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아의 작은 세상

Anarchia 2008. 2. 17. 14:20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및 운동.

 

개요

 

국가나 정부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연유한 이 말은 일찍이 영국 청교도 혁명에서의 수평파(水平派 Levellers)나 프랑스 혁명기의 앙라제(Enragés:전투적 급진파)를 비난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법규를 부인하고 재산을 압제의 수단으로 간주하며 죄란 사유재산과 권력에 따르는 사회적 산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인간이 법과 사회체계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원리를 실천하게 된다면, 사회성과 타고난 기질의 자유로운 발전에 기인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해왔다(→ 법철학).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사상가에 따라 각양각색이지만 주요한 차이는 첫째, 이상사회에 있어서 집단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둘째, 사적 소유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셋째,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3가지 관점에서 발생한다. 무정부주의의 종류에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프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등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와 미하일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집산주의적(集産主義的) 무정부주의 그리고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있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해 공상적 무정부주의와 과학적 무정부주의로 나누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이론에 치중되어 있는 철학적 무정부주의와 정치·사회적인 실천방법까지 구상하고 있는 혁명적 무정부주의로 대별된다. 이밖에 19세기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이 있는데, 노동조합의 직접행동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으로 라틴 제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

 

무정부주의 사상가

 

정치권력에 대한 부인의 전통은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스토아 학파와 퀴닉 학파에까지 소급되며 중세의 카다리파 등 이단 세력이나 종교개혁기의 재세례파(再洗禮派)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간혹 현대의 무정부주의 작가들은 이들을 무정부주의의 원조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물질적 세속으로부터 영적 은총에로의 피정(避靜)을 통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적 무정부주의가 다음의 내용을 공통분모로 하는 정치적·사회적 무정부주의와 양립할 수는 없다. 정치적·사회적 무정부주의의 논리는 첫째, 권력을 기반으로 삼는 현존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며 둘째, 강제력이 아닌 협력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적 사회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셋째, 새로운 사회질서를 유도해내는 방법론을 포함한다.

 

무정부주의 공동체의 윤곽이 최초로 드러난 것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직후 제러드 윈스턴리에 의해서였다. 신을 곧 이성으로 파악한 그는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Truth Lifting Up Its Head Above Scandals〉(1649)에서 무정부주의의 기본원칙들을 정립했다. 권력은 부패하고 부(富)는 자유의 이상과 배치된다. 권력과 부를 모태로 죄악이 잉태된다. 지배하는 자가 없고 생산과 분배가 공동으로 이루어지며 구성원들이 위로부터의 법규가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사회에서만이 인간은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유토피아). 윈스턴리는 무정부주의 이론의 개척자인 동시에 선구적 실천가이기도 했다. 사회적 불의는 대중들 자신의 행위로써만이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한 그는 1649년 디거스(Diggers)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일단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의 산기슭을 점령해 자유주의적 공산사회를 형성했고 지주들의 공격에 소극적, 비폭력적인 저항을 고수했다. 이들의 공동체가 지역주민들의 반발로 와해된 후 윈스턴리는 생사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으나 그의 이론은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을 이루었으며 훗날 윌리엄 고드윈의 저작 속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고드윈은 알렉산더 그레이 경(卿)이 "무정부주의의 본질을 가장 완전하게 집약했다"고 평가한 바 있는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1793)에서 권력이란 자연에 역행되는 것이며 사회악은 인간이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전제한 뒤, 소규모 자치공동체(parish)를 기본단위로 하는 지방분권적 사회를 설계했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서는 정치적 절차가 최대한 배제되는데, 다수에 의한 지배도 억압의 일종에 불과하며 투표나 선거방식은 개인의 책임감을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제공한다고 하여 부의 축적을 비난했고 필요에 따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느슨한 경제체제를 구상했다. 고드윈은 기술적 진보를 예견한 인물이기도 했다. 산업의 발달은 근로시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사람들이 단순화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 것이고 결국 권위없는 사회로의 전이(轉移)에 도움을 줄 것이다. 윌리엄 워즈워스, 윌리엄 해즐리트 등 수많은 작가들이 고드윈의 사상에 빚을 졌으며, 특히 퍼시 비시 셸리의 〈매브 여왕 Queen Mab〉·〈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Unbound〉는 무정부주의 시라고 할 만하다. 그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는 로버트 오언을 중개자로 영국 노동운동의 기반을 형성했으나 무정부주의자들이 고드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최근에 들어서이다.

 

무정부주의 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확고히 한 사람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이다. 이미 2월혁명(1848) 무렵에 급진적 언론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 Qu'est ce que la propriété?〉와 〈경제적 모순의 체계, 빈곤의 철학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을 집필해 사회주의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돌연 "나는 무정부주의자이다"라고 선언한 프루동은 무정부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카를 마르크스, 미하일 바쿠닌 등과 교류했고 2월혁명의 체험으로부터 자유주의 이론을 도출해 〈연방제의 원리에 관하여 Du principe fédératif〉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역량 De la capacité politique des classes ouvrières〉을 저술했다. 방대하고 다양한 저작을 남긴 프루동은 어떠한 정치체계나 정당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바랬지만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등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그들의 진정한 비조(鼻祖)로 평가되었다.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 이론의 골자는 상호주의·연방주의·직접행동주의로 요약된다. 먼저 상호주의란 평등주의에 기초한 사회공동체의 건설을 뜻했다. 부(富)를 도둑이라고 한 그의 언명은 결코 공산주의의 옹호가 될 수 없으며 재산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서 남용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었다. 프루동은 생산에 필요한 토지와 도구에 대한 지배권인 '소유'를 자유를 위해 불가피한 하나의 보루로 간주했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사회는 자영농민과 독립적인 장인들로 구성되고, 노동자연합체가 공장과 공공시설을 운영하며, 이 모든 요소들이 인민은행의 상호신용체계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경제공동체였다. 프루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대신해 계약과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자치적 지역사회 및 산업연합체들의 연방을 제안했다(→ 연방제도). 연방체제하에서는 법원이 아닌 중재의 방법이 채택될 것이며, 노동자들의 관리·경영이 관료제를 대체시키고 이론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인격교육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질서가 끊임없는 압제의 모태가 되는 혼돈에 불과하다면, 그가 설계한 체계는 자연 그대로의 사회공동체를 의미했다.

 

프루동의 노선에 동조하는 노동자 세력은 1830년대에 그가 리용에서 가입했던 비밀결사의 이름을 본따 스스로를 '상호주의자'라고 불렀다. 1864년 프루동이 사망한 직후 일단의 상호주의자들이 영국의 노동조합운동 세력 및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제휴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설한다. 상호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카를 마르크스 진영과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으나, 실상 마르크스가 경계해야 했던 대상은 미하일 바쿠닌의 추종자들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정치적인 국가전복활동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쿠닌은 혁명가로 전향한 러시아 귀족으로 일찍이 슬라브 각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해오다가 1840년대에 프루동의 사상을 흡수했다. 1868년 인터내셔널에 참여할 즈음에는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인 '사회민주주의동맹'을 결성하고 이탈리아·스페인·스위스 그리고 론 계곡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루동주의를 수정해 자신의 집산주의 이론을 창출해냈다. 그는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직접행동원칙을 수긍하고 노력에 상응하는 분배를 요구했지만, 제한된 소유권의 개념은 비현실적이므로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사람의 또다른 차이점은 혁명 방법론에 있었다. 기성 사회 내에서 이를 대체할 상호주의적 연합체를 형성시킬 수 있다고 본 프루동이 혁명적 폭력수단을 거부한 반면, 바쿠닌은 "파괴의 열정은 곧 창조의 열정이기도 하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선배 이론가의 소극적이고 단편적인 개혁노선에 반대했다. 프루동의 개인주의와 비폭력주의가 무정부주의 전통의 일부를 이루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제1인터내셔널 시절부터 1939년 스페인 내란의 종식과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 그 주류를 형성했던 것은 바쿠닌의 집산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론이었다. 마르크스와 바쿠닌 사이의 반목은 제1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들의 불화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공산당에 의한 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봉기에 의한 혁명이라는 방법론상의 충돌인 동시에 타협될 수 없는 두 사람의 인성차(人性差)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인터내셔널이 마침내 와해되었을 때, 바쿠닌 세력은 스페인, 이탈리아, 남프랑스, 불어권 스위스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게 되었고 유럽의 무정부주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3년 바쿠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된 인터내셔널은 1877년까지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고, 이 무렵 집산주의자보다는 무정부주의자라는 명칭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바쿠닌이 저술가이기보다는 실천가로 살았던 반면 그의 후계자인 페테르 크로포트킨은 이론에 출중했다. 1876년 공작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가가 된 그는 프랑스 지리학자인 엘리제 레클뤼의 사상에 힘입어 고유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레클뤼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제자였다. 크로포트킨은 생산수단의 공유뿐만 아니라 16세기에 토머스 모어경이 〈유토피아 Utopia〉에서 그렸던 것과 같은 공산주의적 분배방식을 주장함으로써 미하일 바쿠닌의 집산주의를 넘어선다. 〈빵의 정복 La Conquête du pain〉(1892)은 자유로운 공산주의 세력의 연합인 혁명적 사회공동체를 서술한 것이며, 〈상호부조:진보의 한 요인 Mutual Aid:A Factor in Evolution〉(1902)에서는 생물학적·사회학적 접근법을 취해 경쟁보다는 협력이 인간에게 더 자연스러운 일임을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토지, 공장, 작업장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1899)은 무정부사회에 합당한 산업의 분산을 논한 것이다.

 

사회운동으로서의 무정부주의

 

페테르 크로포트킨은 이론적으로 무정부주의의 앞날을 조명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새로 덧붙여진 내용이란 거의 발견할 수 없지만, 그당시 더 큰 중요성을 가졌던 것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 싹튼 '행동선전이론'이었다. 1876년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이와 같은 신조를 "사회주의 원칙을 확고히 하기 위한 폭동은 가장 효과적인 선전수단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농촌지역에서 몽매한 대중을 선동하려는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정부적 직접행동주의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개인 차원의 항의형태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테러리즘). 그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권력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냄으로써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1890~1901년에 상징적인 암살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1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 프랑스의 카르노 대통령,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 스페인 총리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 등은 그 대표적인 희생양들이었다. 이제 무정부주의자는 제정신이 아닌 파괴분자로 낙인찍혔지만 과격행동이 유발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스페인·러시아 등지에서 계속 명맥을 유지했다.

 

1890년대에 무정부주의 사상은 프랑스의 전위적(前衛的) 화가 및 작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면, 귀스타브 쿠르베는 이미 프루동의 제자가 되어 있었고,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폴 아당, 옥타브 미르보, 로랑 타일라드, 스테판 말라르메등이 이에 동조했다. 이무렵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는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고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사회주의적 인간의 영혼 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1891)을 집필했다.

 

예술가에게서의 아나키즘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무정부주의의 속성은 구체적으로 개인주의적 색채였다. 1890년대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의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부각된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해방문제가 도외시되어왔다는 비판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은 평등한 개인 각자의 자유로운 요구들을 온전히 반영하면서도 전체 사회의 결속을 다져야 한다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청년 헤겔 학파 출신으로 〈유일자(唯一者)와 그의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를 펴낸 막스 슈티르너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모든 사회적 행동규범과 제약을 거부했다. 심지어 크로포트킨이 설파한 사회적 무정부주의 원칙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조차도 행동의 자유를 위협하고 사회제도로 굳어질 우려가 있는 혁명적 조직의 결성에 조심스러웠다. 이결과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규모의 무정부주의자 대회가 개최되었지만 효율적인 조직의 창설로 이어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무정부주의가 팽배해 있던 국가에서도 연합체들의 존재는 미미했고 소규모의 상투적인 조직체들이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아나르코-생디칼리즘의 대두

 

개인주의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졌고 테러 행위에 대한 공중의 반감이 무정부주의 운동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던 프랑스에서 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거래소(bourses du travail)를 비롯한 노동조합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의 지역연합체인 노동거래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지방분권이라는 무정부주의의 이상에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1892년 결성된 전국 노동거래소동맹은 1895년 페르낭 펠루티에, 에밀 푸제, 폴 델레살을 주축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른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란 이들에 의해서 발전된 노동자 직접행동주의의 이론과 실제이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더 나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의 전통적 기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의 전복에 주력하는 급진적 조직체였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공공시설을 접수하고 그 운영을 담당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중요한 2가지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하나는 혁명 뒤의 행정기구로서의 역할이다. 급진·과격 성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투쟁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며 총파업은 그 핵심에 해당한다. 생디칼리스트들은 대대적인 비협조운동이 자연스럽게 혁명을 유도해낼 것이라고 믿었으나, 제한된 목표를 설정한 부분적인 총파업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 일시에 사회질서의 전면타도를 획책했던 적은 없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프랑스 이외에 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위세를 떨쳤는데, 열악한 근로조건하에서 정부와 자본가들이 노동운동을 유혈진압했기 때문이었다. 1902년에는 프랑스 노동조합총동맹(CGT)이 창설되었고 무정부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정부주의와 마찬가지로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총파업의 의미를 사회적 신화에까지 올려놓은 조르주 소렐의 〈폭력론 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이즈음에 씌어진 가장 중요한 저작이다. 한편 순수 이론가들은 생디칼리슴 조직 내부의 위계질서가 혁명적 사회에서 확고한 지배구조로 정착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무정부주의자대회에서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이 쟁점을 놓고 청년 생디칼리스트인 피에르 모나트와 격론을 벌였으며, 이결과 무정부주의의 개인주의 성향은 대규모 조직체에 대한 반감으로 역사적인 귀결을 이루었다.(번역에 어폐가 있다 말라테스타와 피에르 모나트의 대립은 아나르코 개인주의와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대립이 아닌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간의 이견이었다. 미래 사회의 관점에서 노동조합이 자치적 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 산업사회의 기반을 닦아내지 못한 이탈리아와 산업사회의 수준을 상당히 진전시킨 프랑스 아나키스트들간의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세계를 뒤흔흔 상호부조론" 책을 권한다.)

 

무정부주의 운동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대중적인 기반을 얻게 되었다. 1922년 생디칼리스트들은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하고 베를린에 본부를 두었는데, 스톡홀름으로 옮겨 현재도 활동을 벌이고 있다. 생디칼리슴은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을 탄생시켰고, 영국의 길드 사회주의 운동도 그 맥락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은 세계적으로 가장 치열한 투쟁양상을 보였다.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슴은 이곳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스페인 최초의 무정부주의자인 라몬 데 라 사그라는 프루동의 제자로서 1845년 세계 최초의 무정부주의 잡지 〈포르베니르 El Porvenir〉를 발행했다. 그뒤 프루동의 상호주의 이론은 Pi y 마르갈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연방주의 지도자로서 프루동의 여러 저작을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1873년의 혁명기에 지방분권적(cantonalist) 정치체제를 수립하려고 애썼다. 1860년대로 접어들자 스페인 무정부주의에 바쿠닌적 색채가 짙어졌다. 미하일 바쿠닌의 제자였던 이탈리아인 주세페 파넬리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방문하고 인터내셔널의 지부를 설치했다.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지방의 노동자들과 안달루시아에서 부재지주제도(不在地主制度)로 곤궁에 빠져 있던 농민들에게 무정부주의는 바람직한 급진주의의 양태로 다가왔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운동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처럼 반란과 테러리즘으로 점철되었는데, 군부와 자본가들에 맞서 싸운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들이 전문적인 청부살인조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은 프랑스의 CGT에 자극을 받아 생디칼리슴 조직인 노동자동맹(Solidaridad Obrera)을 설립했고 카탈루냐 지방 전역으로 순식간에 세력을 떨쳤다. 1909년 군부가 카탈루냐의 보충역을 모로코에 파병하려는 계획을 입안하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비극의 1주간'에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했고 5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었다. 1910년 세비야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대회는 대책을 숙의한 결과 전국노동조합동맹(CNT)을 발족시켰으며 1927년에는 급진론자들에 의하여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자연합(FAI)이 탄생되었다.

 

CNT는 지방분권주의와 반(反)관료주의에 충실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국가수준의 조합체가 아니었고 특정지역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신디카토스 우니코스(노동조합)였다. 중임금지(重任禁止)의 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국대표자회의의 위원은 매년 상이한 지방에서 선출되었고 일반회원들은 해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스페인 내란기까지 회원수가 200만 명에 육박했던 이 거대한 조직은 단 한 사람의 유급 서기관을 채용했을 뿐이었으며 나날의 일과는 동료회원들에 의해 지명된 노동자들이 이용해 틈 수행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체는 소외된 인텔리겐치아가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이었으므로 이론보다는 실천과 행동영역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뒤 본격적인 공개투쟁에 돌입한 CNT는 1931년부터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1936년까지 몇 차례의 봉기에 실패했으나 스페인 내란이 발발한 후에는 스페인 동부지역을 사실상 점유했으며 이를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노동자위원회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공장과 철도를 접수했고 안달루시아에서 토지를 장악한 농민들은 페테르 크로포트킨의 이론대로 자유주의적 코뮌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 내란기간 동안 실패하게 된 이유는 장기전을 수행할 만한 규율을 가지지 못해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국제여단에 필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했으며 1936년 12월 프란시스코 카바예로 정부에 입각한 4명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도 좌파 전체주의로 기울어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1937년 5월 무정부주의 세력과 공산주의자들이 바르셀로나에서 유혈충돌을 빚었다(더 정확히 무정부주의자들이 관리하고 있던 전선, 통신 시설을 장악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앙정부는 집산화된 공장들을 점령했고 프랑코는 순순히 안달루시아에 진입함에 따라 수많은  자유 코뮌들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무렵 기타 지역의 무정부주의 운동도 러시아 혁명과 좌, 우파 각각의 전체주의 정권의 등장에 따라 분쇄되어갔다. 합법정당인 '사회혁명당'(나로드니키)이 바쿠닌주의를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던 러시아에서는 무정부주의가는 따로 번성하지는 않았다. 혁명 후 망명을 끝내고 돌아온 크로포트킨에겐 어떠한 동조세력도 없었다. 적군과 백군의 내전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눈부신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아나르코 농민운동을 지휘 했던 N.I.마흐노가 망명길에 오른 뒤 러시아에서 무정부주의는 근절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CGT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무정부주의 운동은 1920년대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았으며 나치당은 무정부주의 운동을 공격했다. 일본의 무정부주의는 크로포트킨의 이론을 흡수한 사회주의 지도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에 의해 소개되었다. 1911년 천황암살음모에 연루되어 고토쿠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처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흑단(黑團)과 생디칼리스트 연합 등 조직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만주침략 후 일본 정부는 좌익세력들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비밀결사인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당'이 해체된 후 1935년 일본의 무정부주의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저시아 워런, 리샌더 스푸너의 작품과 〈자유 Liberty〉를 펴낸 벤저민 터커 등이 특유의 비폭력주의 전통을 일구어 놓았던 반면, 유럽 이민자들인 요한 모스트, 알렉산더 버크만, 에머 골드만 등은 행동주의를 주장했다. 모스트는 〈자유 Die Freiheit〉지의 편집자였고 버크만은 강철 산업의 제왕 헨리 클레이 프릭의 암살을 시도했다. 특히 골드만의 〈내가 사는 삶 Living My Life〉은 세기말 미국 급진주의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903년 의회는 외국 무정부주의자들의 입국을 금하고 국내에 잠입해 있는 외국 운동가들을 색출·추방하기 위해 관계법안을 제정했다. IWW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고 버크만과 골드만 등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20세기의 무정부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 전의 무정부주의 세력과 연합체들이 되살아났지만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상이 세계를 압도했다. 1960 년대와 70년대는 러시아 혁명 이후 무정부주의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엄밀한 의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 자체로 볼 수는 없을 것이나, 조직적 영속성을 별반 강조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의 본질로 미루어 볼 때 이같은 발전양상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무정부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사회적·윤리적 사상들은 대개 모든 사회운동 속에서 숨쉬고 있다. 레오 톨스토이는 스스로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지 않았을 뿐, 급진적 비폭력주의와 이성적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국가 및 온갖 형태의 정부를 부정하고 도덕적 재생을 위해 생활의 단순화를 주장했으며 재산의 사유 대신 자유코뮌적 공산소유를 옹호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은 무정부주의 운동에 있어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남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전개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은 톨스토이와 소로의 사상에서 착안한 것이며 크로포트킨의 영향 아래 자치적인 촌락 코뮌을 기본단위로 하는 지방분권화 계획을 수립했다. 비노바 바베, 자야 프라카슈 나라얀 등 간디 사상의 계승자들은 '사르도바야 운동'을 추진했고 토지공유화(gramdan)를 통해 목표달성에 힘썼다. 비록 지방분권화 계획이 그 비현실성과 지배세력의 탄압으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은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장 인상깊은 발자취를 남겼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정부주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반체제 학생들과 좌익 일반 사이에서 또한 인기를 구가했는데, 점차 기계적으로 되어가는 인류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젊은 세대의 반문화(反文化) 경향을 예견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이러한 면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1932)에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초래할 반지성적이고 물질적인 사회공동체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확실한 지방분권화와 생활의 단순화, 그리고 크로포트킨적인 정치운용만이 현대사회에 내재된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헉슬리의 후기저작들은 기존사회에 대한 평가기준으로서 무정부주의의 유용성을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 1950년대에 무정부주의는 미국 시민권 운동의 형태로 재발현됨으로써 다시 한번 주목 받게 된다. 시민권 운동가들은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성 회복의 기치를 내걸고 제도화된 투쟁 이외의 방법론을 추구했다. 1950년대말 미국·유럽·일본 등지에서 성행한 새로운 급진주의는 시민권 운동의 편협한 주제에서 벗어나 현대사회의 엘리트주의적 구조와 물질적 목표에 의구심을 표명했다. 새로운 급진주의의 이면에는 전통적 무정부주의 사상이 다소간 재현되어 있었다. 미국 작가 폴 굿먼이 갑작스런 인기를 누렸고, 영국에서는 세련된 〈애너키 Anarchy〉지가 월간으로 발행되어 일반생활 속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조명했다.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 비정통 심리학, 신비주의적 요소, 신(新)불교, 톨스토이류의 그리스도교정신 등이 한데 어우러진 무정부주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는 혁명적 신조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독일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나 일본의 급진적 전학련[全學聯:全日本學生自治會總聯合]을 의미에 충실해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들은 다같이 마르크스, 바쿠닌, 체 게바라의 숭배자들이었으며 현존 정치구조뿐 아니라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의 정당성에까지도 의구심을 표명했다. 자발적인 행동, 이론적 융통성, 삶의 단순성, 사랑과 분노를 포함하는 무정부주의 노선은 사회기구의 비인간성과 정치 정당의 이해타산에 염증을 느껴온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해준다. 지방분권주의와 지역자치의 원리는 참여민주주의 이론에 도움이 되었고, 1968년의 파리 폭동을 전후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선언들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현대에도 타당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급진주의자들은 직접행동주의를 받아들여 장외투쟁과 정국대치상황을 유도했으며 미국·일본의 일부 학생세력은 미하일 바쿠닌의 범(汎)파괴주의를 흡수해 타락한 기성사회질서는 타도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인 폭력이 역설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창출해낸다는 바쿠닌류의 세속적 예언사상은 폭탄 테러와 도시 게릴라 활동 등으로 1960년대 후반까지 성행했다.(그리고 계속되어 지고 있다)

 

이상으로서의 무정부주의

 

톨스토이나 간디의 맥락에서 사회개혁에는 도덕적 재생이 선행되어야 하며 점진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다 자유로운 사회공동체를 위해 도시개혁을 제안한 폴 굿먼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어떤 부류들은 다양한 유형의 공동체를 시도함으로써 이상사회에 접근하려고 애썼는데, 이와 같은 일들은 무정부주의의 전 역사를 통해 항상 재발되어왔다.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평화주의 시위가 전개되었고 미국의 경우 정상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일단의 현상들이 1970년대에 나타났다.

 

자유주의자들이 꿈꾸어왔던 완전한 무정부사회는 경험에 의존해 말하자면 실현이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허버트 리드의 마지막 작품인 〈성실예찬 The Cult of Sincerity〉(1968) 속에서 진정한 무정부주의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인류 문화사에 있어 이상사회란 사라져가는 수평선상의 한 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쪽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열정으로써 순간마다의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무정부주의 관점이 유용한 것은 현실세계를 평가하는 시금석(試金石)으로서, 이상으로서이다. 체계화된 대규모 조직과 복잡성에 대한 반동으로서 그것은 인간정신의 파동과 같은 편력과정(遍歷過程)에 맞물려 있다. 무정부주의적 통찰력은 도시 및 농촌계획, 참여에 의한 공동체 관계의 발전, 인격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드가 "의무교육과 개인적 수양으로 성취되는 개체화 과정"이라고 불렀던 영역에서 가장 큰 효용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정치 이데올로기라기 이전에 사회적·윤리적 신조로써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거대한 국가권력과 자본가 법인에 대해 지역적 이해와 애향심의 가치를 항상 일깨워준다.

G. Woodcock 글

 

 

 

 

영상은 위 Anti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시위를 주도했던, Atari teen age r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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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아의 작은 세상

Anarchia 2008. 2. 17. 12:44

<크로포트킨 자서전> 크로포트킨


△ 크로포트킨 자서전 크로포트킨 지음·김유곤 옮김 우물이있는집 펴냄·1만9800원

민중을 사랑한 '영원한 아나키스트'

19세기 후반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양분한 것은 ‘적과 흑’이었다. 붉은 깃발을 앞세운 진영은 카를 마르크스를 수장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었고, 검은 깃발을 내건 진영은 미하일 바쿠닌을 위시한 아나키즘 세력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그 상속자인 레닌주의가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아나키즘은 볼품없는 서자 취급을 받았지만,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결성 전후만 해도 두 혁명 이념은 대등한 경쟁자였다.

19세기 말 바쿠닌에 이어 아니키즘 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이다. 아나키즘을 주창했지만 정교한 이론체계를 짜지 못한 바쿠닌과 달리, 크로포트킨은 광범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살려 아나키즘 사상의 건축물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젊었을 적부터 지리학과 동물학 분야에서 학자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는 ‘아나키즘 운동의 일급 이론가’로 자신의 후반생을 살았다. 러시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를 보장받았던 그는 29살 때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사회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헌신은 혁명가로서 그의 삶에 특별한 색조를 입혔다.


귀족세습권 포기 '일급 이론가'
무정부·비혁명 '자유 코뮌' 역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1899년 그가 망명지 런던에서 펴낸 57년 삶의 회고록이다. 1980년대 중반에 <한 혁명가의 회상>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출간된 바 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신성한 지위’가 무너진 지금 상황에선 그의 자서전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이 개인의 회고록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지은이의 성품은 이 책을 자서전의 일반적 성격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 지은이의 사생활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언제 연애를 했는지 따위는 일절 쓰지 않았으며, 결혼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관해 가능한 대로 유려한 문체로 기술한다. 그에 따라, 이 삶의 기록은 19세기 유럽 노동운동사는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러시아 역사까지를 모두 담은 일종의 체험적 역사서가 됐다.

이 회고록은 지은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회주의 사상과의 비교를 통해 보여주는 마당이기도 하다. 그에게 국가는 ‘모든 악의 근원’이었고, 혁명은 민중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국가나 정부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구나 마르크스 진영이 주장한 ‘혁명적 독재’는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낡은 권력장치’일 뿐이다. “혁명은 단순히 지배자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인민에 의한 모든 사회적 재부의 수용이다. 인간성 발전을 오랫동안 저해한 모든 폭력의 폐지다.” 그는 인민의 자발적 연대와 협동에 기초한 ‘국가 없는 자유 코뮌’의 건설을 혁명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아나코-코뮌주의’로 요약된다.

이 책의 본문 내용은 189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그 뒤의 삶은 보여주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후 조국으로 돌아가 10월혁명에 동참했다. 하지만 백군이 패퇴한 뒤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파를 공격해 궤멸시켰다.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의 폭력적 권력 구축을 보며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고 말했다. 그는 1921년 모스크바 근처에서 쓸쓸히 죽었다. 크로포트킨의 절친한 벗이었던 덴마크 작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는 이 자서전에 붙인 서문에서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고 썼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아나키아의 작은 세상

Anarchia 2008. 2. 11. 21:02
"노엄 촘스키의 아나키즘에 대하여(Noam Chomsky on Anarchism)" Noam Chomsky

 

 

"노엄 촘스키의 아나키즘에 대하여(Noam Chomsky on Anarchism)"

 

                                                                                                               톰 레인(Tom Lane)

번역 : 스코잉크

 

 

1996년 12월 23일

 

소개의 글

 

 촘스키가 지난 30년 간 아나키즘에 대하여 상당한 양의 글을 써왔음에도 사람들은 자주 그에게 사회 변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상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곤 한다. 그의 정치 분석은 항상 읽는 이들로 하여금 세계가 운영되는 방식에 대하여 분개하게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촘스키가 도대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이해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의 분석들에 대하여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가 그의 목표와 전략를 제시할 때도 비슷한 수준의 정확성과 분명함을 기대하지만, 그가 대부분의 경우 자유의지적(libertarian) 사회주의적 가치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의 천명에 그치는 것에 대하여 실망하기 마련이다. 즉 많은 사람들은 한 명의 위대한 지식인이 그들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따르기만하면 밝은 내일로 이르는 마스터 플랜을 제시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그러한 류의 선언을 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는 더욱 정의로운 사회 조직은 어떠한 특정한 형태를 취할 것인지 예측하거나 무엇이 현재의 체제을 대체할 수 있는 이상적인 대안인지 아는 것 조차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경험의) 과정 동안 우리는 우리의 미래 사회가 어떠한 특정한 형태가 되더라도 관계 없이 이의 기저에 깔릴 일반적 원칙들의 인도를 받아야한다. 촘스키에게 이러한 원칙들의 근원은 "아나키즘"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사상/실천의 경향성이다.

 

 촘스키는 아나키즘에 대해서 매우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그는 내가 제기한 아나키즘에 관한 질문들에 응답하면서 "나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쓰려 노력한 적이 한번도 없고, 내가 아는 한 다른 사람들이 쓴, 권할만한 저작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나키즘에 대하여 여기 저기 간헐적으로, 특히 최근의 "권력과 전망(Power and Prospects)" 등에 저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관심있는 것은 적용의 문제이지만, 이는 보통 시간 및 장소적인 상황의 제약을 받는다"라고 생각한다.

 촘스키는 "나는 남미에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하였고, 더욱 중요하게는 실제로 상당히 아나키즘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뿐만 아니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마존 강 유역에 위치한 벨레른(Belern - 나는 이 곳에 대하여 전혀 몰랐었다. 우리의 친구들이 이러한 곳에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는 곳에 이르기까지 각처의 생기있고, 흥미로운 아나키스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과의 토론은 내가 이 곳에서 흔히 보는 것 보다 더욱 초점있고, 구체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위의 말에서처럼, 이러한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변은 일반적이고, 간결하다. 그러나, 그의 아나키즘에 대한 간단한 소개인 그러한 답변들은 독자들을 이런 주제에 대한 그의 다른 저술들로 인도하고, 더욱 중요하게는 더욱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일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컨셉트를 개발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줄 수 있다.

 

톰 레인(Tom Lane)

 

 

아나키즘에 관한 8개의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변

 

전체 질문에 대한 전반적인 코멘트

 아무도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독점할 수 없다. 그 용어는 광법위하게 다양한 사상과 실천의 상이한 조류들을 일컬어왔다. 수많은 자칭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의 방식만이 올바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이름을 사용할 자격조차 없다고 (또는 이런 저런 유형의 범죄자에 지나지않는다고) 주장한다. 현대 아나키즘 관련 문헌들을 보면, 특히 서구/지식인 서클(그들은 이 용어를 싫어할 수도 있다)의 문헌들을 보면, 상당한 부분이 맑스-레닌주의 종파주의 문헌의 경우처럼 상대방의 편향에 대한 비난 일색인 것을 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류의 문헌들이 건설적인 문헌을 숫적으로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올바른 방식"에 대한 나의 관점에 대한 확신이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들 - 심지어 좋은 친구들의 - 의 자신감 넘치는 선언에도 별 감동을 받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지나치게 적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장기적 비젼, 우리의 목표, 우리의 이상을 세울 수 있고, 실제적으로 인류에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헌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간극은 상당한 것이 대분분의 경우이다. 그리고 나는 매우 모호하고 일반적인 차원을 제외하고는 이런 간극을 메우는 방법을 좀처럼 보지 못한다. 나의 이러한 성향(혹은 결함?)은 귀하의 질의에 대한 간략한 대답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1. 아나키스트 사상의 지성사적인 근원은 무엇이며, 어떠한 운동이 생성되었고, 무엇이 그러한 운동을 역사적으로 활성화시켰는가?

 

내가 관심있는 아나키스트 사상의 조류(내가 관심있는 조류는 많다)는 내가 생각하기엔 계몽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고, 심지어 흥미롭게도 데카르트 류의 이성주의처럼 일반적으로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까지 포함하는 17세기의 과학 혁명으로까지 그 뿌리를 추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문헌들이 있다(하나의 예를 들자면 사상-역사가 해리 브랙킨 - Harry Bracken - 이 있으며, 그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글을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다시 요점을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중요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저술가이자 운동가인 루돌프 락커(Rudolf Rocker)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은 산업 자본주의의 암초에 좌초되어 다시는 그 원형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나는 물론 1930년대의 락커를 말한다. 수십년 후 그는 생각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 사상은 끝없이 재창조되어왔고, 내가 보기에 이는 아나키즘이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인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마 스페인 내전이 가장 중요한 케이스가 아니었나한다. 그러나, 우리는 1936년 이래로 다양한 형태를 취하면서 스페인을 휩쓸었던 이 아나키스트 혁명이 결코 자연발생적인 돌발 사태가 아니라 수십년 간의 교육, 조직, 투쟁, 패배, 그리고 승리를 통하여 준비되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당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혁명은) 모든 주요 권력 체제들 - 스탈린주의, 파시즘, 서구 자유주의, 대부분의 지적인 조류와 그들의 교리 기관들 - 의 격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들은 합심하여 아나키스트 혁명을 비난하고, 파괴하려하였고, 결국엔 그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중요성을 입증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2. 비판자들은 아나키즘은 "형태가 없고, 공상주의(utopian)적"이라고 불평한다. 이에 대하여 귀하는 역사적인 개별적인 단계마다 철폐되어야할 고유한 형태의 권위와 억압이 있어왔으므로, 어떠한 고정된 교조를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고 답변해왔다. 귀하가 생각하기엔 현 시대에 있어선 아나키즘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해야한다고 보는가?

 

 나는 아나키즘은 형태가 없고, 공상주의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맑스-레닌주의나 지난 세월동안 설명하기 쉬운 이유들로 권력자들과 그들의 지성적 시녀들에게 어필하였던 다른 이데올로기들의 공허한 교조에 비하여 더욱 (형태가 없고, 공상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러한 일반적인 무형성(無形性)과 (가끔은 지식인들의 이기적인 이해 때문에 거창한 언어로 위장된) 지성적인 공허는 우리가 인간 사회와 같은 복잡한 시스템에 대해서 매우 많은 것을 알고 있지못하고, 인간 사회를 재구성하고 건설하는 방법에 대해서 유효성이 제한된 직관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아나키즘은 '입증을 해야하는 부담'은 오히려 권위와 지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게게 있다는 사상의 표현이다. 그들은 강력한 논쟁으로 그러한 결론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들이 수호하려는 제도들은 정당하지못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당하지 못한 권위에 어떻게 반응해야하는가는 상황과 조건에 달려있고, 어떠한 공식도 있을 수 없다. 현 시대에 있어서 잇슈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 저기서 떠오르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 내, 또는 다른 곳에서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부터 국제적 정치/경제 질서까지. 그리고 권위에 도전하고, 권위가 권위를 정당화시킨다는 것을 주장하는 아나키스트 사상은 모든 차원에서 적절하다.

 

 

3. 아나키즘은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다는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가? 평등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인센티브는 감소할 것인가? 정부의 부재가 강자의 약자 지배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과연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 과도한 갈등, 우유 부단, 그리고 '우중(愚衆)들의 지배' - mob rule - 을 초래할 것인가?

 

 내가 아나키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로는, 그것은 인간 본성의 핵심 요소는 단결, 상호 부조, 동정,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등의 정서를 포함하고 있다는 희망(우리가 이 문제에 무지한 현 단계에서는 희망 이상이 될 수가 없다)에 기반하고 있다.

 과연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에서 덜 노동할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생존의 필요에 의해서, 혹은 물질적인 보상에 의해서 노동을 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병적 심리이다. 마치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창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핵(노소를 막론하고 상황이 허락하는대로 그러는 것을 가끔씩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교리가 맞는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식의 사고에 회의적일 것이다.  이러한 식의 사고는 권력과 권위에 유용할 뿐 다른 아무 쓸모가 없다.

 정부의 부재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가능케할 것인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범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형태의 사회 조직이 건설되어야할 것이다(이에 대해선 많은 가능성이 있다). 민주적인 의사 결정의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답은 알 수가 없다. 시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한 번 시도해보고 알아 보자

 

 

4. 아나키즘은 가끔 "자유 의지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로 불리운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레닌주의와 같이 흔히 사회주의로 불리우는 이데올로기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레닌주의 교리는 하나의 전위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인민을 경제 개발로 동원, 설명되지않은 일종의 기적을 통하여, 자유와 정의를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연히 이를 통하여 자신들의 국가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어필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이것이 논리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도 합리적이라고 보지않는다. 그리고 또한 이를 진지하게 보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자유의지적 사회주의(맑스주의의 주류 대부분을 포함하여)는 정당하게 이것 - 레닌주의 -을 경멸적으로 일축해버렸다.

 

 

5. 많은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자(anarcho-capitalists)"들은 아나키즘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지 하고, 다룬 사람들과의 자유로이 접촉할 수 있는 자유라고 주장한다. 귀하는 자본주의가 아나키즘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나의 의견으로는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는 만일 실행된다면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전제와 억압의 형태로 귀결될 교리 체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무시무시한 사상이 실현될 가능성은 한 치도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사상들은 곧 바로 (이 사상을 실현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사회 자체를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와 굶주리는 백성 사이의 "자유 계약" 사상은 (내가 보기에는 멍청한) 사상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논하는 학술 토론장에서나 잠깐 들을 만하지 다른 곳에선 일고의 여지도 없는, 밥맛 떨어지는 농담일 뿐이다.

 그러나, 나도 전체적인 잇슈들의 차원에서는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과 상당히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과 한 동안은 그들의 간행물에만 글을 올릴 수 있었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그리고 그들이 지지하는 교리의 결과나 그들의 사상의 심오한 도덕적 파산을 인식하고 있지못하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합리성(rationality)에 대한 보기 드문 헌신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한다.

 

 

6. 아나키즘의 원칙은 어떻게 교육에 적용되는가? 점수, 자격 조건, 시험 등은 과연 좋은 것들인가? 어떤 종류의 환경이 자유로운 사상과 지적인 성장을 용이하게 할 것인가?

 

 부분적으로 이러한 분야에서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훌륭한 교육이라함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좋은 가르침의 방식은 식물의 줄기 속을 물로 채우는 것보다 식물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러한 생각은 별로 오리지널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의 문헌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라는 것을 덧붙인다)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생각하기에 유효한 일반 원칙이다. 그것들이 특정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는 겸허한 자세와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일천한가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하여 케이스 별로 평가되어야할 것이다.

 

 

7. 가능하다면 이상적인 아나키스트 사회가 어떻게 하루 하루 운영되는가를 설명해주기 바란다. 어떠한 종류의 경제적 / 정치적 제도들이 존재하고, 운영될 것인가? 화폐는 계속 존재할 것인가? 우리는 상점에서 쇼핑을 할 것인가? 우리는 자택을 소유할 것인가? 법은 존재할 것인가? 어떻게 범죄를 막을 것인가?

 

 나는 이러한 것들을 대답하려고 시도하지 않겠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투쟁과 실험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8.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있어서 아나키즘의 실현 전망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하는가?

 

 자유와 정의의 전망은 무한하다. 우리가 취해야할 행동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려하는가에 달려있다. 어떠한 일반적인 대답도 가능하지않다.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방금 떠나온) 브라질의 농촌 노동자의 빼어난 슬로우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우리의 바닥을 넓혀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결국에 쇠창살을 부수고 나갈때까지 말이다. 가끔은 외부의 더욱 악랄한 약탈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야할 때도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약탈자적인 사적인 전제(tyranny)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국가 권력을 보호하는 것은 자유와 정의에 헌신하는 어떠한 사람 -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먹을 식량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 에게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자유 의지론자(libertarian)나 아나키스트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내가 보기에는 좌익으로 자처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실천적인 면에서 고통을 겪는 인민의 삶과 정당한 원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자기 파괴적이고 비이성적인 충동 중의 하나라 고 생각한다. 나에겐 그렇게 보인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고, 반박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단 우리가 슬로우건의 공허한 제창 - 내가 보기엔 좌익 내에서의 논쟁 자체를 배제한다. 이는 애석한 일이다 - 을 초월할 수 있는 콘텍스트에서만 말이다.

 

 

노엄(Noam)

다른 편지에서 촘스키는 다음과 같이 미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관점을 제공했다:

 미래 사회에 대하여, 나는...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내가 아이였을 때부터 계속 관심있어왔던 것이다. 아마 1940년 정도에 Diego Abad de Santillan의 '혁명 이후(After the revolution)'라는 흥미로운 책을 읽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 책에서 자신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비판하고,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스페인이 어떻게 운영될 것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상세하게 서술했다(이 것은 50년도 넘은 일이므로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않기를 바란다). 그 당시 나의 느낌은 그의 설명이 매우 그럴 듯해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한 사회에 대한 질문을 그렇게 상세하게 대답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더욱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는 우리가 과연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깊게 했을 뿐이다. 최근 몇 년 간 마이크 알버트(Mike Albert)씨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가져왔다. 그는 나로 하여금 사회가 운영되어야하는 방식에 대한 나의 입장을 개진하도록, 또는 최소한 자신의 "참여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응답하도록 고무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위와 같은 이유로 뒤로 물러 섰다. 나에겐 대부분의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실험에 의해서 배워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 (시장이 어떠한 사회에서라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논리학을 꺼낼 것도 없이 역사적 기록이 어떠한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분명히 제한된 예이다)의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시장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이는 시장 활동을 제거한 체제가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엔 충분하지않다. 이는 단순히 논리학의 문제인 것이고, 우리가 결코 해답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모든 것에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