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소로몬 2015. 4. 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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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발행된 <불교평론> 봄(2011)에 실린 동국 대학교 황순일 교수의 ‘남방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견해’에 적극적인 동조를 보낸다. 황 교수의 주장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째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남방 국가의 위빠사나 수행이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이 남방국가에서 중시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위빠사나의 본고장처럼 여겨지는 미얀마에서 위빠사나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의도가 깊이 깔려 있다는 내용이다.

 

황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불교의 깨달음은 반드시 지혜 수행인 위빠사나만을 통해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부처님은 위빠사나 보다는 사마타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 정권에서 위빠사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유는 위빠사나가 중생의 모든 내․외적 상황에 대해 오직 무상과 무아와 고만을 자각하려 하기 때문에 그들의 독재 정치에 무관심과 함께 저항 의지를 지니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일부 남방국가에서 수행을 하고 온 사람들의 무조건적 위빠사나 추종 행위에 적지 않은 우려를 표시해 왔다. 심지어 나는 남방국가에서 수행하고 돌아온 지나치게 위빠사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한국의 대승불교에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경고까지 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해, 황 교수의 주장을 빌릴 필요도 없이, 초기경전 자체만 가지고 보더라도 반드시 위빠사나만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님이 대각을 이루기 위해 오늘날 남방국가에서 유입된 위빠사나를 행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직전 내면에서 연기의 법을 순관․역관 했다는 기록은 분명하지만 연기를 깨닫기 위해 어떤 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였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리고 초기경전을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부처님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이 수다원과를 비롯한 그 이상의 과를 성취한 것도 특별한 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 했던 것은 아니다. 저 유명한 바보 수행자 쭐리 빤따까의 예만 보더라도 그 역시 현재의 위빠사나와는 무관한 방법으로 도과를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권한 수많은 수행법들은 현재처럼 어떤 정형화된 방법들이 아니었다. 경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그때그때 즉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이 도과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셨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많은 수행법들이 있어 왔고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을 추종하는 분들은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직접 행하신 수행법이고 오직 위빠사나만이 진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이 분들의 주장을 들을 것 같으면 마치 남방에서 행하고 있는 위빠사나만이 정통이고 그 동안 대승권에서 행해온 여러 가지 수행법들은 모두 변질되고 왜곡된 수행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또 한 가지, 황 교수가 미얀마 정권을 들어 설명한 남방 위빠사나 수행이 지니고 있는 법인(法印)에 관한 부분이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오로지 삼법인의 체득과 갈애의 소멸에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삼법인을 체득하여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 열반에 이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법인에 초점을 맞춘 위빠사나 수행에는 과연 문제가 없을까?

나는 이 수행에 대해 두 가지의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는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력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이다. 남방 위빠사나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이고, 세상은 머물러야 할 가치가 별로 없는 장소이다. 삼법인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생관은 삶의 의미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삼법인의 인생관은 오직 삶이란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할 때만이 빛난다. 따라서 이같은 수행을 지속하게 되면 자연히 그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특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촉발시켜 세상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시도 하려 하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다. 자신의 주변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개성과 감정의 발현을 경계하고 불간섭․무대응의 자세를 취한다.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해 공격과 방어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하려 하지 않고 순응과 방관 쪽으로 기운다.

다음 남방 위빠사나 수행의 또 한 가지 문제는 중생의 욕구에 대한 부분이다. 중생의 욕구는 중생 생존의 근저를 이룬다. 중생에게 욕구가 없다면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감각적 쾌락과 연결된다. 그런데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중생의 이러한 감각적 쾌락을 향한 욕구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감각적 쾌락은 버려야 할 바며 떠나야 할 바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버리고 떠나야 할 중생의 감각적 쾌락을 향한 욕구는 그게 설혹 건전하고 건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위빠사나의 입장에서는 크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무상 무아 고를 중심으로 갈애의 소멸을 추구하는 위빠사나의 원칙에서는 중생이 꽃을 보고 향기에 취하는 것도 주의해야 할 일이며 남녀 간에 애틋한 사랑도 마음 놓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몰라도 삼법인과 위빠사나가 중시된 삶은 출가 수행자나 출가의 가치에 기반을 둔 세속 사람들에게나 걸맞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의 인생관에 있어서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향유, 과거에 대한 반추, 미래에 대한 계획이 희석되고 오직 여기 오온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만이 최상의 가치가 된다. 여기에는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성공을 위한 집념과 왕성한 활동은 갈애나 집착이라는 이름아래 기세가 꺾인다. 이렇게 무상․무아․고에 기초한 갈애의 소멸이 목적인 위빠싸나 수행이 중생들에게 청정과 지혜와 해탈은 약속 받을지 몰라도 중생의 현실에는 동화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불교 발전에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이 큰 치료약이 되리라고는 보지만 만병통치약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국의 대승불교를 남방의 불교가 들어와 잠식 되는 것을 매우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입장에 있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이 불자들에게 보급 될 경우 위와 같은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을 경계한다. 남방불교 자체가 한국불교의 한 분야를 이루는 것은 적극 찬성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적자임을 내세워 대승불교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도저히 간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남방불교가 아닌 대승불교를 지키고 선양해야만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기회를 빌려 말하고자한다. <<STRONG>적연 이제열 법사(유마선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