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서민 생활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천재 김홍도의 서화첩은 보물(제527호)인데 ,도화서에서 쫓겨난 신윤복은 왜 국보(135호)일까

댓글 243

문화유산 답사기

2021. 2. 21.

영화 '비밀의 화원'에서 남장여인으로 출연한 문근영

조선시대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가

金弘道申潤福

 

사제지간이자 연인으로 그려지는 '바람의 화원'과 달리

실제 두 사람이 교류한 흔적은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모두 화원 가문 출신으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반면
신윤복은 당대 실력을 인정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역사적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에서 사제 겸 애인으로 출연한 김홍도와 신윤복

檀園 金弘道1745년 김해 김씨 김진창의 증손으로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일곱살에 도화서 김응환의 제자가 됐다.

김응환은 당시 유명한 문인 화가인 강세황에게 김홍도를

소개했으며,도화서에 정식으로 들어간 김홍도는 1771년

왕세손인 이산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화원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1776년 영조에 이어 이산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김홍도는 규장각도를 바쳤고,1781년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그림과 관계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하게 하라"라고

할 정도로 김홍도를 총애했다.김홍도는 성품 또한 '군선도'

그린 것처럼 호방하고 신선과 같은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따르면 김홍도는 말년 너무 가난해

조석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만 시장에서 본 매화를 보고

사고 싶어 자기 그림을 3000냥에 팔아 2000냥으로 매화를 샀으며,

나머지 돈으로 지인을 초대해 술잔치를 벌였다.

김홍도는 김응환과 함께 1788년 금강산 산수화를,

1789년 일본 지도를 그려오라는 어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 돌아왔다.

1790년에는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으며

1795년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홍도는 소금 장수로 부를 축적한 거상 김현태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적 지원을 받아 활발히 그림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말년에 생활이 어려웠다.1805년 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蕙園 申潤福은 화원 가문인 신한평의 장남으로 1758년 태어났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이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나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후에 쫓겨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개인적인 생애와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권력과 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살았으며,

유교 사회로부터도 소외당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신윤복은 기생과 한량, 별감이나 포졸 등 하급 잡직 관료들의 모습을

그렸으며, 봉건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고집했고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담아 감각적인 글솜씨도 발휘했다.

'기방무사' '월하정인' '혜원전신도' 등이 대표작이며 그림 속에

자주 자신을 등장시켰다는 학설도 있다.그림 인물 중, 주변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가 바로 신윤복 자신이며,이는 장난기 섞인

에로티시즘이자 세상을 관조하는 풍자적인 의미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처네를 쓴 여인'이 1829년 그린 작품이라,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잘 사용되지 않았던 화려한 색을 주로 사용하여

선정적이면서 은근한 노골적 표현이 돋보인다.

성적인 남녀의 표현이 전부가 아니라 권력의 부조리나 윤리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작인

〈미인도〉<단오도> 을 봐도 그가 표현하는 작품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

<蛇足>

국보 제135호인 혜원 신윤복의 화첩 ‘惠園傳神帖’에는 

서른 점의 혜원 풍속도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첩은 일본의 한 수장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간송이 이 화첩을 조선으로 가져오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일본인이 요구한 금액은 4만 원, 간송이 최종 흥정가로

2만 5천원을 제시했습니다.

간송은 한 장 한장 넘기면서 너무나 간절하게 욕심이

났습니다.

값은 3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이 금액은 요즘 가치로 한 장 당 3억 원으로 총 90억원입니다.

간송은 말 없이 2억 5천만 원이 든 가방을 그의 앞에 내밀었습니다.

마침내 그 일본인은 간송의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무엇보다도 조선 사람이 자기나라 문화재로써의 가치를 

탐한 것이지 재산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 자세에 감동하여

간송에게 화첩을 내주었습니다.

대 부호의 아들인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1만 원에

나오자 1만원에 1만원을 더 주며 이 책은 그 정도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제하에서 무리 문화재 보호에 온 정열과 재산을 다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미인도

조선시대의 미인상은 오늘날의 미인상과는 많이 다르죠?!

얼굴에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와있고 작은 입술에 가는 눈매를 가진

단아한 여인이 섬세하게 그려져있는데 단조로운 그림 이지만

노리개를 만지는 손이며,살짝 고개를 숙인 얼굴이며,

여성스러워 보이는 한복의 매무새까지,

신윤복의 뛰어난 묘사력을 대표해주는 작품이 될만합니다

신윤복의 연인이였던 기생을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기다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뒤로 하고 있는 손에는 스님의 옷과 모자가 들려있는데,

그로 봐서는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신윤복의 그림은 배경의 물체 하나 하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하는데

드리어진 버드나무가 고개 돌린 여인의 애타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청금상련

벼슬 높은 양반들과 기생들의 모습입니다.

가야금을 연주하고 듣는 이들과 남녀가 연애를 즐기고 있는 남자 등을 그린 작품,

남녀를 바라보며 한심하다고 느끼는 듯한 표정의 남자는

신윤복 자기 자신의 생각을 투영 시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윤복의 작품에서 배경 물체들의 의미가 매우 중요한데

담넘어 들어온 나뭇가지가 남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싶어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계변가화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그 옆을 지나는

젊은 사내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청루소일

방안에 여유로운 양반이 앉아있고 마루에는 생황을 든 여인이 있으며

전모를 쓴 기생이 마당을 들어서고 있는 적막한 오후 한 때의 기방 풍경을 그렸습니다.

 

 

주유청강

산 대신 강으로 나간 소풍이라 할 수 있겠다.

수염이 긴 늙은 선비는 점잖게 뒷짐을 지고 있는데 비해,

젊은 선비는 기생의 마음을 끌기 위해 뭔가 속삭이고 있습니다.

 

 

단오풍정

신윤복의 그림 중 가장 빼어난 수작 중 하나.

단오를 맞아 개울가에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주사거배

이 그림의 술집은 선술집입니다.

왜 선술집인가? 선술집이란 이름은 지금도 드물게 쓰이고 있습니다.

대개 부담없이 '쌈직한 술집'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니다.

선술집은 주당들이 모두 서서 술을 마시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선술집에서는 백 잔을 마셔도 꼭 서서 마시고 앉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만약 앉아서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술꾼 패거리가 "점잖은 여러 손님이 서서 마시는데,

버르장 머리없이 주저 앉았담. 그 발칙한 놈을 집어내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고,

이때문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도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곽쟁웅

기방 문 앞에서 대판 벌어진 싸움 모습입니다.

장죽을 문 기생은 구경을 하고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싸움을 말리고 있습니다.

 

 

야금모행

늦은 겨울 밤 기생이 동침을 원하는 양반을 따라 어디론가 가는 모습.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다 그렇고 그랬나보다.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양반과 기생의 성매매를 중개하고 있습니다.

 

 

연소답청

'연소답청'이란 젊은 선비들이 푸른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양반들의 유한놀이 문화인 들놀이를 말합니다.

젊고 늙은 양반들이 종과 기생을 앞세워 풍취 좋은 산천을 찾아

즐기고 돌아오는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상춘야흥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한 어느 봄날,

양반가의 후원에서 벌어진 연회의 흥취를 그렸습니다.

음악에 흠뻑 취한 주빈의 표정이 이 날의 연회가 아주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정변야화

어스름 봄밤에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 것으로

물을 길러 온 두 여인이 춘홍이 오른 듯 보름달 아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돌담 뒤에서 음흉한 양반이 두 여인을 몰래 훔쳐보고 있습니다.

 

 

월야밀회

인적이 끊어진 골목길 보름달이 비치는 담 그늘 아래에서

한 남자가 여인을 위압적으로 감싸안고 있습니다.

담모퉁이에 비켜서서 조마조마하게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그림 속의 긴장을 고조시킵니다.

 

 

무녀신무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민간의 굿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무녀와 여인들이 마당에 옹기종기 앉아있고

담 너머에서 한 사내가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습니다.

 

 

삼추가연

어린 기생의 '머리를 얹어주는' 초야권을 사고 파는 장면.

뚜쟁이라 할 수 있는 늙은 할미가

기생과 초야권을 사는 사내의 중간에서 중개를 하고 있습니다.

 

 

쌍검대무 - (국보 135호)

넓은 마당 한 가운데서 쌍검을 들고 춤을 추는 두 검녀의 아슬아슬한 대결을

정방향 구도와 인물들의 회전 운동으로 그려

정중동의 운동감을 세련되게 표현했습니다.

 

 

이부탐춘

이부는 과부를 뜻하니

소복을 입은 여인이 마당에서 짝짓기 하는 개와 참새를 보고 웃음을 머금고

몸종이 나무라듯 그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입니다.

해학적이면서도 여필종부를 강요하는 남존여비 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월하정인

달빛 아래에서 두 남녀가 안타까운 정을 나누는 장면을

숨막힐 듯 섬세한 필치로 묘사했습니다.

안타까운 두 사람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기방무사

기생이 외출했다가 돌아오고 있는데,

그 사이 왠 사내와 몸종이 방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왼쪽 나무잎이 무성한걸 보니 계절은 더운 여름.

날이 더우니 기생도 전모를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한여름에 이불을 덮고 있을까?

방안의 두 남녀는 이상한 짓(?)을 하다가

갑자기 주인기생이 찾아오자 누비이불을 덮은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전모를 쓴 여인

배경도 없는 단순한 화폭 위에 가늘고 뚜렷한 선묘로 그려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조심스럽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원문보기

cafe.daum.net/exdos-sejin/R8Ut/8770?q=%EC%8B%A0%EC%9C%A4%EB%B3%B5%3A%20%EC%83%89%EC%9C%BC%EB%A1%9C%20%EB%AC%BC%EB%93%A4%EC%9D%B8%20%EC%A1%B0%EC%84%A0%20%ED%92%8D%EA%B2%BD

 

이제 소개시켜드릴 분은 신한평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속화가들의 활동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신윤복입니다. 그 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신윤복은 조선후기의 풍속화가로 김홍도, 김득신과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지칭하고 있는데요. 그의 아버지의 그림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한평은 조선후기에 활동을 했던 도화서의 화원입니다. 호는 일재, 본관은 고령인데, 쌍순도에 찍혀있는 관지로 보아 자는 자익이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로 아들 신윤복과 외동딸을 두었습니다. 신한평이 태어난 해는 1726년으로 알려져있지만 뚜렷한 근거는 찾을 수는 없습니다.

신한평1789년 장조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천봉도감청에 소속되어 일을 하였는데, 정조 원유관본 어진 제작에 참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791년 2월 24일 녹취재에 응시를 한 차비대령화원이 모두 파면을 당했고, 같은 해의 5월 5일 차비대령 화원의 그림 중에 특히 신한평의 것을 빨리 없애라는 극잔적인 표현도 보이며 규장각의 각신까지도 싸잡아 꾸지럼을 들었습니다. 그것때문인지 이로부터 활동이 남아있는 것은 없습니다.

 

풍속화가 신한평은 어진제작에 세차례 참여를 한 어용화사인데, 이광사초상 같은 사대부상을 남겼고, 신윤복 풍속화의 배양토를 짐작케하는 자모육아도 같은 풍속화, 궁중장식화 계열로 채색의 사용과 묘사를 적확성이 돋보이는 화조화, 미인도 등과 수묵담채의 영모화, 남종문인화 계열의 산수화 등을 남겼습니다.

이 그림이 신윤복과 비슷한 작품인데, 저 역시도 지금까지 그의 작품인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선의 느낌이 조금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색채를 사용한 부분이 비슷한 느낌이 많습니다.

이광사 초상으로 신한평이 그린 그림입니다. 비단에 채색을 하였으면 현재 보물 제 148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광사는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였는데, 화면오른쪽에 있는 글씨를 보면 1774년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렸다고 합니다. 사방건을 쓰고 있고, 흰 도포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자세이며 얼굴에는 무언지 알수 없는 침통한 분위기가 들어나 있습니다.

원문보기

stock.good-luck81.com/65

이제 김홍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과거와 현대를 접목해서 작업을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옛 작품들을 살펴보고 참고를 하는 편이에요. 김홍도의 작품은 제가 그리는 작업과는 스타일이 달라서 따라서 모사를 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합니다

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화가입니다. 영, 정조의 문예부흥기부터해서 순조 연간 초기에 활동을 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서 그림을 그렸고,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어 정조의 신임 속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화, 풍속화 등 모든 장르에 능했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1745년 출생 1806년쯤 사망하였으며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 호는 단원, 단구, 서호, 고명거사등인데, 이 중에 단원 김홍도로 많이 불립니다. 김홍도의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략을 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이 되고,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 7,8세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으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어린시절을 안산에서 지냈다고 추정을 합니다.

다음에 강세황에 대해 알아보긴 할텐데요. 그 역시 유명한 문인화가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스승과 제자로 직장의 상화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지냈습니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20대 초반에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1773년 그의 나이 29세때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서 사포서에서 근무도 했습니다. 단원이라는 호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을 때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서 단원이라고 스스로 칭했습니다.

 

김홍도는 만년에 이르면서 농촌이나 전원생활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데, 관심을 기울렸고, 이러한 사경,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를 가미시켜서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김홍도 작품은 산수 뿐만 아니라 도석 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치를 개척을 했는데,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던 도석신앙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느낌의 선이 특징인데,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가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습니다.

 

현재 김홍도 작품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가장 먼저 풍속화가 떠오릅니다. 예전에 대학원다닐때 산수화를 임모한 적이 있었는데, 산수화보다는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있는 듯합니다

그는 조선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해서 길쌈, 타작, 대장간, 고기잡이 등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씨름, 윷놀이, 무동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이나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된 일상의 모습을 간력하면서도 생동감있게 표현을 했습니다

 

김홍도 작품은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고,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흰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둥글넓적한 우리 서민의 얼굴이 한국적인 정취를 느끼게합니다.

 

왕의 어진에서 촌부의 얼굴까지 궁중의 권위가 담긴 기록화에서 서민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속화까지 신분과 장르를 어우르며 작품을 했습니다. 화가의 신분으로 종 6품까지 오르는 세속적 출세를 맛보기도 했지만 말년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생동안 시를 읊고 고졸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 위대한 화인이었습니다. 김홍도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아들은 양기를 비롯해서 신윤복, 김득신, 김석신, 이인문, 이재관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그렸습니다. 저는 신윤복의 작품을 많이 응용을 하는데, 다음에는 그분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문보기

stock.good-luck81.com/60

[문화재방송 캠페인]

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