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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 박인환문학관 & 인제산촌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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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국내여행기

2021. 2. 2.

 

관람시간

09:30 ~ 17:30까지 입장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매주 월요일)

별도 공지할 때까지 휴관

주차 및 이용 : 무료

 

주소 :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길(상동리 415-1)

문의전화 : 033-462-2086

 

 

 

 박인환문학관 

[박인환문학관]

오늘은 시인 박인환을 추억해봅니다.

박인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저는 중고등학교 때 가장 즐겨 암송했던 시 가운데 하나가 박인환의 시 <얼굴>이었습니다. 오래 전 블로그에도 올렸었지요. 

그래서 박인환문학관은 제게 설렘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야외 전시실]

 

박인환(1926 - 1956)은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한 1950년대 후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1956년 소설가 이상(김해경, 1910 - 1937)의 기일(4월 17일) 한 달 전 이상을 추모하며 4일 동안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코올성 심장마비로 이어져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시인의 생가 터 옆에 2012년에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은 야외전시실과 문학관 내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박인환 문학관과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을 연결하는 통로 아래 뒤로 보이는 조형물인 ‘시가 열리는 나무’는 “사과나무에 시가 주렁주렁 열린 모습으로 미래의 꿈나무 시인의 창작성을 나타내며 아래에 벤치를 둔 휴게 공간”이라고 합니다.

홈페이지와 팸플릿 설명을 종합해보면 박인환문학관 뒤쪽 시인의 생가 터에 조형물 ‘그 그리움에 대하여’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이나 박인환문학관을 찾아갔지만 문학관 뒤쪽으로는 가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품]

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인 박인환의 커다란 동상입니다. 매우 인상적인 이 작품은 명동 최고의 멋쟁이였던 박인환이 코트와 넥타이를 바람에 휘날리며 오른손에 만년필을 들고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모습입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인물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데 이 동상을 보는 순간 기념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코트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으면 센서(감지기)에 의해 시인의 대표 노래와 시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을 때 노래나 시가 들렸었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너무 잠깐 앉았다 일어나서일까요???

 

 

‘시인 박인환의 거리’가 조성되었다고 해서 이 주변의 도로명이 '박인환 거리'인 것은 아닙니다. 이 조각 작품 이름이 ‘시인 박인환의 거리’인지, 아니면 박인환과 관련된 다섯 가지 조형물을 비롯한 이곳에 조성된 길을 ‘시인 박인환의 거리’라고 하는 것인지 안내 팸플릿과 홈페이지 정보로서는 구분하기 힘듭니다.

 

이 조형물에는 박인환의 가장 대표적인 시 <목마와 숙녀>가 궁서체로 쓰여 있습니다. 오래 전 이미 블로그에 올린 시지만 다시 올려봅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인의 모습과 이 시의 분위기를 잘 살려 찌그러진 양은 술 주전자와 술잔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시인과 함께 앉아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듯 실물의 긴 의자도 있습니다. 낭만을 즐기던 그 시절 예술인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멋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책 읽는 목마]

조형물 ‘박인환의 길’ 앞에 ‘책 읽는 목마’가 있습니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서 ‘목마’ 이미지를 주제로 만든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목마와 숙녀> 하면 ‘목마’보다는 ‘버지니아울프’가 먼저 떠오르고, ‘목마’하면 ‘트로이의 목마’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인지 ‘박인환의 길’의 쓸쓸함과 상큼 발랄한 목마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어린 아이들을 두고 먼저 떠난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 박인환이 이렇게나마 어린 자식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것 같은 따스함도 동시에 느껴집니다.

 

 

[시 짓기 블록놀이]
[시 짓기 블록놀이]

박인환문학관 옆에는 ‘시 짓기 블록놀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보니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나 짧은 시의 글귀가 아닌 가족의 건강이나 연인과의 사랑을 기원하는 글들로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문학관 1층 통유리창문 또한 시인의 대형 얼굴사진과 결혼식 사진,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로 장식해 놓아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박인환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한껏 선사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세월이 가면>의 “가을에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라는 시구(詩句)처럼 이곳저곳에 벤치가 많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갖고 있는 엽서인데 박인희가 부른 노랫말 가사로 원문과 다음의 글귀가 다릅니다.

내 가슴에 있네 → 내 가슴에 있어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내 가슴에 있네 →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층 전시실로 들어가 봅니다.

현대적 분위기의 대부분의 기념관과는 달리 이곳은 박인환 시인과 관련된 서울 종로의 ‘마리서사’, 충무로 4가의 ‘유명옥’, 명동의 ‘봉선화 다방’과 ‘동방싸롱’ 그리고 ‘포엠’을 작은 규모로 재구성해 놓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전시관이라 더욱 좋았습니다. 조명도 약간은 어둡게 하여 해방 후 서울의 모습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사랑방  ‘ 마리서사 ( 茉莉書舍 )’]

왼쪽에 시인이 1945년에서 1948년까지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가 있습니다. 평양의학전문대학을 다니던 중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와 1945년 종로 3가 파고다공원 근처 낙원상가 입구에 열었던 서점입니다.

마리서사(茉莉書舍)의 한자의 茉은 ‘마’가 아니라 ‘말’입니다. ‘마리서사’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일본에서 ‘말리’를 ‘마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말리(茉莉)는 물푸레나뭇과의 상록관목으로 여름에 흰 꽃이 가지 끝에 핀다고 합니다. 가수 이승철의 ‘말리꽃’으로 인해 친숙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서점 이름을 ‘마리서사’라고 한 이유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박인환 시인이 프랑스의 여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라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서점의 이름을 ‘LIBRAIRIE MARIE’라고 프랑스어로 표기한 것과 평소 모딜리아니, 장 콕도 등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흠모했기 때문에 일본보다는 프랑스와 더 연관이 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인환 시인의 부인도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박인환은 서점을 운영하며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시인 김경린, 김광균, 김기림, 김수영, 오장환, 이한직과 교류하였습니다.

전시실의 마리서사 유리창에는 ‘낭만주의자 박인환 현실주의자 김수영’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새겨놓았습니다. 당시 시에 대한 관점이 달라 소원해졌던 두 시인의 관계를 암시해 주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박인환에 관해서는 <얼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이외에는 따로 그에 관한 글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낭만을 동경했고 그의 표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민음사에서 출판했던 <金洙暎 全集 Ⅰ 詩>와 김수영 산문선집 <詩여, 침을 뱉어라>는 많은 책을 정리하면서도 여전히 갖고 있을 만큼 젊은 시절 김수영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와 산문집에서는 박인환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짐작할만한 시나 글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수십 년 전에 읽었기에 기억이 희미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에 대한 해석능력도 부족한 탓으로 현실주의자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현실주의자에 대한 정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김수영 자신이 스스로 현실주의자라고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라면, 또한 박인환에 대해 어쩌다 김수영이 한 마디 던진 말과 글이 전체인양 해석되고 있는 것이라면, 저는 그냥 두 시인의 시들을 평론가들의 정의나 당사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일화에 얽매이지 않고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좋아하고 싶습니다.

많은 아픔을 겪으며 살아야 했던 김수영은 버스에 치어 머리를 다친 후 깨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김수영의 <풀>은 그가 죽기 며칠 전에 쓴 시입니다.

 

 

 

[마리서사 내부]

박인환은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던 오장환이 운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하여 ‘마리서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서점의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갖고 있던 장 콕도, 앙드레 브르통 등 외국문화예술서적이었는데 당시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축소해서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영업에는 소질이 없었기에 문학청년들의 아지트로만 이용되고 책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 3년 만에 서점의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모더니즘 시운동의 시초가 된 선술집 - 유명옥]

‘마리서사’ 옆에는 시인 김수영의 모친이 운영했던 빈대떡집 ‘유명옥’이 있습니다. 김수영은 1945년 24세 때 부모와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충무로 4가에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부친이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모친이 충무로 4가에 ‘유명옥’을 운영하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유명옥은 30년대 초기 김기림, 김광균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후기 모더니즘 시운동이 시작된 곳입니다. 즉 박인환, 김수영,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등이 이곳에 모여 1950년대 후기 모더니즘의 발전에 대해 모색하던 곳입니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후에 그들 5인의 시 20편이 실린 신시론시집(新詩論詩集)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광복 후 최초로 모더니즘을 표방한 동인지였습니다.

 

 

 

[동방싸롱]

35세의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술집이나 다방을 전전하며 마담의 눈치를 보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논해야 하는 가난한 청년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1955년 3층 콘크리트 건물에 ‘동방문화회관’을 개관하였습니다. 1층은 차와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살롱, 2층은 집필실, 3층은 회의실로 구성된 최신식 건물이었습니다. 1층에 ‘동방싸롱’이 문을 열자 ‘모나리자’에 출입하던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1956년 김동근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 후 연극인 이해랑이 인수하였으나 경영악화로 1957년 문을 닫게 됩니다.

 

 

 

[명동의 댄디보이를 기억하다 : 포엠]

술집 ‘포엠’은 위스키 시음장으로 문을 연 뒤 값싼 양주를 제공해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축음기와 폴 모리아, 차이코프스키 등의 LP 레코드판이 있으니 오히려 이곳이 음악다방 같은 분위기입니다. 박인환은 조니 워커와 담배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저 술병 가운데 조니 워커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항상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포엠을 드나들었던 댄디보이 박인환을 추억하기 위해서인지 회색 코트와 검은 양복과 모자가 벽에 걸려있습니다. 

 

 

 

[고전음악 전문 다방 - 봉선화 다방]

마네킹이 무섭게 생겨 들어가기가 꺼려진 이곳은 ‘봉선화 다방’으로 해방이 되자 명동 부근에 처음으로 개업한 고전음악 전문 다방이라고 합니다. 저의 세대에는 명동의 클래식 음악 감상실 ‘필하모니’를 자주 갔었는데 그 이전에는 고전음악 전문 다방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 계기로 처음 알았습니다. 봉선화 다방에서는 시낭송의 밤, 출판기념회, 그림 전시회와 작곡 발표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에는 축음기나 전화기가 있는 가정집은 드물었을 테니 서양음악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가난한 문인과 예술인들이 즐겨 찾으며 연락장소와 토론의 장소로 애용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전음악 전문 다방 - 봉선화 다방]

그런데 저는 박인환문학관의 ‘봉선화 다방’에서 반가운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재빨리 사진에 담았답니다.

‘쿼바디스’ ‘애수’ ‘오즈의 마법사’ ‘작은 아씨들’ 등의 명작을 남긴 마빈 르로이가 감독하고 로널드 콜먼, 그리어 가슨 등 미남, 미녀 배우가 출연한 영화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 포스터가 벽에 딱!

그 많은 영화 가운데 왜 저 영화를 붙여 놓았을까 궁금합니다. 저는 한 편의 영화를 10번 이상 본 영화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마음의 행로’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신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이기에 영어대본으로도 열심히 공부하는 척만 했던 영화랍니다.

박인환문학관 전시실에는 이 영화 이외에도 여러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습니다. 박인환이 부인과 함께 당시 개봉하던 영화를 거의 다 보았음을 상징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돈만 생기면마 술로 다 써버리는 가난한 시인이 어떻게 그 많은 개봉영화들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부인의 사촌 형부가 매번 시사회 표와 개봉관 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나리자

팸플릿과 홈페이지에는 다방 ‘모나리자’도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모나리자’를 전시관 안에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나리자'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다방으로 많은 문화예술인이 출입하던 유명한 다방이라고 합니다. 사실 ‘봉선화 다방’, ‘모나리자’, ‘포엠’ '동방싸롱'뿐 아니라 명동 자체가 그 당시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술집 포엠과 다방 모나리자를 찾는 문화예술인 가운데 열에 아홉은 외상인데다 1955년 동방싸롱이 개업하자 문화예술인들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포엠과 모나리자는 경영난을 겪으며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박인환뿐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은 가난과 외상을 낭만이라 여기며 그것을 맘껏 즐겼던 것 같습니다.

 

 

 

[명동백작 박인환의 추억]

동행이 있었기에 이 영상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학창시절 제가 좋아하던 시들을 적어놓았던 노트를 펼쳐 장 콕도의 한 편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산비둘기 

☆ Jean Cocteau (장 콕도)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상냥한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2층 전시실 

 

[술집 - 은성]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술집이었기에 여러 번 기사화도 되어 문인들과의 연관성을 떠나서도 친숙한 곳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953년 영업을 시작한 ‘은성’은 1950~60년대뿐 아니라 1973년까지 운영을 계속하면서 명동의 문인과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이자 언론인 이봉구를 비롯하여 시인 변영로, 박인환, 김수영, 오상순, 천상병, 수필가 전혜린, 테너 임만섭 등이 이곳의 단골이었습니다.

 

박인환문학관 전시관과 홈페이지 그리고 팸플릿 모두 ‘은성’을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은 1956년 명동의 경상도집이라는 막걸리 집에서 박인환이 죽기 얼마 전에 종이에 긁적인 시라는 것이 정설로 알고 있습니다. 문학관 측에서도 상당한 자료수집 후 전시하였을 텐데 ‘은성’이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인환이 황급히 종이에 써내려간 이 시를 술자리에 합석했던 극작가 이진섭이 샹송 풍으로 즉흥적으로 작곡하였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부른 유명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불렀습니다. 나애심이 자리를 뜬 뒤 테너 임만섭이 합석하며 큰 소리의 성악발성으로 이 노래를 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들며 명동의 샹송, 명동의 엘레지로 사랑받게 된 곡이 바로 <세월이 가면>입니다. 그러나 박인환문학관에서는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에게 부르도록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며 반가운 사실 또 하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EBS에서 방영한 <명동백작>입니다.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이 잠깐이나마 등장했었지요. 전혜린은 그 수필집에서 독일 슈바빙을 매우 낭만적으로 묘사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독일 슈바빙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었답니다. 아쉽게도 독일에 갔을 때 슈바빙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오늘 전혜린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며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박인환박물관은 비록 매우 작은 규모이지만 박인환을 추억할 수 있는 분들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인상적인 곳입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어릴 적 인제하면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에서) 못 살겠네.”라는 지역명을 갖고 우스개처럼 유행하던 말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작년 인제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다양한 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어 부러운 곳이었습니다. 이 박물관 역시 매우 잘 꾸며진 곳이었습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었는지 내부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아 소개해드리지는 못하지만 박인환문학관을 찾는 분이라면 이 박물관도 꼭 둘러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박인환박물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일행 중 한 분은 이곳은 정말 좋아하더군요. 이 박물관은 2003년 개관한 국내 최초의 산촌민속전문박물관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