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完)

燒燻 송영호 2013. 6. 24. 17:56

                <사기권팔십오(史記卷八十五)>(1366)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한(漢)나라 무제 때 쓰여진 역사서로 본격적인 저술은5BC108~BC91년 사이에 이

  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사관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

  승하고 아울러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 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

  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는 것’으로 각각 설명하였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이책의 가장 큰 특색은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

  체(紀傳體)의 효시로서,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12편, 제후왕을 중심으로한 세가(世家)30편, 역대 제

  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8편, 연표인 표(表)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70편, 총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불위열전(如不韋列傳)(4)

  여불위(如不韋)는 전기(傳記)의 색채가 풍부한 역사인물이다. 그는 본래 한(韓)나라의 양적(陽翟)사람으

  로, 거상(巨商)이 되어 여러 제후국을 주유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

  다. 이 여불위에 대해 위(魏)나라 출신이니, 조(趙)나라 출신이니 하면서 각사전마다 다르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사마천의 원문(原文)에 따라서 한(韓)나라 출신임을 언급 해 둔다. 여불위는 뒤에 진

  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어,진나라 통일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불후의 명작인 <여씨춘추>를 편찬

  하기도 하였다. 여불위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가 진시황의 친아버지 일지도 모른다는

  대목이 이 편에 나오기 때문이다. 곧 여불위가 어떤 첩에게 반하여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숨기고

  서 자초에게 바쳐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바로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는 가능할 수

  도 있는 일이었다. 반고(班固)가 여불위의 <여씨춘추>를 잡가류(雜家類)로 분류한 뒤,여불위는 잡가(雜

  家)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여겨져 왔다. 여불위가 여러 사람의 사상을 널리 받아들이고 특히 초기의 도가

  사상(道家思想)을 근본으로 각사상의 장점을 취사선택하여 황로사상(黃老思想)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불위를 신도가(新道家)라고도 부르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불위가 황

  로사상에 심취했던 사마천에게 중시된 것은 당연하다. 사마천은 천지, 만물, 고금의 일에 관한 모든 것이

  <여씨춘추>에 갖추어져 있다고 볼 정도로 여불위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4> 태후가 섹스를 밝히자 음경이 큰 노애(嫪毐)를 바치다.

 

   始皇帝益壯(시황제익장) 

   진시황이 차츰 장년이 되어 가는데도,

   太后淫不止(태후음부지)

   태후는 음란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呂不韋恐覺禍及己(여불위공각화급기) 

   여불위는 그것이 발각되어 자신에게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하여,

   乃私求大陰人嫪毐以爲舍人(내사구대음인로애이위사인) 

   음경이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몰래 찾아 사인(舍人)으로 삼고,

   時縱倡樂(시종창락) 

   때때로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使毐以其陰關桐輪而行(사애이기음관동륜이행) 

   노애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서 걷게 하였다.

   令太后聞之(영태후문지) 以啗太后(이담태후) 

   태후가 그 소문을 듣게 하여,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太后聞(태후문) 果欲私得之(과욕사득지) 

   태후는 그 소문을 듣고, 정말로 사람들 몰래 그를 얻고자 하였다.

   呂不韋乃進嫪毐(여불위내진로애) 

   이에 여불위는 노애를 바치고,

   詐令人以腐罪告之(사령인이부죄고지) 

   사람을 시켜서 그를 음경을 제거하는

   부죄(腐罪)에 처하도록 허위로 고발하였다.

   不韋又陰謂太后(불위우음위태후) 曰(왈)

   여불위는 또 태후에게 은밀하게, 이렇게 말했다.

   可事詐腐(가사사부) 

   "거짓으로 부형을 받게 하여,

   則得給事中(즉득급사중)

   부릴 수가 있으면 급사중(給事中)으로 삼으십시오"

   太后乃陰厚賜主腐者吏(태후내음후사주부자리) 詐論之(사론지)

   태후는 부형을 맡은 관리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서, 판결을 위조케 하고,

   拔其鬚眉爲宦者(발기수미위환자)

   그의 수염과 눈썹을 뽑아서 환관으로 만들어, 

   遂得侍太后(수득시태후) 

   마침내 태후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太后私與通(태후사여통) 絶愛之(절애지)  

   태후는 사사로이 그와 정을 통하면서, 몹시 그를 사랑하였다.

   有身(유신)

   그러자 아이를 갖게 되었고,

   太后恐人知之(태후공인지지)

   태후는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서, 

   詐卜當避時(사복당피시) 

   거짓으로 점을 치고서 이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徙宮居雍(사궁거옹) 

   궁궐을 옮겨서 옹(雍) 땅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게 하였다.

   嫪毐常從(노애상종) 賞賜甚厚(상사심후) 

   노애는 언제나 그녀를 따라 다녔고, 태후는 그에게 많은 상을 내렸으며,

   事皆決於嫪毐(사개결어로애) 

   모든 일은 노애가 결정을 하게 되었다.

   嫪毐家僮數千人(노애가동수천인) 

   이로써 노애의 사인은 수천 명이 되었고,

   諸客求宦爲嫪毐舍人千餘人(제객구환위로애사인천여인) 

   벼슬을 얻기 위해 노애의 사인이 된 자도 1천 여 명이나 되었다.

   始皇七年(시황칠년) 莊襄王母夏太后薨(장양왕모하태후훙)

   시황제 7년에, 장양왕의 어머니 하태후(夏太后)가 죽었다. 

   孝文王后(효문왕후) 曰華陽太后(왈화양태후) 

   효문왕의 황후를, 일러 화양태후(華陽太后)라 부르고,

   與孝文王會葬壽陵(여효문왕회장수릉)

   효문왕과 함께 수릉(壽陵)에 합장하였으며, 

   夏太后子莊襄王葬芷陽(하태후자장양왕장지양)

   하태후의 아들 장양왕은 지양(芷陽)에 묻혔으므로, 

   故夏太后獨別葬杜原(고하태후독별장두원) 

   그래서 하태후는 두원(杜原)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曰(왈)

   하태후는 죽으면서 유언하여 말하기를,

   東望吾子(동망오자) 

   "나는 동쪽으로는 내 아들을 바라보고,

   西望吾夫(서망오부)

   서쪽으로는 내 남편을 바라보고 싶다. 

   後百年(후백년) 旁當有萬家邑(방당유만가읍)

   백년 후에, 무덤 옆에는 마땅히 1만호의 읍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