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었다.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로스제독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서양세력과의 최초의 전투인 병인양요(1866)이다. 강화성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정족산성의 양헌수부대와 김포 문수산성의 한성근부대가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규장각을 불태워 전소되었다. 5천 권 이상의 책이 불탔고, 조선왕조의궤 및 은괴 수천 냥 등을 약탈하여 갔다. 프랑스는 경부고속철도의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반환의사를 내비쳤다. 이때 프랑스는 외규장각도서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문화재와 맞바꾸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협상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여 프랑스는 2011년 145년 만에 5년 단위 임대방식으로 반환하였다. 그리하여 김영삼 정부 때 TGV 고속철도협상 과정에서 1권을 돌려받았을 뿐 수백 권에 달하는 의궤의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가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