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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축전의 임수경과 박철언, 그리고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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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상식

2021. 12. 7.

평양축전의 임수경과 박철언, 그리고 국가보안법



이제훈의 1991~2021 _17
 
 
임수경은 평양축전 참가를 계기로 남과 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라 불렸다. 2001년 8·15 민족공동행사의 남쪽 대표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쪽의 환영 인파가 특별기에서 내린 임수경을 보고는 대열을 무너뜨리며 다들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만지고 말을 걸려 했다. 그 모습은 남쪽의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 1989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은, 그해 8월15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으로 돌아왔다. 임수경의 ‘무사귀환’을 도우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손을 맞잡고. <한겨레> 자료사진
 
 
 

 

“임수경은 (평양)축전의 주인공이었다.
”1989년 7월1~8일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하 평양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3학년)과 관련한, 당시 ‘평양시민’이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회고다. 주 기자는 그때 평양 사람들이 임수경한테서 받은 ‘문화충격’을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에 이렇게 적어놨다.
 

 

“북한에서 금기시하는 청바지를 입고 면티를 입은 이 아가씨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 그녀가 남한 정부를 마구 비판하는 모습에 북한 사람들은 ‘어구구, 용감하긴 한데 쟤네 집은 이제 3대가 몽땅 망했다’ 하면서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그해 8월15일,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분단선 위에 섰다. …
우리는 모두 슬펐다. 한 달 반 동안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우리의 여주인공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끌려갔으니. …
1990년대 초반, 남북총리급회담(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자, 서울을 방문한 북한 기자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으로 들이닥친 일이 생겼다. 진짜 가족들이 피해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장면도 티브이(조선중앙텔레비전)로 방영됐다.
이 장면이 특히 충격이었다. 가족이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놀라운 일인데, 그 ‘역적’의 집안에 그토록 귀한 천연색텔레비전(컬러TV), 소파, 냉장고 등 없는 게 없었다.”
 
임수경이 북한에 머문 1989년 6월30일부터 8월15일까지 <노동신문> <조선중앙텔레비전> 등 북녘의 주요 매체는 임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하게 보도했다. 북녘 인민들의 안방까지 여과 없이 전달된 임수경의 거침없는 언행과, ‘낯설지만 멋진 복장과 머리 스타일’의 영향은 컸다.
북쪽 당국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결과적으로 북쪽 지배집단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인민의 의식에 균열이 생기는 계기가 됐고, 남쪽 사회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북쪽의 삶을 남쪽의 삶과 비교하는 시각을 촉발시켰다.
 
임수경은 평양축전 참가를 계기로 남과 북 모두에서 “통일의 꽃”이라 불렸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1년 8·15 민족공동행사의 남쪽 대표단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쪽의 환영 인파가 특별기에서 내린 임수경을 보고는, 대열을 무너뜨리며 다들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만지고 말을 걸려 했다.
북에 장기 체류하며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펴낸 소설가 황석영을 포함해, 남쪽의 내로라하는 각계 유명 인사들 앞에선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꽃과 손을 기계적으로 흔들던 이들이 ‘임수경’한테만 반응했다.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던 기자한테 그 모습은 남쪽의 아이돌 스타를 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임수경은 분단사를 통틀어 남북 모두에서 대중의 ‘사랑’을 얻은 사실상 유일한 인물에 가깝다. ‘1989년 평양의 임수경’은 남녘 시민과 북녘 인민의 마음을 잇는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었다. 남과 북을 가른 심연을 건너는 다리 놓기는 남북 당국 관계만으론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임수경은 남쪽으로 돌아온 뒤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임수경한테 적용된 ‘국가보안법 위반죄’는 여러모로 문제적이었다.
 
우선 노태우 정부가 ‘평양축전 참가’를 애초부터 금지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1월17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평양축전’을 “반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전위 역할을 하는 집회”라면서도 “그러나 남북 간에 어떤 형태든, 어떤 분야든 교류를 해야 되겠다 하는 입장과 정책에 따라서, 문교부에서 이 학생교류 방침을 지금 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것이든 교류 성사의 기회로 활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열흘 뒤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1989년 1월27일)가 발족했고, 다시 보름여 뒤 노태우 정부는 평양축전에 대학생 200명을 파견하기로 결정(1989년 2월13일)했다.
그러던 노태우 정부가 문익환 목사의 ‘미승인’ 방북(1989년 3월25일~4월3일)을 빌미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는, 평양축전 참가 관련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꿨다.
그해 6월6일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평양축전을 “반한·반미 투쟁을 부추기는 북한의 선전장”으로 규정하고, 전대협의 방북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둘째, 1989년 7월1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평양축전 개막식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민’은 임수경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김정일 등 북한 최고 수뇌부가 자리한 중앙 주석단에, 박철언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과 그 수행원인 강재섭 당시 민주정의당 의원이 앉아 “임수경양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 영웅처럼 손을 흔들어대며 입장하여 경기장을 한 바퀴” 도는 모습을 지켜봤다.(박철언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
 
노태우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임수경은, 1989년 6월21일 서울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도쿄, 서독 서베를린, 동독 동베를린을 거쳐, 열흘 만인 6월30일 오후 1시3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임수경은 공항에서 “자동차로 불과 네 시간이면 올 거리를, 저는 240시간이 걸려 도착했다”고 밝혔다.
박철언은 6월30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까지 직행했다.
박철언은 평양축전 개막식장에서 “초청받은 해외 거주 동포 브이아이피(VIP)인 것처럼 처신”했다고,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 적었다.
 
박철언은 허담 조선노동당 대남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한시해 조평통 부위원장 등과 회담을 하고는, 7월2일 백두산에 올랐다.
‘박철언-한시해’ 창구는 전두환·노태우와 김일성을 잇는 비밀 협상 통로로, ‘88 비밀 회담’ 창구라 불렸다. 박철언은 한시해와 1985년 7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남과 북, 제3국을 오가며 모두 42차례 비밀 회담을 했다고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밝혔다.
 
그런데 1989년 7월31일 야권 성향의 무소속 국회의원인 박찬종·이철이 ‘박철언 7월 방북설’을 제기했다.
박철언과 임수경의 방북을 대하는 노태우 정부의 ‘이중잣대’를 두고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들끓었다. 1989년은 정주영(1월23일~2월2일)·문익환 등 각계 인사의 방북을 둘러싼 논란이 특히 심했다. 문익환과 임수경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에 갇혔고, 정주영은 논란 끝에 ‘무사’했으며, 박철언은 방북 사실 자체를 당시엔 인정하지 않았다.
 
방북 논란은 노태우 대통령과 정부의 누군 되고 누군 안 된다는 고무줄 잣대가 논란을 키운 측면이 있지만, 방북과 관련한 법·제도가 정비돼 있지 않은 현실이 근본적 문제였다.
시민사회는 방북 인사한테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고 비판했는데, 군부 등 노태우 정부 강경 세력은 방북과 교류협력 자체를 불온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정주영 방북 허용을 “적성국가와의 외교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한 문제”라고 비난한 노재봉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박철언 방북’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국회의원한테 흘린 이가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권력 내부와 외부로부터 서로 다른 방향의 공격을 받은 노태우 대통령은, ‘통치행위’라는 논리로 가까스로 버텼다. 노태우 대통령은 정주영의 방북은 자신이 시킨 “심부름”이라고, 박철언의 방북은 “나의 허가를 받은, 정부 관리의 자격에서였으므로, (임수경 처벌과) 별개의 문제”라고 둘러댔다.(<노태우 회고록> 하권, 361쪽)
 
하지만 이른바 ‘통치행위론’은, “현재의 국가보안법은 정주영, 박철언 등이 북한 땅을 밟으면 죄가 되지 않고, 한 시대의 보편성을 짊어진 작가가 북녘땅을 밟으면 ‘이적행위’이자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이 되는 등, 도무지 기준과 형평성이 없고, 또한 적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분단시대 최후의 악법”(작가 황석영 석방대책위 결성취지문)이라는 비판 앞에 옹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노태우 대통령은 “남과 북이 민족공동체”이므로 “자유 왕래”와 “교역 문호”를 개방한다고 선언(7·7 특별선언)한 터다.
 
북한 방문과 교류협력에 ‘질서’를 부여할 입법이 불가피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남북 교류협력을 법으로 보장하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년 8월1일 제정)이 세상에 나온 까닭이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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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2176.html#csidx7d3f95e312f6787b5db51be3668497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