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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경 사건(윤상도 옥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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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 관련

2021. 3. 21.

김노경 사건(윤상도 옥사 사건)

 

​[개요]

윤상도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여, 종6품 부사과(副司果)에 승진했다.

1830년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효명세자의 무능과 정2품 호조판서 박종훈, 종2품 어영대장 유상량, 종2품 유수를 역임한 신위 등,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군신을 이간질하고,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추자도로 유배됐고, 1840년 김홍근의 상소(윤상도 옥사 재조사)로 유배지에서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는 아들 윤한모와 함께 능지처참 되었다.

김노경은 1830년 윤상도의 배후조종자로,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1834년 순조의 배려로 해배됐다. 1837년(헌종 3)에 사망했다. 1840년 김홍근의 상소(윤상도 옥사 재조사)로 삭탈관직되었다가, 나중에 복권되었다. 

 

[내용]

 

1830년 8월 28일 부사과(副司果) 윤상도(尹尙度)가 상소하기를

 

"우충(愚忠)이 분격(憤激)한 바가 있으면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 구애될 것이 없고, 의분(義分)이 징토(懲討)하기에 시급하면 늦추면서 시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아! 호조 판서 박종훈(朴宗薰), 전 유수(留守) 신위(申緯), 어영 대장 류상양(柳相亮)이 예은(睿恩)을 저버리고 함께 악행(惡行)을 서로 구제하였으니, 그 행사(行事)를 추적하면 말하기가 추잡스럽고, 그 설심(設心)을 논하면 죄 가운데 큰 것입니다.

호조 판서 박종훈(朴宗薰)은 이름난 조상(祖上)의 자손으로 전후(前後)하여 두루 드날렸던 벼슬이 진실로 어떠하였습니까? 저에게 있어서는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도리가 의당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의 타고난 성질이 교활하고 행실이 이미 요특(妖慝)하며, 술을 걸러 내고 남은 찌끼처럼 정밀하고 자세하지 않은 조백(糟粕) 같은 문예(文藝)로 한 세대를 속이고 명예를 구하여,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이를 질투하고 자기보다 나은 이를 싫어하여 남을 그르치게 하였으니, 고시(考試)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온 방(榜)이 모두 사사로움을 따랐으며, 전선(銓選)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모든 과(窠)를 전혀 공심(公心)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근년에 오면서 이처럼 권간(權奸)에게 붙어 파리처럼 부지런히 총리(寵利)를 경영하면서 권세 탐하기를 집안의 계책으로 삼아, 종기를 빨아주고 치질을 핥아주는 등의 극도로 아첨하는 것을 스스로 잘하는 일로 여기며, 겉으로는 공경하며 경계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간사하고 악독함을 품었으며, 좌우에서의 조종은 오직 김노(金鏴)에 의뢰하였고, 억양(抑揚)과 진퇴(進退)도 오직 김노의 말을 들었으며, 몰래 여러 고을에다 뇌물을 바치도록 사주(使嗾)하여, 한 사람 김노(金鏴)의 계학(溪壑)같은 욕심을 채우도록 해서, 나라를 좀먹게 하고 세상을 병들게 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도, 단지 경미하고 잗단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정당한 도리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 성현(聖賢)의 가르침인데도 그는 바로 그 것을 뒤집었으며, 임금을 섬기면서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신자(臣子)의 직분인데도, 그는 그런 것이 전혀 없고 나쁜 부류들과 체결(締結)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세력이 있는 사람을 의뢰하였으니, 계책을 삼는 것이 비루하고 없던 일을 새로 생각해 내는 것이 음험하여, 여러 가지의 기이하고 교묘한 짓들이 그의 손에서부터 나와 자못 조저(曹儲)를 텅비게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또 들으니 설인(舌人)에게 대하(貸下)한 은자(銀子)가 많게는 4천 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국가의 비용이 다 떨어지고 사무(事務)가 번거롭고 큰 때를 당하여, 한 푼도 국가를 위하여 준비하거나 우려하는 마음이 없이 제멋대로 사용하여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하고서야 그만두려고 하니, 그 죄범(罪犯)을 추구하면 어떤 형벌로든지 처치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아! 전 유수(留守) 신위(申緯)는 교묘한 말과 보기좋게 꾸미는 얼굴로 오로지 남에게 잘 보이고 즐겁게 하기를 일삼아, 기량(伎倆)은 본래 창가(娼家)의 묘동(妙童)과 같고, 종적(蹤跡)은 자못 권문(權門)의 총예(寵隷)와 같아서,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꾸짖는 바이니 진실로 책망할 대상이 못됩니다. 그러나 타고난 모습이 경박하고 타고난 성질이 음탕하고 간사하기 때문에, 춘천(春川)의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사납게 굴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으며, 강화 유수(江華 留守)가 됨에 이르러서는 옛 날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걸태질하고 여색을 탐하기를 또한 지난 날보다 더 심하게 하여, 재물이 많은 자는 탕패(蕩敗)하기에 이르도록 하고, 딸이 있는 자는 눈치를 보아 도망하여 떠나므로, 막중한 지역이 열 집에서 아홉 집은 텅비게 되었습니다.

 

저가 만약 한 푼이라도 보답하려는 정성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 것 역시 그에게는 잗단 과실이며 기타 죄상(罪狀)으로 지극히 간교하고 흉측한 것은 신이 감히 조목으로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로 온 세상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파하는 것을 들으니, 예후(睿候)가 세자의 병세가 위독해지는 대점(大漸)하기 하루 전에 도하(都下)의 신민(臣民)들이 초조해 하고 허둥대며 몸둘 바를 몰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위는 술자리를 크게 마련하고는, 널리 동류를 맞이하여다 금옥(金玉)을 자리에 내어두고, 창기(娼妓)를 끼고 앉게 하여 주취(珠翠)가 자리에 빙둘러 있게 해서 해가 지도록 음탕하게 농지거리를 하였으며, 그 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또 그 날밤을 기약하도록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이로 미루어보면 그의 음모(陰謀)와 간계(奸計)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며, 거리에서 하는 이야기와 골목에서 하는 말들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숨기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많은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이고, 모두들 죽이는 것이 가하다고 말하니 많은 사람의 입은 막기 어렵습니다.

 

아! 저 어영 대장 류상양(柳相亮)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곤수(閫帥)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대장(大將)이 되었으니, 관작(官爵)은 높고 영화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만에 하나라도 은혜를 보답하려고 하여야 마땅한데, 나가서는 주민들이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물을 빼앗아 기이한 보화와 특이한 산물을 수레와 말에다 실어 나르느라 도로에 끊임없이 잇달았으며, 들어와서는 막중한 공화(公貨)를 문을 열어두고 난만하게 사용하면서, 계책을 권신(權臣)에게 아첨하는 데 두었으니, 그 죄는 하늘을 속이는 데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 세대에서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약현(藥峴)에다 넓은 집을 지었으니 이 것은 누구의 집이며, 영(營)에서 저축한 청동(靑銅)을 모두 써버렸는데, 이 것은 어떤 등류의 재물입니까? 눈에는 군부(君父)가 없으며 권간(權奸)과는 폐부처럼 체결하였으니, 그 설시(設施)를 추구하면 역시 무슨 마음에서이겠습니까? 그가 악행을 저지른 것이 시간이 부족하여 그의 요망스러운 자식을 제 마음대로 하도록 놓아 두어, 그 교활하고 간특함을 행하게 하여 방자함이 거리낌이 없이 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저도 역시 사람인데 어찌 차마 인신(人臣)으로서 하지 못할 일을 한단 말입니까?

 

아! 저 세 흉인(凶人)의 죄를 이루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그 설계가 음험하고 없던 일을 새로 생각하는 것이 간특하여, 스스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바 입장이니, 누가 있어 그것을 알겠는가고 여기며,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바 일을 누가 있어 그 것을 말하겠는가고 여겨, 몰래 다른 사람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계획을 행하고, 다른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일을 제 멋대로 행하니, 이는 진실로 전고(前古)의 간신(奸臣)과 소인(小人)에게도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을 끝까지 캐어보면 조금을 베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그 죄를 성토한다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3사(三司)에 내려서, 만일 신의 말이 털끝만큼이라도 허위가 있으면 신은 당연히 다른 사람을 무함(誣陷)한 죄에 복주(伏誅)되어야 할 것이며, 신의 말이 정말 허망(虛妄)한 것이 아니라면, 박종훈·신위·어영 대장 류상양(柳相亮)에게 빨리 처분을 내려 모두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게 하소서."하였다.

 

[출처] 윤상도(尹尙度)|작성자 김민수

 

윤상도의 상소문을 읽어본 순조는,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 시파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교하기를,

 

《아무리 사람이 주색과 못된 일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반푼의 반푼 정도는 염치가 있고 두려워하며 꺼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하다. 그런데 윤상도는 조선의 신하가 아닌가?

그런 윤상도가 세 사람에 대하여 논한 내용이 극도로 음험하고 참담하며, 심지어 사람으로 차마 하지 못할 바를 하였다고 말했는데, 과연 저와 같이 어리석은 윤상도가 어떻게 스스로 그런일을 분별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지휘하고 시키는 사람이 있어서, 시기를 틈타 반란을 선동하려는 계획을 하였을 터이니, 진실로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인심을 바로잡고 간사한 말을 그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지만 여러 차례 생각하고 헤아려 보았으나,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은 도리어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니, 우선 가벼운 법으로 다스려, 윤상도를 전라도 추자도로 유배를 보내도로 하여라,》

 

 

경주 김씨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슬하에 자식이 없이 죽자, 경주 김씨 일가인 김한정(金漢禎)의 아들 김이주(金頤柱)가 월성위 김한신의 양자로 들어가서 대를 이었다.  김이주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넷째 아들 김노경(金魯敬)이 윤상도의 탄핵 사건의 배후 인물로 연루되어, 전라도 완도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가, 1834년 순조가 죽기전에 김노경을 유배에서 풀어주자, 김노경은 유배에서 돌아와서 경기도 과천에 있는 별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은거하였다.

김노경의 큰 아들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로,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할 때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효명세자의 측근으로 세자를 보필했었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아들 8살 이환(李奐)이 경희궁 숭전문에서 조선 제24대 왕(헌종)으로 즉위하고, 경희궁 흥정당에 머물고 있던 할아버지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신 안동 김씨)를 배알하고, 수렴청정의 예를 행하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순조는 죽기 전에 손자 이환의 외종조부인 조인영(趙寅永)에게 왕세손 이환을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남기고 승하하였다.

어린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신 안동 김씨 순원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헌종의 외할아버지 풍양 조씨 예조판서 풍은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은, 동생 이조판서 조인영(趙寅永), 큰 아들 성균관 대사성 조병귀(趙秉龜) 등과 함께, 순조의 고명을 받들어 외손자인 헌종을 보호한다고 하며,  안동 김씨 김조순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무렵 김노경의 아들 동지부사 김정희(金正喜)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북학파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의 제자인 김정희는, 어려서 부터 헌종의 외종조부인 조인영과 함께 박지원과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고,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풍양 조씨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김정희는 학문과 서예, 그림 등으로 청나라에 막강한 우호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김정희가 청나라에 가면 풍양 조씨들을 두둔하고 신 안동 김씨들을 헐뜯을까 두려워진 안동 김씨들은, 김정희를 청나라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모함을 하기로 하였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조순은, 같은 안동 김씨 일족인 한성부판윤 김홍근(金弘根)을 사주해서 김정희를 탄핵하기로 했다.

1840년 6월10일 김홍근은 10년 전에 있었던 '윤상도의 옥사'를 재조사해야 한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 내용은, 김노경이 아들 김정희에게 상소문을 쓰게 하고, 윤상도를 사주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호조판서 박종훈, 전 유수 신위,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모함하여 처벌하라고 상소문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상소문이 도착하자, 안동 김씨들은 김정희의 죄를 물어서 사사하라고 벌떼 처럼 일어나 헌종을 압박하자,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김씨가 김정희의 죄를 물어 사사하기로 결정하자, 김정희의 친구인 조인영이 중재에 나서서, 김정희의 관직을 삭탈하고 삼천리 밖으로 유배형에 처하기로 합의하면서, 김정희는 목숨을 보전하고 제주도 대정현으로 귀양을 가서 위리안치 되었다.

 

[출처] 세한도(阮堂 歲寒圖){2편}|작성자 소라네

 

 

*** 참고로 윤상도 옥사사건은 안동 김씨의 자작극으로 드러나고, 윤상도는 고변자이자 피해자가 되었으며, 윤상도의 탄핵 상소는 안동 김씨 세력이 반 안동 김씨 세력(풍양 조씨 와 경주 김씨 등)의 주축이던 경주 김씨(김정희의 집안)를 제거하기 위한 술책임이 밝혀졌으나, 이후 안동 김씨들에 대한 견제 세력이 없어져, 안동 김씨 독재체제(세도정치)가 장기간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