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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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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4.

양천허씨 관향과 유래

 
 
 
* 뿌리공원에 세워진 양천(陽川)허씨(許氏)의 조형물과 관향(貫鄕)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관향(貫鄕)의 유래(由來)

 

​양천(陽川)은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 때의 재차파의현(薺次巴衣縣)을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되었습니다.

 

* 고정리 양천허씨정려​(高井里陽川許氏旌閭)

 

정려는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나 효자, 열녀의 집 앞에 나라에서 세운 붉은 문 입니다. 이 곳은 김장생의 7대 할머니인 허씨의 정려에요. 허씨는 태조(1392~1398 재임)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로, 김간과 결혼을 하였는데, 17세의 나이로 혼자가 되었어요, 이에 친정부모가 재혼 시키려 하자, 시댁이 있는 연산 지방에 아들을 데리고 와서 훌륭히 키우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세조 13년(1467)에 정려를 세웠어요. 이 후 광산 김씨 가문에서 김장생, 김집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었습니다.

 

​가문(家門)의 유래(由來)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입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는 공암촌(孔巖村 : 경기도 김포시 양천)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어요.

 

태조는 그 공(功)을 가상히 여겨, 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 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어요.

 

*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조형물 전면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올랐어요.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습니다. 후손 굥(珙)은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부(元傅) 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습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어요.

종(琮)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도적(盜賊) 장영기(長永奇)의 난(亂)을 평정(平定)하는 공(功)을 세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어요. 장신(長身)으로 궁마(宮馬)에 뛰어났고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종(琮)의 동생 침(琛)은 1475년(성종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세자(世子)의 총애를 받았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珊定 : 쓸데없는 글의 글자와 글귀를 깎고 다듬어서 잘 정리함)했다.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친 그는,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항상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며, 학문(學問)이 깊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어요. 뿐만 아니라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 생활로 주위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습니다.

 

* 뿌리공원 조형물 우 측면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옥(頊)은 종(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 추대사건에 관련, 원주에 유배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허씨가문(許氏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초당(草堂) 엽(曄)과 미수(眉叟) 목(穆)을 빠뜨릴 수 없다. 엽(曄)은 군자감부봉사(軍資監副奉事) 한(瀚)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어,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과 허자(許磁), 구수담(具壽聃) 등의 무죄를 논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 조형물 뒷면

 

그의 슬하에 4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특히 난설헌(蘭雪軒)은 규수시인(閨秀詩人)으로 이름이 나서, 황진이(黃眞伊), 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여류(三代女流)로 꼽혀왔어요. 늦게 결혼하여 금슬이 원만치 못했던 그녀는, 친정의 겹친 화액에 따른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래며, 독특한 시세계(詩世界)를 이루었답니다.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미수 목(穆)은, 한강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워, 당대의 석유(碩儒)인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었던 이름난 학자로, 학문(學問), 문장(文章), 그림, 서예(書藝)에 뛰어났의며,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으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습니다.  그가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며 읊은 시(詩)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가무불가음(無可無不可吟) 

 

한 번 가고 오는 것이 이치가 있나니(一往一來有常數) 

온갖 이치도 처음에는 둘이 아닌 것 (萬殊初無分物我) 

이 일 이 마음도 같은 것             (此事此心皆此理) 

누가 그르고 누가 옳단 말인가       (孰爲無司孰爲司)

 

 

* 조형물의 전면 글 내용

 

영의정(領議政) 적(積)은 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어요.

그 외 선조(宣祖) 때 명의(名醫)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준(浚)은 16년의 긴 세월 동안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韓醫學)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고 , 숙종(肅宗) 때 화가(畵家)인 숙(俶)과 과학자(科學者) 원(遠)은 한말(韓末)의 의병대장(義兵隊將) 재욱(在旭)과 함께 양천허씨(陽川許氏)의 가문을 자랑되게 하였습니다.

 


* 조형물 뒷면의 내용

 

* 허가바위

 

허가바위는 옛날 석기시대 사람들이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으리라 추측 되는 강가에 있는 천연적인 바위동굴입니다.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하였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굴이 속한 강서구의 최초 이름은 "제차파의현"인데, "제차"는 차례 또는 갯가, "파의"는 바위라는 의미로, 강서구의 최초 이름이 이 곳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어요.

이 곳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어, 이 굴을 양천 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릅니다.

 

돌림자(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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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허씨(陽川許氏)                                   시조  :  허선문(許宣文) 
                       
한국의 허씨는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 왕비로부터 비롯되었다.
왕비는 인도의 야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때 큰 배에다 파사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 부인당(夫人塘)으로 들어와 정박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을 갖추고 맞이해 비(妃)로 삼았다.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시조(始祖)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이다.
선문(宣文)은 공암현(孔巖縣)에 대부호(大富豪)로써 살았으며, 이 때는 후삼국이 대립을 하던 시기인데  
고려의 태조 왕건이 견훤군을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중 군량미가 떨어지고
병마(兵馬)가 매우 피로하여 절대적인 위기에 처했는데 이때에 공께서 마필과 식량을 내어 줌으로써
왕건은 전쟁에 승리하여 고려건국에 지대한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 공으로 왕건은 공의 충의에 감동하여 의부(義父)로 모시고 공암촌주로 봉하여
공암현을 식향(食鄕)으로  사(賜)하니 이로 말미암아 관적을 공암허씨(公巖許氏)로 한 것이며
후에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허씨(陽川許氏)로 불려지게 되었다.

양천(陽川)의 지명 변천을 보면 현재의 한강유역 인근으로서 백제의 영토였다가
고구려 전성기때에는 장수왕이 다스렸으며 삼국통일후인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전국을 9주5경으로 나눌 때 이전의 양동(陽東) 양서(陽書)가 공암현(孔巖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충선왕 2년에 양천으로 명명 되었다.
이후 많은 지명의 변화를 거치며 조선의 고종 32년에 양천현은 양천군으로 개칭되면서 5개면을 두었고
일제치하인 1914년 3월 행정구역 재편시 양천,통진을 합해 김포군이라 하고 9개면을 두었으며
김포시 고촌면 풍곡리 산87-3번지에 시조 설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선문(宣文)의 손자(孫子) 원(元)이 고려 목종(穆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지제고(知制誥)·태자사의(太子司議)등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정(正)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후 태자재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정(正)의 아들 재(載)는 일찍이 병마사(兵馬使)에 재임시
여진의 정세를 파악하여 변경수비의 방책을 왕에게 올려 채택되기도 하였다.
후손 공(珙)은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하여 원 부(元 傅) 등과 함께「고금록(古今錄)」을
찬술(撰述)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재령 군수(載寧郡守) 손(蓀)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종(琮)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침(琛) 형제가 뛰어났다.
종(琮)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도적(盜賊) 장영기(張永奇)의 난(亂)을
평정 하는데 공(功)을 세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라 변방의 여진족을 소탕하기도 하였으며
장신(長身)으로 궁마(宮馬)에 뛰어났고 문명(文名)이 높아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한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허종(許琮)의 동생(同生) 허침(許琛)은 1475년(성종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세자(世子)의 총애를 받았으며,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珊定 : 쓸데없는 글의 글자와 글귀를 깎고 다듬어서 잘 정리함) 했다.
150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우참찬(右參贊)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친 그는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항상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을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며 학문(學問)이 깊고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상신(相臣)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 생활로
주위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한편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욱(頊)은 종(琮)의 현손(玄孫)으로 광해군(光海君) 때
능창군(綾昌君) 추대사건에 관련, 원주에 유배된 후 배소(配所)에서 임종하였으나
인조 반정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허씨가문(許氏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미수(眉 ) 허목(許穆)을 빼놓을 수 없다.
엽(曄)은 군자감부봉사(軍資監副奉事) 한(瀚)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東人)의 영수(領袖)가 되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과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등의
무죄를 논하다가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슬하에 성(筬)·봉(篈)·균(筠)·난설헌(蘭雪軒) 4 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특히 난설헌(蘭雪軒)은 규수시인(閨秀詩人)으로 이름이 나서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여류(三大女流)]로 꼽혀왔으며 홍길동전의 허균은 모르는 이가 없을것이다.
엽(曄)과 함께 4자녀는 강릉의 5문장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조선(朝鮮)의 봉건적 사회제도(社會制度)에 개혁(改革)을 부르짖은 사회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로 유명한 균(筠)은 서얼을 차별대우하는 당시의[서얼금고법(庶 禁錮法)]철폐와
반계급적(反階級的) 평등사상을 주장하여 한국사상사(韓國思想史)에 있어
근대화(近代化)의 시발점을 이룬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숙종(肅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목(穆)은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워 당대의 석유(碩儒)인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었던 이름난 학자로 학문(學問)·문장(文章)·그림·서예(書藝)에 뛰어났으며
특히 전서(篆書)에 능하여 동방(東方)의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일컬어졌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은 1678년(숙종 4) 재정의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이를 사용하게 했으며, 궤장( 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 명의(名醫)로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오른 준(浚)은 16년의 긴 세월 동안
연구 끝에 25 권의 방대한 의서(醫書)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韓醫學)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현대까지 의성(醫聖)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니
우리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가문을 가장 빛낸 대표적인 위인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 문중인물 ] 편을 참고 하세요.


☞  집성촌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독정리
강원도 이천군 안협면 지전리, 퇴탄리
경기도 파주군 고하면 일원
평북 구성군 동산면 남산동
충북 청원군 부용면 일원
평북 구성군 사기면. 방현면 창동
전북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전남 승주군 해충면 일원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 일원
함북 학성군 학서리 일원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1리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상삼리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쌍동리
함북 길주군 덕산면. 장백면. 양사면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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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가 외자 이름을 쓰는 이유와 유래

 

 

 출처 : https://brunch.co.kr/@dh310/39

 

 

 


결론 : 외자 이름은 가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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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 허씨 외자 이름, 삼국지의 인물들

조선의 명의. 허준

농구스타. 허재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외자였다.

고려의 시조 왕건의 개국을

도운 공으로 왕족만이

가능한 외자 이름을 하사받은

가문의 내력 때문이 그 이유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

조조, 손권, 관우,유비,장비

여포,동탁,손책,원소

여기에도 유난히 외자 이름이 많다.

그 이유는 뭘까?

<삼국지>란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역사서로, 후한 말기부터 서진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운다.

​반면 <삼국지연의 또는 삼국연의: 아래에서는 삼국지연의를 편의상 삼국지로 표기>는 명나라때 나관중이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까지의 후한말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집필한 대표적인 중국의 고전 역사소설이다.

​삼국지의 시대배경은 후한말과 삼국시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나, 소설은 기본적으로 유비(刘备)가 주인공이며 모든 스토리는 유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시는 전란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참담한 시기라 자연히 수많은 인물들과 장수들이 등장하는데, 등장인물만 1200여명에 달한다. 이렇게 많은 인간 군상들의 등장과 그들의 특징은 삼국지 재미중 으뜸이다.

그러면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등장인물 중 누가 먼저 생각이 날까?

아마 유비, 관우, 장비, 동탁, 여포, 손책, 조조, 원소, 손권 등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일 것이다.

​그 다음엔 방통, 조운, 맹획, 마초, 황개, 주유, 순욱, 곽가, 제갈량(제갈이 성이므로 이름은 량, 외자), 하후돈(하후가 성이므로 이름은 돈, 외자), 사마의(사마가 성이므로 이름은 의, 외자) 등이 연상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은 외자라는 것이다. 역사책을 보아도 동한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300여년간의 인명을 보게되면 거의 대다수 외자(한 글자) 이름이다.

물론 삼국시대 이전에도 유방, 한신, 항우, 항량, 팽월, 영포, 범증, 진승, 오광 등 외자 이름을 지닌 역사적인 인물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2글자와 3글자 이름이 모두 같이 사용되었고, 신나라때부터 동한, 삼국시대로 이어지면서 2글자 이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후한서, 삼국지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물론 두 글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희소한 사례이지만, 한 부류는 은사로서, 방덕공(龐德公), 등노서(鄧盧敍)와 같은 인물이었고, 또 한 부류는 이름이 아니라 황승언(黃承彦), 순거백(荀巨伯) 등등 자(字)로 불리우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의 지식인이나 관리중에서는 두 글자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왜 당시의 사람들은 절대다수가 한 글자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신나라를 세운 왕망

그 근원은 서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생몰 기원전 45년∼23년, 재위 8년∼23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왕망은 유교적 이상국가 실현을 꿈꾼 이상주의자였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정책들로 인하여 혁신적인 개혁 정책들은 실패하고, 결국 신나라도 멸망하고 동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한서. 왕망전)에 보면, 왕망의 장손으로 왕종(王宗)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있었으면 조부, 부친을 거쳐 자신에게도 황제의 자리가 돌아왔을지도 모르나, 조급한 욕망에 기다리지 못하고 모반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왕종이란 인물은 천하 제위를 노리기에는 자질이 부족하여, 그의 역모 사실은 사전에 발각이 되어 결국 자살하게 된다. 비록 친손자지만 모반한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왕망은 모반에 대한 중대조치로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종(왕종)의 본명은 회종(會宗)이었다. 법령으로 두글자 이름을 없애게 하였으나, 이제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회복시켜 회종이라 하라.'

유비, 관우, 장비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왕종은 원래 본명이 왕회종이었는데, 왕망이 법령으로 두글자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여 한 글자 이름인 왕종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이제 대역죄인이 되었으므로 두 글자로된 원래 이름 왕회종으로 되돌린다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왕망시기 이전에는 이름의 글자수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고, 심지어 왕망의 손자도 두 글자 이름을 사용했었다.

둘째, 왕망이 전권을 잡은 후에 일찌기 두 글자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명을 내려, 법령의 형식으로 두 글자 이름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셋째, 당시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두 글자 이름으로 회복시켰는데, 이것은 하나의 형벌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조조와 사마의

결국 종합적으로 보면 왕망의 법령이 공표된 이후로, 당시 사람들은 점점 외자 이름을 쓰게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동한이 들어섰지만, 이 전통은 변하지 않고 관습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보여진다.

​당시엔 두 글자로 된 이름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현상이 동한시대와 삼국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고, 그래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도 거의 모두 외자인 것이었다.

문화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며

느끼는 만큼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